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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연금술사 리덴 1권(18화)
5. 예상외의 곳에서 예상외의 흔적이(2)


우웅.
리덴은 마찬가지로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이전의 공간들과는 달랐다.
벽난로가 있고, 옷걸이가 있고, 책상이 있고, 탁자가 있고, 그림도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보던 풍경이었다. 너무나 그리운 풍경이었다. 리덴은 멍하니 향수에 잠겨 있다가 서둘러 머리를 흔들고는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오른쪽 귀퉁이에는 책이 5권 정도가 쌓여 있었고 정중앙에도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정중앙에 놓여 있는 책표지에 황금색으로 그리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운 필체였다. 뿐만 아니라 책표지의 오른쪽 하단에는 스승 쿠벤베르크의 사인이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어.”
리덴은 고장 난 CD 플레이어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다가 책에 손을 뻗었다. 표지를 넘기자 첫 페이지 중앙에,
<놀랐을 거다. 나도 놀랐다. 세계의 비밀을 손에 넣어 카테고리 초인에 도달한 내가 한때의 인연에 연연하게 될 줄은.>
라고 적혀 있었다.
그다음 두 번째 페이지.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였다.
세 번째 페이지.
아무 내용도 없는 백지였다.
네 번째 페이지, 다섯 번째 페이지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백지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빠직.
리덴은 분노했다. 울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하지만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했기에 꾹 눌러 참으며 책을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 오른쪽 모서리에 쌓여 있는 책들 중 맨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쿠벤베르크 전기』
라는 제목이었다.
“……!”
리덴은 크게 놀랐지만 조용히 책표지를 넘겼다. 정중앙에 있는 책과는 달리 백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30페이지 정도를 읽어 나가자 백지가 나타났다. 그래서 몇 페이지를 넘기니 글씨가 있었다.
30페이지까지의 내용은 쿠벤베르크의 어린 시절이었다. 군데군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등장했지만 리덴은 신경 쓰지 않았다.
3시간 정도가 흘렀다. 리덴은 대충이긴 하지만 쿠벤베르크 전기를 완독했다. 충격적인 내용이 많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잔뜩 있었다. 어려운 이야기여서가 아니다. 군데군데 백지인 페이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책을 읽어 보자.”
리덴은 사고의 흐름을 바꾸었다.
『세계의 진실과 예언의 서』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제조 법―상』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제조 법―중』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제조 법―하』
다른 4권의 책 제목들이었다.
리덴은 심호흡을 하고는 ‘세계의 진실과 예언의 서’부터 읽었다. 쿠벤베르크 전기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백지였지만 쿠벤베르크 전기와는 다르게 아무래도 좋은 내용들이었다. 오히려 어떤 부분은 읽기 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생의 목표는 사랑과 평화이고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서 어쩌고저쩌고.
라는 잔소리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읽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리덴은 5시간에 걸쳐 ‘세계의 진실과 예언의 서’를 완독하였다. 쿠벤베르크 전기보다 드러난 내용이 적은데도 시간은 두 배 가까이 들었다. 읽기 싫은 부분을 억지로 읽었기에 생긴 결과였다.
그렇게 해서 리덴은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제조 법―상’에 손을 댔다.
정확하게 3페이지.
리덴은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책을 조용히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작부터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첫 번째.
진실 된 영혼의 비약.
필요 연금 재료.
신념의 돌, 호문클루스의 사랑의 숨결, 요정 여왕의 꿈, 데미 리치의 눈물.
신념의 돌 연성법―현자의 돌을 베이스 삼아 하얀 엑토플리즘과 태양의 눈, 황금사과, 인어의 노래, 용사의 맹세,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가지고 고결한 예술가의 혼에게 도움을 받아 어쩌고저쩌고.
이런 망할.
리덴은 정말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신념의 돌이라는 재료에 레인보우 플라워의 6개 재료 중에 하나인 현자의 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호문클루스의 사랑의 숨결? 요정 여왕의 꿈? 데미 리치의 눈물? 농담이 아니다.
사실.
신념의 돌에 비하면 나머지 것들은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어떤 조건만 갖추면 구하기가 무척 쉬웠다. 하지만 그 조건을 갖추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호문클루스의 사랑의 숨결?
풀이하자면 사랑에 빠진 호문클루스가 토해 내는 숨을 말했다. 호문클루스는 인간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과는 다른 생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만든 연금술사에게 절대복종하는 인공 생명체였다. 그런 것이 사랑을 해? 누구를? 연금술사를? 아니면 연금술사 외의 다른 누군가를? 백 번 양보해서 리덴이 호문클루스를 만들고 그 호문클루스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자. 그 후의 일이 어찌 되었든 숨결만 얻으면 되는 일이니까 그것 자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헛소리이고 잠꼬대 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하자. 다음 재료가 요정 여왕의 꿈인데 요정 여왕은 요정보다 만나기가 더욱 어렵고 항상 깨어 있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잠을 잘 때가 있는데 그것은 요정 여왕이 사랑에 빠졌을 때였다.
더구나 데미 리치의 눈물은 리덴도 모르는 연금 재료였다. 어떤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만들어야만 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단다.
잠꼬대는 자면서 하는 거고 술주정은 술에 취해야 하는 거다. 멀쩡한 상태에서 진지하게 늘어놓으면 맞은 데 또 맞고, 또 맞고, 또 맞아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런데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 제조 법―상’은 그대로 찢겨도 할 말이 없는 내용을 멀쩡하게 담고 있었다.
게다가 숨겨진 페이지를 읽는 데 필요한 약품은 진실 된 영혼의 비약 하나만이 아니었다.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상’에만 다섯 가지 비약 재료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평화로운 노래의 비약.
성스러운 약속의 비약.
현명한 지혜의 비약.
