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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11화)
Chapter Five 미러 영지의 신임 영주(2)


아론의 거절에, 알렌이 천천히 생각했다.
‘어떻게 꼬드길까…….’
곰곰이 생각하던 알렌이 씩 미소를 지었다. 예전부터 녀석이 입만 열면 도와 달라고 하던 것이 있었다.
그때마다 녀석이 불쌍하게 여겨지긴 했었으나, 그래도 귀찮아서 도와주기 싫었다.
여자 앞에 서면 한 마리의 곰이 되는 모자란 녀석……. 그렇기에 모태솔로의 길을 걷고 있는 한심한 녀석.
그 녀석이 바로 아론이다.
“네 연애 사업을 도와주마.”
“……정말?”
아론이 두 눈을 빛냈다. 그것을 보며 알렌은 가슴 한편이 쓰라렸다.
‘연애 사업’이라는 말 한마디에 태도가 돌변하는 아론.
아아, 비참해라. 불쌍한 녀석. 네가 그러고도 정녕 이 몸의 불알친구더냐…….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전설적인 제…….”
아론이 알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을 하려 하자, 알렌이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그거 말고! 나는 제, 제…… 아무튼 그게 아니고, 단지 여성들의 슬픔을 달래 주고, 위로해 주었을 뿐이라고! 단지 그 후에 여성들이 나한테 고맙다고 밥도 사 주고, 술도 사 주고 했던 거지. 그런 게 아니야! 알겠어?”
“또 그 소리냐? 알았어. 그러면 오징어 발까지 갔던 전설의 어장관리 남?”
“어장관리라니! 나는 추호도 그런 적 없다? 너 계속 헛소리할래? 나는 단지 많은 여성들과 친하게 지냈을 뿐이라고!”
알렌이 역정을 냈다.
‘그게 그거 아냐?’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아론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 알았어. 그러면 1분이면 모든 여성이 치맛자락을 내리는 천하의 바람둥…….”
“짜샤, 그거 말고!”
“불굴의 치근덕…….”
“말고!”
“두려움을 모르는 변태?”
“그것도 말고!”
“다른 건 다 귀찮고, 여자 달래는 것만 안 귀찮은 후레자…….”
“이 새끼야! 나하면 떠오르는 게 그런 것들밖에 없어? 나를 대표하는 말 몰라?”
알렌이 얼굴이 붉히며 소리쳤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기에 전념했다.
아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를 대표하는 말이면……. 처녀들의 황제?”
“…….”
이봐.
“아니야? 그러면 흩날리는 치맛자락?”
“…….”
너 지금…….
“으음……. 이것도 아니야?”
날 놀리는 거지? 그렇지?
알렌이 불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짓자, 아론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알렌으로선 진짜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이 더욱더 짜증났다.
“아! 연상킬러!”
아론이 손뼉을 짝! 하고 치며 기뻐 소리쳤다.
진짜 기뻐하는 표정이다. 알렌이 인상을 찌푸렸다.
“……됐으니까 그냥 내 잠자리나 만들어.”
“응! 대신 너 약속 지켜야 한다.”
“…….”
알렌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 글쎄다.
오늘 네가 너무너무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다.

3

알렌이 자신처럼 잠자리를 만들지 않고, 늑대들한테 이상한 고기 덩어리를 먹이고 있는 피터에게 물었다.
“넌 취침 준비 안 하냐?”
정식 기사인 스카도 자기가 잘 잠자리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데, 나야 아론에게 떠넘겼다 치고, 넌 뭘 믿고 그렇게 태평한 거냐?
라는 깊은 뜻이 담긴 말이었다.
조금 추가하자면, ‘그건 또 뭔데?’라는 의미도 약간 섞여 있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늑대들 밥 준다. 넌 아론에게 떠넘기지 말고 네 잠자리나 만들어.”
“‘사랑스러운’은 무슨. 그리고 난 아론에게 떠넘긴 적 없어, 공정한 거래에 의한 일일 뿐이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쌀쌀맞은 피터의 대답에, 알렌이 작게 인상을 썼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 제가 뭐 잘났다고 나한테 시비야, 시비는.’
시비를 건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먼저지만, 그런 것에 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속으로 한껏 욕을 퍼부으면서도 알렌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가 아는 피터는 은혜는 눈곱만큼도 모르고, 돈만 밝히는 놈이지만, 뒤끝은 영지 하나 말아먹을 정도로 길고 강한 놈이었다.
알렌은 결국 피터에게 신경을 끄고 그냥 일찍 자기로 마음먹고, 지금 열심히 자신의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 아론의 잠자리에 누웠다.

