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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중대장의 대련 중지 선언에 나는 기간트에서 내려왔다.
아직 흥분감이 덜 가라앉은 나와 달리, 창백한 안색으로 기간트에서 내려오는 빅토르 중위.
무슨 일인지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그 역할은 정비반장이 자처했기에 아직 친분이 옅은 나는 그냥 지켜만 봐야만 했다.
1소대장이 진정될 동안 장교수첩을 열어 주술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다.
― 주술.
└ 기사들이 사용하는, 섭리에 구애받지 않는 특수한 힘. 육체가 멀쩡하지 않아도 정신만 멀쩡하다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술법이다. 각 가문별로 그 특징과 쓰임새가 다르며, 사용자의 마나하트 랭크에 따라 사용 가능한 기술의 범주가 다르다.
주술이라는 게 뭔가 했더니, <하르마 로얄>에서 소환사 주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참고로 내 마나하트 랭크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도감을 열어봤더니 [?]라고만 되어 있었다.
내 마나하트 랭크를 확인하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았다.
“오빠! 복귀했으면 바로 나한테 와서 신고해야지!”
중대장의 토라진 말에 빅토르 중위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볐다.
창백했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야, 너 전역일 언제냐?”
“취소했어.”
“아! 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빅토르 중위.
중대장이 대답 대신에 나를 쳐다봤다.
중대장의 그런 시선을 보고 그 길을 따라 빅토르 중위가 나를 쳐다봤다.
“하, 아서라! 너랑 쟤랑 나이 차가 얼마나 나는데… 쯧.”
“두, 두 자리 수까지는 안 가!”
“그럼?
“아, 아홉 살…….”
아멜이 스물세 살이니, 마리안느 중대장의 나이는 서른둘인가 보다.
중대장의 말에 빅토르 중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좀 차려라. 보통 남자도 아니고 루겐바인가 사람인데 그렇게 나이 차가 나는 여자랑 결혼하겠냐?”
“아, 아니… 난 본처 욕심은 없고… 그저 제2첩 이상만 되도…….”
“자존심도 없냐. 우리, 그래도 나름 영지 있는 귀족인데.”
“그럼 뭐해. 완전 시골 벽촌인데…….”
“그런 말 아버지가 들으면 화내신다.”
“내가 시집 간다고 하면 그런 말해도 좋아라 하실걸?”
둘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정비반장을 쫓아갈 것을 그랬나 보다.
그나저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중대장한테 아무 감정 없는데, 왜 저 둘이 난리인 거야.
“됐고, 이거나 받아.”
빅토르 중위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편지 두 개를 꺼내 중대장한테 건넸다.
“뭐야?”
“아버지랑 어머니가 쓰신 거. 너 집에 언제 오냐고 하시더라.”
낯간지럽다는 듯 무뚝뚝하게 말하는 빅토르 중위였지만, 묘하게도 가족애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부모님한테서 온 편지를 받자 중대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긴 저걸 받고도 눈시울 안 붉어지는 냉혈한은 잘 없지.
“아, 맞다.”
자리를 뜰 것처럼 하더니 빅토르 중위가 갑자기 자세를 잡았다.
“단결. 중위 빅토르, 교육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단결. 수고하셨습니다.”
경례를 마친 빅토르 중위는 이윽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빅토르 중위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중대장이 이번에는 나를 쳐다봤다.
“아, 맞다. 자기야, 카트린이랑 데이트 좀 갔다 와야겠다.”
…예?
***
어두껌껌한, 어느 이름 없는 토굴.
인공적인 조명이라고는 벽면에 하나도 설치가 안 된 이 토굴이 위치한 곳은 산세가 험악하고 야생동물마저 살지 않는데다가 토양이 척박해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토굴을 따라 산을 넘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토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만나게 되는 마경.
그곳에는 1개 군단급 병력이 주둔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 위치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위의 척박한 토양과 달리, 지맥을 따라 흐르는 천연 지하수와 중앙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농사마저 지을 수 있게 할 정도였다.
자연이 만든 천연의 요새인 이곳은 바로 최근 몇 십 년 전부터 제국 서부 지대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늑대교단의 본산이었다.
넓은 공간 안을 돌아다니는 수만의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형성된 생활과 문화.
