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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23화)
八章. 오룡무(五龍舞)(3)
강하다.
지금 자신의 앞에 미소 짓고 선 소녀는 강하다.
박건은 그녀의 말속에서 충분히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넌…… 강하구나.”
“흠, 이래 봬도 사랑을 시작한 여자는 남자보다 강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던진 말이었으나, 정작 무심결에 말을 내뱉었던 이은영은 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방금 한 말은 잊어 달라 말한다. 얼굴이 빨개져 다급히 손을 내젓는 이은영의 모습에 박건은 진중한 어조로 물었다.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느냐?”
“……모르겠어. 하지만 단순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것은, 아마 그분을 좋아한다는 것이겠지? 아, 이런 쓸데없는 얘기 그만 하고, 오빠는 다시 일하러 가야지! 참, 그리고 오늘 정말 고마웠어. 앞으로도 이 나약하고 힘없는 동생 좀, 잘 지켜 주시와요, 오·라·버·니!”
“…….”
어느새 괴로움은 다 잊었는지 다시 활달한 성정으로 돌아온 이은영은, 박건에게 애교를 부리듯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그 모습에 미소가 그려질 법하건만 박건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 그대로였으며, 재미가 없어진 이은영은 혀를 살짝 내밀어 보인 후 손을 흔들며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건의 눈으론 한줄기 이채가 떠오르고 있었다.
‘저 아이는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 확인해 주겠다. 이 오라비가 확인해 주겠다. 그의 마음을, 그가 나 대신 널 지켜 줄 만큼 강한 자인지를 확인해 주겠다.’
“형님께선 어찌 동생 얼굴도 몰라보실 수 있습니까?”
“…….”
섭섭한 듯, 반쯤 돌아선 여인의 얼굴이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든다.
살짝 내리감은 눈에선 그윽한 빛이 감돌아 지상을 향했으며, 가는 턱 선을 가리듯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은 뺨 위를 스치듯 지나, 고아한 자태를 그려 낸다. 그 머리칼 사이로 상기된 얼굴이 드러나니, 목해운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했다.
“여인이 되었구나.”
“……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전 원래부터 여자였단 말입니다! 가뜩이나 스승님께서 사매를 데리러 가는 길에 치마를 입으라 성화를 부려 불편해 주겠는데, 형님마저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놀리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연 소저, 아니 연 동생의 모습이 너무도 바뀌어 제가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
가만히 목해운을 응시한 채, 성이 난 듯 두 눈썹을 찌푸렸다.
무심결에 나온 말은 반어였는데, 정신이 들고 나온 말은 존칭이니 화가 난 것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왜 이리 화가 치미는지 알 순 없었으나, 한번 부아가 난 서연은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냉정한 모습과는 달리 당황해 하는 목해운을 향해 톡 쏘아붙였다.
“형님께선 여전히 절 동생으로 여기시지 않나 봅니다. 전 애써 형님이라 부르는데, 형님께선 소제에게 존칭을 써 소제를 힘들게 하니…… 아무래도 다시 목 공자님이라 불러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
모습은 완연한 여인인데, 여전히 말투는 남정네 같은 서연의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에 목해운은 한바탕 웃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리 화가 난 상대를 두고 웃을 순 없기에, 그는 쓴 미소만을 지어 보여야 했다.
“이런, 아무래도 이 우형이 동생을 너무 화나게만 한 것 같구나. 내 본시 사람들과의 말이 익숙지 않다 보니 습관처럼 존칭을 쓰는 버릇이 생겼다만, 이젠 제법 말솜씨가 늘었으니 내 너의 뜻대로 말을 놓겠다. 어떠냐? 이 정도면 만족하겠느냐?”
“…….”
호객 일을 하며 익힌 말솜씨가 제법 입에 붙은 목해운이 자랑스레 가슴을 펴니, 그 모습이 또 서연에겐 재밌게 느껴진지라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애써 말투를 고쳤건만, 오히려 서연이 웃고 있으니 이번엔 목해운이 심술이 난 듯 이마를 찡그렸다.
한편 철없는 두 어른의 장난 같지도 않은 말장난에 기가 질리다 못해 진이 빠진 이수아는, 오늘 자신의 사저가 된 서연과 목해운 사이에서 두 남녀의 재미없는 말장난을 말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방해하듯, 갑작스레 주방으로 연결된 문이 덜컹 열리며 그 속에서 피범벅이 된 아칠이 힘없이 걸어 나왔다.
“……?!”
얼굴은 뭉개질 대로 뭉개져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며, 옷은 혈색으로 변해 혐오감을 일으켰다. 그 끔찍한 광경에 어린 이수아가 비명을 질렀으며, 그런 그녀를 보호하듯 감싸 안은 서연이 순식간에 허리에 찬 장검을 빼 들었다. 챙 소리와 동시에 푸른빛을 머금은 검날이 모습을 드러내니, 움찔한 아칠은 두려운 듯 그들을 피해 마음과는 달리 힘이 빠져 느린 걸음으로 객잔 밖으로 나섰다.
