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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14화)
五章. 따라가는 이(3)


진정으로 분노한 석무의 호통이 귓가를 맴돈다.
그 호통에 주광영의 시선이 뒤에 있는 아들에게로 향했다.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도 묘수가 떠오르지 않던 주서운은, 아비 주광영의 시선에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고개를 흔들고 있다.
“아, 아버지, 전, 전…….”
“말해 보거라, 이 모녀의 말이 사실이냐?”
믿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이리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들의 입에서 아니란 답이 나오길 바라며…….
“그, 그것이, 그것이 전…….”
답을 못한다.
당황한 주서운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그저 같은 말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번 일의 진실이 무언지 알 수 있다.
속은 것이다.
그토록 귀하게 키워 왔던 아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아비의 마음을 속인 것이다.
처음으로 아들에 대한 화가 치민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치민 화는 큼지막한 손 가득 힘을 주게 만들며, 그 손을 허공 높이 솟구치게 만들었다.
“네, 네놈이, 네놈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네놈이 어찌!”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버지!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울며 매달린다.
금방이라도 저 큰 손이 자신을 때릴 것 같아 무서워 울며 매달린다.
태어나 단 한 번도, 아비한테 해 본 적 없던 용서를 빌며…….
지금껏 잘못해도 누구 하나 주서운을 꾸짖은 적 없으니, 그것이 잘못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제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그러나 지금 화가 난 채 손을 든 아비의 모습에, 주서운은 아비의 다리를 부여잡은 채 무서워 울며 용서를 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차마 올렸던 손으로 아들을 때릴 수 없다.
그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워 왔던 자식인가.
그런 자식에게 손찌검을 해야 함을 아나, 차마 무정히 손을 내려칠 수가 없다.
“때리셔야 합니다.”
“……!”
“지금 때리지 않는다면, 아드님의 심성은 영영 고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괴롭더라도, 사소취대(捨小取大: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한다)란 말을 부디 명심하십시오.”
“…….”
문득,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주광영의 귀로 잔잔한 목해운의 전음이 흘러든다.
그 전음에 각오가 선 주광영의 손이 아들에 대한 정을 끊듯 거칠게 휘둘러지니, 울고 있는 주서운의 뺨으론 순간 붉은 손도장이 찍혔다.
짝!
“……!”
스스로 의지를 다지듯 감고 싶은 눈을 억지로 부릅뜬 주광영.
그의 눈으로 입술이 터진 뺨을 부여잡은 채, 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들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주광영 자신이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배신감을 느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맞았다?’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비한테 맞은 것이다.
그 충격이 너무 컸던지, 말조차 나오지 않는다.
육신의 고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의 충격.
그 충격의 파장이 주서운의 정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니, 불현듯 자애롭기만 하던 아버지가 야차보다 더 무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
“이놈! 누가 나한테 사과하라 했느냐! 네놈이 사과해야 할 분들은 저분들이다!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면, 어서 저분들께 무릎 꿇고 용서를 빌지 못하겠느냐!”
한번 화가 나니 산중(山中)의 왕(王)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
그 무서운 호통에 주서운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릎걸음으로 목인선과 목해운 앞에 다가가 엎드려 절을 한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생각이 없어, 잘못을 범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
“…….”
다 큰 어른이 아비가 무서워 울며 용서를 빌고 있다.
그것은 그의 육신은 컸으나, 마음이 아직 어리다는 증거이며, 그 모습에 목인선과 목해운 둘 모두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일었다. 그러나 한번 마음을 다잡은 주광영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정도로 어찌 두 생명을 죽이려 한 네놈의 간악한 심성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 지금 당장 저 여인의 배를 걷어찬 네놈의 그 흉악한 다리를 스스로 잘라라!”
“아, 아버지!”
“사형!”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주광영의 일갈에, 모두가 놀라 돌아보았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자식이다.
아니 자식 이전을 떠나, 앞으로 장차 남해검문의 대를 이을 주서운의 다리를 자르는 것은 너무했다 싶은 석무다. 그는 사형을 만류하기 위해 주광영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주광영은 요지부동(搖之不動) 그의 뜻을 거절한 채 겁을 집어먹은 주서운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
자신의 애잔한 목소리에도 눈빛엔 흔들림이 없다.
이대로 간다면 정말 자신의 다리를 잘라야 한다 생각하니, 주서운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목인선과 목해운에 대한 원한보다,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빌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 남녀의 다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약자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세 치 혀로 남을 속이려 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주, 주 공자님…….”
