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소드이블 1권(12화)
제05화 지원병 모집(2)
바라논 왕국에서 북쪽에 위치한 한센 영지.
붉은 노을이 산에 걸친 저녁 시간이었다. 집무실 창가로 붉디붉은 저녁 해가 스며들고 있었다. 책상에는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한센 영주가 있었다.
그는 오후에 바라논 왕국의 수도 레논에서 날아온 일급비밀봉서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라논의 국왕인 파르테온 아에곤의 인장이 찍힌 일급 봉서. 한센 영주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뜯고는 내용을 살폈다. 그리고 읽어 내려가던 한센 영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동안 잠잠 하나 싶었더니…….”
그는 깊은 탄식을 흘리며 그 봉서를 도로 접었다. 그때를 같이해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님, 시온입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며 플레이트 갑옷을 걸친 기사가 들어섰다. 갈색 수염이 멋들어지게 난 강인한 인상을 한 기사였다.
한센 영주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시온 수석기사단장, 어서 오게.”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선 저리로 가서 앉게나.”
한센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의 소파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시온은 앉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한센 영주의 옆에 서 있었다.
한센 영주는 그런 시온을 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 한센 영주를 보던 시온이 궁금증을 느끼곤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오늘 오후에 수도 레논에서 긴급봉서가 날아왔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온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혹시…… 전쟁입니까?”
“그렇다네. 놈들이 광산을 건드렸다는군.”
한센 영주가 굳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산? 이번에는 어느 곳입니까?”
“알비온 왕국이라는군.”
“흠, 또 알비온이군요.”
시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알비온 왕국은 몇 년마다 한 번씩 꼭 국지전을 펼쳤다. 별다른 소득이 없음에도 그들의 도발은 끝이 없었다.
“그럼 왕국에서 내려온 봉서는 역시 징집 명령입니까?”
시온의 물음에 한센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지원병 모집 공고문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은 별다른 감흥 없이 말했다. 하지만 한센 영주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그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시온은 잘 알았다.
“정말 이런 지원 명령을 내릴 때마다 가슴이 정말 무겁네. 이제 갓 열다섯 살이 된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아.”
“…….”
한센 영주의 한탄에 시온은 그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바라논 왕국의 전통이며, 이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왕국을 지키며 지탱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 힘이야말로, 저희 바라논 왕국이 여태까지 버텨 온 이유입니다. 저 또한 그 나이에 지원해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때 지원한 것에 대해 한 점도 후회를 한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지원한 아이들도 다들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무거운 침묵을 고수하던 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센 영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알고 있네. 하지만 말일세. 자네 같이 뛰어난 기사가 되기까지 피 흘린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해 보게.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자네가 있었겠나?”
“…….”
한센 영주의 말을 들은 시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 대한 반박의 말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자신과 같이 징집되었던 수천 명의 아이들 중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수백 명. 나머지의 희생으로 인해 바라논 왕국을 지킬 수 있었고, 시온 본인 역시 살아남아 수석기사단장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해야 저희 바라논 왕국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만…….”
한센 영주는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네, 내일 당장 지원 공고문을 붙이도록 하게.”
“네, 영주님.”
시온은 기사의 예를 표한 후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한센 영주는 말없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저녁노을이 서쪽 산 능성에 걸친 채 서서히 내려가고 있었다.
집무실은 때아닌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한센 영지에는 지원 공고문이 붙여졌다.
2
바네아 마을의 산 중턱에 있는 루카스의 집.
루카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물가 옆의 공터에서 열심히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목검을 쥔 루카스의 눈빛은 언제나 매섭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목검만 손에서 떠나면 달라졌다. 열네 살의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왔다.
루카스는 밥 먹을 때와 엄마께 약을 드릴 시간을 빼고는 거의 목검을 휘두르는 것에 몰두했다. 그런 오빠의 모습에 루시는 조금 불안했지만 너무나도 좋아하는 목검이기에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우물가 마당에서 루카스가 목검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지난 일 년간 연습해 온 검술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발과 검의 움직임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더듬었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뜬 루카스가 힘차게 목검을 휘둘렀다. 목검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루카스 뒤로 바람의 일렁임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순간 루카스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약 일 미터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루카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의 몸 뒤로 작은 회오리바람이 생겼다가 금세 사라졌다.
“후우!”
루카스는 목검을 늘어뜨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뭔가 부족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따라 한 것은 같은데. 그래도 뭐가 부족하단 말이야.”
루카스는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고개만 갸웃거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집 정면 비탈길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루카스 대장!”
목검을 휘두르던 루카스는 그 소리에 멈추며 시선을 돌렸다. 비탈길 위에 머리가 나타나며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카알이었다.
