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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4화)
Chapter Two 영주라는 이름(2)
4
세상에는 수많은 가문이 있다.
그리고 그 많은 가문들 중에서 이름을 떨치는 가문들을 명가(名家)라고 한다.
명가에 속한 가문들은 모두 최소한 하나 이상 다른 가문들보다 잘난 것이 있었다.
그것이 돈[金]이든 힘[武]이든 권력(權力)이든.
타밀론 후작가.
이곳은 명가였다.
그것도 기사들의 나라라 불리는 할버드 제국 최고의 검의 명가.
비록 서서히 가세가 기울어 가곤 있지만, 그 어느 가문에도 꿇리지 않는…… 심지어 한 국가의 왕도 부럽지 않은 힘과 권력을 가진 자가 바로 타밀론 후작가의 가주, 다비드 더 타밀론.
그가 석 달 만에 영지로 돌아왔다.
놀라운 것은 그가 석 달 동안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인지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왔느냐.”
다비드가 차분히 루멘을 쳐다보았다.
“예.”
루멘이 짧게 답했다.
다비드를 눈앞에 둔 루멘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바뀌었다.
아버지가…… 바뀌었다.
물론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은 상상도 못할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가문의 오랜 염원이 풀렸다.
그러다 궁금함이 생겼다. 과연 지금의 아버지는 눈치챌까? 이때까지는 잘 숨겨 왔다만, 지금은 다르다.
루멘의 생각을 아는 것일까? 다비드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곧 인상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동생을 사랑하는 모습은 좋지만, 너무 과하구나.”
무언가 루멘의 뒤통수를 쿵! 하고 후려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안다!
이때까지 들키지 않고 꽁꽁 숨겨 왔던 비밀이 밝혀졌다.
“고얀 놈.”
아버지를 속였으며, 그 아버지가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일까? 심장에 차디찬 칼날이 꽂히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루멘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자존심 하나는 더럽게 센 아들놈이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 모습에 다비드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괜찮다. 사내라면 누구나 숨기는 것이 있지 않더냐? 한데 이상한 것이 있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루멘이 조심스런 어조로 답했다.
“넌 왜 필드가 없느냐? 그것만 있었더라도 내 예전에 눈치를 챘을 터인데.”
필드(Field).
그것의 마스터의 상징이자, 그들만이 가지는 고유한 자신의 영역.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마스터는 수십 명의 오러 나이트가 달려들어도 상대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검의 지배자라고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멘은 그런 마스터가 아니었다.
아직 오러 나이트. 그것도 갓 들어온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무언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밀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만 있을 뿐.
루멘이 차분하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비밀을 밝힐 수 없었다. 만약 비밀을 밝힌다면, 아버지가 자신을 아들로 인정할까? 단지 미친 살인귀로 취급하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하지만…….’
다른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이 미친 살인귀라면, 아버지가 자신을 배척한다면 카온의 후계자 자리가 더욱더 확고해지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내 곧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카온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밑에서 카온을 떠받쳐 가문을 최고의 자리로 올려놓겠다던 자신의 원대한 꿈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그럴 사정이 있습니다.”
루멘은 아버지에게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이때까지 속여 왔던 아버지다. 죄스러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와 별다를 것 없이 숨기면 되는 것이다.
“그래,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마.”
다비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내가 왜 널 찾았는지 아느냐?”
“오랜만에 오셨으니 사랑스러운 아들의 얼굴을 보려는 게 아닙니까?”
루멘의 말에 다비드가 흐, 하고 웃었다.
“네가 무엇이 사랑스럽다는 것이냐? 다 큰 사내놈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이 자식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한 십 년 정도 전쯤에. 아니…… 근데 진짜 이런 말을 했던가? 가물가물하네.
다행히 기억을 한 것인지, 아니면 루멘의 말에 맞장구를 치려고 하는 것인지, 다비드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다 큰 놈은 들어가면 아프다.”
그럼 어릴 때 들어가면 안 아프고요?
루멘이 피식 웃었다.
“그럼 왜 찾으신 겁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내 너의 실력을 알았으니, 그것에 대해선 질책하지 않으마.”
내 실력을 알았으니 혼내진 않겠다고?
아, 어제 카온과의 대련. 그것도 진검에다가 오러를 흩날리며 싸웠지.
만약 루멘의 실력이 다른 엑스퍼트들과 같았다면, 사단이 날 수도 있었던 일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나눌 말도 없을 테니까.
아버지를 딱히 싫어해서 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아니,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 때면 때때로 저도 모르게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가 있었다.
특히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더욱더.
그랬기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미흡해지고, 서먹서먹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문 내에서 자신의 세력은 거의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기다려라. 아직 할 말이 남았다.”
“무엇입니까?”
“일주일 뒤면 너의 생일이구나.”
다비드의 말을 들은 루멘이 눈을 부릅떴다.
잊고 있었다.
자신의 생일을. 그리고 가문의 가법(家法)을.
타밀론 후작가는 명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가문이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가법이 존재했다.
일단 ‘7살 이전의 아이에게는 검술을 훈련시키지 않는다.’라는 있으나마나 한 가법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가법들이 지켜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성인이 된 가문의 자식은 일을 시킨다.’이다.
대개 가문의 자랑거리인 질풍 기사단에 들어갔다.
타밀론 후작가의 질풍 기사단이라 하면, 세계 전역에 위명을 떨칠 정도로 대단한 기사단이었다. 질풍 기사단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오러 나이트의 실력자여야 했으며, 질풍 기사단의 기사단장은 마스터에 오른 뛰어난 실력자였다.
타밀론 가문의 자식들은 대체로 뛰어난 재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이 성인이 되고 나서 머지않아, 혹은 성인이 되기 조금 전 오러 나이트의 반열에 들었다.
