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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10화)
四章. 끌려가는 놈(2)


상대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음인지, 검을 비스듬히 내려뜨린 채 차갑게 비웃었다.
“건방진 놈.”
감히 천하의 주서운이 물어보는데 대답도 않다니?
허, 나보다 더 건방진 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주서운은 차갑게 웃으며, 손 안의 검을 순간 내뻗었다. 거리가 멀지 않은 상태에서 섬전처럼 내뻗어진 검은 순식간에 열두 개의 검영(劍影)을 그렸으며, 실과 허를 분간할 수 없는 빠른 쾌검은 목해운의 사혈만을 노렸다.
분영십이신검(分影十二神劍).
남해검문의 독문검공인 분영십이신검이 펼쳐지는 순간, 정지되어 있던 목해운의 신형이 움직였다.
느릿느릿 들어 올려진 우수는 열두 개의 검영 중 심장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신의 밑으로 파고들었으며,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우수와 동시에 어느새 좌로 삼 보, 앞을 향해 이 보 내디딘 목해운의 신형은 검영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주서운의 옆에 자리해 있었다.
파앗!
“헉?!”
빠르다.
자신이 펼친 쾌검술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의 몸이 더욱 빠르다.
어떻게 움직였는지 미처 보지도 못한 사이 허깨비같이 눈앞에서 사라진 사내의 신형은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섰으며, 열두 개의 검영 중 정확히 하나의 실검을 찾아낸 사내의 우수는 검신 밑으로 파고들어 검을 잡은 우수를 움켜쥐었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굴이 붉어진 주서운은 내기를 끌어올려 잡힌 손을 빼내려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그의 손은 목해운의 손에 달라붙듯 약간의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떨리는 팔의 경련만큼이나 파르르르 떨리는 주서운의 두 눈엔 두려움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빛이 마음속 살심을 더욱 부채질하니, 자유로운 좌수가 살기를 머금은 채 목해운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뿐.
주서운의 마음속에 살심이 차는 순간,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그를 지켜보던 목해운의 검은 눈동자로 한줄기 빛이 일었다.
그 빛은 곧 침묵하던 목해운의 우족을 움직임이요, 살짝 들려진 오른발은 주서운의 발목을 뒤꿈치로 가볍게 걷어차니, 아무 힘도 없어 보이는 그의 발길질에 튕겨지듯 주서운의 신형이 허공 위로 떠올랐다.
“어, 어!”
대지에 눕듯 허공 위로 누운 주서운.
그의 입에선 당황에 찬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팔과 다리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움켜잡듯 버둥댔다. 그 모습을 재밌게 바라보던 목해운이 몸부림치는 주서운의 오른손을 빙글 돌리자, 주서운의 몸도 따라 돌며 순식간에 일 장이나 날아갔다.
어느새 잡은 손을 놓은 목해운의 입가로 한줄기 미소가 걸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입가로 자연스레 떠오른 미소.
그 미소가 채 끝나기도 전, 그의 신형이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가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가벼우면서도 무겁게.
무거우면서도 부드럽게.
그 부드러움 속에 강을 담은 채,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직 그 몸이 허공에 떠 있는 주서운을 향해…….

