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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9화)
三章. 무전취식(無錢取食)(3)
그런 그녀가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게, 그것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기질을 가진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열여덟 소녀의 방심이 흔들린다면,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녀의 행동을 막은 보타신니는, 아직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목해운을 직시한 채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젊은이, 이 늙은이에게 관심이라도 있나?”
“풋!”
수줍은 소녀마냥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흘러나온 보타신니의 엉뚱한 말에, 뚱뚱한 체구의 비구니는 마시던 엽차를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찻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서연의 반듯한 이마로 푸른 힘줄이 돋았으나, 보타문의 호위대인 염천각(炎天閣)의 주인 비인비니(非人肥尼)를 상대로 화를 낼 순 없기에, 그 화는 고스란히 이번 일의 원흉인 스승 보타신니를 향했다.
“스승님, 체통을 지키십시오!”
“어머, 솔직하지 못하구나. 훗, 부러우면 부럽다 하거라.”
“……!”
젊은 시절엔 그 크기만으로도 뭇 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처진 가슴을 가리키며 던진 보타신니의 말에, 서연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인 가슴 크기를 강조하며 보타신니가 놀려 대자, 우울해진 것이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같은 나이 또래라 하나 배분상으론 한참 밑인 두 사질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사고님, 너무 속상해 마세요, 가슴이 작으면 어때요? 어차피 사고님은 부처님께 귀의해 불가에서 평생을 지닐 몸이니, 가슴이 작아도 상관없잖아요.”
“맞아요! 저도 가슴이 크지만, 전혀 쓸데가 없는걸요. 오히려 걸어 다닐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 사고님, 문주님의 말씀에 너무 심려치 마세요.”
“…….”
위로다.
이건 분명 자신을 위로하는 거다.
하지만 왜 이다지도 우울해진단 말인가.
고개 숙인 서연의 주위로 어둠이 내려앉자 그만 당황한 혜소와 혜연은 참새가 재잘거리듯 쉼 없이 그녀를 위로했으나, 오히려 서연의 분위기는 가라앉다 못해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재밌는 사람들이로군.’
도저히 엄한 계율 속에 몸 담근 불가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보타문의 제자들을 보며, 목해운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들의 주변에는 즐거움이 가득 차 보는 목해운의 기분마저 좋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보타신니의 농 속에 칼이 담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목해운은 더 이상 그녀들을 볼 수만은 없기에,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산대로 다가간 목해운은, 예상과는 달리 달랑 소면 하나만을 시킨 손님을 노려보는 이씨에게 말을 걸었다.
“잘 먹었습니다.”
“……!”
물론 잘 먹었을 것이다.
비록 소면이라곤 하나 맛 하나는 기가 막혔을 테니.
문제는 돈이다.
잘 먹었으면 돈을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 수고하십시오.”
“아, 예, 손님. 부디 살펴 가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인다.
어느새 돈 생각은 까맣게 잊은 이씨는 허리를 숙인 것도 모자라 친절히 손까지 흔들어 보인다. 그러나 목해운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의 입에선 경단 장수 장씨의 말과 같은 유의 욕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갇혀 있던 내실에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세상 밖으론 소보소복 눈이 흘러내리고 있다.
듬성듬성 자리한 잔나뭇가지 위에도, 알록달록 오색 빛깔을 가진 수많은 지붕 위에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도 흘러내리는 하얀 눈을 마주한 목해운은 걸어가던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서 사색에 잠겼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했던가.
혜각이 사색을 즐겼듯, 목해운 역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드는 사색을 즐겼던 것이다.
언젠가 목해운은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저 해는 왜 아침마다 뜰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새벽 시간, 내기를 다지기 위해 절벽 위에 올라 시작된 목해운의 고민은 배고픔도 잊은 채 정오까지 계속되었으며, 어스름한 저녁이 다가와서야 겨우 그 사색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때 얻은 결론은 참으로 간단했다.
어둠이 찾아드니 빛이 물러나며, 어둠이 물러나니 빛이 찾아드는 것이다.
음과 양.
음한 자가 있으면 양한 자가 있듯,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는 당연한 생각으로 결론지은 목해운은, 당시 만족감보다는 배고픔에 부리나케 혜각의 처소로 달려갔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사색이었으나, 그 우스운 사색을 다 큰 지금에 와서도 목해운은 하고 있었다.