루카스는 카알을 발견하고는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또 병정놀이에 참여해 달라고 말하려는 것일 것이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카알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카알이 루카스 근처로 뛰어왔다. 루카스는 그런 카알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카알,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이제 병정놀이는 하지 않겠다고.”
무슨 이유인지 들어 보지도 않고 곧바로 거절부터 하는 루카스를 보며 카알은 왠지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온 것인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서운하네, 루카스.”
무겁게 내려앉은 카알의 음성을 들은 루카스가 흠칫했다.
‘응? 병정놀이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닌가?’
루카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카알의 표정을 보던 루카스는 짐짓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 난 또…….”
“됐어, 변명하지 않아도 돼.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병정놀이에 오라고 부탁하지도 않을 거야. 나를 비롯해 아이들 전원이 대장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으니까.”
카알은 거침없이 말했다. 그의 말에 루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움도 있었다.
“그, 그래? 고마워.”
루카스가 어색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미 어색해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못하고 쭈뼛거렸다. 그러다가 루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는데?”
그의 물음에 카알도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영지에서 알아온 소식이야. 조만간 전쟁이 터진다고 해.”
“뭐? 전쟁?”
루카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재빨리 물었다.
“어디랑? 어디서 한다고 그래?”
“알비온 왕국과 전쟁을 한다고 해. 그래서 마을에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이 붙었어.”
“지원병? 그 공문 사실이야?”
루카스가 놀라며 물었다. 카알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직접 확인하고 온 것이니까, 확실한 거야.”
“왜 그런지 모르고?”
“그야 뻔하잖아. 라할트 지역에 있는 금광을 또 건드렸겠지.”
루카스도 어릴 적부터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알비온 왕국이나 토르만 왕국은 심심하면 번갈아 가며 전쟁을 걸어왔다.
그들은 날로 국력이 세지는 바라논 왕국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계속 전쟁을 하면서 바라논 왕국의 국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알비온 왕국과 토르만 왕국은 번갈아 가며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바라논 왕국의 힘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자신들의 왕국이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두 왕국의 무력에도 바라논 왕국은 무너지지 않고 더욱 강한 국력을 보유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바라논 왕국의 뒤에는 프로이센 제국이 버티고 있지 않는가.
카알의 말을 들은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함께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이건 기회다. 내가 기다렸던 순간이 온 것이야.’
사실 다른 왕국의 아이들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두려운 것 중의 하나였다. 부모가 죽고, 형제가 죽고, 어쩌면은 자신까지 끌려갈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바라논 왕국의 아이들은 생각이 달랐다. 대부분 전쟁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특히 기사를 꿈꾸는 아이들은 더욱 그랬다.
바라논 왕국은 특징이 있었다.
병사가 되어서 많은 공을 세우면 평민이어도 기사가 될 수 있었다. 기사가 되면 종속된 가문으로부터 마나듐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것이 바라논 왕국이 기사를 유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다른 왕국은 가문의 검술과 마나듐을 함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것도 평민이었던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바라논 왕국은 달랐다.
바라논 왕국은 전쟁에서 희생된 기사를 그 숫자만큼 전쟁을 통해 다시 보충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평민기사를 철저하게 이용하는 악질 왕국일 수도 있지만, 평민에게는 기사가 될 수 있는 희망을 주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루카스도 이런 한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판단을 한 것이다. 곧바로 카알을 보며 루카스가 물었다.
“전쟁에 지원할 수 있는 나이가 몇 살부터지?”
“열……다섯 살.”
카알이 이상한 눈으로 말했다. 그렇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크게 떴다.
“가만, 설마 전쟁에 나가려고?”
“응. 나갈 수 있다면 나가고 싶어.”
루카스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말에 놀란 카알이 크게 소리쳤다.
“미쳤어? 전쟁이야, 전쟁! 우리들같이 병정놀이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알아, 하지만 나가고 싶어. 전쟁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우면 기사가 될 수 있잖아. 그리된다면 난 마나듐을 배울 수 있어.”
루카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먼 산을 보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마치 벌써 기사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 모습에 카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아무리 그래도 대장은 안 돼!”
“왜?”
“대장은 아직 열네 살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년이나 되어야 가능하다고.”
카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별것 아니란 듯 대꾸했다.
“그래도 실력은 열다섯 살 못지않아.”
카알은 그 말이 맞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을 하던 카알이 다시 물었다.
“괜찮을까? 대장의 부모님이 허락할까?”
“한번 말씀드려 보려고.”
“허락해 줄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겠지. 하지만 진심을 얘기하면 들어주실 거야.”
루카스도 부모님에게 말할 생각을 하니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뭐, 대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잘되길 바라.”
힘없이 대답한 카알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때까지 혼자 고민을 하던 루카스는 힘없이 돌아가는 카알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착잡해졌다.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난 꿈이 있어, 목표가 있고. 이런 것에 흔들리면 안 돼.”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애써 마음을 다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