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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11화)
四章. 끌려가는 놈(3)
모두의 시선이 주서운을 지나 목해운에게 꽂히는 가운데, 목해운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별반 상관하지 않고 주서운만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작구나.”
‘이런, 씨팔!’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마음에 반항심이 인 주서운은 두 눈을 부릅뜨며 목해운을 노려봤다. 그러나 가만히 손등을 들어 휘휘, 휘저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불현듯 부러져 나간 이가 떠오른 주서운은 목청껏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나 주서운은, 힘없는 여인의 배를 걷어찼습니다! 그것도, 그것도…….”
“임신한 여자의 배를 걷어찬 흉악무도.”
“크……. 임신한 여자의 배를 걷어찬 흉악무도한 놈입니다! 모두가 저의 어리석은 마음 탓이며, 천지신명께 맹세코 다시는 힘을 믿고 약한 이를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흑, 모두가,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여러분, 이 흉악한 놈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
대로변으로 걸어오는 내내 주입시킨 말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끝맺는 주서운의 모습에, 목해운은 그제야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것이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늘에 맹세하였으니, 아마 그는 앞으로 좀 전과 같은 행패를 부리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
웅성거림이 커진다.
주서운의 심성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으나, 설마 임신한 여인의 배를 걷어찰 정도로 악랄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마을 사람들은 분기 어린 눈으로 주서운을 노려봤다. 그런 그들의 입에선 자연 욕지기가 흘러나왔으나, 남해검문의 위세가 있어 그 소리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은 소리가 모여드니 웅성거림은 커질 수밖에 없었으며, 그 커지는 소란 속에서 주서운은 고개를 숙인 채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뻔했다는 게 그의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이 한 부끄러운 행동을 낱낱이 말했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마저 버린 채 용서를 빌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젠장, 차라리 비무나 하러 갈걸. 그 계집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이 낫지,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후회가 물 밀듯 몰려드는 주서운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여인 서연이 사람들 틈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음을.
“스승님, 주서운이라면 제가 상대해야 할 남해검문의 소문주가 아닙니까?”
“호, 그렇구나. 한데 저 꼴이 대체 뭐란 말이냐? 쯧쯧, 성질 더럽기로 유명하더니 아무래도 오늘 상대를 제대로 만난 듯하다.”
“…….”
객잔에서의 짧은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던 보타문의 제자들은 대로 한가운데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궁금함에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주서운이 외치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으며, 주서운을 제압한 채 데려온 목해운을 보고는 짧은 놀람의 빛을 띠었다.
객잔 안에서 마주했을 때부터 무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했으나, 설마하니 남해검문의 소문주를 제압할 만큼 실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충분히 그 무위를 짐작케 하는 목해운의 모습을, 보타문의 제자들은 이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중에는 설빙화(雪氷花) 서연의 시선 역시 같이했다.
“…….”
처음 보았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주서운.
그의 옆을 스치듯 지난 시선은 목해운을 주시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엔 객잔에서완 달리 호감 어린 관심이 일었다.
‘사파의 인물은 아닌 듯한데, 대체 정체가 뭘까?’
남해검문과 보타문 둘 다 그 근본은 정도에 있었다.
중원과의 거리가 멀다 보니 중원에선 의례적으로 남해도의 두 문파를 일러, 정파의 숨겨진 힘이라 표현할 정도였다. 그중 보타문의 직계제자로 자란 서연은 남다른 자긍심과 협의지심(俠義之心)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 깃든 협이란 한 글자를 대신했다 할 수 있는 목해운의 행동에, 서연이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목해운의 행동을 좋은 쪽으로만 본 서연과는 달리, 보타신니는 침중함 속에 굳은 안색을 하고 있었다.
‘비록 행동은 옳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짓이다. 저 아이는 자신이 수모를 준 아이가 남해검문의 보배임을 알고 한 것인가? 이번 일의 뒷감당을 대체 어찌하려고 저런 무모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설마 남해검문조차 우습게 여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짧은 이채가 번득인다.
목해운이 설사 주서운의 뒤에 남해검문이 있는 걸 알았다 하더라도 상관없이 일을 벌였을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보타신니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린 채 선 목해운에게 호기심 어린 호감이 일었다.
그러나 그 호감만큼이나 큰 것이 걱정이었으니.
만약 평소의 주광영이라면 문의 제자가 잘못한 일을 벌준 목해운에게 오히려 감사할 것이다. 그의 사람됨은 공명정대하다는 평판이 자자할 정도로 인품 역시 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의 제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팔불출.
하나뿐인 자식 일에 관해서만큼은 앞뒤 재지 않는 그의 소문을 잘 알고, 또한 보아 왔던 보타신니인지라 이번 일 역시 그리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것이란 걸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보타신니의 우려가 옳았음인가.