그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무력인 수백 대의 기간트.
둔전에서 열심히 감자나 밀을 재배하고 있는 병사들.
이 모든 것들이 늑대교단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최심부에 위치한 어느 건물의 방 안.
디자이너의 인테리어 감각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각종 해골 장식으로 꾸며진 이곳에 검은색 망토와 붉은색 갑옷, 그리고 얼굴 전체를 뒤덮는 황금색 투구를 쓴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당 벽에는 영상 통신 마법에 사용되는 마법구가 쏘는 스크린이 출력되고 있었다.
영상에 비치는 것은 회갈색 머리를 하고 화려한 복식을 차려입은 채 인상을 잔뜩 구긴 한 남자였다.
“…오랜만이요, 백작. 그래, 선물은 마음에 들었소?”
[마음에 들고 자시고 간에! 마수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은 없었잖소!]
잔뜩 신경질을 내며 말하는 백작이라 불린 남자.
백작의 신경질에 갑옷 입은 남자가 살짝 눈썹을 구겼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오?”
[내가 내세운 조건은 순회순찰대나 다른 영방군들이 우리 영지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해 달라는 거였소! 하지만 그대들이 마수를 불러들이고, 또 그것을 순회순찰대가 해결하는 바람에 일이 이상하게 되었잖소! 보시오!]
백작이 스크린에 대고 금박이 쳐진 공문서 하나를 보여 줬다.
“활동 허가 요청서. 순회순찰대군.”
[맞소! 통신마법을 통해 우리 측 마법사에게 전달된 공문이오. 이제 어쩔 거요? 나는 지금까지 그대들을 지원해 왔소! 양심이 있으면 순회순찰대를 여기서 걷어 내란 말이오!]
백작이 하는 말에 남자는 콧방귀를 꼈다.
‘사교집단인 우리에게 양심이라는 것을 바라다니. 아직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좀 더 분발해야겠군.’
남자가 그렇게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소. 조만간 순회순찰대에 타격을 줘서 백작의 영지에서 활동할 여유가 없게 만들겠소.”
[정말 할 수 있는 것 맞소?]
의심하는 백작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요?”
[마수를 소환해서 혼란을 일으킬 거면 안 걸리게 해야지! 순회순찰대한테 걸린데다가 토벌까지 당한 그대들이라 믿음이 안 가서 그렇소.]
“흐음?”
백작이 꺼낸 말 중 이것만큼은 남자도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확인해 보겠소.”
[아무튼 좀 잘해 보시오!]
그렇게 말하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는 백작.
통신이 끊기자마자 남자는 통신용 마법 도구를 조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느 기간트의 콕핏 내부를 보여 주는 통신기.
이번 영상에서는 콕핏 내부에 도넛을 잔뜩 쌓아놓은 채 거의 속옷 차림 수준으로 노출이 많은, 헐렁한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나왔다.
“아쿠아.”
[음?]
빵가루를 칠칠치 못하게 콕핏 내부 바닥에 흘리며 책을 보고 있던 여성이 남자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옵시디언 대장. 무슨 일이야?]
“토파즈는 어떻게 되었나?”
[어? 어어, 아… 응…….]
눈알을 굴려 가며 대답을 회피하는 아쿠아.
옵시디언은 그런 부하의 모습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또 죽었나?”
[으응, 그게… 윌리엄한테 당해서…….]
옵시디언의 아쿠아의 보고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당초 토파즈에게 준 기간트는 전투에 적합한 기간트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수 소환술의 디바이스로 사용될 목적으로 배정된 기체.
그렇기 때문에 윌리엄 대령에게 졌다는 것 자체는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것.
“서부 순회순찰대가 어떻게 댄들라이언을 찾아낸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
토파즈에게 배정한 댄들라이언은 마법 사용에 있어 최상급의 디바이스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코어가 되는 마석에 은신 마법까지 새겨져 있는 놈이었다.
이걸 감지하려면 마법학장 정도가 와야지 가능할 거라 자부했던 옵시디언이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 그게… 아멜 루겐바인이 찾아냈나 봐.]
“아멜……?”
아멜 루겐바인.
