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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7화)
二章.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으니(3)


“허허, 이놈 보게나, 그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이가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하느냐? 이놈아, 그것은 과욕이다.”
어린 손자 놈을 호통 치듯 들려오는 혜각의 말에, 목해운은 나이에 맞지 않는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후훗, 하지만 할아버지가 그랬잖아요! 인간은 욕심이 있기에 나갈 수 있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하는 욕심이 없다면 그건 죽은 것과 같다고! 아닌가요?”
빙그레 미소 지은 목해운의 반문에, 혜각 역시 한줄기 미소를 입가에 담아 보였다.
“허허, 옳다 옳아! 너의 말이 백번 옳다! 그래, 그럼 넌 이제 세상에 나가 욕심을 가지려 하느냐?”
“물론 가질 거예요. 세상에 나가 토령과 한 약조대로 많은 것을 볼 것이며, 많은 것을 보는 중 깨달음을 얻어 지금보다 더욱 높은 곳을 향하겠어요! 그것이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과욕이라 할지라도요.”
“껄껄, 그렇담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어서 빨리 창공 위를 날아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세상에 나가 네놈의 욕심대로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아 이 할아비보다 더욱 높은 곳에 서거라!”
“……응!”
재촉하듯 들려오는 혜각의 성화에 목해운은 잠시 뜸을 들이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의 대답이 신호라도 된 듯, 영물 중 커다란 독수리의 형태를 갖춘 백색 매가 목해운 앞에 엎드려 등에 타라는 고갯짓을 한다.
목해운은 영물인 백령천왕(白靈天王)의 몸짓에 망설이지 않고 등에 올라타 모두를 한차례 둘러보았다. 이제 자신이 이곳을 떠난다면, 자신을 키워 준 혜각 역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것이 이미 정해진 당연한 이치이기에 목해운은 옅은 물막이 차오른 눈으로 혜각을 향해 마지막 말을 던졌다.
“선계에 들더라도 너무 바둑만 두진 마세요! 매일같이 앉아 먹고 놀기만 한다면, 조만간 찾아갈 제가 할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뚱뚱해질 테니까요!”
“이런 고얀 놈! 오냐, 내 네놈이 찾아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일같이 수련을 해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만들어 놓겠다! 껄껄!”
기분 좋은 웃음을 휘날린 혜각은, 여지없이 하늘 위로 날아오른 목해운을 기꺼운 마음으로 보내 주었다.
만남이 있다면 헤어짐이 있으며, 헤어짐이 있다면 다시 만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 당연한 이치를 목해운과 혜각 자신 둘 다 알고 있음이니, 비록 지금은 헤어진다 해도 그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 그 당연함을 알고 있음에도 어찌 가슴이 이리도 휑한 것인가.
마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다가오는 쓸쓸함에, 혜각은 이제 백색 점이 되어 버린 목해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또 바라본 채 서 있었다.
그 누구도 자리를 뜨지 않는 몽유도의 해변에 선 채…….



三章. 무전취식(無錢取食)(1)


꿈.
꿈을 꾼다.
아직 어린 난 풀밭에 앉아 내가 꿈을 꾸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미 지나왔던 길을 되짚어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리도 현실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목령을 마주한 채…….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한 목령이 나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다.
그 말에 화가 난다.
어떤 말이었기에 내가 이리 화를 냈더라…….
‘넌 엄마도, 아빠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칭얼대지 좀 마!’
생각났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전해 준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 속에 등장한 부모란 존재에, 난 할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물은 것이다. 왜 나에겐 엄마가 없냐고, 아빠가 없냐고, 엄마 아빠를 만나게 해 달라 울며불며 매달렸던 것이 생각난다.
그 울음이 해질 무렵까지 계속되자 목령이 참지 못해 나에게 던진 말은 처음으로 나를 화나게 했었지……. 난 내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목령의 가슴을 힘껏 치며, 그 말에 반항했다.
‘아니야, 내게도 아빠 엄마가 있어, 나한테도 있단 말이야!’
울며불며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내 주먹에 처음으로 목령이 당황한 채, 뒤로 물러났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도 그녀는 내 앞에서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맞아, 이 빛.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연녹색 빛이 나를 감쌌지.
그 빛 속에 갇힌 난 맹목적으로 화가 나 있었어.
너무도 화가 나, 나 자신을 주체치 못할 정도로.
어느새 눈앞에 보이던 풍경마저 빛 속에 사라져, 나 혼자밖에 없는 공간에서 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으며 화를 냈지.
후훗, 그것이 내 몸에 깃든 기운인 목(木)이, 인간의 감정인 화에 반응해 나타난 심관임을 난 알지 못했어. 그저 내가 화를 내는 이유도 모른 채 무조건 화를 냈어.
그것이 내 유일한 목적이라는 듯…….
그 화를 내가 어떻게 가라앉혔더라.
그 화를 내가 어떻게 가라앉혀, 다스릴 수 있었더라.
잘 기억이……!
수적령.
맞아, 바로 당신이었어.
지금 내 앞에 나타난 당신 때문에 내가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어. 당신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난 당신의 얼굴을 보며 저절로 화가 가라앉았어.
부끄러워서…… 어린 나지만 이리 한심한 꼴을 보이는 내가, 이런 나를 계속해 바라보는 당신의 시선에, 난 부끄러웠던 거야.
어찌해 난 화를 내는가.
화가 나는 일이 있으니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 화를 왜 다스리지 못한 채 더욱더 화를 내는가.
초라했어.
목령의 한마디에 발끈해 미친 듯 화를 내는 내 모습이,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했어. 그 초라함을 느낀 내 마음은 우습게도 너무나 쉽게 가라앉았지. 가라앉은 내 마음속에 화가 사라졌듯, 당신의 모습도 사라지고, 내 주위를 가리던 연녹색 빛도 사라졌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내 앞에는 언제나 그랬듯 인자한 얼굴의 할아버지가 있었어.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는 한마디 말과 더불어…….
‘장하다.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벌써 목의 심관을 통과하다니. 정말로 장하구나, 장해!’

