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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지로 1권(24화)
八章. 오룡무(五龍舞)(4)


순간.
푸쉬쉬쉬쉬!
큰 양(陽)과 큰 음(陰)의 기운이 부딪친 두 손에선 기괴한 소리가 일며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목해운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그대로 우수를 이용해 박건의 하단전을 파괴하듯 내질렀다.
그러나,
쩌저저저저정!
“……?!”
두꺼운 벽에 가로막히듯 멈췄다.
어느새 자유로운 좌수로 목해운의 우권을 거머쥔 박건의 손에선 다시 한 번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처음과는 달리 맞닿은 손에선 하얀 서리가 일며 차가운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수룡(水龍).
화룡이 감아 쥔 우수와 마찬가지로 푸른빛의 기운이 왼손부터 어깨에 이르기까지 똬리를 틀듯 일어난 박건의 모습에, 목해운은 두 눈 가득 이채를 띠어 보였다.
‘비슷해. 이것은…… 오행의 기운 중 화와 수의 기운이다! 어쩌면…….’
처음 박건이 던진 오룡이란 말에서 오행(五行)을 떠올린 목해운.
그의 짐작대로 박건의 내기는 오행에 그 근본을 두고 있으나, 목해운이 서로 다른 다섯 가지 기운을 한 번에 받아들여 그것을 마음에 따라 하나로 통합시키거나 분리해 쓰는 것과는 달리, 천문의 오룡은 단계별로 나뉘어 익힌다.
처음 화룡의 근본이 되는 화(火)의 기운부터 시작해, 마지막 흑룡(黑龍)의 근본이 되는 중(中)인 토(土)의 기운까지 총 다섯 단계로 구분되며, 또한 그 기운들은 마지막 단계인 흑룡의 힘을 얻기 전에는 따로따로 나누어 사용할 수밖에 없다.
무당파의 양의심공(兩意心功)이 마음을 둘로 나눠 두 가지 상반된 기운을 동시에 쓸 수 있다면, 박건이 익힌 오룡무의 오기신(五氣神)은 마음의 근본을 무(無)에 두고, 그 무속에 다섯 개의 마음을 따로 분리하듯 최대 단전을 다섯 개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중원의 대표적인 양의심공보다 뛰어나다 할 수 있으나, 심법인 오기신의 단점상 일단공을 다 익혀야만 다음 기운인 이단공을 받아들여 익힐 수 있기에, 체내에 싸이는 내력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그 한계 때문에 오단공까지 익히는 데는 영약의 도움이 없는 한 평생이 걸려도 모자라며, 그 단점이 천문을 일인계파로 만들어 오로지 한 명의 전승자만을 택하게 한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오기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역대 천문의 문주들은 자신들이 얻은 내력을 영물의 내단과 같이 만들어 입 밖으로 토해 냈으며, 통합된 기운이 아닌 다섯 개의 따로 된 성질로 나뉜 내단들은 다음 후손이 순서대로 하나씩 복용해 내력의 부족함을 채우게 한 것이다.
그러나 목해운이 심관을 통해 오행심공을 익히는 과정과는 달리, 오기신을 익히는 과정은 소림사의 역근경에 비견될 만큼 난해하고 복잡하여 박건 또한 현재 일단공의 화기신과 이단공인 수기신까지 익힐 수 있었다.
비록 이단공까지 익혔다 하나, 대대로 이어지는 천문의 특성상 화룡단(火龍團)과 수룡단(水龍團)이라 불리는 내단을 복용한 박건의 내력은, 따로따로 나눈다면 목해운이 갖은 삼 갑자의 내력과 비슷하며, 둘이 합한다면 목해운의 내력을 오히려 웃돌고 있었다.
그러나 힘을 나눠 쓰는 것과는 달리 다섯 개의 서로 다른 기운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던 목해운은, 맞잡은 양손을 통해 내부로 밀려드는 화룡과 수룡의 기운을 금(金)의 기운을 통해 막아 냈으며, 벽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내기의 움직임에 박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강하군. 하지만 언제까지 막아 낼 수 있을까?”
“…….”
자신감에 찬 박건의 말이다.
그 말에 목해운은 답조차 하지 않는다.
단지 두 무릎을 살짝 구부리다 튕겨 내듯 대지를 박차며 신형을 뒤집었을 뿐.
촤아아아앗!
“……!”
반월각(半月脚).
중원에 일반적으로 이름난 반월각과 같은 형태로 일각을 내지른 목해운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박건은 잡은 두 손을 놓은 채 급히 물러나야 했으며, 박건의 아래턱을 우족을 이용해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허공 위로 떠오른 목해운은 그대로 공중에서 제비 돌기를 펼치며 뒤로 이 장가량 물러나 대지 위로 내려섰다.
순간.
파앗!