밤이 되자 꽤나 쌀쌀했다. 루멘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새 취침 준비를 하고 있는 사내놈들을 지켜보았다.
“쩝……. 그냥 밖에서 자도 괜찮을까?”
녀석들 모두 사지 멀쩡, 신체 건강한 사내놈들이긴 했으나, 밖에서 자는 것이 좋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때까지 쭈욱 야외에서 자지 않았던가?
그랜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들이라도 차디찬 땅바닥에서 자면 몸 쑤시고, 입 돌아가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 세상의 이치!
피터를 비롯한 모두들 자신의 부하이자 동료였으며, 스카는 자신을 따르는 유일한 기사였다.
잠깐 장난 좀 친 것뿐이었는데, 녀석들은 어느새 깔끔하게 취침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벌써 자는 놈도 있었다.
“그래, 그냥 거기서 자라.”
안 그래도 방 좁은데 잘됐네, 뭐.

“끄응. 아이고, 허리야.”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잠에서 깬 알렌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일을 겪었다.
아니, 딱히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순순히 피터의 지식에 감탄했을 뿐!
“어떻게 늑대 위에서 잘 생각을 했냐…….”
늑대의 주둥아리를 줄로 꽁꽁 묶은 다음, 눕힌 뒤 다른 늑대들과 묶어서 살아 있는 늑대 침대를 만든 것이다.
저러니까 진짜 늑대가 사랑스러워 보일 정도!
보니까 저 늑대들, 숱한 생명 경쟁 속에서 살아온 근육질의 늑대가 아니라 사람의 손에서 길러져 포동포동 살이 오른 늑대다.
한마디로 감상용.
털도 복슬복슬, 살도 적당히 붙었으니 누우면 얼마나 편안할까?
아니, 최소한 머리만 기대도 충분히 안락하고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으리라!
“저…… 피터 씨? 늑대 한 마리만 빌릴 수 있을까요?”
알렌이 상당한 저자세로 나섰다. 피터가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답했다.
“20골드.”
“네, 네?”
“아예 팔게. 20골드 어때?”
피터의 말에 알렌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살 생각 없고, 그냥 하룻밤만 빌리려고…….”
“15골드.”
가격이 내려갔다. 하지만 알렌으로선 추호도 돈을 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안 산다니까. 쩨쩨하게 굴지 말고 하루만 좀 빌려 달라고! 내가 세 마리를 원해, 네 마리를 원해? 한 마리를, 딱 하루만 빌리자니깐?”
“그러니까 빌리는 데 15골드.”
“…….”
피터의 말에 알렌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피터를 쳐다보았다.
에…….
그러니까 사는 데 20골드, 빌리는 데 15골드?
말이 돼?
“보이지? 이 윤기 좌르르 흐르는 거? 털이 얼마나 복슬복슬한데? 또 살도 먹음직스럽…… 아니, 토실토실한 게 누우면 얼마나 기분이 좋다고. 만져 볼래?”
갑자기 피터가 두 눈을 빛내며 알렌에게 입에 기름이라도 발랐는지 충동구매를 일으키는 말을 술술 내뱉었다.
“아니, 난 만질 생각이…….”
“어허! 그렇게 안 빼도 돼. 그냥 잠깐 만져 보는 건 나도 돈 달라고 안 해.”
절대! 결코 늑대의 털을 쓰다듬어 볼 생각이 없던 알렌이었으나, 피터의―그리 빠르지는 않았다만―손에 손목을 낚아채어져 본인의 의사와는 절대! 상관없이 늑대의 털을 쓰다듬었다.
상당히 매끈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살짝 찔러 보니, 진짜 살도 토실토실한 것이 푹신푹신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털이 상당히 많아 털만으로도 충분한 부드러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빌릴래, 살래?”
피터의 말에 알렌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에서 20골드를 꺼내어 피터의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손님.”
피터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4