비틀비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걸어가는 아칠의 모습에, 잠시 얼이 빠졌던 목해운은 경계 어린 서연을 뒤로한 채 걸어가 힘들어 하는 아칠을 부축했다.
“아 형, 이게 어찌 된 겁니까? 대체 무슨 일이?!”
“건들지 마…….”
“아 형?”
“건들지 말란 말이다!”
팟, 쿠다탕!
혐오스럽고, 증오스럽다.
모든 일이 목해운 때문이라 생각하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식에 차 보인다.
그 가식에 찬 손이 자신의 어깨를 짚으니 절로 소름이 돋아, 그 손길을 힘껏 뿌리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상대를 밀며 생긴 반동을 견딜 힘이 없었던 아칠은 힘없이 객잔 바닥을 뒹굴었으며,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아칠의 모습에 목해운은 굳어 든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절 싫어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우선 아 형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먼저이니, 제가 싫더라도…….”
“그래……. 크흐흐흐, 난 네놈이 싫단 말이다! 네놈만 오지 않았어도, 네놈만 오지 않았어도…… 모든 게 네놈 때문이다! 모든 게! 네놈 따위가 있으니 그녀가 날 싫어하고, 내가 박건에게 이런 꼴을 당한 것이다!”
“……!”
이해할 수 없다.
아무것도, 지금 아칠이 하는 말을 목해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시 멍해진 시선으로 아칠을 바라보니, 아칠은 다시금 몸을 일으켜 객잔 밖으로 나선다. 그런 그의 등은 힘없이 처져 목해운의 마음을 자극하나, 목해운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게 자신 때문이란 말.
그 말이 목해운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했으며, 차가운 바람이 부는 거리로 나선 아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람들 틈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깊은 어둠이 찾아온다.
그 어둠 속에서 붉은 화촉을 밝힌 유선객잔으론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모여, 내일이면 이곳 남해도를 떠나갈 한 사내를 위한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목해운이 중원으로 간다는 말에 보타문으로의 길을 늦춘 서연과 이수아, 목해운이 호객 일을 하는 동안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까지 모인 객잔 안 분위기는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단지 하루아침에 점소이를 잃고, 또한 예상보다 많은 인원수에 술값과 음식 값이 배로 나간 이곽과 고민으로 마음이 굳어 든 목해운만이 억지웃음을 띨 뿐. 그러다가 목해운은 한쪽 빈자리에서 홀로 술잔을 채우는 박건을 간혹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 그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건은 그저 홀로 연거푸 술을 들이켤 뿐, 목해운에겐 단 한 점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한편 밝은 웃음을 띤 이은영은 장점인 붙임성을 이용해 자신보다 한 살 위인 서연을 언니라 불렀으며, 사내들만 모인 자리에서 같은 나이 또래인 이은영의 친근한 어조가 서연 역시 싫진 않았던지라, 그녀와는 말을 놓을 만큼 친해질 수 있었다.
모두가 목해운을 중심으로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는 시점.
깊은 밤이 다가온 시점에서, 술을 못해 차로 대신하던 목해운에게 홀로 앉아 술잔을 비우던 박건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할 얘기가 있다.”
“……마침 잘됐군요. 저 역시 박 형께 물어볼 게 있었습니다.”
“…….”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목해운은, 어느새 등을 돌려 객잔 밖을 향해 걸어 나가는 박건의 뒤를 쫓았다. 오늘의 주인공이 자리를 비움에도 이미 취기가 올라 시장바닥처럼 변한 객잔 안의 그 누구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으며, 단지 이야기를 주고받던 서연과 이은영이 동시에 말을 멈추고 신중한 눈으로 두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
마을 외곽의 공터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고도 차가웠다.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눈밭 위는 신비스런 빛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 빛 속에 마주한 흑과 백의 두 사내는 서로 바라보며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목해운과 박건.
객잔을 빠져나와 묵묵히 걷고 또 걸어 일각 만에 마을 외곽에서 걸음을 멈춘 두 사내는, 부드러움과 강함이란 상반된 기질을 대변하듯, 짧은 머리칼과 긴 흑발을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며 서로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란…… 아칠에 대한 건가?”
“그렇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박건의 입이 열리며 흘러나온 투박한 어조에, 목해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대가 이미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어느 정도 말하기가 편해진 목해운이었으나,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하듯 박건은 가벼운 냉소를 띠었다.
“알려 줄 순 있지만…… 지금은 알려 줄 수 없다.”
“……?!”
무심하던 입가로 그려진 한줄기 냉소와 더불어, 평범히 서 있던 박건의 우수에서 한줄기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둠을 밝히듯 피어오른 불의 기운.
