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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7화)
Chapter Three 떠나다(3)


5

루멘에겐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하지만 그 비밀은 남들이 ‘전혀’ 모르는 비밀은 아니었다.
몇몇만이 아는 자신의 비밀.
지금, 오랜만에 자신의 비밀을 아는 모든 이들이 다 모였다.
사내 놈 셋에 여인 둘.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시간은 금이란 말도 모르십니까?”
사내 놈 셋 중 한 명인 피터가 루멘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의 손에는 수십 개의 목줄이 한데 엉켜 들려 있는데, 늑대들의 목줄이었다.
“좀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사내대장부가 쫌생이처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시간이 금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루멘이 뻔뻔스럽게도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대답했다. 그에 피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어라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루멘에게 그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광견병 걸린 개한테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한마디로 헛수고―이다.
“그럼 이제 가시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피터가 인상을 피며 말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루멘이 피터의 안면 근육을 부드럽게 만들어 줄 말을 내뱉었다.
“조금만 기다려 봐.”
루멘의 말에 피터의 뒤에 있던 루시가 쌩하니 달려와 루멘의 옆에 선 뒤, 그의 팔을 잡아채며 말했다.
“공자님, 어서 저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요, 네?”
“…….”
루멘이 할 말을 잃고 루시를 내려다보았다.
얘가 이런 애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기다리는 게 귀찮았나?’
겨우(?) 한 시간인데?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든 루멘은 루시를 발로 차서 떨어트리는 야만인 같은 행동은 하지 않고 가볍게 손으로 밀었다.
“…….”
“아잉, 공자님도 참. 왜 이렇게 급하실까?”
루멘이 루시의 등을 살포시 밀고 있었는데, 그 순간 루시가 휙 하고 돌았다. 그러자 루멘의 손이 공교롭게도 루시의…….
퍽!
루멘이 가볍게 루시를 발로 차 버렸다.
“아얏! 왜 이렇게 세게 차요?”
바닥에 주저앉은 루시가 자신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일어났다. 루멘에게 맞은 곳이다.
어지간히 아팠는지 루시가 루멘에게 빽 소리를 내질렀으나, 루멘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공자님!”
루시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막 루멘에게 무어라 화를 내려고 했다.
“공자님, 같이 가시지요.”
갑옷으로 무장한 한 기사가 루멘을 부르며 쫓아왔다.
아마 저택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라 생각되는 스카였다.
“늦었잖아.”
“후우, 후우. 죄송합니다.”
“시간은 금이란 말도 몰라?”
루멘이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피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루멘의 말에 피터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피터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이 자신이 늦었기 때문이라 생각한 스카는 일행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스카의 사과를 들으며 루멘이 그의 뒤를 흘깃 쳐다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막상 겪고 보니 쓸쓸했다.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만 마중 나왔어도 기뻤을 텐데.
‘뭐, 상관없어.’
루멘이 스스로를 자위하며 인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럼 가자.”
마차는 능히 네 명이 타도 될 정도로 넓었다. 루멘이 마차 위에 올라타자, 피터가 자연스럽게 루멘의 옆에 걸터앉았다.
루멘이 흘깃 그에게 눈짓을 주었다.
‘맞기 싫으면 내려.’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지지 않았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마차 제가 샀습니다.”
“…….”
루멘이 고개를 휙 돌렸다.
예예, 너 앉으세요.
피터를 말로써 이길 방법이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는 루멘은 체념하고 경치를 감상하려 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는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옆에 한 명이 더 앉아 있었다.
“루시.”
루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루시가 헤헤 웃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루멘의 팔에 달라붙었다.
“네? 왜요? 헤헤.”
“내려.”