피터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칠 줄을 몰랐다.
단돈 8골드를 주고 산 늑대를 20골드에 되팔았다. 도대체 이윤이 얼마란 말인가!
더군다나 막상 사 놓고 보니 몸이 상당히 굼떠 사냥개(?)로도 적합하지 않았던 상황!
“뭐가 그렇게 좋냐?”
루멘이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피터를 쳐다보았으나, 피터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개인주의 사상에 몸을 맡긴 선진적인 인간이니까.
“그럴 일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1골드만 주십시오. 기승전결을 토대로 말해 드리겠습니다.”
“아냐, 나도 별로 안 궁금해졌어.”
“그래서 갑자기 왜 부른 겁니까?”
“흠흠,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살아야 하잖아?”
“아, 뭐, 그렇지요. 안 그러면 패배자니까요.”
피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멘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그리고 실력이 있는 사람은 응당 그에 맞는 일을 하는 거고.”
“안 하면 밥버러지죠.”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루멘이 기쁜 듯이 맞장구를 치자, 피터의 미간에 주름이 지어졌다.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놀고 처자빠졌습니까?”
피터의 말에 루멘이 피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루멘의 시선에 피터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저…… 라고요?”
“그래. 바로 너.”
피터가 믿기 힘들다는 듯이 묻자, 루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하는 일이 제일 많습니다.”
“뭔데?”
“일정을 짜지 않습니까? 저희들 모두의!”
피터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치자, 루멘이 피식 웃었다.
“사생활 침해야.”
“제 일정대로 살면 없다가도 은(銀)이 나옵니다. 있던 은(銀)은 금(金)으로 바뀌고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루멘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그 미소에 몸을 흠칫 떤 피터가 곧장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저는 이만 다른 곳에 할 일이 있어서…….”
“없던 은도 나오고, 있던 은은 금으로 바뀌고……. 그게 개인에 대해서라면, 영지에 관해서라면 은이 아니라 금이 나오고, 금은 다이아몬드로 바뀌고 막 그러겠다. 그치?”
“……그, 그건 개인차가 있습니다. 영지는 조금 더 그 차가 심하지 않을까요? 하하. 그리고 느낌상 왠지 금은커녕 구리 하나 안 나올 듯…….”
“흐흠.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리 개인차를 따져도 나와 다른 애들이 가졌어야 할 금액이 약간 부족하고, 막 그렇다. 아니, 별일은 아니고, 그냥 그렇다고. 혹시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걱정이 돼서.”
언제 눈치챈 거지?
하긴, 꼬리가 길면 언젠간 잡히니까.
‘물어 줘야 할 돈이…….’
자신의 잘난 머리로도 계산이 되지 않자 피터는 식은땀이 흘렀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하하. 선수끼리 이거 왜 이래.”
‘저는 선수 아닙니다. 그리고 영주님은 더더욱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쳐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피터였으나, 그럴 순 없었다.
“일단 잠시 동안 덮어 둘 테니까, 밥버러지가 되기 싫으면 일 열심히 해야겠지? 뭐, 꼭 정직하겐 안 살아도 돼. 내 것만 안 건드리면.”
루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넘어가 주겠다는 거다.
‘오늘 이 인간 왜 이래?’
피터로선 의문인 것이, 대부분의 일에 능글능글, 대충대충, 건성건성, 동네 옆집 형 혹은 동생―아저씨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같던 인간이 오늘따라 상당히 날카롭다는 것이다.
뭐, 그래 봤자 속내는 일 하기 귀찮아서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것이 훤히 보였다만.
아무튼 바뀐 루멘의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여 잠시 동안 제대로 된 반박도 못하고 있었으나, 피터는 곧이어 정신을 바로잡으며 평소 자신의 페이스로 돌아왔다,
“그럼 우선 금전적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어 봐야겠네요. 일단 제 추진으로 인하여 영지가 발전하였을 때 나오는 수익 중 절반은 어쩔 수 없이 타밀론가로 보낸다고 해도, 남은 수익 중 70퍼센트는 다시 영지를 위해 사용해야 하니 결국 전체의 15퍼센트밖에 남지 않는데, 미러 영지 수준을 생각해서 5퍼센트로 저 같은 고급 인재를 막 이리저리 휘두를 수 없는 것은 아시죠?”
피터의 말에 루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1대 2. 2는 네가 해라.”
루멘의 말을 들은 피터가 루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태도가 날카롭게 변해도 역시 루멘은 말이 통하는 인간이다.

“흠흠, 모두들 안녕하십니까?”
피터가 미러 영지의 모든 영지민을 모아 간단하게 인사를 올렸다.
겨우 300여 명.
이건 뭐, 화전민도 아니고……. 아니, 화전민보다도 상황이 나빴다.
옷은 중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정도에 불구하고, 온몸의 땟자국은 치를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이 덜 드니 실용적이지 않은가!
“앞으로 여러분들을 지도할 영주 대리입니다.”
피터가 자기소개를 하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영주가 버젓이 서 있는데, 왜 영주 대리가 나선단 말인가?
하지만 ‘높으신 양반들이니까 알아서 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하여 반박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쪽이 여러분들의 신임 영주인 루멘 반 타밀론 영주님이십니다.”
“모두들 반갑네.”
루멘이 짤막하게 영지민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피터가 이어서 말했다.
“근데 하는 일 없이 그냥 놀고 자빠질 테니까, 그리 신경들 안 쓰셔도 됩니다.”
“…….”
루멘의 얼굴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