“……?!”
가볍게.
하얀 눈밭 위로 내려선다 싶은 순간, 목해운의 좌족이 다시 한 번 대지를 박찼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힘이 실린 그의 신형은 굳건히 선 박건을 향해 섬전처럼 덮쳐 들었으며, 그의 우수는 어느샌가 긴 머리를 묶었던 푸른 끈을 풀어 헤친 채 움켜잡아, 박건에게 알지 못할 위압감을 안겨 주었다.
‘대체 무엇을?’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 사이로 한줄기 미소를 드러낸 목해운.
그 미소를 바라본 박건의 양손이 둥근 원을 그리며 그 원 속에서 내쏘아진 화룡과 수룡이 다가오는 사내를 향해 춤을 추기 시작한 것과 목해운의 우수에 들려 있던 푸른 끈이 한줄기 섬광을 그린 것은 찰나였다.
파아아아아앗!
“……!”
“…….”
대지 위로 가라앉았던 눈꽃이 분분히 허공 위로 떠오른다.
한순간 펼쳐진 두 사내의 춤사위 속에 퍼져 나간 강맹한 힘을 이기지 못한 듯 일어난 눈발 속에, 박건은 처음과 같은 자세로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굳건히 선 그의 몸과는 달리 거세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격한 감정을 대변하듯, 한순간 박건의 의복이 수십 갈래로 찢겨 나가며 불어오는 삭풍에 천 조각이 휘날렸다.
촤아아아아아!
“…….”
찢어진 옷깃 사이로 흘러내리는 가는 선혈.
날카로운 검에 베이기라도 한 듯, 박건의 육신 위론 수많은 혈선이 그어져 있었으며, 그것을 내려다보는 박건의 눈동자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쉼 없이 흔들렸다.
‘쌍룡천변(雙龍天變)이 막혔다.’
두 마리 용.
박건이 익힌 오룡무는 육신의 춤이 아닌 다섯 마리 용의 춤이다.
그의 육신에서 일어난 용의 형태의 오기신이 어검술과 마찬가지로 육신에서 내쏘아지며, 적을 공격하는 것이다. 또한 그 춤은 한 마리보다 두 마리였을 때 그 힘이 배가되는 것이며, 다섯 마리가 모이면 능히 천하를 뒤엎는 위용을 자랑한다.
박건은 오룡무 중 쌍룡천변으로 다가오는 목해운을 공격했으나, 화룡과 수룡의 춤을 비웃기라도 하듯 목해운은 유유히 그 속을 뚫고 나온 것이다.
아니 뚫고 나온 것이 아닌, 그 춤 속에 동화되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일정한 형을 유지한 화룡과 수룡의 공격을 목해운은 받아치는 것이 아닌 같은 기운으로 받아넘겼으며,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채 사라진 화룡과 수룡의 공간 속으로 목해운의 신형이 들어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박건의 시선이 미치는 곳.
바로 코앞에까지 밀어닥친 목해운의 우수가 푸른 끈과 함께 한줄기 섬광을 그린 것이다.
그 푸른빛이 나타남과 사라짐은 찰나였으며, 빛이 사라졌을 땐 이미 목해운도 없었다.
단지 박건의 전신에 가는 혈선이 수없이 그려져 있었을 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깊지 않은 상처다.
가벼운 찰과상에 지나지 않은 상처이기에 박건은 흐르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미소 짓고 있는 사내.
풀어 헤쳐진 머리칼 사이로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박건의 뒤로 태연히 선 사내 목해운은, 그의 물음에 손에 들린 푸른 끈을 바라보았다.
“제가 익힌 선무는 춤입니다. 총 열세 개의 형으로 만들어진 춤이나…… 그 끝은 단지 흐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형이 없는,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
분명 목해운이 그려 낸 섬광 속엔 일정한 형이 없었다.
단 하나의 빛으로 보였으나, 박건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빛이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나뉘며, 끝에 가선 셀 수 없는 수많은 빛줄기로 변화하며 자신의 전신을 스치듯 지나가던 것을. 그리고 그 속에서 일정한 하나의 움직임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음부터 형(形)이 없었기에.
처음부터 어느 이름의 초식도 아닌, 단지 목해운이 말한 그대로 흘러가는 물과 같았기에.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언젠가 내 스승님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춤은 단지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춤이란 짜인 움직임이 아닌, 내가 추고 싶은 대로 추는 마음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누가 있어 형을 벗어난 자유로운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며, 그 누가 있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육신을 움직여 그 마음에 맞는 춤을 출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러한 자가 있다면 그자의 춤은 이미 사람의 춤이 아닌 신선의 춤이요, 그 춤을 추고 있는 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허공 위에서 노니는 신선(神仙)일지라……. 넌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거운 뜻이 깃들어 있다.
