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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12화)
四章. 끌려가는 놈(4)
목해운은 자신조차 믿고 싶을 정도로 주서운의 연기가 완벽했기에, 의심이 인 서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있기에 자신을 도우러 온 서연에게 심정을 말했을 뿐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서연의 눈으론 한줄기 빛이 감돌았다.
‘거짓이 아니다. 이 사람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 그의 언행만 보아도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음이다.’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부드러워 듣는 이의 마음을 평안케 했으며, 그 부드러움 속엔 진심이 담겨 서연이 가진 단 한 가닥 의심을 지웠다. 오히려 자신이 그를 의심했다는 생각에 한줄기 부끄러움이 인 서연의 하얀 볼 위론 홍조가 떠올랐다.
설원(雪原) 위로 피어난 한 송이 장미와도 같은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 목해운의 입가로 미소가 걸리니, 그 미소를 본 서연의 얼굴은 홍시마냥 붉어져 급히 고개를 돌린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박동에 당황한 서연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으며, 그런 그녀의 머릿속엔 또다시 의문만이 가득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리 세차게 가슴이 뛰다니, 단 한 번도 없던 일인데…….’
알 수 없다. 자신의 가슴이 왜 이리 세차게 뛰는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진정시키고자 빙설천공을 운기 하니, 과연 그녀의 생각대로 들뜨던 마음은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휴우…….”
짤막한 안도의 한숨.
왜 안도해야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안도한 서연은 목해운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없어?!’
없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뒤에 있던 목해운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서연이 급히 좌우를 돌아보니, 목해운은 어느새 그녀를 지나쳐 살기를 피워 올리는 남해검문의 제자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뒤에 자리한 채, 아비의 가슴을 방패 삼아 숨은 주서운을 향해 다가간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런 그의 무모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조급함이 인 서연이 급히 입을 열었다.
“공자께선 어찌해 도우려는 소녀를 무시한 채, 홀로 사지로 들려 하십니까?”
“…….”
다급함이 묻어난 그녀의 말에 앞을 향해 나가던 목해운의 걸음이 멈춘다. 걸음을 멈춘 채 그는 어느새 눈이 그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검게 물든 하늘.
지금 저 주서운이란 자의 마음에 깃든 빛깔 역시 암울한 하늘의 색과 마찬가지로 검을 것이다.
처음부터 참견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겠으나, 아마 같은 상황이 와도 똑같이 참견할 것이며,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은 타인의 도움이 아닌 혼자서 책임져야만 한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아예 벌이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
돌아본다.
살짝 고개를 돌려 흘러내린 머리칼 속에 담담한 눈빛을 담은 목해운은, 근심 어린 얼굴의 서연을 보며 눈빛만큼이나 담담한 말을 내뱉었다.
“사로(死路) 속에 생(生)이 있음이니, 저 혼자 살기 위해 나아가려 합니다.”
“…….”
재미없는 농이다.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며 던진 농은 서연에게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 농 속에 담긴 속뜻을 읽은 탓이다.
도우러 온 자신을 위험 속에 놓지 않기 위해, 홀로 사지로 걸어가려는 목해운의 속내를…….
“…….”
절로 두 주먹이 쥐어지며 힘이 들어간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것이 협이고, 그것을 자신의 신념으로 정한 서연이다.
그 신념을 위해 강해졌다.
아니 그 강함 속엔 다른 이유 역시 있었으나, 그것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한 여인의 뜻이다.
그 여인의 뜻 때문에 머리를 깎지 않았으며, 그 여인의 뜻 때문에 비구니가 되지 않았다. 그 뜻을 이룰 때까지 자신은 다른 어떤 사내보다 강한 마음과 육신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그것은 그 여인의 뜻일 뿐, 강함을 이룬 자신의 본뜻은 신념이다.
그런 자신이 어찌 목해운의 한마디에 의지를 꺾으리오.
남에게 지기 싫어하며 고집이라면 황소고집보다 더 센 서연은, 목해운의 뜻을 무시하듯 앞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 순간 들려온 사부 보타신니의 전음은 더 이상 서연을 나아갈 수 없게 함이니, 대지 위에 못 박힌 듯 우뚝 선 서연의 두 눈으론, 어느새 몸을 돌려 저만치 앞서 가는 목해운의 등만이 보일 뿐이었다.
“…….”
왜소한 등.
분명 왜소하기 짝이 없는 등이다.
그러나 그 유약한 등에선 알 수 없는 강건함이 느껴져, 서연의 차가운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단단한 빙판 위로 따사로운 봄 햇살이 부서지듯 쏟아져, 차가운 얼음을 녹이듯…….
五章. 따라가는 이(1)
싸아아아아…… 철썩!
