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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2화)
Chapter One 검의 귀공자와 빛의 검사(2)
1
조금은 오래된 기억.
그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그의 회상을 깨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멘이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동생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엑스퍼트의 실력에 올랐다지? 그런데도 대련을 무서워하는 건가? 아니면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사실도 거짓말인가?”
그의 동생, 카온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최소한 이곳에서, 루멘은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은 루멘이 연무장의 위로 올라섰다.
루멘이 올라서자, 한 기사가 헐레벌떡 뛰쳐나왔다.
“공자님, 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형제간에 진검으로 대련이라니요? 카온 도련님도 이제 그만하십시오.”
“나서지 마, 스카.”
루멘이 기사를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충분히 자제하며 싸울 수 있다.”
카온이 앞으로 나서는 스카에게 말했다. 그러자 스카가 루멘을 향해 인상을 썼다.
“아, 진짜! 후작님이 아시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괜찮잖아? 어차피 외유 중이신데.”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잖습니까!”
루멘이 적당히 스카를 타이르려고 답하자, 스카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이곳에 있는 건 기사 수십 명, 가신 수십 명, 그리고 기타 등등 수십 명. 능히 백 명을 아우르는 인파다.
이런 곳에서 형제간에 칼을 겨누다니?
그런 보기 힘들지만, 보면 꽤나 재밌을 것 같은…… 이 아니라,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려 하다니!
생각이 있는 거란 말인가?
스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카온이 원하고 있었다. 루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가. 명령이다.”
루멘의 말에 스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 저는 어떻게 되든 모릅니다, 진짜.”
스카가 고개를 휙 돌리며 연무장의 아래로 내려갔다.
스카가 내려가자, 카온이 루멘을 쏘아보며 말했다.
“덤벼.”
싸가지를 밥 말아 먹은 듯한 말투.
‘그래도 내가 네 형인데 말이야.’
루멘이 속으로 피식 웃으며 발검(拔劍)했다.
오랜만에 검집에서 탈출해서 기쁜 것인지, 그의 검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스르릉!
곧이어 카온도 검을 뽑아 들었다. 루멘이 그런 카온을 향해 눈빛을 주었다.
먼저 가마!
‘엑스퍼트에 올랐으니 예전보다 조금만 더 힘을 줘서.’
루멘이 적당한 힘으로 바닥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빠른 속도로 카온을 향해 날아들었다.
‘빨라!’
상상 외의 루멘의 속도에 카온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카앙!
서로의 검이 강하게 부딪쳤다.
검을 한 번 주고받자, 카온이 곧장 자세를 낮추더니 그 상태로 옆으로 빠졌다.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
하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는 수많은 이들 중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촤악!
옆으로 빠졌던 카온의 신형이 순식간에 위로 솟구쳐 올랐다.
추와악!
그와 함께 카온의 검이 창처럼 날카롭게 루멘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카온이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놀라 나자빠지며 바닥을 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멘으로선 이 기술을 수십, 수백 번도 더 경험해 봤으며, 심지어 이 기술을 카온에게 가르쳐 준 것 또한 그 자신이었다.
채앵!
루멘이 손목을 비틀며 카온의 검을 받아넘겼다. 하지만 카온이 곧장 다시 한 번 자세를 낮추며 루멘의 다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채앵!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루멘에 의해 카온의 검이 막혀 버렸다.
카온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실력이 꽤 많이 늘었군.”
“그래?”
루멘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떠올렸던 기억과는 정반대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카온을 이끌든, 아니면 카온이 자신을 이끌든.
아니, 오히려 카온이 자신을 이끄는 것이 더 기뻤다.
쉬아악!
카온이 다시 자세를 고쳐 잡더니, 강하게 검을 내리그었다. 루멘은 곧장 뒤로 빠지며 카온의 검을 피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하지는 않았다.
추욱!
루멘의 가슴팍이 얇게 베였다.
시뻘건 선혈이 주르륵 흘렀다. 약간 따끔거리긴 했으나 별것도 아니었다.
‘좋아. 이렇게 되면 내가 카온에게 검술에서 밀린 거니까…….’
카온이 원하는 것을 보여 주자!