‘눈은 어째서 하얀 것인가? 눈은 어째서 차갑고, 만지면 사라지는 것인가?’
그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을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목해운은, 좁은 골목길에 선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사색을 방해하려는 듯, 앳된 아이의 울부짖음이 그의 귀로 흘러들었다.
“엄마, 엄마!”
“……?!”
어머니.
가까우나 다가갈 수 없는 말이다.
그 말속에 아이의 걱정이 묻어나니, 목해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골목 안쪽의 허름한 집을 향했다. 그 속에는 좁은 마당에 쓰러진 한 여인이 보였으며, 그 여인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울부짖는 어린 소녀가 비쳐 들었다.
또한 그 아이의 옆으론 제법 준미하게 생겼으나 그 눈매가 날카롭고, 흉한 기운이 감도는 비단 청포의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리에 한 자루 검마저 찬 사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쓰러진 여인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목해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싶은 순간 목해운의 신형이 한순간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서니, 그의 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인의 배를 걷어차는 사내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목해운이 사내에게 다가가 앉으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며, 그 찰나의 순간 펼쳐진 어이없는 사태에 사내는 당황해 외쳤다.
“뭐냐, 네놈은?!”
“…….”
말이 없다.
순식간에 사내의 발목을 낚아챈 목해운은 말을 하지 않은 채 굳은 얼굴로 사내가 아닌 여인을 바라보았다. 삼십 대 후반의 여인은 엎어진 자세 그대로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으며, 이에 목해운은 사내의 발을 놓은 채 여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
위험했다.
여인의 맥은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으며, 그 맥을 통해 기를 내부로 주입해 살펴본 목해운은 여인의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내가 배에 충격을 준 덕에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는데, 이대로 계속 둔다면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목해운은 마음속에 오행 중 목의 기운을 떠올렸다.
목(木)은 생명을 관장한다.
목의 기운 속엔 치유의 힘이 있는데, 그 기운이 순식간에 목해운의 내부에서 하나로 합쳐져 여인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
잠깐.
아주 잠깐 여인의 몸에서 기이한 연녹색 빛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빛은 찰나의 순간 사라졌으며, 그 기이한 광경에 사내는 놀라 빼 들던 검마저 놓은 채 두 눈을 크게 떴다. 한편 몸 안에 흘러들었던 기운이 약해지던 아기와 산모의 기운을 다시 안정시켜 놓자, 목해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어 그는 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 지어 주었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단다. 잠시 쉬고 나면 평상시의 모습과 같은 엄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오빠, 그 말 정말이야?!”
걱정할 것 없다는 목해운의 잔잔한 음성에 기이하게 마음이 편해진 소녀가 놀라 물으니, 목해운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답을 전한다.
그 답에 완전히 마음을 놓은 소녀의 입가론 미소가 걸렸으며, 소녀의 미소를 뒤로한 채 여인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 목해운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소녀를 이끈 채 여인을 방 안에 눕혀 주었다.
목해운이 여인의 배가 차지 않도록 이불까지 덮어 준 후 나올 때까지 비웃음을 띤 채 기다린 사내는, 곧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목해운의 눈빛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한기.
그윽하기만 하던 그의 눈으로 왠지 모를 한기가 감돌자, 그 한기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한편 사내를 향해 다가들던 걸음을 멈춰 세운 목해운은 미소가 사라진 굳은 얼굴로 사내의 두 눈을 직시했다.
화가 난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힘 있는 사내가 여인의, 그것도 아이를 가진 여인의 배를 찬단 말인가. 그나마 자신이 보아서 다행이지,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아이와 여인 둘 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에 화가 난 목해운은 어정쩡한 자세로 선 사내를 바라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억양 없는 말을 던졌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빨아들이는 검은 호수 깊은 곳에 한줄기 한기가 감돌아, 보는 사내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또한 은연중 바뀐 기도 속엔 위엄이 담겨 있어, 사내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이깟 놈의 한마디에 겁을 집어먹다니?’
오기가 인다.
지지 않겠다는 오기가 인다.
누구나 자신을 두려워했으면 했지, 자신이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있다면, 그건 아주 어렸을 때 단 한 번.
그것도 사내가 아닌 계집아이에게 두려워하며, 땅을 긴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은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타고난 자질로 사문의 무공을 대성했다.
섬혼검(閃魂劍)이란 명호를 부여받은, 분영십이신검(分影十二神劍)을.