밀려드는 파도 소리가 시원스레 귓전을 부딪친다.
노래하듯 울려 퍼지는 갈매기 소리는 손자를 향한 할머니의 자장가처럼 편안했으며, 옷깃을 스치는 바람은 화산의 열기 때문인지 따스한 기운마저 내포하고 있다.
“…….”
모든 것이 그대로.
모든 것이 언제나 보고 느꼈던 그대로이다.
그러나 그 변하지 않은 세상 속에 선 혜각은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밀려드는 파도 소리는 성난 범과 같았으며, 자유로이 허공을 떠도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슬픔에 찬 이별곡과 같다. 옷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은 차갑다 못해 쓸쓸함을 자아내니, 혜각은 허전한 마음의 공간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아 보았다.
눈을 감자 선명한 선을 가진 한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아이는 밟으면 밟을수록 푹푹 파여 들어가는 모래사장이 재밌는지, 연방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천진해 절로 미소 지었으며, 너무 급히 뛰다 넘어질까 걱정도 인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계속해 뛰어다니다, 자신의 걱정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아차, 하는 심정에 울지 않을까 당혹했으나, 아이는 어릴 적 말한 자신의 말을 기억하는지 절대 울지 않고 히죽 웃어넘긴다.
그 모습이 너무도 대견해 얼마나 흐뭇해 했던가.
당장에라도 달려가 품에 안아 주고 싶었으나, 자칫 너무 보호해 아이가 약해질까 안지도 못했다.
‘훗, 그때는 그저 대견하고 흐뭇한 생각에 즐겁기만 했지, 그것이 일상에서 주는 행복임을 알지 못했다. 이제 그 아이가 떠나 내 곁에 없음이니,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귀중했던가를 알겠구나.’
혜각은 감았던 눈을 떠 보았다.
맑디맑은 창공(蒼空)이 두 눈 가득 비쳐 들며, 넓은 허공 위로 당장에라도 다녀왔어요란 말이 울려 퍼질 듯하다. 그 아이가 떠난 지 채 반 시진(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건만, 혜각은 온몸 가득 엄습해 오는 쓸쓸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언제까지고 품 안의 아이가 아니거늘. 그 아이를 품 안에 안길 만큼 약하게 키우지 않은 것이 바로 나거늘. 어이해 내 마음은 이다지도 약해졌단 말인가? 운아, 대답해 주겠느냐? 이 할아비의 가르침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웃고 있다.
허공 위로 떠오른 목해운의 얼굴이 밝게 웃고 있다.
선무를 가르치고부터, 자상한 말은 던져도 결코 따듯한 품에 안아 주진 않았다. 자칫 자신의 품에 안긴 아이가 그 품에 안착할까 두려워 안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
아이가 약해질까 단 한 번도 안아 주지 않았던 무심한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말하며…….
비록 허상이라고는 하나 밝게 웃는 목해운의 모습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혜각은 한바탕 크게 웃어 보였다. 고요하던 하늘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뜨리며.
***
왠지 화가 난다.
마음속에 일던 부러움도 사라진 채, 아비의 등에 숨은 주서운을 보는 목해운의 가슴엔 화가 치민다. 대체 무엇이 아쉬워 약한 자를 괴롭히고, 거침없이 살검을 내지르며, 간악한 흉계로 사람을 모함한단 말인가.
튼튼한 버팀목인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을 것이며, 그 주변엔 우정을 나눈 친구와 피를 나눈 친지들이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남해검문의 소문주라면 배고픔을 모를 것이며,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며, 강한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조건 역시 갖추어져 있을 터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저자의 마음은 검다 못해 한길 앞도 보이지 않으니, 처음 본 내 입에서조차 한숨이 새어 나오게 만드는구나.’
한심했다.
한심한 그 모습에 화가 난다.
좋은 것을 보고, 좋은 말을 들으며, 좋은 것만을 배웠을 것이 분명한 주서운의 한심한 모습에 목해운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그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목해운은 결코 겉으로 표현치 않았으며, 단지 말없이 걷고 또 걸었을 뿐이다.
“…….”
앞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갈수록 전신으로 스며드는 살기 역시 강해진다.
피식.
미소가 그려진다.
결코 그들의 살기를 비웃는 미소가 아니었다.
단지 우스웠을 뿐이다.
당당히 선 아비 뒤에 숨은 채, 득의에 찬 비소를 흘리고 있는 주서운.
그를 보호키 위해 살기를 내뿜는 자들의 행동이 우스웠을 뿐이다.
‘저들에게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이해해 줄까? 싸우지 않고 내 생각을 말하면 이해해 줄까? 아니 그건 힘들겠지.’
이해치 못할 것이다.