그 망나니 낭봉꾼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활동 무대가 제국 서부 지대인 늑대교단 역시 아멜에 대해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고작 망나니 난봉꾼 따위한테 깨진 거냐고 크게 혼날 줄 안 아쿠아였기에 미리 양 귀를 틀어막고 잔소리를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옵시디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 대장?]
“…아무 것도 아니다. 토파즈가 재생성되면 내가 찍어 주는 포인트로 데리고 와라. 너희 둘과 만나서 건네줄 게 있다.”
[옛썰! 대장!]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는 방 안.
옵시디언이 고심 끝에 통신기를 다시 한번 건드렸다.
이번에는 드레스를 입은 채 부채로 턱을 가리고 있는 어느 여성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해당 실루엣의 밑에는 ‘음성만 출력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옵시디언?]
통신기 너머에서 맑고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옵시디언이 보는 이가 아무도 없건만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푸른 장미님.”
[내가 함부로 통신을 연결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계획에 약간의 혼선이 발생한 것 같아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옵시디언이 이윽고 푸른 장미라 불린 여자에게 아쿠아와 백작에게 들은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다.
[흐음, 들은 바가 없네요. 어차피 프로젝트는 이미 가동했어요. 이쪽에서 더 이상 컨트롤하는 것은 무리라고 봐요.]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현장 담당은 스켈터와 옵시디언이니까,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혹 저희가 그자를 죽여도 될 런지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사람도 불빛도 없는 빈 공간에서 늑대교단, 스틸 브리드의 대장인 옵시디언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아멜 루겐바인… 흐음…….”
***
모의전과 1소대장과의 대련을 끝으로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특별할 것이 없는 군 생활을 보냈다.
일어나서 소대 정비하고 부대 분위기 파악하고, 가볍게 기초 체력을 단련하고.
하지만 그런 나에게 특별한 일이 찾아왔다.
“두 분 다 잘 어울리십니다. 누가 봐도 훈남, 훈녀 커플로밖에 안 보이겠지 말입니다.”
“어, 그래…….”
네드 분대장의 입에 발린 말에 영혼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데이트를 나간다고 하니까 소대원들이 열심히 나를 가꿔 줬다.
그 결과, 나름 잘 꾸민 모양새가 된 나.
하지만 문제는 역시 스타일링을 담당한 게 군인들이라 그런지, 아무리 꾸며도 내 눈에는 내가 군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원판 자체가 워낙에 훌륭해서 그런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괜찮아?”
그런 내 옆에는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는 카트린이 있었다.
카트린 역시 사복 차림에 약간의 꾸밈이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엄마 화장품 몰래 빌려 쓴 여고생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쪽도 얼굴 자체가 워낙에 반반해서 그런지, 어색한 화장을 미모가 다 커버했다.
“그러면 중대장님한테 외박 신고를 하러 가자.”
“그, 그러지 말입니다.”
“카트린, 연인 사이에는 그런 말투 안 써.”
“아, 응이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뒤에 빼라고.”
“알겠습니다. 빼지 말입니다.”
카트린의 말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는 누가 봐도 군인들이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잔뜩 굳은 카트린을 데리고 중대장 게르에 도착했다.
“단결. 소위 아멜, 데이트 활동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래, 단결. 우리 자기는 이번이 첫 데이트지?”
“예.”
“주의 사항은 아까 말했으니까 더 말 안 해도 되지?”
“예. 문제 없습니다.”
“그럼 둘 다 데이트 잘하고 와.”
중대장한테 경례를 올리자, 그녀 역시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화답해 줬다.
나와 카트린은 중대장 게르를 나와 위병소로 향했다.
경비병들을 지나 야영지 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카트린.
“후우, 카트린. 이래서 데이트 할 수 있겠어?”
“하,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못할 것 같은데.
아까부터 일부러 몸에 힘 좀 빼라고 먼저 편하게 말해 주고 있는데도 카트린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흐음, 좋아. 그러면 소지품 확인해 봐.”
카트린은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줬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소정의 돈과 물, 그리고 간이식 몇 세트와 좌표 설정에 쓰일 마도구 및 무기로 사용될 단검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순회순찰대 마크가 그려진 마패가 있었다.
그렇다.