***

“사형!”
“오오……. 찾았느냐?”
“그, 그게 아무 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미 마을을 벗어난 듯합니다.”
쥐꼬리만 한 수염을 두 갈래로 기른 얄팍해 보이는 사내의 말에, 그와는 반대로 청수한 인품을 지닌 중년 사내가 반색하며 반긴다. 그러나 곧 뒤따라 나온 사제의 보고에 큰 충격을 받고 만 중년 사내는, 뒷골을 잡은 채 몸을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청의 무복을 입은 사내 둘이 다가와 얼른 받쳐 들며, 걱정 어린 신색으로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문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문주님!”
“운아, 운아―!”
애절함이 가득 찬 해청검(海靑劍) 주광영의 울부짖음에, 그의 사제인 사일검(蛇一劍) 석무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후우, 그 훌륭한 사형께서 어쩌다 자식 하나 잘못 둬 저리도 못난 꼴을 보인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한심했다.
삼대독자가 가출했다는 생각에 통곡하는 주광영의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으나, 석무에겐 체통조차 지키지 못하는 못난 모습으로 비쳐 든 까닭이다.
젊은 날의 빼어났던 기강은 온데간데없는 사형의 한심한 모습에 장탄식을 내뱉은 석무였으나 어쩌겠는가. 미우나 고우나 그는 자신의 사형이며 남해검문의 현 주인인 것이다. 또한 비무가 싫어 내뺀 꼴도 보기 싫은 사질은 장차 이 남해검문의 주인 될 자였다.
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석무는 곧 안절부절못하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거친 고성을 내질렀다.
“해룡단(海龍團)은 다시 한 번 마을을 샅샅이 뒤져 사라진 소문주를 찾아내라!”
“사숙님의 명을 받듭니다!”
이사숙인 석무의 말에, 마을 외곽 공터에서 둥글게 포진하고 있던 이십여 명가량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고개 숙여 답했다. 그 답을 뒤로한 채 사라지려는 사내들 중 아직 앳된 소년을 불러 세운 석무는 그에게 사형제와는 다른 명을 내렸다.
“일평, 넌 지금 당장 문에 돌아가 마염에게 제자들을 이끌고, 마을 밖에서부터 소문주를 찾으란 내 말을 전해라.”
“예, 사부님.”
석무가 거느린 일곱 제자 중 가장 막내이자 늦깎이 아들인 석일평은, 아버지이자 사부인 석무의 말에 그러겠노란 답을 전했다. 비록 아버지라곤 하나 공과 사가 엄격한 석무의 교육 탓에, 공적인 자리에선 아비를 부르는 호칭부터가 다른 석일평이었다.
그런 자식의 모습에서 개망나니 같은 사질 주서운을 비교해 떠올린 석무는, 속으로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들이라 하는 자랑이 아니라, 석일평의 인품과 무공은 주서운 따윈 발끝에도 못 미칠 정도로 빼어났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시킨 탓도 있겠으나, 워낙 그 천성이 무겁고 말이 없으며 또한 성실해, 석일평은 석무가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것을 노력해 왔던 것이다.
‘쯧, 어찌 그 한심한 놈과 일평을 비교하리오. 애초 비교 자체가 안 되는 것을.’
눈물을 쏟듯 지상으로 눈꽃을 흘려 보내는 먹구름을 본 석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런 그의 귀로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부님.”
“응? 뭐 하는 거냐, 아직도 가지 않다니?”
떠났어야 할 석일평이 오히려 그의 옆으로 다가와 부르자, 석무는 의아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석일평이 눈짓하는 곳을 바라보자, 마을로 향했던 제자들이 마을에 남아 있던 제자들과 함께 다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찾은 것인가?’
그들의 모습에서 대강 사태를 짐작한 석무는 제일 먼저 달려온 제자를 보고 물었다.
“어찌해 다시 돌아온 것이냐? 소문주를 찾은 것이냐?”
“예, 사숙님. 마을에 남아 있던 사형들께서 소문주를 찾았다 합니다.”
“무어라, 그게 정말이냐! 어디냐, 어디야?! 네 이놈, 어서 빨리 말하지 않고 뭐 하느냐!”
반쯤 죽은 듯 누워 있던 주광영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제자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급히 외쳐 물었다. 정신없이 흔들어 대는 그를 석무가 겨우 진정시켰으며, 어느새 모여든 제자들 속에서 처음 말을 꺼냈던 사내는 주저하는 음성으로 주서운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놨다.
점점이 흘러나오는 사내의 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주광영은 입에 거품을 문 채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