“후후, 후후후후후,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보면 모르겠냐, 이 등신아! 저 계집년의 배를 걷어차지 않았느냐!”
“…….”
섬혼검 주서운은 한껏 비웃었다. 몸에 이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단전에 깃든 해청신공(海靑神功)의 기운을 가득 끌어올려 내부로 퍼뜨리며…….
그런 그의 오만한 말에 목해운의 눈에 감돌던 한기가 더욱 짙어졌으며, 그의 주변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四章. 끌려가는 놈(1)
자신을 찾아 이끌고 왔던 제자들을 푼 아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서연이란 고 계집만은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만나서 자신이 어렸을 때 한 짓거리와 그 짓거리 때문에 당한 수모가 밝혀진다면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은 없었다.
그렇기에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입에 거품을 문 채 자신을 찾고 있을 아비 주광영으로부터…….
그렇게 얼마나 숨바꼭질을 했을까.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배는 고파 오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느껴지지 않던 한기마저 감돌게 만들었다. 자연 걸음은 느려진 채 너털 걸음이 됐으며,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던 자신에게 한차례 물벼락이 쏟아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짜증이 최고조로 일던 순간.
그 순간 마당 안쪽에서 쏟아진 물은 차갑게 발을 적셨으며,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차가운 마음으로 마당 안을 돌아보니 그곳엔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여인이 서 있었다. 마당 밖의 개똥을 물에 씻어 보내기 위해 함지를 들었던 여인은, 황망한 얼굴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미안하긴 미안할 것이다.
하나 그 사과만으로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팼다.
상대가 아낙네든 뭐든 상관없다.
그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응당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때리고 또 때렸다.
그랬더니 그 계집의 딸년이 울며불며 난리를 친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있나.
이렇게 큰 소리로 울어 대면 아버지가 날 찾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계집년도 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시는 울지 못할 만큼 아예 입을 박살 내 주기로.
허허, 근데 웬 돼먹지도 못한 놈이 끼어들어 순식간에 모든 일을 망쳐 논다.
짜증을 풀려던 자신의 마음까지.
“네놈은 대체 누구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냐?!”
“…….”
그 오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스르르릉 차갑게 울리는 검음과 동시에 서슬 퍼런 검을 뽑아 든 주서운의 말에 목해운은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는 말로 해서 알아들을 자가 아니다. 그의 언행만 보더라도 그가 가진 심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으며, 이런 자를 만났을 때 혜각은 이리하라 했다.
‘무조건 패라!
세상에 상대 못할 자가 둘 있으니.
하나는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자요, 둘은 자신이 가진 힘과 배경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는 자다. 그 둘을 네가 만나 말로 그 잘못을 고치려 한다면,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자는 고개를 끄덕이나 차후 네 등에 칼을 꽂아 넣을 것이다. 또한 안하무인격으로 설쳐 대는 자는 너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으며, 오히려 너를 비웃을 것이다.
그런 그 둘 모두에게 해당하는 극약처방은 힘의 우위를 보여 줘 기를 죽여 놓는 수밖에 없다. 절대 약하게 나가선 안 된다. 그들에겐 너의 부드러움이 아닌 강함을 보여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된다면 네 말이 귀에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그들은 너의 말을 따를 것이다.’
혜각.
그 자신이 강호를 횡보하며 숱하게 보고 경험했던 일 중 혜각이 유독 강조했던 말이다. 그것은 너무 부드러워 강함이 부족한 목해운이 차후 그 유의 성질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하여 전한 말이었다.
만약 어떤 일에 휘말려 상대에게 당근만 준다면 상대는 오히려 목해운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렇기에 혜각은 강호의 수많은 위험은 물론이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경험은 목해운에게 강호의 험난함을 알게 해 주었으며, 비록 말뿐이라곤 하나 그것이 차후 세상에 나간 목해운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혜각이었다. 과연 그의 말을 떠올린 목해운은 혜각이 말한 대로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만히 몸 안의 기운을 이끌었다.
일단은 패고 나서 말을 걸 생각이었던 것이다.
三章. 무전취식(無錢取食)(3)
그런 그녀가 이름도 모르는 사내에게, 그것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기질을 가진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열여덟 소녀의 방심이 흔들린다면,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우려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녀의 행동을 막은 보타신니는, 아직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목해운을 직시한 채 흐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젊은이, 이 늙은이에게 관심이라도 있나?”
“풋!”