데이트라는 것은 순회순찰대에서 사용하는 군사적 은어였다.
그 실상은 민간인으로 위장해 영지를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거나 아니면 민심 파악 등을 하는 암행 활동이었다.
한 달 전에 중대장이 나보고 카트린이랑 데이트를 다녀오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이게 암행 활동을 의미하는 은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김이 팍 샜는지.
“카트린, 하나씩 설명해 봐.”
“네, 넵. 먼저… 이건 간이식입니다. 비상시에 허기를 채워 줄 겁니다.”
“그럼 이건?”
“좌표 설정용 마도구입니다. 혹여 기간트를 사용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간트를 부르는 용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건?”
“마패입니다. 순회순찰대의 이름이 필요한 상황에 저희의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입니다.”
가방 안에 든 물품을 일일이 재확인시켜 주면서 최대한 카트린의 긴장감을 풀어 주려고 했다.
별로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꽤 효과가 있었다.
“후우, 그럼 인사를 드리러 갈까…요?”
순회순찰대는 지방 귀족의 영지가 활동권이었다.
귀족의 권력이 황가의 그것보다 센 이 리바크르 제국에서 관군이 지방 귀족을 무시하고 해당 영지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다.
말이 좋아 관군이지, 실질적으로 강제력이 그리 큰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누군가 불온한 생각을 가진 이가 없는지, 아니면 제후들 간에 불화가 발생했을 경우 무력 다툼으로 이어지기 전에 중재를 한다든지.
그런 것들이 우리가 맡은 임무였다.
때문에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황가가 아니라 사대귀족을 비롯한 제후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암행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영지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 영주에게 찾아가 활동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물론, 우리의 뒤에는 사대귀족과 황가가 존재하고 있기에 말만 허가지, 실질적으로 선포에 가까운 행위였다.
다만…….
“흥, 무시를 해도 정도가 있지. 감히 내 영지에서 활동하겠다면서 고작 소위 하나랑 하사 하나가 와? 순회순찰대는 제정신인가?”
영주들이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 사대귀족일 뿐이지, 황가는 아니었기에 엄연히 황가 직할에 해당하는 관군에 대해 갑질을 해대는 게 영주들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한 소리 아니냐! 이 몸은 백작이다! 나, 기드온 백작을 영접하는 데 있어 최소한 대령급은 찾아와야 하거늘! 어찌 소위 따위가 찾아온 것이냐!”
잔뜩 성을 내는 기드온 백작.
— 그거야 그게 우리 순회순찰대가 자기를 영입한 이유 중 하나인걸.
왜 하필 내가 임무 시작 선포 및 데이트를 해야 하냐는 질문에 돌아온 중대장의 답변.
이렇게 갑질을 해 대는 영주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하아, 백작님. 혹시 아멜 루겐바인이라고 아십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제국 서부 아니 제국 전체를 통틀어 있을까? 후작위임에도 불구하고 공작들과 더불어 사대귀족이라 불리는 가문,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는 검성 진 후작님이 가주로 계시는 가문, 모든 서부 귀족들의 대표! 위대한 루겐바인가의 자랑스러운 장남 아니시더냐?”
기드온 백작의 말에서 서부 귀족들에게 있어 루겐바인가라는 가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가문을 이용하기 싫었지만, 데이트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이번 한 번만 딱 눈감고 가문의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게 바로 접니다.”
“뭐?”
“아멜 루겐바인, 그게 제 이름이라고요.”
내 정체를 들은 기드온이 잠시 뇌정지가 온 것처럼 3초 정도 멍하니 있더니, 이내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중대장의 대련 중지 선언에 나는 기간트에서 내려왔다.
아직 흥분감이 덜 가라앉은 나와 달리, 창백한 안색으로 기간트에서 내려오는 빅토르 중위.
무슨 일인지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그 역할은 정비반장이 자처했기에 아직 친분이 옅은 나는 그냥 지켜만 봐야만 했다.
1소대장이 진정될 동안 장교수첩을 열어 주술에 대한 내용을 살펴봤다.
― 주술.
└ 기사들이 사용하는, 섭리에 구애받지 않는 특수한 힘. 육체가 멀쩡하지 않아도 정신만 멀쩡하다면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술법이다. 각 가문별로 그 특징과 쓰임새가 다르며, 사용자의 마나하트 랭크에 따라 사용 가능한 기술의 범주가 다르다.