세상에 말로 풀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혜각이 말한 다툼조차 일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저들의 편에서 자신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며, 그 말은 색이 변한 채 오히려 저들의 화를 부채질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자연스레 떠오른 생각.
그 생각과 동시에 목해운의 두 팔이 큰 원을 그린다.
어느 틈엔가 다가온 열두 개의 검날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휘둘러진 그의 손에, 검을 내지른 사내들의 입가론 차디찬 비웃음마저 걸린다.
우스웠다.
남해검문의 정예라고도 일컬어지는 해룡단(海龍團)의 날카로운 검날을 상대로, 정체를 알 수없는 괴사내는 고작 손만을 움직인 것이다.
마치 손을 베 달라는 듯 크게 원까지 그리며…….
허리춤의 고색창연한 검은 뽑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어이없는 행동을 보이는 목해운의 모습에, 기가 막힌 한 사내가 차디찬 고성을 내질렀다.
“우릴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네놈의 허리에 찬 검은 장식품이란 말이냐?!”
“…….”
사내가 내지른 검과 그의 말이 터져 나온 것은 동시였다.
그 짧은 순간 열두 개의 검날은 마음속 분노를 대변하듯 목해운의 전신에 꽂혀 들었으나, 그 차가운 검 끝이 닿기 전 휘둘러진 목해운의 긴 소맷자락에서 한줄기 돌풍이 일어 검날을 튕겨 냈다.
콰과과과과!
“……?!”
“……!”
굳건하던 땅이 파헤쳐진다.
펄럭이는 소맷자락에서 흘러나온 바람은 성난 회오리 같았으며, 한순간 열두 개의 검날을 무형의 기운으로 튕겨 낸 돌풍은 땅을 파헤침과 동시에 모래 바람을 불러일으켜 모두의 시야를 가렸다.
사아아아아아…….
“……!”
천천히.
대지 위로 눈이 내려앉듯 잦아든다.
거칠게 일던 바람이 한순간 너무도 잔잔히 가라앉는다.
마치 언제 바람을 일으켰냐는 듯 가라앉은 장내론 뿌연 흙먼지가 빗물처럼 흘러내렸으며, 그 흙먼지 속에서 겨우 눈을 뜬 주광영은 곧 경악 어린 빛을 띠어야만 했다.
사내.
분명 그 거리가 삼 장에 달하며 그 중간에 이십여 명의 제자들이 버티고 선, 철옹성과 같은 간격을 두었던 사내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바람의 여파에 백의를 펄럭이며, 그 바람을 타고 살랑대는 머리칼 사이론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
“미, 믿을 수 없다!”
“……?!”
발작하듯 터져 나온 외침.
그 외침에 불현듯 정신을 차린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주광영 앞에 우뚝 선 목해운을 향했으며, 그들의 입에선 황망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경악 어린 신음성을 들은 목해운의 눈이 사르르 떠지며, 한일자로 닫혀 있던 입가론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진다.
그려진 미소 속엔, 사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담으며…….
“검(劍)은 단지……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
미소 속에 흘러나온 담담한 한마디.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 든다.
그를 좋게 보던 서연의 눈에마저 못마땅함이 일고 있다.
건방지고 오만했기에.
지금 목해운이 던진 그의 말은 방금 보여 준 신기(神技)에 가까운 한 수와 어우러져 너무도 오만해 보였다.
검에 평생을 바쳤다 할 수 있는 남해검문과 보타문에 있어, 목해운의 한마디 말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못마땅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인지한 목해운은 자신이 생각하는 검에 대한 정의를 짧게나마 설명해 오해를 풀고자 했다.
“손에 들리지 않은 검은, 단지 장식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
급격히 흔들린다.
수많은 사람 중 목해운이 던진 말을 이해한 자 많지 않았으며, 그 적은 사람들 중 유독 보타신니와 주광영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검선(劍仙).
목해운의 말속과 어우러져 자연스레 떠오른, 한 사내의 명호.
그 명호를 동시에 떠올린 주광영과 보타신니였으나, 둘의 눈은 정반대의 빛을 띠고 있었다. 보타신니의 눈엔 더욱더 짙어진 의혹과 그 의혹만큼이나 짙어진 호감이.
주광영의 눈엔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불신만이…….
‘아니다. 아니다. 절대 아닐 것이다. 이자가 그분의 제자라니? 아니야, 아니야, 지금 이자의 말은 그분이 남기신 말과는 다르다. 달라, 절대로 달라!’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더 이상 중원 땅을 밟을 수 없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마음 가득 부정하는 주광영의 귀로 문득 목해운의 말이 흘러들었다.
“말해 보아라.”
“……?!”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네 아버지께 했던 말을 해 보거라.”
“…….”
침중하고도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