“…….”
진심이 배어 있다.
주서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정이 배어 있었으며, 그것을 느낀 목해운은 가만히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되었다. 네 스스로 잘못을 알았다 하니, 따로 벌을 줄 필요도 없음이다. 부인께선 이자를 벌주길 원하십니까?”
“다, 당치도 않습니다.”
어찌 벌을 줄 수 있단 말인가.
설사 벌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남해검문이 무서워 그리할 수 없는 목인선이다. 그녀는 목해운의 물음에 손사래를 내쳤으며, 주서운은 둘이 자신을 용서한다 말하니 그저 고맙고도 고마워 연방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린 주광영은, 이쯤이면 되었다 싶은데도 다리를 자르라 말하고 있었다. 이에 속으로 웃음을 흘린 보타신니가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와 주광영을 말렸다.
“아미타불, 이쯤에서 이 늙은이를 봐서라도 화를 푸는 게 어떻겠나? 산모와 아이 둘 다 무사하고, 또한 자네 아들도 저리 진심 어린 사과를 하니, 이만하면 된 것이 아니겠나? 정히 그리 자식을 혼내고 싶다면, 차후 집에 가 따로 불러 매질을 하면 될 일. 여기 이 두 분껜 남해검문이 지은 죄에 대한 사례를 좀 해 주고. 어떤가, 이 늙은이의 생각이?”
“신니…….”
다행이다.
역시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몰아갔던 자신을 보타신니가 말려 다행이다.
군중 속에 숨은 보타신니를 발견하고 믿은 보람이 있다는 생각에, 주광영의 안색이 풀리며 그 입에선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니께서도 이리 말씀하시니, 서운, 오늘 너의 죄는 따로 문에 가 엄책하겠다. 사제는 문에 돌아가는 즉시, 철없는 내 아들이 지은 사죄의 의미로 저기 저 부인의 집에 적절한 보상을 해 주도록 하라.”
“사형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석무가 스리슬쩍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또한 보타신니의 등장과 함께, 마치 미리 준비했다는 듯 말을 늘어놓는 주광영의 속뜻을 읽은 것이다.
절대적.
잘못을 저지른 자는 그 자식마저 절대 용서치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 준 주광영의 행동은 과연 그 효과가 커, 주서운뿐만이 아닌 지금 보고 있는 젊은 제자들의 가슴에마저 찬바람을 일으킬 정도였다.
차후 그 누가 되었든 남해검문에선 이와 같은 잘못을 벌이는 자가 없으리라.
‘이제야 사형이 사형다워졌구나.’
어려서부터 보아 왔던 사형의 모습을 되찾았단 생각에 절로 흐뭇해진 석무는 곧 목인선에게 다가가 집의 위치를 물었다. 그러나 목인선은 일의 잘못이 자신에게 먼저 있고 용서도 받았으니, 사례를 받을 수 없다며 극구 사양하였다. 그런 그녀의 말에 난색을 표하는 석무를 이수아가 구해 줬으며, 그녀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에 석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그 뒤를 두 제자와 목인선이 허둥지둥 뒤따르니, 보타신니 역시 무슨 생각을 했음인지 밝게 웃는 이수아를 가리켜 비인비니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이에 비인비니는 뚱뚱한 체구를 움직여, 두 사매와 함께 사라지는 석무 일행을 뒤따랐다.
장내의 일이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니, 구경키 위해 왔던 자들 역시 잠시 멈추었던 바쁜 걸음을 움직여 각각의 일을 찾아 나섰다. 이리되고 나니 휑한 바람만이 부는 장내론 주광영과 보타신니 일행을 포함한, 목해운만이 남아 서로 바라보았다.
“…….”
‘신니께서 아까 그 아이를 마음에 두었음이로군.’
사라지는 비인비니의 행동을 지켜본 주광영은 보타신니의 뜻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정도의 총기에, 그 정도의 담력이라면 제자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다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발 늦었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주광영은 곧 남아 있던 제자들 중 일부에게 일러 주서운을 자신이 돌아갈 때까지 방에 가두라는 명을 전했다. 이에 열 명의 제자가 힘 있게 대답해 말을 잊은 주서운을 데리고 사라지니, 장내는 을씨년스런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아미타불, 직계인 서운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은, 이번 비무가 우리 연이의 승리란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
까맣게 잊고 있었다.