그 불꽃은 손을 지나 점점 팔 위로 뱀이 똬리를 틀듯 흘러 퍼져 흡사 화룡(火龍)을 팔에 두른 것 같았으며, 그 불꽃을 목해운의 눈앞에 들어 보인 박건은 붉은 빛줄기 사이로 섬뜩한 한광을 발했다.
“날 이긴다면, 가르쳐 줄 수도.”
“……그 말씀은.”
씨익, 미소 짓는다.
저 사내에게 저토록 다양한 표정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박건은 미묘하게 뒤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무공을 익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터. 더 이상 말이 필요한가?”
“…….”
상대는 싸우려 하고 있다.
또한 그 싸움에서 이겨야만 목해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일의 진상을 알 수 있다.
“좋습니다. 박 형을 이겨야만 알 수 있다면…… 부족한 실력이나마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
눈빛이 변한다.
고요하던 눈 속으로 은은한 빛이 감돈다.
그것은 투기(鬪氣).
남해검문의 소문주를 상대할 때도 보이지 않았던 투기를, 목해운은 박건을 향해 내비쳤다. 그것은 이미 박건의 숨겨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인정한 데서 오는 투기였으며, 그것을 박건 또한 알았음인지, 그는 미묘하게 뒤틀린 미소 속에서 즐거움에 찬 말을 내뱉었다.
“재밌군. 하나 최선만으론 나 박건을 이길 수 없다. 죽을힘을 다하지 않는 이상, 내가 가진 오룡무(五龍舞)의 힘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겠다.”
“……?!”
화아아아악!
덮쳐 든다.
한줄기 기음과 동시에 들어 올렸던 우수를 일직선으로 내뻗으며 움직여진 신형은, 목해운이 상상한 이상으로 빨랐으며, 어느새 지척에 이른 박건의 입에선 대갈일성이 터져 나왔다.
“오룡무(五龍舞) 비기(秘技), 화룡참상(火龍慘喪)!”
“……!”
콰화아아아악!
화룡이 꿈틀대며 붉은 숨결을 토해 낸다.
일권과 동시에 박건의 팔에서 벗어난 한 마리 화룡은,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며 사방 일 장여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화룡의 숨결 속에 포함된 눈밭이 순식간에 무너지듯 녹아내렸으며, 한순간 폐허가 된 공터 안에는 오로지 박건만이 다시 불러들인 화룡을 팔에 감은 채 서서 안색을 굳혔다.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었던 사내.
그 사내가 마치 허깨비처럼 눈앞에서 사라진 사실을 깨달은 박건의 입가로, 다시금 뒤틀린 미소가 떠올랐다.
‘재밌군. 생각보다 더 재밌어.’
처음으로 느껴 보는 즐거움이다.
언제나 죽이기 위한 싸움만을 펼쳤던 박건은, 처음으로 살기가 아닌 순수한 대결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즐거움을 대변하듯, 기괴한 미소를 지어 보인 박건.
그의 고개가 천천히 좌로 돌아가며, 어느새 공격권 밖으로 이동한 목해운을 바라보았다.
“…….”
암천 위로 떠오른 한 조각 달빛을 받으며, 고요한 자세로 선 목해운.
그는 마치 박건의 시선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순보를 펼쳐 보였으며, 스팟 소리와 동시에 사라진 목해운의 신형은, 순식간에 박건의 좌로 이동하며 두 손이 기이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
월영성무(月影星舞).
십삼무(十三舞)로 구성된 선무의 제사식인 월영성무가 펼쳐지는 순간, 두 개의 손은 이십팔수(二十八手)로 변해 은은한 월광을 내뿜기 시작했으며, 박건의 화기(火氣)와는 달리 수(水)의 기운을 내포한 양손은 일정한 간격으로 박건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왼쪽 어깨에 위치한 견정혈(肩井穴)부터 시작해 아랫배인 상곡혈(商曲穴)에 이르기까지.
박건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휘둘러진 손은 우측 어깨에선 권으로, 좌측 가슴에선 손등으로 쉼 없이 변화하며, 변화하는 손의 형에 따라 목해운의 신형 역시 춤을 추듯 쾌속하게 움직임과 동시에 끊임없이 박건의 상체를 두들겼다.
파바바바바바밧!
“……!”
‘춤을 추고 있다?!’
상대의 형(形)은 말 그대로 춤이다.
단지 눈앞의 사내는 한바탕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
그것을 인지한 박건의 입가로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방비할 틈도 없이 상체로 밀려드는 공격에 주춤주춤 물러서는 상황에서도, 박건은 자신이 익힌 오룡무와 같은 춤을 추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조선의 일인계승 문파인 천문(天門)의 당대 문주로서, 박건은 그 누구보다 목해운이 익힌 무공의 성질을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을 파악한 박건의 눈빛이 변했다.
변화된 눈빛과 동시에 박건의 정지된 우수가 붉은 화염을 토해 내며 신봉혈(信封穴)을 향해 덮쳐 들던 목해운의 좌수를 덥석 움켜쥔 것은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