자신의 등을 신중한 눈으로 바라보며 던진 박건의 질문에, 목해운의 입가로 그려졌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윽한, 한없이 그윽한 미소를 그려 보인 목해운은 달빛 아래 가볍게 몸을 돌리며, 부드러운 말을 흘려보냈다.
“전 사람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
밝게 미소 짓는다.
자신과 같은 속세의 때가 묻지 않은, 수수한 미소를 그린 채. 그 미소를 마주한 박건의 입가로도 한줄기 미소가 매달렸다. 부자연스런 미소가 아닌 자연스런 미소를 그린 채 박건은 피식 실소를 흘려보냈다.
“그렇군. 과연 그런 것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그 말과 어우러진 박건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짐을 던 듯 홀가분해 보였으나, 어느새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온 박건은 평상시의 무심한 어조로서 이번 일을 매듭지었다.
“졌다.”



九章. 만남 뒤에 헤어짐이 있고, 그 이별 속엔 새로운 만남을 기다림이니(1)


타오르는 불꽃.
그 불꽃이 뿜어 내는 붉은빛 속에 홀로 앉은 사내는, 멍한 눈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으며, 그 방의 가운데에 자리한 사내의 두 눈엔 흐릿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
무릎을 양팔에 낀 채, 하염없이 촛불을 바라보는 사내 아칠.
아칠의 두 눈은 흐리멍덩해 이지가 상실된 듯 보였으며, 언제까지고 죽은 듯 앉아 있는 사내의 귀로 문득 부드러운 한 점 말이 흘러들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강제로 해선 안 된다 생각합니다.”
‘목해운?!’
느닷없이 흘러든 전음에 흐릿하던 눈으로 한줄기 광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증오가 아닌, 후회와 수치의 빛이었다.
마음이 안정된 채, 홀로 방에 틀어박혔던 아칠.
처음 그의 마음속에 깃든 것은 박건과 목해운뿐만이 아닌, 이은영에 대한 증오였다.
그러나 시간이 가며 홀로 정적 속에 잠겨 든 아칠의 마음은, 증오가 아닌 후회로 바뀌어야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인가.
자신은 어째서 그녀에게 그런 행동을 보여, 다시는 그녀를 볼 수도 없게 됐는가.
만약 그런 성급한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조금 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고백을 했다면.
결코 이런 후회는 생기지 않았으리라.
후회…… 그 후회로 점칠된 아칠의 마음속으로 다시금 창문 밖에서 목해운의 전음이 흘러들었다.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그 사람이 나를 봤을 때 편안하게 느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를 돌아봤을 때 이 사람이 나를 불편해 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이 사람이 나를 봤을 때 편안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 줘야 하는 게 아닐까요? 마주할 때 찡그리지 않고 미소 지을 수 있는, 힘들어 할 때 기댈 수 있는 그런 버팀목이 된다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언젠가 나에게 기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먼저…… 내가 그 사람의 버팀목이 될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성숙시켜야겠지만…… 전 그러지 못했습니다. 전 그 사람의 버팀목이 되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사람에게 기대려고만 했습니다. 결국 제 첫사랑은 그렇게 기대기만 하다 끝이 났습니다……. 만약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전 그분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려 합니다.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는 그런 버팀목이……. 힘내십시오.”
“……!”
눈물이 흐른다.
마지막 말에 아칠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볼 수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도 없다.
이미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
그것을 깨달은 아칠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으나, 그 마음을 목해운의 마지막 말이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다. 힘내라고, 무너지지 말고 다시 일어나라고. 다른 여인을 만나게 된다면 이번엔 그녀가 믿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라 목해운은 말하고 있다.
그 말에 아칠은 감정이 복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 냈다.
작은 흐느낌에서 점점 더 큰 소리로…….

“…….”
검은 구름 사이로 감춰졌던 달이 다시금 고개를 내민다.
은은한 빛을 뿌리는 달을 목해운은 거무칙칙한 벽에 기대선 채 바라보았다.
닫힌 창문을 뚫고 흘러나오는 아칠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 울음을 선율 삼아 달을 감상하듯 바라보는 목해운의 두 눈 속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박건으로부터 일의 전말을 듣고 찾아온 아칠의 집.
그 집의 벽에 기대선 채 목해운은 자신의 진심을 전한 것이다.
한 여인에게 한없이 기대기만 했던 자신.
기대면 기댈수록 그 여인에게 자신은 한 아이로밖에 자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럴 수도 있겠으나, 목해운은 그것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기대면 기댈수록, 그녀는 목해운 자신에게 기댈 수 없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아닌, 보호해 줘야 할 연약한 아이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기대기만 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필요할 땐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그런 것이 사랑이겠지?’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금 그려진다.
그 미소 속에 목해운은 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던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