주술이라는 게 뭔가 했더니, <하르마 로얄>에서 소환사 주문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참고로 내 마나하트 랭크는 어느 정도인가 하고 도감을 열어봤더니 [?]라고만 되어 있었다.
내 마나하트 랭크를 확인하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조건이 필요한 것 같았다.
“오빠! 복귀했으면 바로 나한테 와서 신고해야지!”
중대장의 토라진 말에 빅토르 중위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볐다.
창백했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야, 너 전역일 언제냐?”
“취소했어.”
“아! 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빅토르 중위.
중대장이 대답 대신에 나를 쳐다봤다.
중대장의 그런 시선을 보고 그 길을 따라 빅토르 중위가 나를 쳐다봤다.
“하, 아서라! 너랑 쟤랑 나이 차가 얼마나 나는데… 쯧.”
“두, 두 자리 수까지는 안 가!”
“그럼?
“아, 아홉 살…….”
아멜이 스물세 살이니, 마리안느 중대장의 나이는 서른둘인가 보다.
중대장의 말에 빅토르 중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좀 차려라. 보통 남자도 아니고 루겐바인가 사람인데 그렇게 나이 차가 나는 여자랑 결혼하겠냐?”
“아, 아니… 난 본처 욕심은 없고… 그저 제2첩 이상만 되도…….”
“자존심도 없냐. 우리, 그래도 나름 영지 있는 귀족인데.”
“그럼 뭐해. 완전 시골 벽촌인데…….”
“그런 말 아버지가 들으면 화내신다.”
“내가 시집 간다고 하면 그런 말해도 좋아라 하실걸?”
둘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정비반장을 쫓아갈 것을 그랬나 보다.
그나저나 정작 당사자인 나는 중대장한테 아무 감정 없는데, 왜 저 둘이 난리인 거야.
“됐고, 이거나 받아.”
빅토르 중위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편지 두 개를 꺼내 중대장한테 건넸다.
“뭐야?”
“아버지랑 어머니가 쓰신 거. 너 집에 언제 오냐고 하시더라.”
낯간지럽다는 듯 무뚝뚝하게 말하는 빅토르 중위였지만, 묘하게도 가족애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부모님한테서 온 편지를 받자 중대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긴 저걸 받고도 눈시울 안 붉어지는 냉혈한은 잘 없지.
“아, 맞다.”
자리를 뜰 것처럼 하더니 빅토르 중위가 갑자기 자세를 잡았다.
“단결. 중위 빅토르, 교육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단결. 수고하셨습니다.”
경례를 마친 빅토르 중위는 이윽고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빅토르 중위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중대장이 이번에는 나를 쳐다봤다.
“아, 맞다. 자기야, 카트린이랑 데이트 좀 갔다 와야겠다.”
…예?
***
어두껌껌한, 어느 이름 없는 토굴.
인공적인 조명이라고는 벽면에 하나도 설치가 안 된 이 토굴이 위치한 곳은 산세가 험악하고 야생동물마저 살지 않는데다가 토양이 척박해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토굴을 따라 산을 넘어가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토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만나게 되는 마경.
그곳에는 1개 군단급 병력이 주둔해도 될 정도로 커다란 공간이 위치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위의 척박한 토양과 달리, 지맥을 따라 흐르는 천연 지하수와 중앙에 뚫린 커다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은 농사마저 지을 수 있게 할 정도였다.
자연이 만든 천연의 요새인 이곳은 바로 최근 몇 십 년 전부터 제국 서부 지대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늑대교단의 본산이었다.
넓은 공간 안을 돌아다니는 수만의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형성된 생활과 문화.
그런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무력인 수백 대의 기간트.
둔전에서 열심히 감자나 밀을 재배하고 있는 병사들.
이 모든 것들이 늑대교단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최심부에 위치한 어느 건물의 방 안.
디자이너의 인테리어 감각에 대해 의구심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각종 해골 장식으로 꾸며진 이곳에 검은색 망토와 붉은색 갑옷, 그리고 얼굴 전체를 뒤덮는 황금색 투구를 쓴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당 벽에는 영상 통신 마법에 사용되는 마법구가 쏘는 스크린이 출력되고 있었다.