수줍은 소녀마냥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흘러나온 보타신니의 엉뚱한 말에, 뚱뚱한 체구의 비구니는 마시던 엽차를 내뿜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찻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서연의 반듯한 이마로 푸른 힘줄이 돋았으나, 보타문의 호위대인 염천각(炎天閣)의 주인 비인비니(非人肥尼)를 상대로 화를 낼 순 없기에, 그 화는 고스란히 이번 일의 원흉인 스승 보타신니를 향했다.
“스승님, 체통을 지키십시오!”
“어머, 솔직하지 못하구나. 훗, 부러우면 부럽다 하거라.”
“……!”
젊은 시절엔 그 크기만으로도 뭇 사내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처진 가슴을 가리키며 던진 보타신니의 말에, 서연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유일한 약점인 가슴 크기를 강조하며 보타신니가 놀려 대자, 우울해진 것이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같은 나이 또래라 하나 배분상으론 한참 밑인 두 사질이 다가와 위로해 주었다.
“사고님, 너무 속상해 마세요, 가슴이 작으면 어때요? 어차피 사고님은 부처님께 귀의해 불가에서 평생을 지닐 몸이니, 가슴이 작아도 상관없잖아요.”
“맞아요! 저도 가슴이 크지만, 전혀 쓸데가 없는걸요. 오히려 걸어 다닐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 사고님, 문주님의 말씀에 너무 심려치 마세요.”
“…….”
위로다.
이건 분명 자신을 위로하는 거다.
하지만 왜 이다지도 우울해진단 말인가.
고개 숙인 서연의 주위로 어둠이 내려앉자 그만 당황한 혜소와 혜연은 참새가 재잘거리듯 쉼 없이 그녀를 위로했으나, 오히려 서연의 분위기는 가라앉다 못해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재밌는 사람들이로군.’
도저히 엄한 계율 속에 몸 담근 불가의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보타문의 제자들을 보며, 목해운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들의 주변에는 즐거움이 가득 차 보는 목해운의 기분마저 좋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보타신니의 농 속에 칼이 담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목해운은 더 이상 그녀들을 볼 수만은 없기에,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계산대로 다가간 목해운은, 예상과는 달리 달랑 소면 하나만을 시킨 손님을 노려보는 이씨에게 말을 걸었다.
“잘 먹었습니다.”
“……!”
물론 잘 먹었을 것이다.
비록 소면이라곤 하나 맛 하나는 기가 막혔을 테니.
문제는 돈이다.
잘 먹었으면 돈을 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 수고하십시오.”
“아, 예, 손님. 부디 살펴 가십시오.”
꾸벅 허리를 숙인다.
어느새 돈 생각은 까맣게 잊은 이씨는 허리를 숙인 것도 모자라 친절히 손까지 흔들어 보인다. 그러나 목해운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씨의 입에선 경단 장수 장씨의 말과 같은 유의 욕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갇혀 있던 내실에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세상 밖으론 소보소복 눈이 흘러내리고 있다.
듬성듬성 자리한 잔나뭇가지 위에도, 알록달록 오색 빛깔을 가진 수많은 지붕 위에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도 흘러내리는 하얀 눈을 마주한 목해운은 걸어가던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서 사색에 잠겼다.
아이는 부모를 닮는다 했던가.
혜각이 사색을 즐겼듯, 목해운 역시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드는 사색을 즐겼던 것이다.
언젠가 목해운은 아침 해를 바라보며 저 해는 왜 아침마다 뜰까 하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새벽 시간, 내기를 다지기 위해 절벽 위에 올라 시작된 목해운의 고민은 배고픔도 잊은 채 정오까지 계속되었으며, 어스름한 저녁이 다가와서야 겨우 그 사색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때 얻은 결론은 참으로 간단했다.
어둠이 찾아드니 빛이 물러나며, 어둠이 물러나니 빛이 찾아드는 것이다.
음과 양.
음한 자가 있으면 양한 자가 있듯,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는 당연한 생각으로 결론지은 목해운은, 당시 만족감보다는 배고픔에 부리나케 혜각의 처소로 달려갔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사색이었으나, 그 우스운 사색을 다 큰 지금에 와서도 목해운은 하고 있었다.
‘눈은 어째서 하얀 것인가? 눈은 어째서 차갑고, 만지면 사라지는 것인가?’