정직한 미덕의 비약.
이상이었다.
이름부터가 리덴에게 있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첫 페이지만 드러나 있고 나머지 페이지는 백지인 책이나 쿠벤베르크 전기의 백지 부분이나 세계의 진실과 예언의 서의 백지 부분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쿠벤베르크 전기의 읽을 수 있는 부분 중 후반부에 적힌 내용들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엔버가 등장했다. 리덴이 기억하고 있는 그 엔버였고 거기에 등장하는 쿠벤베르크는 리덴이 알고 있는 그 쿠벤베르크였다.
많은 부분이 일치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필자가 독백하는 형식으로 ‘레인보우 플라워’는 어떻게 해도 만들 수 없고 만들지도 말아야 했던 물건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뒷부분은 백지였다. 알고 싶으면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을 만들라는 뜻이다. 당연하게도 그 부분을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이 어떤 것인지는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추가로 ‘숨겨진 페이지를 읽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약품―상’ 권에도 백지인 부분이 잔뜩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읽고 싶냐? 그러면 약품을 만들어. 싫으면 읽지 마.’라는 거다. 그리고 그게 전부냐, 그것도 아니었다. ‘세계의 진실과 예언의 서’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리덴이 책을 읽지 않을 경우 지금 리덴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망하고, 이 세계 자체가 망하면 이 세계를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는 웨이랜더 제국 황실 비밀금고도 함께 없어진다.
즉, 리덴이 알고 싶어 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긴 이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이번 생애에 한정된다는 뜻이었다.
“안 해.”
“안 해.”
“농담이 아냐. 레인보우 플라워 만들기도 바쁜데 내가 왜 이딴 걸 읽기 위해.”
빠득.
리덴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떻게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는 레인보우 플라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 책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리덴은 미네에게 이 장소가 어떤 곳이고 유래는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게 되면 이 납득할 수 없는 빌어먹을 상황을 어떻게든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무언가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밖.
리덴은 황실 비밀금고 입구에 설치해 두었던 결계와 바위 문을 해제하고 밖으로 나와서는 다시 바위 문과 결계를 시전하여 봉쇄했다. 그러고는 미네에게 가서 저곳의 정체가 무어냐고 물었다.
“그전에,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안 될까요?”
미네는 조건이 있다는 식으로 질문을 했다.
“알아서 뭐하게. 나중에 보복이라도 하게?”
리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꽤 막가는 성향이 있는 리덴이었지만 자신은 어쨌든 평민에 3급 연금술사고 미네는 7황녀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분을 가르쳐 주게 되면 상황에 따라서 이븐의 제안대로 미네를 아내로 맞이하든가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아예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속이 편했다. 그런데 미네는 자꾸만 알려고 했다. 왜일까? 자신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황녀라는 여자가 그렇게도 멍청한 걸까? 리덴은 정말로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런 게 아니에요. 일이야 어찌 되었든 저는 그쪽에게 감사하고 있어요. 그쪽이 아니었다면 제 입장은 곤란해졌거나 아니면 죽었겠지요. 게다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어요. 운명 공동체 같은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미네가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돌았냐?”
리덴이 말했다. 겉보기에는 미쳤냐는 식이지만 진심으로 미네의 정신 상태를 염려하고 있었다.
미쳤다면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저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요. 흑마법사들의 공격을 받아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주었잖아요. 그 의도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요. 당신은 그 일로 인해 그들의 적이 되었고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처음부터 적이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알 거라 믿어요. 당신은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에요.”
미네는 은근슬쩍 리덴을 띄워 주며 그런 말을 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뜻이냐?”
리덴이 물었다.
“그런 거죠. 뿐만 아니라 저에게는 당신의 협조가 필요해요. 본래 이곳은 지정된 사람이 아니면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장소예요. 저는 지정된 사람이 아니에요. 알고 있는 것은 위치 정도뿐이었고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어요. 알고 있는 곳은 여기가 어떤 장소인지 하는 것 정도죠. 그럼에도 제가 당신을 여기로 인도한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미네는 논리 정연했다.
“무슨 이유?”
리덴이 물었다.
“웨이랜더 제국의 멸망이랄까요? 몰락이랄까요? 흑마법사들은 가장 먼저 태양궁을 공격했어요. 제 부모님이신 황제 폐하와 황비 전하는 분명 돌아가셨겠지요. 그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태자 오라버니는 아내와 황실의 주요 인사들을 데리고 몸을 피했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진실은 모르지만 틀림없이 클라만더스의 서가 원인일 거예요.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는 예언서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자가, 황족들이 황궁을 버리고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죽을지언정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미네가 묘한 말을 늘어놓으며 안색을 굳혔다. 그녀는 태자를 비롯한 형제들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큭.”
때문에 리덴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토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미네가 언급한 클라만더스의 서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기에 그 부분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미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스운가요? 그러면 웃으세요.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에요.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잖아요. 위험에 처하면 잠시 몸을 피하는 것이 좋죠.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알고 있지만 역시 납득할 수 없어요.”
미네는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흐음. 화제를 돌리지. 클라만더스의 서라고 했지? 그게 뭐야?”
리덴이 물었다.
“당신의 이름과 정체를 알려 주세요. 그러기 전에는 그 어떤 무엇도 가르쳐 드릴 수 없어요. 어떤 치욕을 당한다고 해도, 당신이 저를 죽인다고 해도 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을 거예요.”
미네는 은근슬쩍 조건을 하나 더 보탰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칫.”
리덴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물쩍 넘어가지 못해서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조용히 미네를 바라보며 어떻게 할까 생각했다. 답을 듣긴 들어야겠는데 이름이나 정체는 가르쳐 주기 싫고 그렇다고 모욕을 주거나 협박을 하자니 통할 만한 껀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