“…….”
피식 미소가 그려진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빠르게 귓가를 스침에도 편안히 백령천왕의 등 위에 누워 잠들었던 목해운은 한줄기 실소를 그려 보였다.
꿈을 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 꿈을.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기운 중, 그 첫 번째인 목의 기운을 이끌었을 때의 꿈을 꾼 목해운은, 당시 혜각이 그토록 안도했던 이유를 떠올리곤 실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울며불며 매달렸던 자신을 꾸짖기보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심관에 빠졌던 자신의 무사함에, 혜각이 얼마나 안도했는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타인의 아이를 키움에도, 그 어떤 아비보다 강한 부정을 가진 혜각의 마음이리라.
그 마음을 느낀 다음부터 할아버지 앞에선 부모에 관한 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던 목해운이었다. 그것만이 혜각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마음에 대한 답례라 여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심관을 통과하며 어느 정도 철이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령에게서 애늙은이란 핀잔을 들을 만큼.
“훗.”
목령을 떠올린 목해운의 입가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 웃음에 하늘 위를 빠르게 날아가던 백령천왕은 의아함이 일었으나, 그 의아함을 풀 여유를 갖진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의 연녹색 빛깔을 본 목해운의 말에, 의아함보다는 내려앉을 좋은 곳을 찾기 위해 두 눈을 번뜩여야만 했던 것이다.

찬바람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비록 최남단에 자리한 남해도(南海島)에 있다고는 하나, 어찌 한겨울의 추위를 피할 수 있겠는가. 다만 대륙의 추위보다는 그 매서움이 덜함에 다소나마 위안을 삼을 뿐이다.
“휴우, 오늘은 그럭저럭 견딜 만하겠군.”
피부로 와 닿는 추위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텐데, 맨살을 훤히 드러낸 삼십 대 중반의 장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매 없는 청의무복을 걸친 주제에, 그나마 덜 추운 날씨에 안도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일 게다.
실제로 사내가 안도한 것은 이깟 날씨 탓이 아닌, 남해도의 무가 중 당연 으뜸인 남해검문(南海劍門)의 철없는 소문주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남해도 인근에 위치한 보타산(普陀山) 보타문(普陀門)의 보타신니(普陀神尼)가 직접 키운 직계제자와의 비무 날짜가 오늘이다 보니, 가기 싫다던 소문주 또한 문주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끌려간 것이다.
남해검문은 대대로 주씨 가문이 그 맥을 이어 왔으며, 말이 문이지 주씨 세가와도 같았다.
현 남해검문의 문주는 해청검(海靑劍) 주광영이란 이로, 중원에선 십검룡(十劍龍)에 들 만큼 그 검술이 뛰어났다. 인품 또한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이 청청(淸靑)하나, 그에겐 한 가지 단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대를 이어야 할 하나뿐인 아들에 관해선 팔불출이란 말을 들을 만큼 지극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손이 귀하디귀한 주씨 세가의 단 하나뿐인 아들은 그 이름을 주서운이라 했으며, 어릴 땐 그 이름 때문에 주워 온 아이라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갈수록 성질이 포악해져 그 흉악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꾸짖어야 할 주광영이 오히려 오냐오냐 어리광을 받아 주니, 결국 주서운의 오만방자함은 하늘을 찌를 만큼 드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 오만방자한 놈이 툭하면 건드리는 것이 만만한 남해검문의 제자들이다 보니, 명색이 사형이란 신분을 가진 장거의 또한 그의 횡포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그런 그가 오늘은 오랜 옛날부터 정통으로 해 왔던 보타문 직계제자와의 비무에 나서 없으니, 장거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거참 희한하네? 보타산에 있으니까 보타문이고, 보타문의 문주니까 보타신니라…… 뭔 이름이 그따위야? 거참, 이름 짓기 귀찮긴 되게 귀찮았나 보군.’
여유로움이 묻어났음인가.
남해검문의 이대 제자인 장거의는 별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런 그의 눈은 자연스레 하늘로 향하니, 그 멍한 눈 속으로 빠르게 허공을 지나는 백색 구름이 비쳐 드나, 그저 그런 생각에 무심히 지나칠 뿐이다.

