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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3화)
Chapter Two 영주라는 이름(1)


0

“음……. 피터.”
“왜 그러십니까?”
혼자 상념에 빠져 있던 루멘은 결국 생각 속에서 적절한 해답을 얻지 못했는지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피터에게 물었다.
“영주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영주요?”
“응.”
루멘의 질문에 피터는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답했다.
“그럼요. 대단한 거지요. 귀족들 중 열에 아홉은 그 영주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흐에. 그렇게나 많이?”
“공자님, 영주는 말이지요, 어∼엄청나게 대단한 존재입니다. 공자님, 이 나라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아빠.”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하는 루멘을 보며, 피터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 하하. 뭐, 후작님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일 대단한 사람은 황제 폐하 아닙니까? 황제 폐하의 말 한 마디면 후작님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움직여야 하지요.”
“그래? 그럼 나중에 가주가 아니라 황제가 되…… 우웁!”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려는 루멘의 입을 피터가 황급히 틀어막았다.
이 꼬맹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고, 공자님? 그런 얘기는 절대, 추호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하다가는 전대 가주님과의 사랑스러운 면담 7박 8일로 끝나지 않아요.”
루멘이 제일 싫어하는 게 할아버지와의 사랑스러운 면담이다. 종종 잘못을 저지르면 할아버지가 상큼하게(?) 웃으면서 루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며, 같이 밥 먹고, 수련을 도와준다.
마스터에 이른 무인을 이겼다고 전해지는 검사인 할아버지가 수련을 도와주는 것이니 대단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 확실히 대단한 것이지만, 루멘은 싫었다.
그 사랑스러운 면담을 끝낼 때마다 한층 더 강해지는 것이 몸에 와 닿았지만, 고속으로 강해지는 만큼 엄청난 고통을 동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할아버지의 성격이 워낙에 호탕해서 1시간만 같이 있으면 몸이 열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가끔씩 ‘사랑스러운 내 손자!’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껴안을 때는 5번 척추가 6번 척추가 되는 것은 기본이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으으……. 알았어. 절대 황제가 되겠…… 우웁!”
“거, 공자님. 절대 해서는 안 된다니까요.”
“아바스니까 이버 돔 노보 바해(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말해).”
그제야 조금 알아들었다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몸부림치는 루멘이 귀찮았는지, 피터가 입에서 손을 뗐다.
“후우. 알겠죠? 절대 그런 얘기는 해서는 안 됩니다.”
“알았어. 황제 폐하가 그만큼 대단한 건 알았으니까, 영주는 얼마나 대단한 거야?”
“황제 폐하 다음이요. 황제 폐하보다는 덜 대단한데, 다른 사람보다는 대단합니다.”
뭔가 미묘한 설명에 루멘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그게?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해 봐.”
“그냥 그렇게만 알아 두세요. 어차피 말해 봤자 공자님 머리로는 이해 못합니다.”
“…….”
사람 개무시하는 피터였다.