그래, 루멘과 마찬가지로.
그의 아버지인 타밀론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열여섯. 정확하게 따지자면 열다섯에 오러 나이트의 반열에 오른 대천재(大天才).
그것이 카온이었다. 주변에선 카온이 타밀론 후작가를 빛낼 것이라고 말이 많았다. 본인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그 덕에 카온은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뭐, 카온이 그런 천재가 아니더라도 아마 가주가 될 것이다. 카온의 어미는 현 황제의 누이이니까.
“사실 처음엔 질풍 기사단에 너를 넣으려고 했다.”
넣으려고 했다?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그 말은 자신을 질풍 기사단에 넣지 않으려는 것인가?
타밀론 가문의 자식들은 대부분이 질풍 기사단에 들어간다.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상당히 적었다.
우선 첫째는 여자이기 때문에.
하지만 루멘은 당당한 남자다. 이것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아니, 종종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검술을 익혀 들어간 적도 있었다.
둘째는 성인식을 치른 뒤 일 년 안에 오러 나이트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거나.
하지만 벌써 루멘은 오러 나이트의 실력자다.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셋째는 검 대신 펜을 들었을 때.
검의 명가인 타밀론 후작가의 자식이라고 무조건 검술을 익혀야 한다는 가법은 없었다. 당연히 ‘나는 무식한 검질 따윈 하고 싶지 않아! 공부를 하겠어!’라고 당돌하게 외치며 되도 않는 머리로 공부를 하겠다고 설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경우 질풍 기사단에 들지 못했다.
아무튼 루멘은 펜이 아니라 검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질풍 기사단이 아니라면?’
타밀론 가문의 자식들이 질풍 기사단에 들지 못하면 한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펜을 든 자들의 경우, 종종 수도로 가서 관리가 되겠다고 지랄 발광을 떨다가 결국 낙담하고 영주가 되기가 부지기수였다.
만약 다비드가 이례 없던 일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자신은 아마…….
“너에게 영지를 주마.”
영주가 된다!
두근두근!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영주가 된다는 사실에……. 물론 타밀론 후작가의 가주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어느 한 곳의 영주가 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면…… 지긋지긋한 이 연기를 당분간 그만할 수 있다!
영주는 국왕에 의해 만들어진 직위…… 아니, 칭호였다.
모든 국가의 왕들은 그 나라를 혼자서 관리하지 못한다. 밑에 수많은 관리들이 있지만, 수도 한 곳에서 왕국 전역을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그래서 왕들은 귀족들에게 충성을 대가로 땅을 하사한다. 작은 땅, 큰 땅 종류별로 나누어 주었다.
힘이 강한 귀족에게는 큰 영지를 하사하고, 힘이 약한 귀족에게는 작은 영지를 하사했다.
작은 영지를 하사받은 영주는 그냥 관리, 가신 몇 명 데리고 열심히 영지를 관리하지만 큰 영지를 하사받은 영주들은 사정이 달랐다.
왕이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한 이유와 같이 혼자서 큰 영지를 관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몇몇의 가신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대가로 영지를 하사했다.
그것은 타밀론 후작가도 마찬가지.
그렇게 해서 광활한 타밀론 후작령 안에 수많은 영지들이 자리 잡았다.
타밀론 후작령에 있는 영지의 수는 열둘……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열셋.
루멘이 기억하기론 그중 세 곳의 영지가 비어 있었다.
‘라이너스 영지와 튜닉 영지 중에 어느 곳을 주려나?’
라이너스 영지는 조금 변방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 번 가 보니 살 만한 영지고, 튜닉 영지는 선정만 베풀면 영지민들이 행복해할 만한 곳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순간, 그의 뇌리에 카온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곧 카온에 대한 생각은 떨쳐 냈다.
당분간 카온을 못 보지만…… 뭐, 자신이 카온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원한다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보다 그의 머리에 온통 영주라는 단어가 가득 차올랐다.
영주(Lord)!
이 얼마나 매력적인 명칭이란 말인가?
“녀석, 그렇게 좋으냐?”
다비드가 루멘의 얼굴 만면에 피어오른 웃음꽃을 보곤 피식 웃었다. 그에 루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예전부터 영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영주는 많은 이들의 꿈이자 로망이었다.
국왕이 된다는 것은 반역을 저지르겠다는 뜻이니 꿀 수 없는 꿈이지만, 영주가 된다는 것은 귀족, 평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국왕 다음가는 권력가!
그것이 바로 영주가 아니던가?
사실 루멘처럼 대영주―다비드―의 아들이라면 언제든 영주가 될 수 있었다.
단지 아무 생각도 없었을 뿐.
게다가…… 언젠가는 카온의 영지민이 될 이들. 자신이 잘 대해 주는 것은 결국 훗날 카온에게 잘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한 영지를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곧 카온의 이득으로 돌아갈 것이다.
“상처는 이 주 안에 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비드의 말에 루멘이 살짝 움찔했지만, 평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 뒤 너의 성인식을 치르고, 남은 일주일간 짐을 정리한 뒤에 가거라.”
다비드의 말이 루멘의 두 귀를 간질인다.
나름 자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성인이 된다.
이 두 가지가 겹쳤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하지만 이내 곧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잠깐의 유흥이라고만 생각하자. 본격적으로 카온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일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루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방문을 나가려는데.
“근데 저는 어느 영지로 갑니까?”
루멘의 말에 다비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미러 영지다. 이 아버지를 그동안 속였으니 고생 좀 하여라.”
다비드의 말을 들은 순간, 루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 쿵쾅쿵쾅 뛰며 기뻐하던 루멘의 심장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 물론 뛰고는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