루멘이 검에 천천히 차크라(Chakra)를 집어넣었다.
우웅!
검이 부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곧이어 그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사방으로 폭사 되었다.
폭사 된 빛은 점점 갈무리되어 그의 검에 맺혔다.
오러 나이트의 상징이자, 평소에는 눈에 보이지 않던 차크라가 고밀도로 압축되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이게 되는 오러(Aura)!
“순백색의 오러…….”
루멘의 오러를 본 카온이 넋을 놓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겨울 하늘에서 내리는 새하얀 눈보다 더 뽀얀 빛깔의 오러. 확실히 감탄할 만한 오러였다.
하지만…….
‘이게 아니야!’
그때 자신이 보았던 오러는……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카온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자신을 놀리고 있어.
어떻게 두 가지 속성의 오러를 사용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꼭 진실을 밝혀 주마!
우웅!
카온 또한 자신의 검에 차크라를 주입했다.
그의 검에서 당장이라도 이글이글 타오를 것만 같은 붉은색의 오러가 치솟아 올랐다.
흔히들 말하는 화염의 오러라 불리는 것. 그것이 카온의 손에서 펼쳐졌다.
선홍빛의 오러는 당장이라도 루멘을 집어삼킬 듯 점점 덩치를 불려 나갔다.
곧 오러는 카온과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더 덩치가 커졌다.
단거리 무기라 할 수 있는 검이, 어느새 순식간에 중거리 무기라 불려도 상관없는 크기가 되어 버렸다.
“쯧. 너무하잖아, 이거.”
루멘이 혀를 내둘렀다.
그의 오러는 기껏해야 30센티미터. 반면에 카온의 오러는 능히 2미터에 달하는 크기였다.
압도적인 차이!
그것이 실력의 차이를 의미하기도 했다.
목숨이 오가는 생사의 전투에서 상대의 오러가 크다고 욕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 봐.”
카온의 목소리에 작은 기대가 실려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루멘이었으나, 무시했다.
샤아악!
그 순간이었다.
카온의 오러가 질풍처럼 루멘을 향해 날아들었다.
2미터에 달하는 크기가 루멘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왔다.
으악! 저거 맞으면 최대 사망, 최소 전신 화상에 전치 12주다!
“또 그 소리네.”
루멘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바닥을 굴렀다.
후와악!
오러가 루멘의 위를 지나쳐 갔다.
오러가 연무장 밖으로 날아가자, 곧이어 몇몇의 기사가 오러를 펼친 뒤, 그것들을 날려 카온의 오러를 격살시켰다.
루멘이 오러를 피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카온의 날카로운 공격이 치고 들어왔다.
‘좋은 공격이네.’
카온의 공격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오러는 어느새 1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 크기로 바뀌어져 있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더 나았다. 강한 힘을 발휘하기에 가장 적합했으니까.
오러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자신을 위협해 오는 공격.
‘이건…… 맞아야 돼.’
피하면 더 이상하다. 이건 오직 맞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다.
‘평소보다 몸을 반 정도면 덜 빼면…….’
중상이다. 아마 전치 3주는 확실하게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이렇게 카온과 진검을 맞대는 것…… 그것도 오러까지 펼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빠르지만…… 그냥 이쯤에서 끝내자.
루멘이 약간은 느린 속도로 뒤로 한 발 빠졌다.
추왁!
카온의 검이 루멘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루멘은 옆구리에서 불로 지진 것처럼 화끈거리는 고통을 느꼈다. 아니…… 뭐, 사실 불로 지진 거랑 별다를 바가 없었다.
“크윽!”
루멘이 한쪽 무릎을 꿇은 뒤, 자신의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상처가 나는 순간 고열로 인하여 순식간에 지혈은 되었지만, 오히려 상처가 더 악화되었다.
게다가 상처 또한 깊었다.
‘전치 3주가 아니라 4주다.’
루멘이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4주 동안이나 연기를 해야 하다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간만 뒤로 더 빠질걸! 하고 후회를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후회는 늦은 법이다.
“공자님!”
스카를 비롯한 몇몇의 기사들이 루멘을 부르며 연무장의 위로 올라왔다.
끝이다.
루멘의 패배.