길을 가로막듯 모여든 수많은 사람 중 한곳이 파도가 갈라지듯 쫙 벌어지며, 그 속에서 애절한 사내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운아∼!”
“아부지?!”
아, 그 얼마나 기다렸던 외침이던가.
주서운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며 자신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오는 사내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마치 긴 세월 동안 떨어졌다 다시 만난 것같이 부둥켜안은 두 부자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하이고, 내 자식 놈 얼굴이 어찌 이리되었단 말이냐?”
“흑, 아부지, 저기 저놈이 저를. 엉엉!”
마음의 안도가 컸음인가.
다 큰 사내인 주서운은 넓은 아비의 품에 안겨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에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주광영은, 자신들을 비웃듯 미소 지은 목해운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네 이놈! 내 귀한 아들을 어떤 놈이 쥐어박았다는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았건만, 네놈이 어찌 나의 단 하나뿐인 자식 놈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이냐! 감히 남해도에 와 내 아들을 이 꼴로 만들었다는 것은 나 주광영은 물론이요, 남해검문조차 무시함이렷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차분했다.
그저 다정한 부자의 모습이 보기 좋아 미소 지은 게 실수였다는 것을 안 목해운은, 주광영의 노한 외침에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차분한 말을 던졌다. 그 말속엔 저리도 다정한 아비 품에 안길 수 있는 주서운에 대한 한 가닥 부러움이 담겼으나, 좌중의 그 누구도 목해운의 쓸쓸한 마음을 알지 못했다.
애당초 그런 것엔 관심조차 없었던 주광영은 주서운을 등 뒤로 돌려 보호하며, 차가운 눈빛을 해 보였다.
“네 이놈! 여기 이 아이의 몰골이 그 증거이건만 어디서 그따위 거짓을 늘어놓으려 하느냐?! 남해검문의 제자들은 들어라! 내 아들을 해하고, 우리 남해검문을 무시한 저기 저놈을 지금 당장 내 앞에 무릎 꿇리도록 하라!”
“문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노기 어린 주광영의 말에, 그의 옆으로 모여들었던 청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늦게 도착한 그들로선 주서운이 한 말을 듣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자신들의 자랑인 남해검문을 무시한 괴사내를 제압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검을 뽑은 사내들은, 곧 목해운을 반월형으로 포위한 채 서서히 다가들었다.
‘어찌 한 문의 문주란 이가 일의 전후도 살피지 않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아무리 부정이 개입되어 있다 하나, 그 정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면 오히려 자식에게 화가 된다는 걸 모른단 말인가?’
잠깐 지켜본 주씨 부자의 모습.
그 모습 속에서 지나치게 아들을 감싸고도는 주광영의 행태를 목격한 목해운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잠깐 지켜본 사이, 주광영의 부정이 지나칠 정도로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잘못된 행동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모습이 부러운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목해운은 두 부자의 모습 속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아비를 떠올리며 쓸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의 주변으론 살기등등한 표정의 사내들이 다가왔으며, 그 순간 홀로 선 목해운을 보호하듯 흑의인영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팟!
“모두 멈추십시오! 어찌해 일의 전후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한쪽의 잘못만을 탓한단 말입니까?! 명색이 남해검문의 제자란 자들이 이리 성급해서야, 중원천하가 비웃을 것입니다!”
“웬 놈이냐?!”
“……!”
당당했다.
한순간 허공을 날아 목해운의 앞을 가로막은 흑의인영은, 남정네들이나 입는 흑의무복을 걸쳤으나 그 신체는 사내라 하기엔 작았으며, 입에서 흘러나온 힘이 깃든 어조 속엔 가는 실과 같은 잔잔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목해운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체구를 우뚝 세운 전신에선 당당한 기세가 일어 다가들던 남해검문의 제자들을 멈춰 세웠으며, 사내처럼 틀어 올린 머리칼 아래론 시리도록 맑은 눈동자가 자리해 정광을 내뿜었다.
서연.
비록 남자의 행색을 했으나 손바닥으로 가려질 것만 같은 작고 갸름한 얼굴형과 연분홍빛 입술은 서연이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알려 줬다.
한편 난데없이 등장한 독특한 미소녀의 모습에 남해검문의 제자들은 주광영을 돌아봤다. 지시를 바라는 그들의 눈빛에 주광영은 근엄한 얼굴로 앞을 향해 나섰으나, 서연을 발견한 주서운은 무슨 이유에선지 재빨리 시선을 땅에 떨어뜨린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이야, 지금 무어라 했느냐?! 중원천하가 감히 남해검문을 비웃는다 했더냐?!”