그 누구도 염두에 두지 않을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목해운은, 좁은 골목길에 선 채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사색을 방해하려는 듯, 앳된 아이의 울부짖음이 그의 귀로 흘러들었다.
“엄마, 엄마!”
“……?!”
어머니.
가까우나 다가갈 수 없는 말이다.
그 말속에 아이의 걱정이 묻어나니, 목해운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골목 안쪽의 허름한 집을 향했다. 그 속에는 좁은 마당에 쓰러진 한 여인이 보였으며, 그 여인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울부짖는 어린 소녀가 비쳐 들었다.
또한 그 아이의 옆으론 제법 준미하게 생겼으나 그 눈매가 날카롭고, 흉한 기운이 감도는 비단 청포의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리에 한 자루 검마저 찬 사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쓰러진 여인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목해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싶은 순간 목해운의 신형이 한순간 사내의 코앞으로 다가서니, 그의 손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인의 배를 걷어차는 사내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목해운이 사내에게 다가가 앉으며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며, 그 찰나의 순간 펼쳐진 어이없는 사태에 사내는 당황해 외쳤다.
“뭐냐, 네놈은?!”
“…….”
말이 없다.
순식간에 사내의 발목을 낚아챈 목해운은 말을 하지 않은 채 굳은 얼굴로 사내가 아닌 여인을 바라보았다. 삼십 대 후반의 여인은 엎어진 자세 그대로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으며, 이에 목해운은 사내의 발을 놓은 채 여인의 맥을 짚어 보았다.
“……!”
위험했다.
여인의 맥은 빠르고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으며, 그 맥을 통해 기를 내부로 주입해 살펴본 목해운은 여인의 뱃속에 또 다른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사내가 배에 충격을 준 덕에 뱃속에서 자라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는데, 이대로 계속 둔다면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에 목해운은 마음속에 오행 중 목의 기운을 떠올렸다.
목(木)은 생명을 관장한다.
목의 기운 속엔 치유의 힘이 있는데, 그 기운이 순식간에 목해운의 내부에서 하나로 합쳐져 여인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
잠깐.
아주 잠깐 여인의 몸에서 기이한 연녹색 빛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빛은 찰나의 순간 사라졌으며, 그 기이한 광경에 사내는 놀라 빼 들던 검마저 놓은 채 두 눈을 크게 떴다. 한편 몸 안에 흘러들었던 기운이 약해지던 아기와 산모의 기운을 다시 안정시켜 놓자, 목해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어 그는 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그레 미소 지어 주었다.
“괜찮다. 걱정할 것 없단다. 잠시 쉬고 나면 평상시의 모습과 같은 엄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오빠, 그 말 정말이야?!”
걱정할 것 없다는 목해운의 잔잔한 음성에 기이하게 마음이 편해진 소녀가 놀라 물으니, 목해운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여 답을 전한다.
그 답에 완전히 마음을 놓은 소녀의 입가론 미소가 걸렸으며, 소녀의 미소를 뒤로한 채 여인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난 목해운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소녀를 이끈 채 여인을 방 안에 눕혀 주었다.
목해운이 여인의 배가 차지 않도록 이불까지 덮어 준 후 나올 때까지 비웃음을 띤 채 기다린 사내는, 곧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목해운의 눈빛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한기.
그윽하기만 하던 그의 눈으로 왠지 모를 한기가 감돌자, 그 한기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한편 사내를 향해 다가들던 걸음을 멈춰 세운 목해운은 미소가 사라진 굳은 얼굴로 사내의 두 눈을 직시했다.
화가 난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찌 힘 있는 사내가 여인의, 그것도 아이를 가진 여인의 배를 찬단 말인가. 그나마 자신이 보아서 다행이지,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아이와 여인 둘 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에 화가 난 목해운은 어정쩡한 자세로 선 사내를 바라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억양 없는 말을 던졌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빨아들이는 검은 호수 깊은 곳에 한줄기 한기가 감돌아, 보는 사내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또한 은연중 바뀐 기도 속엔 위엄이 담겨 있어, 사내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말도 안 돼! 내가 이깟 놈의 한마디에 겁을 집어먹다니?’
오기가 인다.
지지 않겠다는 오기가 인다.
누구나 자신을 두려워했으면 했지, 자신이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있다면, 그건 아주 어렸을 때 단 한 번.
그것도 사내가 아닌 계집아이에게 두려워하며, 땅을 긴 적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은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타고난 자질로 사문의 무공을 대성했다.
