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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5화)
Chapter Three 떠나다(1)
0
“다 됐다!”
루멘과 카온이 동시에 환호성을 터트렸다.
루멘의 손톱엔 흙이 잔뜩 끼여 있었으며, 얼굴은 흙투성이였다. 그의 옆에 있는 카온 또한 상황이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만든 것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바닥에 박힌 목검.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근데 형, 이게 뭐야?”
카온의 물음에 루멘이 씩 웃으며 자신의 심장을 한 번 손가락으로 콕 찌른 뒤, 마찬가지로 카온의 심장을 한 번 콕 찌르며 말했다.
“너와 나의 우정의 증표. 쉽게 말해서 우리 형제의 우정의 증표야.”
루멘의 말을 들은 카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형, 렉스 영감이 형제간에는 우정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우애라고 하는 거라는데?”
카온의 말에 루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가 다시 펴졌다. 근데 펴진 얼굴 표정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하, 하하. 카온, 내 말 잘 들어.”
“응!”
“넌 렉스 영감의 말을 믿어, 아님 내 말을 믿어?”
“형 말.”
“그렇지? 그럼 형제간에는 우애라고 할까, 우정이라고 할까?”
“우움…… 우정?”
카온이 자신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자 루멘이 밝게 웃으며 카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이건 우리 형제의 우정의 증표야. 알겠지?”
“응! 헤헤.”
카온이 밝게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카온을 보며 루멘 또한 밝게 웃었다.
“이 다음엔 목검이 아니라 진짜 칼로 만들자.”
루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카온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외쳤다.
“그럼 우리 집 사대보검으로 만들자! 네 개가 있으니까 두 개로 만들고, 두 개는 우리가 쓰면 되잖아.”
루멘이 그런 카온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가능할 리가 없는 얘기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얘기인 것 같았다.
“그래, 카온은 정말 똑똑한데?”
“응. 히히.”
1
미러 영지라는 곳이 있다.
영지라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 과분한 곳.
과분함이 조금 넘치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많이 넘치는 곳.
타밀론 후작령, 아니 할버드 제국 최고의 쓰레기 영지.
그곳이 바로 미러 영지다.
“…….”
에…… 그러니까 잠시 상황 파악 좀 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당연하게 질풍 기사단에 들어갈 줄 알았더니, 영주가 되라고요?
아…… 뭐, 나쁘지 않습니다.
영지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발전시키면 훗날 카온에게 좋은 것이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별로 활동도 안 하는 게 질풍 기사단 아닙니까?
영주, 영주, 영주!
좋습니다, 좋아요.
근데…….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아니면 나를 아들이라고 생각 안 하는 겁니까? 아니면 진짜 나를 주워 온 겁니까?
확실히 내 육신이 좀 이상한 걸 보면 주워 온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가 아니라, 그래도 나름 오러 나이트의 실력자에 상당히 뛰어나단 걸 아실 텐데.
미러 영지라고요?
그냥 나가 죽으라고 하시죠? 예?
“할 말 있느냐?”
다비드가 나가려면 빨리 나가, 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루멘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방금 아버지가 한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없으십니까?”
“이상한 걸 묻는구나.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혹시 은유법이나 비유법, 혹은 반어법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죠? 역설법도 전혀 아니고요?”
루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묻자, 다비드가 딱 잘라 말했다.
“직설법이다.”
딱히 이런 표현법이 있는지는 의문이긴 하다만.
“…….”
다비드의 말을 들은 루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2
“집 나갈까?”
루멘이 고개를 떨어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루멘의 옆에서 책을 읽던 한 사내가 피식 웃었다.
“술 마셨어요?”
아무 말 없이 빈 술잔을 스윽 들어 보이며 루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멘의 대답에 사내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그럼 나가세요.”
“근데 안 그래도 나가게 됐어.”
“네?”
사내가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설들이 떠올랐다.
루멘이 미쳤거…… 아니, 이건 아니고. 말을 들어 보자니 강압적인 이유인 듯하니, 루멘이 사고를 쳤거나, 루멘이 사고를 쳤거나, 루멘이 사고를 쳤거나…….
한데 루멘이 사고를 쳤으면 자신의 귀에 그 얘기가 안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던 찰나, 사내의 머릿속에 타밀론 후작가의 가법이 하나 떠올랐다.
성인이 되면 일을 한다.
“질풍 기사단에 안 들어가고요?”
“그래. 영주가 되란다.”
루멘의 말을 들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영주!
많은 이들의 꿈!
귀족이라고 해도 영지가 없으면 영지가 있는 평민보다 못하다.
그만큼 영주라는 이름이 가지는 힘은 대단한 것이다.
근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왜 이렇게 힘이 없단 말인가?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치 않았다.
“어느 영지입니까?”
라이너스 영지? 튜닉 영지?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다. 두 곳 다 나쁘지 않아. 아니, 타밀론 후작령의 영지들이 전반적으로 뛰어나지.
사내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주가 되면 일단 군사력을 손에 넣으며, 영지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게 된다.
엄청난 권력.
하지만 그런 것을 제하고도 영주가 되면 돈은 거머쥘 수가 있다.
돈, 돈, 돈!
사내도 마찬가지지만, 세상에 돈 싫어하는 놈은 병신이다. 아니, 병신만이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신이 이상하면 정신질환자고, 팔다리가 없는 것은 장애다. 결코 병신이 아니다.
하지만 돈을 싫어하는 놈은 분명한 병신이다.
먹고, 자고, 싸는 데(?) 모두 돈이 들어가지 않는가?
사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루멘을 쳐다보았다.
“미러 영지.”
미안하다, 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근데 내 심정이라고 어련하겠니?