주서운의 일로 마을에 내려온 본목적을 잊고 있었다.
‘허, 여우 같은?!’
빙그레 미소 지은 채, 정체가 궁금했던 소녀 서연을 가리킨 보타신니.
그녀의 주름 진 얼굴이 이리 미워 보일 수가 없다.
주서운이 떠날 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다 그가 사라지니 바로 비무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냥 날로 먹겠단 수작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목해운의 앞을 가로막던 서연의 기개를 보았던 주광영은, 자신의 자식이 설사 그녀와 대결한다 해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제 자식 놈은 무공은 둘째 치더라도 마음에 부족함이 많으니, 이번 비무엔 나설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신니의 뜻대로 하십시오.”
“흠…….”
빠져나갈 구멍은 잘도 만든다.
무공은 부족하지 않으나, 그 심성이 모자라 비무를 아예 시키지 않겠단 말이 아닌가.
끝까지 남해검문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주광영의 말에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던 보타신니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멀뚱멀뚱 선 목해운을 가리켰다.
“이보게, 비무는 차후 다시 얘기키로 하고. 여기 이 젊은이한테 줄 보답은 없는 겐가? 아까 그 부인한텐 보답을 하면서, 어찌 실질적으로 자네와 자네 아들에게 참된 길을 가르쳐 준 인자(仁者)껜 아무 보답이 없는 것인가?”
“음…….”
이번엔 주광영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보답을 하긴 해야 한다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잘못과 자식의 잘못을 일깨워 준 은인인 것이다. 그러나 보타신니에게서 그 말이 나오니 영 탐탁지가 않다.
그렇다고 어찌하겠는가.
이미 생각해 둔 것이고, 또한 선배인 보타신니에게서 나온 지적이니 행하는 수밖에.
“소협의 이름과 사문은 어찌 되시는가?”
“목해운이라 하며, 따로 사문은 없습니다.”
“사문이 없다?”
사문이 없다는 말에 모두의 눈에 어이없음이 떠올랐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그 무공을 추측키 힘들 정도로 강한 것을 알겠거늘, 강함을 안겨 준 사문이 없다 하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못해도 구파일방과 어깨를 견줄 만큼 큰 문파의 제자라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그 불신은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에게 사문을 물어 그 사문에 보답을 하려 했던 주광영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아까 했던 말의 참뜻이 무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말이라 하시면?”
“그 있지 않은가. 손에 잡지 않은 검은 단지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했던 말.”
“그거라면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검이란 손에 잡혀야만 검으로써 활용할 수 있는 것이며, 손에 잡지 않은 허리에 찬 검은 단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끄는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음…….”
어딘가 다르다.
뭔가 깊은 뜻이 있으면서도, 그 언젠가 들었던 검선의 말과는 뜻을 달리했다.
그 점을 보타신니 또한 눈치 챘는지 깊게 침묵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한편 목해운은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다.
말 그대로 검은 허리에 차면 멋들어져 보이는 장식용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거늘 어찌해 이들은 그 속에 숨은 뜻을 찾아 저리도 고민을 하는가.
‘이 또한 당연한 것인가?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는 당연한 인간의 심성이던가?’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낸 목해운의 귀로, 다시금 주광영의 말이 들려왔다.
“자네의 말을 내 도저히 짐작하기 어렵군. 혹여 자네, 그 말 그대로 검을 잡아 본 적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검을 잡아 써 본 적이 있나?”
검을 배운 적이 있냐는 질문에 목해운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따로 검을 써 본 적은 없습니다.”
말 그대로 검을 잡지도, 따로 검을 쓰거나 배운 적도 없다.
몽유도에서 검이라고는 천공검 하나였으며, 그것은 언제나 금강령의 허리에 매여져 있었다.
선무를 배울 당시 혜각은 선무가 모든 무를 포함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그에게 나무토막을 하나 쥐어 준 적은 있다. 풀밭에 떨어진 나무토막을 잡은 채 선무를 출 당시, 그것이 검을 이용한 검무란 생각을 목해운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손에 무언가가 들리면 그 효능에 맞춰 선무의 기질 또한 바뀐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
그것은 곧 혜각의 말대로 손에 검이 들리면 검무가, 도가 들리면 도무가, 주먹을 쥐면 권법이 된다는 말을 이해한 것과 같았으나, 그렇다고 따로 검법만을 집중적으로 익힌 적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