형이 아우에게 졌다. 장자계승이 주된 할버드 제국이기에, 형이 아우에게―특히 검술로―지는 것은 체면 때문에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일어나도 보통 몰래 일어난다.
반면 지금은 사람이 많았다.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미 형은 아우에게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으니까. 모두 그러려니 할 뿐.
“괜찮으십니까?”
스카가 루멘을 일으키며 물었다. 루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데에도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고통이 꽤나 큰 모양이다.
스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뭣들 하느냐? 어서 공자님의 방으로. 마법사를 불러라!”
스카의 말에 몇몇의 견습 기사들이 후다닥 뛰어갔다. 그것을 본 스카가 카온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카온 공자님.”
곧이어 스카가 루멘을 부축하며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카온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휘익!
카온이 허공을 향해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오러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흩어졌다.
파앗!
오러가 사라진 검을 차분하게 착검한 카온이 연무장을 내려왔다.
“역시 검의 귀공자십니다.”
“대단하십니다. 벌써부터 그렇게 큰 오러를 일으키시다니, 가문의 앞날이 훤합니다.”
카온이 내려오자마자 몇몇의 가신들이 재빠르게 카온의 옆에 붙어 재잘재잘 아부를 떨었다.
장자계승을 원칙으로 삼는 할버드 제국이지만, 장남이 미흡하거나 동생이 극히 뛰어나면 언제든 동생이 한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었다.
‘검의 귀공자라…….’
옆에서 아부를 떠는 가신의 말에, 카온이 속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검술 또한 또래에 따라올 자가 없어 자신에게 붙여진 말.
하지만 종종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자신에게 붙여지지 않았다면 아마 자신의 형에게 붙여졌을 것이다.
얼굴은 잘생긴 건 아니지만 그만하면 남자답게 생겼고, 검술 실력 또한 나쁘지 않았다.
능히 천재라 불려도 나쁘지 않을 정도.
뭐, 지금 당장 붙여져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단지 자신이 너무 뛰어나 자신에게 붙여진 것일 뿐.
자신이…… 자신이 너무 뛰어나서.
빠드득.
카온이 작게 이를 갈았다.
‘내가…… 내가 뛰어나다고? 뭐가? 검술이?’
순간 카온의 두 눈에 짙은 살기가 맺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향해, 자신의 형을 향해 망발을 내뱉는 이들을 향한 살심.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그 살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나저나 루멘 공자님도 참 대단하셔.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오러면 충분히 대단하신 거지.”
“후작님이 아마 열일곱 때 오러를 일으켰다지?”
“그러게. 후작님이랑 똑같구먼. 근데 하얀색 오러라니……. 흔치 않은 건데 말이야.”
보통 오러는 붉은색, 노란색, 하늘색, 옅은 하늘색, 황토색을 띤다. 하얀색의 오러를 사용하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제 루멘 공자님은 빛의 검사가 되는 건가?”
“하하! 빛의 검사라. 그거 참 어울리네!”
가신들이 서로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껄껄 웃었다.
빛의 검사…… 검의 귀공자보다 한 끗발 아래…… 아니, 두세 끗발 아래에 있는 말이다.
대놓고, 그리고 빙빙 둘려서도 아부를 하다니.
정말 대단한 자들이야, 가신들은.
카온이 작게 웃었다.
그것을 카온이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이라 생각한 가신들이 신이 나 더욱더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카온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물론 눈을 감아도 멈추지는 않았다. 걷는 것에도 이상은 없었다.
이들은 사방에서 떠들고 있었다. 이들의 체온을 느끼면 이상한 곳으로 가거나 할 일은 없었다.
‘빛의 검사.’
카온이 루멘의 하얀색 오러를 떠올렸다.
확실히 빛의 검사라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신 또한 그렇게 새하얀 빛깔의 오러는 처음 보았으니까.
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빛의 검사라고?
웃기는 소리!
‘빛의 검사가 아니라 피에 굶주린 미친 검사가 더 어울리지.’
카온의 뇌리에 오 년도 더 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오러 따위는 빛바래 보이는, 그 어떤 오러보다 뜨겁고, 그 어떤 오러보다 붉은 홍염의 오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