1

“음…… 대충 한 달은 요양을 하셔야겠습니다. 어차피 또 마법으로 상처를 치유하자고 하면 극구 사양하실 거니, 제가 효과가 뛰어난 약초들로 약을 만들어 드릴 테니 하루에 한 번씩 듬뿍 바르십시오.”
루멘의 몸 상태를 확인한 마법사가 빠르게 처방을 내렸다.
“공자님, 그냥 마법으로 치료하시지요. 마법으로 하면 겨우 일주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스카가 루멘을 향해 말했으나, 루멘이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렇게 오기 부리지 마시고요, 공자님.”
“싫다니까.”
루멘이 인상을 찌푸리자, 스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도련님은 더럽게도 말을 안 들어요. 에후!
“일단 급한 대로 이거라도 바르십시오.”
마법사가 품에서 여러 약초를 이용하여 만든 점액 상태의 약을 꺼냈다.
검과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 입은 상처에 대해서는 상당히 효과가 좋다고 가문 내에서 정평이 난 약이었다.
기사들 사이에선 몰래몰래 경매도 일어난다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법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긴 하녀 한 명이 다가와 루멘의 옷을 벗겼다.
검에 의해 갈라진 뒤, 순식간에 타 버려 끔찍하기 그지없는 상처.
루멘의 옷을 벗긴 하녀가 곧장 마법사가 주고 간 약을 루멘의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상당히 아플 텐데, 루멘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하녀가 약을 다 바르고 나자, 루멘이 스카에게 눈짓을 주었다.
어서 나가란 뜻.
남의 시선이 있으면 하기 힘든 일. 물론 안면에 철판을 깔았다면 얘기가 달라지자만, 루멘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무릇 사내라면 검으로도, 그리고 침대에서도 힘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스카는 지금 루멘이 하려는 일을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루멘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한 스카가 루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방을 빠져나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자, 루멘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루멘이 눈을 감자마자 그의 상처에서 고름이 일더니, 곧이어 고름 또한 사라지고 루멘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역시 우리 공자님 회복 속도는 괴물 같다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을 눈앞에서 겪고도 하녀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듯 자연스레 루멘의 침대에 걸터앉은 뒤, 원래 상처가 있던 곳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
상처가 다 나아 붕대를 감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리했다.
붕대를 다 감은 뒤, 하녀가 서서히 루멘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느릿느릿 손을 움직였다. 하녀가 루멘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자, 하녀의 옷이 뒤로 쏠리며 그녀의 새하얀 팔이 드러났다.
“뭐하는 거야?”
루멘이 하녀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자 하녀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참, 알면서.”
“알긴 뭘 안다는 거야?”
루멘의 목소리가 다소 쾌활해졌다.
“아잉. 그렇고 그런 거 빨리해야죠. 그래야 우리가 빨리 결혼을 하죠.”
“그렇고 그런 건 또 뭔데?”
루멘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방금 전까지 근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친한 친구와 어울리는 소년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내가 너랑 왜 결혼을 해?”
“아, 공자님도! 자꾸 장난치실 거예요?”
하녀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됐으니까 물이나 줘.”
“벌써 갈증이 생기셨어요? 오늘따라 더 빠르네.”
하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잔에 한가득 물을 따랐다. 그 후 한 모금 입에 넣은 뒤 루멘을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루멘의 인상이 작게 일그러졌다.
“장난하는 거냐?”
루멘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순식간에 방금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꿀꺽.
루멘의 말에 하녀가 물을 꼴깍 삼킨 뒤 루멘을 향해 물잔을 건넸다.
“헤헤. 네, 장난이었어요. 무섭게시리 왜 그렇게 험악한 표정을 지어요?”
하녀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루멘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잔을 다 마셨는데도 아직 목이 마르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자신의 몸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었다.
“한 잔 더 줘.”
루멘의 말에 하녀가 다시 한 번 물잔 가득 물을 따른 뒤 루멘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루멘은 여지없이 물을 한 번에 다 들이켰다.
“한 잔 더.”
루멘이 계속해서 물을 달라고 하자, 하녀가 어깨자락의 옷을 쓱 내린 뒤 루멘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계속 그렇게 물만 마시지 마시고, 그냥 콱 제 목 물어 버리세요. 전 괜찮으니까.”
하녀의 말에 루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됐어.”
루멘이 하녀의 목을 손으로 밀어 버렸다.
“전 괜찮다니까요.”
하녀가 헤헤 하고 맑게 웃으며 다시 목을 쓱 내밀었다.
“됐다니까!”
루멘이 버럭 소리치자, 하녀가 움찔했다.
“루시, 그만 나가.”
루멘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헤, 그럼 물은 여기다 두고 갈게요.”
진짜로 삐지셨네……. 여기 더 있다간 진짜로 내 목 물어 버릴라.
루멘이 화가 날 대로 났단 것을 깨달은 루시지만 여전히 밝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방을 빠져나가긴 나갔다.
루시가 방에서 나가자, 루멘이 작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미치겠다.”
피가 끓어오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의 생명을 갈취하고 그자의 피로 몸을 씻으며, 그자의 피를 마시고 싶다.
방금 전…… 만약 루시가 조금만 더 오래 있었다면, 자신은 루시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이진 않았겠지.
“제기랄…….”
루멘이 작게 욕지기를 내뱉으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 후 눈을 천천히 감자, 피가 미칠 듯한 속도로 자신의 몸을 돌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의 수십…… 아니, 수백 배는 더 되는 속도로 자신의 피는 회전하고 있었다.
이 피는 매번 엄청난 갈증을 느끼며, 피를 원했다. 하지만 지신은 피를 원하지 않았다.
피와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루멘은 매번 힘겨운 승리를 차지했으나, 너무나도 힘들었다.
루멘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탄탄히 잡힌 근육. 그렇지만 무식하게 크지 않아 매우 날렵할 것만 같은 팔이었다.
루멘이 그런 자신의 팔을 강하게 물었다.
콰악!
입안 가득 진한 혈향이 났다. 루멘은 토악질을 할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의 살점을 씹었다.
우드득, 우드득.
대부분이 근육이라 그런지 꼭 물렁뼈를 씹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쉬와악!
루멘이 자신의 살점을 씹을 무렵, 피를 흘리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어 버렸다.
입에 있는 자신의 살점을 삼킨 루멘은 그래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자, 이번에도 다시 한 번 팔을 물었다.
콰악!
어차피 상처는 순식간에 낫는다. 근육 또한 마찬가지다. 순식간에 원상 복귀된다.
루멘이 자신의 살점을 씹어 먹은 뒤, 또다시 한 번 팔을 물어뜯었다.
콰악!
상처는 또 눈 깜짝할 새에 다 나았다.
이런 엽기적인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루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2

