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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연금술사 리덴 1권(19화)
5. 예상외의 곳에서 예상외의 흔적이(3)
‘깍쟁이 같으니라고.’
속으로 투덜거린 리덴은 고민에 빠졌다. 이에 미네는 ‘에헴. 원하신다면 제 몸을 드릴 수도 있어요. 저는 당신을 해치기 위해서, 혹은 보복을 하기 위해서 당신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랍니다.’라고 말했다.
옆에 소이 엘렌이나 긴이 있었다면 놀라 자빠질 일이었지만 소이 엘렌과 긴은 미네의 명령을 받아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 세나와 이븐은 리덴의 지시를 받아 딴짓을 하고 있었고.
“농담하냐?”
리덴이 가당치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는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7황녀로서 황실의 명예를 걸죠.”
미네가 진지하게 말했다.
“큭. 말로는 뭘 못해. 사람 마음이라는 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법이야. 상황이 바뀌면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 그런데 내가 널 믿으라고? 나는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널 믿어야 할 이유가 없지.”
리덴은 진심이었다.
“그렇다면 저도 말씀드릴 이유가 없어요.”
미네도 진심이었다.
“망할.”
리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식으로 한바탕 투덜거리고는 이븐을 불러 배낭을 가져오게 했다. 거기서 리덴은 이것저것 꺼내서는 살펴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호센의 지연성 독약을 만들려고 했는데 해독약 재료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호센의 지연성 독약, 일정 주기로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약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부려 먹어야 할 때 써먹는 물건이었다.
“노예, 이거 가져가. 그리고 저쪽에 가 있어.”
리덴이 이븐에게 말했다.
“네, 스승님.”
지시를 받은 이븐이 명령대로 배낭을 가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리덴은 진지하게 미네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알았어. 좋아. 가르쳐 주지. 단, 조건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네가 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말 것. 약속해.’라고 말했다.
“알겠어요. 약속드리죠. 7황녀로서 황실의 명예를 걸고.”
미네가 답했다.
이에 리덴은 자신이 3급 연금술사 리덴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돈줄과 노예로 부르는 애들은 제자 같은 거라고 말해 주었다. 세나는 가짜 제자였고 이븐은 진짜 제자이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가르침을 베푼 적이 없기에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역시 연금술사였군요.”
미네가 중얼거렸다.
“알았으면, 빨리 여기가 무엇이고 클라만더스의 서는 또 뭔지 설명해 봐. 잔머리 굴리지 말고.”
리덴이 말했다.
“알겠어요.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라도 답해 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릴게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가 이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소이 엘렌이 시끄럽게 굴 테니까요.”
미네는 그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이야기는 미네가 설명하고 리덴이 의문점에 태클을 거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약 반나절, 날이 지고 달이 떴다.
한 개의 달.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리덴이 태어나 자란 웨이랜더의 달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는 어떻게 생각해도 웨이랜더였다. 그런데 달이 달랐다. 리덴은 이 황당한 상황에 미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예언자이자 연금술사이고 마법사였던 위대한 존재, 클라만더스.
이야기는 웨이랜더 제국 건국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의 흑마법사는 지금과는 다르게 대륙의 모든 사회를 주도하는 존재였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를 비롯한 각 분야를 좌지우지했고 그런 탓에 지금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 버젓이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어린 소년이나 소녀를 구입해서 흑마법 실험에 사용한다거나, 흑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소환하여 사람들과 싸우게 한다거나, 고위 마족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고 힘을 얻는다거나 등 그랬다. 고위 흑마법사들은 마족과 결탁을 하고 있었고 마족은 흑마법사가 아닌 인간을 노리개 정도로만 취급했다.
아무튼.
그러한 사회를 혜성처럼 나타나 뒤바꾼 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클라만더스였다. 클라만더스는 마법사와 연금술사를 비롯하여 드래곤, 엘프, 드워프, 세이렌 등의 지지를 받아 마족들을 패퇴시키고 흑마법사들을 주도층에서 끌어내렸다.
피가 강처럼 흘렀다. 많은 나라가 무너졌고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다.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세이렌들도 만세를 불렀다. 심지어는 드래곤들도 클라만더스를 인정했다. 모두가 흑마법사들의 행동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이후 클라만더스는 당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던 7명의 인간과 엘프와 드워프, 세이렌, 드래곤의 대표를 불러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클라만더스는 현재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7개 국가의 초안을 작성하고 인간, 드래곤, 엘프, 드워프 사이의 종족 협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마법사 길드를 창설하고 연금술사 길드의 창립을 도왔다.
시간이 흘러 웨이랜더 제국이 건국 된 지 30년 정도가 지났던 어느 날이었다.
클라만더스는 불쑥 웨이랜더 제국 황제를 찾아와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책이라며 클라만더스의 서라는 걸 건네주고 황궁 뒤편에 있는 산을 써야겠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해서 황실 비밀금고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초대 황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클라만더스의 행동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리고 10년.
클라만더스는 이례적으로 웨이랜더 제국에 머물며 웨이랜더 황실을 도왔다. 그러고는 초대 황제에게 클라만더스의 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째서 작성하였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 내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일이 있은 이후 황제는 자신이 언제 죽을지를 예견했고 다음 대 황제가 될 태자를 불러 클라만더스의 서를 전해 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책에는 황실과 웨이랜더 제국의 미래와 멸망이 적혀 있다. 웨이랜더 제국의 멸망은 대륙의 위기이고 세계의 종말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그 멸망을 웨이랜더 제국과 황실이 넘어서기 위해서는 약속을 지켜야 하느니라. 너도 네 다음 대도, 그다음 대도. 앞으로도 계속.