파앗, 파아앗!
거친 바람 소리와 더불어, 남해도의 빈 공터 위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내려섰다.
날카로운 눈을 가진 백령천왕은 이어 등을 굽혀 올라탄 이가 땅에 편히 내려설 수 있게 만들었으며, 그 고마움에 대지에 발을 디딘 목해운은 빙그레 미소 지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에 백령천왕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한바탕 웃어 보이고는 다시금 하늘 높이 솟구쳐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목해운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날아오며 보았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향했다.

“어라, 저건 계집이야, 사내야?”
비단 청포를 몸에 두른 십대 후반의 사내는, 앞서 걷고 있는 백색인영의 모호한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비싸 보이지도 않는 수수한 백의를 걸쳤는데 그 체구는 가냘파 보였으며, 허리 아래를 지나 엉덩이 부근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칼을 그 끝에서 푸른 끈으로 동여맨 인영은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소매 밖으로 흘러내린 백옥빛 살결은 그 심증을 확신으로 바꿔 주었다.
‘허, 저런 차림새의 계집이 이 마을에 있었나? 허리에 검을 찬 것으로 보아 무림세가의 여식 같은데……. 떠헉, 설마 그 할망구의 제자는 아니겠지?!’
불안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침 댓바람부터 이번만은 아비의 말을 들어달라며 통사정하는 주광영 덕에, 반강제적으로 비무길을 나섰던 주서운이다.
남해도의 두 절대자라 할 수 있는 남해검문과 보타문.
중원엔 신비검문(神秘劍門)이라 이름난 두 문파는 검공으로 유명했으며, 그 이름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지난 백 년간 직계제자들끼리 비무를 벌여 왔다.
말이 비무지 사문에 대한 자존심이 걸린 중요한 일전을 앞둔 주광영은, 가기 싫다는 주서운을 억지로 비무 장소로 이끌었으나, 주서운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복잡한 마을의 대로변으로 몸을 숨긴 참이었다.
그에게 있어 비무는 둘째 치고라도, 보타신니의 제자인 설빙화(雪氷花) 서연을 만날 순 없었던 것이다.
‘암, 절대 만날 수 없지. 그 계집년이 내 얼굴을 본다면 그날의 일 또한 알 것이고, 그럼 난!’
생각하기도 싫다.
그날의 지옥 같은 악몽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수치심에 절로 얼굴이 붉어진다.
남해검문에선 그 누구나가 피해 가야 할 두려움의 상징인 섬혼검(閃魂劍) 주서운은, 떠오르는 옛 기억에 몸을 떨며 재빨리 눈앞의 여인이라 생각되는 인영에게서 멀어졌다.

“…….”
뒤에서부터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졌다.
윤기 어린 부드러운 머리칼을 간직한 목해운은, 뒤에서 느껴지던 따가운 시선이 사라졌음을 알고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지켜본 건지는 알 순 없으나, 어차피 필요하면 자신을 찾을 것이다.
용무가 있다면 올 것이요, 없다면 오지 않을 것이기에 목해운은 관심을 끊은 채 주변 풍광으로 그 시선을 옮겼다.
모든 것이 신기했다.
비록 말로 들었다고는 하나, 옛이야기처럼 들려오는 혜각의 말을 토대로 상상한 것과는 달리, 직접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오니 더욱더 활기가 넘치고 볼 것 또한 셀 수 없이 많았던 것이다.
각종 비단 옷가지를 진열장에 내놓은 포목상부터 시작해, 가판대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만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목해운에겐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그 감정은 비단 목해운 혼자만의 것이 아닌, 우연히 그를 본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했다.
이미 한 번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겪은 목해운은 그 경지가 반박귀진(返璞歸眞)을 넘고 있어, 겉모습만은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얼핏 보면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햇볕에 그을렸던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채 하얀 속살을 간직하게 된 목해운의 얼굴은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으며,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만을 한 그의 몸은 불쌍할 정도로 가냘파 보였던 것이다.
하나 그를 보고 불쌍하다 여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평범한 외형 속에 뿜어져 나오는 부드러운 기운과 어우러진 한줄기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평안케 만들어 호감마저 느끼게 해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