곧이어 짐마차와 인마차가 출발했다. 마차는 둘 다 사람이 조금 빠르게 걷는 수준의 속도로밖에 달리지 못했다.
성내였기 때문이다.
“안 내리냐?”
“헤헤. 공자님도 저랑 같이 앉으면 좋잖아요?”
“안 좋으니까 내려.”
루멘과 루시가 서로 투덕거리고 있을 때, 마차가 성문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 타신 분이 대공자님이십니까?”
성문의 경비를 맡은 병사가 기사 행색의 스카에게 물었다. 아마 사전에 윗선에서 통보를 받은 모양이다.
스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경비 병사가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성문 열어.”
곧이어 약간의 소음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마차가 막 성문을 빠져나가려는데.
“각자 위치로!”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주변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니, 질풍 기사단의 부단장인 론이었다.
론의 뒤에는 완전무장을 한 수십 명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질풍 기사단에 속한 대부분의 기사들인 것 같았다.
“공자님께, 경례!”
“충!”
“충!”
순간 수십 명의 기사들이 일제히 쩌렁쩌렁하게 외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다비드가 저번 외유를 나갈 때 보았던 기사들의 모습과 일치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루멘은 얼떨떨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다비드를 따라 한 것이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사들의 성대한 환호를 받으며 루멘 일행은 성을 빠져나왔다.
피식.
루멘이 작게 웃음을 지었다.
저것들은 카온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호위나 할 것이지 왜 튀어나와서 난리야?
“어? 공자님 웃으시네요? 역시 제가 앉으니까 좋나 봐요? 헤헤.”
그때 루시가 루멘에게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루멘이 루시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걸쳤다.
루시는 루멘이 자신을 때리려는 것 같아 어깨를 움츠렸지만, 루멘은 루시를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루멘이 루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루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루시가 기분이 좋은 듯 헤헤 웃었다.
그러던 때였다.
루멘의 눈에 철검 두 개가 서로 대각선으로 교차하여 바닥에 꽂혀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
루멘의 두 눈이 커졌다. 그의 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다 루멘은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 공자님 제 머릿결이 그렇게 좋아요?”
루멘이 환하게 웃자, 덩달아 루시가 까르르 웃었다.

6

“저…… 카온 님.”
카온의 호위기사가 그에게 물었다.
“명령하신 건 그대로 이행했습니다만…… 어째서 성문 앞에 검 두 개를 대각선으로 꽂으라고 하신 겁니까?”
호위기사의 말에 카온이 짧게 대답했다.
“몰라도 된다.”
“아, 예…….”



Chapter Four 주인(1)