선무(仙舞).
혜각이 가르쳐 준 선무란 이름의 무공은, 검공(劍功)도, 장공(掌功)도, 그렇다고 수공(手功)도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춤.
단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것에도 속하지 않는 춤 속에 검이 들리면 검무(劍舞)가 되며, 도가 들리면 도무(刀舞)가 된다. 손을 펴면 장법(掌法)이 되며, 주먹을 쥐면 권법(拳法)이 되는 것이다.
이 세상천지 모래알만큼 많은 것이 무인이며, 그 무인의 수만큼 많은 것이 무공이다. 그러나 그 무공은 결국 하나에서 생겼듯 하나에서 끝나니,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 포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선무였다.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선무를 펼친 목해운의 신형은 춤을 추듯 나아가며, 천환비산(千煥飛散)을 펼쳤다. 일천 개의 불꽃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곧 손등을 이용한 목해운의 양손이 주서운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경쾌한 타격음을 만들어 낸다.
파파파파팟!
빠르고 가벼우며, 또한 즐겁다.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같이 터져 나온 즐거움에 가득 찬 타격음은, 오직 한 사내에게 있어선 야차의 손짓과도 같았다.
“커헉, 컥, 크악!”
어디를 어떻게 맞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자신은 허공 위에 떠 있건만 그 짧은 순간 가슴, 어깨, 배 할 것 없이 두들겨 팬 마귀 같은 손이 마지막으로 빙글 돌아가는 신형과 동시에 따귀를 때리듯 우측 뺨을 강타했다.
퍽!
두둑!
“컥!”
한순간 터져 나온 탁음 속에 가미된 기음은 곧 주서운의 어금니가 부서져 나감이요, 그 힘을 감당 못한 주서운은 그대로 오른쪽으로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쿵 소리와 더불어 죽은 듯 담장 밑에 쓰러진 주서운을 바라보던 목해운의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어금니가 비쳐 든다.
점점이 묻은 혈흔과 함께 떨어진 이빨을 발견한 목해운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분명 힘 조절을 했건만 어찌 이가 부러진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이십 년 공력이다.
몸 안에 자유로이 퍼진 기운 중, 단 이십 년 수위의 내력만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런데도 주서운의 이는 마치 연약한 풀잎처럼 힘없이 부서져 나갔으니, 목해운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주서운의 검에 담긴 예기만으로도 그의 무공이 결코 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으니, 목해운이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 내력의 근원이 손등을 다치지 않기 위해 두른 금(金)에 있었다는 사실을 목해운은 미처 의식지 못했다. 비록 이십 년 공력이 실렸다고는 하나, 금의 기운은 주서운에겐 단단한 바위에 후려 맞는 것과 같은 충격을 준 것이다.
그 사실을 잠시 생각하고 나서야 인지한 목해운은 후회가 일었으나, 혜각의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는 애써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굳은 얼굴을 한 목해운은, 여전히 엎드려 누워 있는 주서운에게 다가가 말했다.
“죽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다. 어서 일어……!”
파앗!
검광(劍光)이 쏟아진다.
방심한 틈을 노리기 위해 일부러 기절한 척한 주서운의 몸이 순식간에 돌려지며, 그 속에서 한줄기 검광이 뿜어져 나와 목해운의 복부에 꽂혀 들었다.
아니 꽂혀 들려 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어느새 약지와 중지를 이용해 검 끝을 부여잡은 목해운에 의해 검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으며, 정지된 검의 모습에 주서운은 이를 갈아야만 했다.
“이, 이런 빌어먹을!”
“간악한!”
파앗!
욕설에 이어 흘러나온 목해운의 차디찬 말은 곧 주서운의 왼쪽 뺨마저 때림이요, 노기만큼이나 힘이 실린 목해운의 한 수에 여지없이 왼쪽으로 날아가 처박힌 주서운은 바닥에 부러진 이 두 개를 뱉어 냈다.
“이씨, 너 진짜 죽을래! 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따위 짓거리를 하는 거냐!”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주서운은 아픈 이를 부여잡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주서운의 손에서 빼앗은 검을, 오히려 그의 목에 갖다 댄 목해운은 차디찬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따라오겠느냐, 아님 이대로 죽겠느냐?”
“이!”
십팔, 십팔, 십팔이란 욕이 마음 가득 차오른다.
그러나 저 무식한 놈의 눈엔 진심 어린 빛만이 감돌아, 주서운의 욕은 단지 마음속에서만 맴돌았다.
‘제기랄.’
결국 체념한 듯 고개 숙인 주서운의 행동에, 그 뜻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목해운은 몸을 돌려세웠다.
여전히 그 입에선 억양 없는 어조를 내뱉으며…….
“따라와라.”
‘이런 개 같은 자식을 봤나. 이만큼 팼으면 됐지, 또 어디를 따라오란 거야?! 오냐, 좋다. 따라가 주마, 이 빌어먹을 자식아!’
무슨 생각을 했음인가.
아직도 마을 곳곳에서 자신을 찾고 있을 남해검문의 제자들을 떠올린 주서운은, 피가 흐르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주억주억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목해운은 주서운의 검을 든 채 앞을 향해 걸어 나갈 뿐이었으며, 그런 그의 마음속엔 한줄기 쓸쓸함이 일고 있었다.
‘토령 너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행동은 흉악하고 간악하기 짝이 없으니, 너의 말대로 인간은 악일지도. 하나, 저자 하나만으로 모두를 판단해선 안 된다. 토령 네가 하나만을 보고 우를 범했듯……. 그래, 음이 있음 양이 있듯, 악이 있다면 선이 있는 것 또한 이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니 틀림없다.
악한 것만이 인간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그 인간들의 손에 멸망했을 테니…….

웅성웅성.
작은 소란이 일고 있다.
작은 소란은 점차 커져 대로변을 지나던 사람들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어느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주서운은 얼굴을 씰룩거렸다.
“저, 정말 하란 말이오?”
“…….”
팔짱을 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는 듯 무심히 하늘마저 올려다보는 목해운의 얄궂은 태도에, 주서운은 될 대로 대라는 심정이 되었다.
‘오냐, 해 주겠다. 지금만은 네놈 뜻대로.’
자포자기 심정 속에 한 가닥 복수를 다짐한 주서운은 일단 심호흡을 했다. 크게 숨을 들이켬과 동시에 내뱉은 주서운의 열린 입속에서, 이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단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잘……못했습니다.”
“…….”
모두가 바라본다.
분명 작디작은 음성이건만, 혜가촌(慧可村)의 지배자 격인 남해검문의 소문주가 피투성이 얼굴로 한 사내에게 이끌려 왔던 것이 궁금했던 모든 이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연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으며, 제발 아무도 듣지 말기를 바라며 작은 소리를 내뱉었던 주서운의 말은 그들에게 천둥처럼 들렸다.
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안하무인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주서운이 사과를 한단 말인가.
모두의 마음은 의문으로 가득 찼으며, 그 의문만큼이나 큰 관심이 목해운에게 몰려들었다. 보기엔 닭 잡을 힘조차 없는 병약한 서생같이 생겼건만, 대체 그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 주서운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