“음?”
잠시 식사를 마치고 온 스카는 방에서 나오는 루시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이렇게 빨라?
“벌써 끝났나?”
스카의 물음에 루시가 공손하게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흠…… 그런가. 그럼 공자님은 지금 뭐하시지?”
“주무시고 계십니다.”
“알겠다. 그만 가 봐라.”
스카의 말에 루시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으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루시가 간 뒤, 스카는 방문의 앞에 섰다.
매우 안전하다 할 수 있는 타밀론 후작가의 저택이지만, 그래도 이것은 루멘의 호위기사 된 도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별일이시군.’
루시는 루멘이 가장 아끼는 애첩.
매일 밤 자신의 침상으로 끌어들인 뒤, 다음 날 아침이나 되어야 루시를 돌려보내던 루멘이다. 그런 그가 오늘은 루시를 곧장 쫓아내다니.
“하긴, 오늘은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니까.”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스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3

―으으. 형…… 나 무서워.
한 소년이 자신보다 조금 큰 소년의 뒤로 숨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보다 덩치가 큰 소년이 그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을 달랬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래도…….
쉽사리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 듯 소년이 몸을 배배 꼬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닌데…….
형이라 불린 소년이 눈앞의 초록색 괴물을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동생을 달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 형만 믿어. 그리고 알겠지? 하나, 둘, 셋 하면 산 아래로 열심히 뛰는 거다.
―응, 알겠어.
동생이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에 마음이 한시름 놓인 소년은 괴물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하나…… 둘…… 셋!
모든 숫자를 다 셌다. 이제 열심히 뛰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으악! 형!
초록색 괴물이 갑자기 그의 동생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동생은 자신을 향해 주먹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자신을 불렀다.
―위험해!
그의 형이 곧장 자신의 동생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나빴다고 해야 할까.
다행히도 형은 동생을 괴물의 주먹에 맞지 않게 했다. 하지만 대신 자신이 맞았다.
퍼억!
―혀엉!
그의 동생이 눈을 부릅떴다.

“으악!”
루멘이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땀이 흥건하고, 정신이 날카롭다.
무슨 꿈을 꾼 것일까…….
꿈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자신은 악몽을 꿨다.
“나쁜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곁에 있는 스카가 조심스런 어조로 루멘에게 물었다. 루멘이 스카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안 좋은 꿈이었다.”
루멘의 말을 들은 스카가 루시를 향해 눈짓했다.
뭐하나? 어서 빨리 공자님의 땀을 닦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스카의 눈빛에 루시가 곧장 마른 수건으로 루멘의 땀을 닦았다.
루시가 자신의 땀을 다 닦자, 루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후작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가?
석 달 만인가? 하긴, 나중에 인사나 드리러 가야지. 아니지, 그냥 식사 때 인사할까?
루멘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후작님이 공자님을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