루멘이 사내의 질문에 침울한 목소리로 답했다.
“…….”
사내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아아, 기운이 없던 게 이거 때문이었냐?
미러 영지라 하면 크루틴 산맥과 맞닿아 있었으며, 늪의 해변을 끼고 있었다.
크루틴 산맥을 끼고 있어 평화와 안정을 가지려고 하면, 몬스터가 침공해 온다. 그것도 그냥 사람만 죽이고 가는 게 아니라 일궈 놓은 논밭 다 헤집고 가기에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고, 다행히 바다를 끼고 있기에 고기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늪의 바다다.
미칠 정도로 해양 몬스터가 많은 곳!
듣기만 해도 감이 오는 최악의 지리.
동방의 풍수지리설로 따져 볼 때, 아마 거기다 묏자리를 만들면 대대손손 불행하리라!
확실히 영주 되고 싶어서 발작을 하는 자신 같아도 그런 곳은 사양이다.
“너도 갈 거지?”
루멘이 사내를 슥 올려다보며 물었다. 사내가 루멘의 눈빛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다른 애들도 가야 가죠. 하하.”
가기 싫어.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다른 애들 다 간대.”
“예? 다…… 간다고요?”
사내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루멘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루멘이 씩 웃으며 답했다.
“애들의 지적 수준을 생각해 봐. 미러 영지가 어딘지 아직도 몰라.”
루멘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넌 내 둘도 없는 형이다.”
루멘이 사내를 와락 끌어안았다.
무서운 자식…….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한데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나보고 형이라고 하면서 너라니…….’
에후!
됐다, 됐어. 네가 이러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근데 이 자식은 제가 필요할 때만 형이래.’
사내, 피터가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로 속으로 혼자 꿍얼거렸다.
3
타밀론 후작령은 할버드 제국의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대영지다.
당연히 그런 거대한 힘을 지닌 타밀론가이기에 파티를 열자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타밀론가의 대공자, 루멘의 성인식.
세력이라고는 새 발의 때만큼도 없지만, 그래도 타밀론가의 대공자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축하드립니다.”
“성년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몇몇의 기사들이 루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들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모두들 카온의 세력에 붙었지만, 진심으로 루멘의 성인식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과 비슷하기에.
루멘은 대외적으로 재능은 부족한데, 미친 듯이 검을 파고들어 천재가 된 놈이다.
아니, 천재라고 불리기에 재능은 어느 정도 있겠지만, 영주의 자질은 아니다.
검에 대해서도 두각을 나타나는 재능과 군대를 통솔하는 능력, 또 깊이 있는 지식, 마지막으로 온화하면서도 차갑고 강인한 성격, 이 모든 것을 갖춘 카온이야말로 진정한 영주의 자질을 갖춘 자라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카온의 외숙부는 현 황제, 라이노드 드레 할버드 8세가 아니던가?
이미 태생부터 정해진 가주의 자리.
감히 루멘을 이용하여 타밀론 후작가를 자신의 꼭두각시로 부리려고 하는 우매한 자는 없었다. 단지 조금이라도 더 카온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 뿐.
루멘에게 마음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생은 줄타기의 연속이다. 그들로선 루멘의 세력에 들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루멘에게 들 세력이란 게 없지 않은가?
“그래, 고맙다.”
루멘은 종종 몇몇의 기사들과, 혹시나 나중에 자신이 타밀론가에서 나름 권력을 잡을지도 몰라 축하의 말을 전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로선 잘한 행동이었다.
루멘은 가주가 될 생각은 없지만, 타밀론가에서 나름 권력을 잡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장자계승이라는 빌어먹을 제국의 규율 때문에 최대한 없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카온이 가주가 되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타밀론가를 최고의 가문으로 만들기 위해…….
감히 황제도 넘보지 못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루멘의 목표이며, 꿈이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물론 그 권력은 전적으로 카온에게 위임할 터이지만.
“후작님이 들어오십니다!”
그때, 가신 한 명이 고래고래 외쳤다.
그의 말과 함께 타밀론 후작이 한 국가의 주인도 부럽지 않게 등장했다.
따라랄라라!
부드러운 음성의 현악기들이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첼로 따위의 고급스러운 악기들 수십 대가 동원되었다.
삐릴리리!
피리, 호른 같은 관악기들도 적절한 타이밍에 연주가 되었다.
아름다운 연주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레드 카펫의 옆에 일자로 섰다.
뚜벅뚜벅.
타밀론 후작이 레드 카펫을 밟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어느새 모든 이들이 타밀론 후작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타밀론가의 가주에게 주어지는 절대적인 권력!
타밀론 후작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가문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기에.
“모두들 잘 왔다.”
파티장의 제일 앞으로 간 타밀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경어? 그런 것 따윈 필요 없었다.
타밀론 후작은 자신들의 하인에게 얘기하듯―사실 대부분이 자신의 부하들이다―편한 어조로 말을 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오만함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는 뜻이다.
“오늘은 가문의 대공자인 루멘의 성인식이다. 모두 루멘에게 한마디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파티를 즐기도록 해라. 그럼 이것으로 연설을 끝내도록 하지.”
타밀론 후작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러쿵저러쿵 말했을 얘기를 단 몇 마디로 일축했다.
잘 왔다. 루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알아서들 놀아라.
이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연설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여자의 옷과 마찬가지로 짧으면 좋은 것이 윗사람의 연설이다.
타밀론 후작이 간단하게 연설을 끝내자, 모두들 벙긋 웃으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꽤나 오랫동안. 따지고 보면 타밀론 후작의 연설보다 살짝 더 긴 시간 동안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