잊지 말거라. 약속을 지키는 한 웨이랜더 제국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너도 이 책을 펼쳐서 읽게 되면 분명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차기 황제는 클라만더스가 대단하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 싶었지만 그거 황제에 올라 10년을 지내고 클라만더스의 서를 탐독한 결과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약속이란 3가지였다.
첫 번째, 흑마법사를 용납하지 않을 것.
두 번째, 황실 비밀금고에 관한 주의 사항을 지킬 것.
세 번째, 클라만더스의 서에 따라 차기 황제를 지목할 것.
위 3가지 약속에 관한 세부 사항은 황제만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자식을 낳아 자식이 나이가 들어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면 클라만더스의 서에 관해 말해 주었다. 하지만 내용은 달랐다.
태자에게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태자가 아닌 황자나 황녀에게는 형식적인 이야기와 규칙만을 전해 주었다.
너는 절대로 황실 비밀금고에는 다가가지 말라거나.
너는 황실 비밀금고를 관리해야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거나.
대강 그런 식이었다. 미네 역시 그랬다. 하지만 미네는 호기심이 많은 개구쟁이여서 아버지 황제 폐하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클라만더스의 서를 펼쳐 보았다. 그러나 앞의 몇 페이지를 제외하고는 읽을 수 없었다. 완전히 백지였던 것이다.
황제는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미네에게 ‘역시 펼쳐 보았더냐?’라고 물었다. 황제는 미네가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클라만더스의 서를 펼쳐 볼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식이었다.
“거참. 클라만더스라.”
미네의 이야기를 정리한 리덴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기대도 했다.
빌어먹을 저 시설을 만든 자가 자신의 스승과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나 하고.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연금술은 그 상식을 무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었다. 자신이 레인보우 플라워의 열매를 먹고 전생을 기억하게 된 것처럼 스승 쿠벤베르크도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어서 어쩌고저쩌고 등등 말이다.
어쨌든 미네의 이야기에도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다. 리덴의 희망 사항이지만 클라만더스가 쿠벤베르크의 다음 생애고 그렇기에 쿠벤베르크 전기를 작성했고 이런 시설을 만들었다, 라는 듣기 좋은 가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진짜 뭘 어쩌란 거야. 에이, 진짜 씨.”
리덴은 울화가 치밀었다. 레인보우 플라워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악질적인 연금 물품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본심은 무시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행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쿠벤베르크라는 이름은, 리덴이 지금까지 생애를 반복하며 집착을 거듭한 레인보우 플라워보다 더욱 집착하고 있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인보우 플라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레인보우 플라워의 열매 때문이 아니다. 레인보우 플라워 그 자체에 반해 있었다.
그 색채, 그 빛깔, 그 아름다움.
게다가.
연금술사로서 레인보우 플라워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스승인 쿠벤베르크가 레인보우 플라워를 만들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렵다는 건 좋은 거란다. 실용성이나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기분에 얽매이면 위로 올라갈 수가 없어. 이 스승이 이론에 불과한 레인보우 플라워를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이걸 만들면 그다음 경지를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란다. 지금의 너에게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해할 수 있을 게다.」
지금의 리덴은 쿠벤베르크의 그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리덴이 레인보우 플라워를 고집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레인보우 플라워는 리덴이 알고 있는 모든 연금 물품 중 최강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연금 물품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리덴의 앞에 나타난 여섯 권의 책은 레인보우 플라워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실력을 요구하는 과제였다. 무시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무시하는 것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은 패배를 뜻했다.
“기분 나빠.”
리덴이 중얼거렸다.
“불쾌해.”
리덴이 중얼거렸다.
“짜증 나는데, 확 그냥 죽어 버릴까?”
리덴은 신경질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는 이를 빠득빠득 갈고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에 조심스럽게 멀리서 리덴을 지켜보고 있던 세나, 이븐, 미네, 소이 엘렌, 긴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리덴의 상태에 대해 감상을 늘어놓았다.
“우와아, 선생님이 고민하고 있어. 내일 세계가 망할 거야.”
“불쾌하지만 동의를 표합니다.”
“고민이라기보다는 발악으로 보이네요.”
“불길한 예감이 드옵니다. 미네 전하. 경계심을 늦추지 마옵소서.”
“후아암. 고민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보는데요. 그렇게 신기할 것까지야. 저도 말입니다. 예전에…….”
라는 식이다.
그리고 리덴은 무척 귀가 밝았다.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다가 휙 시선을 돌려 쭉 노려보고는 ‘뭘 봐? 구경났어? 빨리 가서 안 자? 혼날래?’라며 으르렁거렸다. 이에 세나와 이븐은 불똥이 튈 새라 얼른 잠자리로 이동했고 미네 역시 이제 피곤하다며 잠자리로 향했다. 소이 엘렌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른다며 불침번을 자청한 후 긴을 보초로 세웠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리덴을 바라보았다.
‘저 멍청이들은 또 왜 저래. 아, 몰라.’
리덴은 속으로 한바탕 불만을 토하고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사고의 방향을 바꾸어 고민을 계속했다.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길 빌면서 말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리덴이지만 고민의 답은 찾지 못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빛은 없었다. 레인보우 플라워를 만들고 누군가가 남긴 여섯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진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할 수 없었다. 리덴은 어느 쪽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