섬혼검(閃魂劍)이란 명호를 부여받은, 분영십이신검(分影十二神劍)을.
“후후, 후후후후후,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보면 모르겠냐, 이 등신아! 저 계집년의 배를 걷어차지 않았느냐!”
“…….”
섬혼검 주서운은 한껏 비웃었다. 몸에 이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단전에 깃든 해청신공(海靑神功)의 기운을 가득 끌어올려 내부로 퍼뜨리며…….
그런 그의 오만한 말에 목해운의 눈에 감돌던 한기가 더욱 짙어졌으며, 그의 주변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四章. 끌려가는 놈(1)
자신을 찾아 이끌고 왔던 제자들을 푼 아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서연이란 고 계집만은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만나서 자신이 어렸을 때 한 짓거리와 그 짓거리 때문에 당한 수모가 밝혀진다면 개망신도 그런 개망신은 없었다.
그렇기에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입에 거품을 문 채 자신을 찾고 있을 아비 주광영으로부터…….
그렇게 얼마나 숨바꼭질을 했을까.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 배는 고파 오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느껴지지 않던 한기마저 감돌게 만들었다. 자연 걸음은 느려진 채 너털 걸음이 됐으며,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던 자신에게 한차례 물벼락이 쏟아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짜증이 최고조로 일던 순간.
그 순간 마당 안쪽에서 쏟아진 물은 차갑게 발을 적셨으며,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차가운 마음으로 마당 안을 돌아보니 그곳엔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여인이 서 있었다. 마당 밖의 개똥을 물에 씻어 보내기 위해 함지를 들었던 여인은, 황망한 얼굴로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미안하긴 미안할 것이다.
하나 그 사과만으로 간단히 넘어갈 일은 아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자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팼다.
상대가 아낙네든 뭐든 상관없다.
그저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으니 응당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때리고 또 때렸다.
그랬더니 그 계집의 딸년이 울며불며 난리를 친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있나.
이렇게 큰 소리로 울어 대면 아버지가 날 찾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계집년도 혼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다시는 울지 못할 만큼 아예 입을 박살 내 주기로.
허허, 근데 웬 돼먹지도 못한 놈이 끼어들어 순식간에 모든 일을 망쳐 논다.
짜증을 풀려던 자신의 마음까지.
“네놈은 대체 누구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눈을 부라리는 것이냐?!”
“…….”
그 오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스르르릉 차갑게 울리는 검음과 동시에 서슬 퍼런 검을 뽑아 든 주서운의 말에 목해운은 약해지려던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는 말로 해서 알아들을 자가 아니다. 그의 언행만 보더라도 그가 가진 심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었으며, 이런 자를 만났을 때 혜각은 이리하라 했다.
‘무조건 패라!
세상에 상대 못할 자가 둘 있으니.
하나는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자요, 둘은 자신이 가진 힘과 배경을 믿고 안하무인격으로 설치는 자다. 그 둘을 네가 만나 말로 그 잘못을 고치려 한다면, 웃음 속에 칼을 숨긴 자는 고개를 끄덕이나 차후 네 등에 칼을 꽂아 넣을 것이다. 또한 안하무인격으로 설쳐 대는 자는 너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으며, 오히려 너를 비웃을 것이다.
그런 그 둘 모두에게 해당하는 극약처방은 힘의 우위를 보여 줘 기를 죽여 놓는 수밖에 없다. 절대 약하게 나가선 안 된다. 그들에겐 너의 부드러움이 아닌 강함을 보여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된다면 네 말이 귀에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그들은 너의 말을 따를 것이다.’
혜각.
그 자신이 강호를 횡보하며 숱하게 보고 경험했던 일 중 혜각이 유독 강조했던 말이다. 그것은 너무 부드러워 강함이 부족한 목해운이 차후 그 유의 성질 때문에,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 하여 전한 말이었다.
만약 어떤 일에 휘말려 상대에게 당근만 준다면 상대는 오히려 목해운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그렇기에 혜각은 강호의 수많은 위험은 물론이요,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경험은 목해운에게 강호의 험난함을 알게 해 주었으며, 비록 말뿐이라곤 하나 그것이 차후 세상에 나간 목해운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혜각이었다. 과연 그의 말을 떠올린 목해운은 혜각이 말한 대로 입을 굳게 다문 채, 가만히 몸 안의 기운을 이끌었다.
일단은 패고 나서 말을 걸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