0

루멘은 단검으로 자신의 팔뚝에 상처를 냈다. 시뻘건 선혈이 튀어 올랐다.
“으윽.”
고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곧이어 바닥에 흩뿌려진 피는 엄청난 속도로 증발해 버렸고, 팔뚝에 난 상처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나았다.
“…….”
피터가 할 말을 잃고 루멘을 쳐다보았다.
뭐야 이건…… 괴물?
음…… 상처가 순식간에 회복되는 몬스터라면 트롤인데…… 트롤이 사람처럼 생겼었나? 아니, 사람처럼 생긴 괴물은 어디에도 없는데…….
‘변종? 아니, 변종이라도 정도가 있지. 하긴 종종 오크같이 생긴 사람들도 몇몇 보이긴 한다만…….’
그래도 피부색이 초록색에서 흰색으로 바뀌거나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텐데…….
“너 뭐야?”
피터가 루멘을 쏘아보며 물었다.
이때까지 사용하던 존댓말도 다 사라졌다. 황당함이 이성을 막아 버렸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년이 타밀론가(家)라고 하는 명가(名家)의 대공자라고 하더라도, 상식을 깨어 버리는 일에 상식 안의 일은 멀어져 버렸다.
“괴물?”
피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 순간, 단검을 쥔 루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단검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루멘의 시선이 자신의 목을 향했다.
슥 그으면 한순간일 듯싶었다.
공포가 무럭무럭 샘솟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이걸 삼켜야 하는데…… 이걸 삼키면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루멘이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퉤!”
일부러 능청스럽게 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루멘이 움찔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겠지……. 이때까지와는 다른 반응일 테니까.
‘후우, 다행이다. 이 나이에 골로 갈 뻔했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피터가 말했다.
“너 짱인데?”
“…….”
이번엔 반대로 루멘이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이 반응은?’
루멘으로선 도통 이해하기 힘든 반응이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은 ‘으악! 괴물이다!’라고 외치며 자지러지는 것이었다. 반대로 자신이 원했던 반응은 ‘마음고생이 심했겠구나?’라거나 ‘그게 뭔 대수냐?’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후자였던 반응은 없었으나, 후자의 반응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길 간절히 원했었다.
피터라면…… 피터라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이해해 주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나타난 반응은 ‘너 짱인데?’라고 말하는 어이없는 반응이었다.
예상도 하지 못했고, 원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죽이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너…… 가 아니라. 공자님, 정말 대단하신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마법입니까?”
피터의 말에 루멘의 심장이 아려 왔다.
자신에게 괴물이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그리고 자신을 향해 감탄사를 터트린 것 또한 마법이라 생각해서인 건가? 확실히 마법일 수도 있다.
마법이라면 이까짓 상처 한순간에 낫게 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루멘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피터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자 했을 때만큼 긴장이 되었다. 긴장이 되더라도 괜히 얼버무릴 수는 없었다.
루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마법이…… 아니야.”
‘마법이 아닌 건 옛날부터 알고 있고.’
자신이 누군가?
한때는 천재 소년 마법사라고까지 불렸던 자다. 이미 세 개의 마력 홀을 만든 자신이 아니던가?
마법의 구성 조건 세 가지 중 첫 번째인 ‘마력’의 발현을 느끼지 못했으며, 두 번째인 주문의 영창(詠唱) 혹은 수인(手印)을 안 맺었고, 마지막인 마법 구현의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은 자신의 눈을 피할 수 있다 할지라도,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결코 자신의 눈을 피하지 못한다. 고로 루멘이 마법을 펼쳤을 확률은 무한히 0에 가까운 것이다.
“마법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겁니까?”
“몰라. 그냥 원래 이래.”
루멘의 말에 피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원래 그렇다고? 그렇다면 너는 진정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타밀론가의 대공자인데…… 그냥 원래 그런 것을 아닐 테고.’
그냥 원래 그렇다니. 이게 무슨 엉성하기 짝이 없는 대답인가? 피터는 루멘의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 없고, 원인 없는 결과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족에 문제가 있나? 부친에게 무언가 특별한 게 있었다면 소문이 안 났을 리가 없으니까, 부친 쪽이 아니면 모친? 그래도 타밀론가에서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돼……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어. 트롤 친구라도 먹을 기세인데……. 가문에선 모르는 게 확실하고…… 근데 나한테는 또 왜 알려 주는 거지? 죽이려고? 끄응…….’
피터는 루멘과 마주 보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설들을 세웠다가 지우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자 머리만 지끈거렸다.
“……?”
한참 생각하는 도중 피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는 이상한 상황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루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내 목이 그렇게 예쁘냐?’
자신의 목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목에 손이 갔다. 피터가 목을 슥슥 긁자, 루멘이 황급히 고개를 밑으로 내리깔았다.
“제 목에 뭐 묻었습니까?”
“아, 아니.”
목소리가 떨린다. 근데 이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도 없고, 루멘이 사소한 거짓말로 목소리가 떨리는 순둥이도 아니었다.
뭔가 다른 게 있다.
그런 확신이 들자, 피터가 루멘의 어깨를 꽉 쥐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시죠?”
“…….”
“있으면 하세요.”
피터가 재차 말을 하라 하자, 루멘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네 목을 물고 싶어…….”
루멘의 말을 들은 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귀를 후볐다.
“아…… 뭐라고요? 요즘 귀 청소를 안 했더니 헛소리가 다 들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