“그렇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소녀조차 지금의 남해검문을 비웃는데, 드넓은 대륙에 산재한 영웅호걸들이 오늘의 소문을 듣는다면 어찌 남해검문을 비웃지 않겠습니까?!”
쩌렁쩌렁 울리는 주광영의 노성에도 불구하고, 반개했던 두 눈을 똑바로 치켜뜨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는 서연의 모습 속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평상시의 주광영이라면 그 당당한 기세에 한껏 웃으며 칭찬해 주었을 것이나, 지금의 주광영은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있었다.
“뭐라?! 네가 지금 우리 남해검문을 비웃는다 했느냐?!”
“물론 비웃고도, 또 비웃을 것입니다! 남해검문이라 하면 남해도에서 보타문과 함께 정파의 기둥과도 같거늘, 지금 하는 행동은 앞뒤조차 살피지 않는 무뢰배와 같으니, 어찌 이 속 좁은 소녀조차 비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급격히 굳어 든다.
한 점 막힘없이 물 흐르듯 흘러나오는 서연의 말에, 주광영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 들었다.
그녀의 말이 가히 틀리지 않으니, 아무리 냉정함을 잃은 주광영이라 하더라도 화만 낼 순 없었던 것이다.
“지금 너의 말은 마치 내 아들이 잘못을 해, 저기 저놈에게 수모를 당했단 말 같구나!”
철석같이 아들을 믿는 주광영의 굳건한 말에, 서연은 고개 숙인 주서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주 대협께서 옥과 같이 여기시는 아드님께 직접 물어보면 알 것입니다.”
“음…….”
무거운 침음성이 입 안을 맴돈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의 곁으로 다가간 주광영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물었다.
“저 소녀의 말이 사실이냐? 네가 잘못을 해 그 벌을 받은 거란 말이?”
“아니에요! 당치도 않아요! 저기 저자는 신분이 불명치 않아 내가 그 신분을 물어보자, 오히려 비겁하게 암수를 써 저를 제압하고 검을 들이댄 채 말도 안 되는 말을 이곳에서 외치라 했어요! 절 죽이겠다는 협박에 전 그것이 사문의 체면을 깎는 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말을 하고 말았어요! 모두가 저자의 말을 믿으니, 아마도 사악한 무리가 우리 남해검문의 위신을 떨어뜨리기 위해 보낸 자가 틀림없어요!”
“그것이 참이냐?!”
남해도엔 작은 군소방파들이 열 수가 넘을 만큼 자리해 있었다. 비록 그 수는 중원에 비해 많지 않았으나, 그들 간에도 세를 넓히고자 하는 다툼이 잦았으며, 그런 그들이 마지막으로 목표하는 것은 바로 남해도의 두 기둥인 남해검문과 보타문이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주서운은 재빨리 염두를 굴려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었으며, 진심 어린 그의 눈빛에 주광영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주서운의 말을 직접 들었던 마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은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여기며 새로운 눈으로 목해운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엔 한줄기 의심을 품은 채…….
‘흐, 이것이 바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렷다.’
사람들의 반응에서 자신의 꾀가 통했음을 안 주서운은, 마지막 일침을 가하기 위해 땅바닥에 털부덕 주저앉았다.
“흑, 아버지 저에게 죄가 있다면 사문의 위신보다 이 보잘것없는 목숨을 소중히 여긴 것이 죄입니다. 오백 년간 선조께서 지켜 오신 사문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그 죄를 물어 소자의 목숨을 거둬 주십시오!”
“운아…….”
가슴이 아팠다.
울며 땅 위에 주저앉은 아들의 모습에 주광영은 가슴이 아려 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다소곳이 주서운을 안아 일으키며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아니다, 어찌 내가 살고자 한 너를 죽일 수 있겠느냐?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가 바라는 마음이니라. 또한 하늘에서 지켜보실 선조께서도,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너의 목숨에 비하자면 하찮다 할 수 있는 사문의 체면을 버리라 하셨을 것이다.”
“아버지…….”
감동한 듯 넓은 아비의 품에 안긴 주서운의 입가론 득의에 찬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그 미소를 보지 못한 주광영은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아들의 여린 가슴을 위로하듯 따사로이 안아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오히려 사람들은 목해운을 악인 보듯 바라보았으며, 그를 위기에서 돕기 위해 나섰던 서연조차 의혹 어린 눈으로 목해운을 돌아봤다.
결코 좋지 않은 사람들의 시선과 의심 어린 서연의 눈빛에 목해운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물었다.
“소저께서도 절 의심하십니까?”
“……상황이 소녀의 마음에 의심을 안겨 주는군요.”
“이해합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이해한다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