영상에 비치는 것은 회갈색 머리를 하고 화려한 복식을 차려입은 채 인상을 잔뜩 구긴 한 남자였다.
“…오랜만이요, 백작. 그래, 선물은 마음에 들었소?”
[마음에 들고 자시고 간에! 마수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말은 없었잖소!]
잔뜩 신경질을 내며 말하는 백작이라 불린 남자.
백작의 신경질에 갑옷 입은 남자가 살짝 눈썹을 구겼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오?”
[내가 내세운 조건은 순회순찰대나 다른 영방군들이 우리 영지에 관심을 갖지 않게 해 달라는 거였소! 하지만 그대들이 마수를 불러들이고, 또 그것을 순회순찰대가 해결하는 바람에 일이 이상하게 되었잖소! 보시오!]
백작이 스크린에 대고 금박이 쳐진 공문서 하나를 보여 줬다.
“활동 허가 요청서. 순회순찰대군.”
[맞소! 통신마법을 통해 우리 측 마법사에게 전달된 공문이오. 이제 어쩔 거요? 나는 지금까지 그대들을 지원해 왔소! 양심이 있으면 순회순찰대를 여기서 걷어 내란 말이오!]
백작이 하는 말에 남자는 콧방귀를 꼈다.
‘사교집단인 우리에게 양심이라는 것을 바라다니. 아직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란 말인가. 좀 더 분발해야겠군.’
남자가 그렇게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소. 조만간 순회순찰대에 타격을 줘서 백작의 영지에서 활동할 여유가 없게 만들겠소.”
[정말 할 수 있는 것 맞소?]
의심하는 백작의 말에 남자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지금 우리를 의심하는 거요?”
[마수를 소환해서 혼란을 일으킬 거면 안 걸리게 해야지! 순회순찰대한테 걸린데다가 토벌까지 당한 그대들이라 믿음이 안 가서 그렇소.]
“흐음?”
백작이 꺼낸 말 중 이것만큼은 남자도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확인해 보겠소.”
[아무튼 좀 잘해 보시오!]
그렇게 말하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는 백작.
통신이 끊기자마자 남자는 통신용 마법 도구를 조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느 기간트의 콕핏 내부를 보여 주는 통신기.
이번 영상에서는 콕핏 내부에 도넛을 잔뜩 쌓아놓은 채 거의 속옷 차림 수준으로 노출이 많은, 헐렁한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나왔다.
“아쿠아.”
[음?]
빵가루를 칠칠치 못하게 콕핏 내부 바닥에 흘리며 책을 보고 있던 여성이 남자의 부름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옵시디언 대장. 무슨 일이야?]
“토파즈는 어떻게 되었나?”
[어? 어어, 아… 응…….]
눈알을 굴려 가며 대답을 회피하는 아쿠아.
옵시디언은 그런 부하의 모습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또 죽었나?”
[으응, 그게… 윌리엄한테 당해서…….]
옵시디언의 아쿠아의 보고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당초 토파즈에게 준 기간트는 전투에 적합한 기간트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마수 소환술의 디바이스로 사용될 목적으로 배정된 기체.
그렇기 때문에 윌리엄 대령에게 졌다는 것 자체는 크게 실망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것.
“서부 순회순찰대가 어떻게 댄들라이언을 찾아낸 거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것.
토파즈에게 배정한 댄들라이언은 마법 사용에 있어 최상급의 디바이스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코어가 되는 마석에 은신 마법까지 새겨져 있는 놈이었다.
이걸 감지하려면 마법학장 정도가 와야지 가능할 거라 자부했던 옵시디언이기에 더욱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 그게… 아멜 루겐바인이 찾아냈나 봐.]
“아멜……?”
아멜 루겐바인.
그 망나니 낭봉꾼은 제국 전체를 통틀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활동 무대가 제국 서부 지대인 늑대교단 역시 아멜에 대해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고작 망나니 난봉꾼 따위한테 깨진 거냐고 크게 혼날 줄 안 아쿠아였기에 미리 양 귀를 틀어막고 잔소리를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옵시디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 대장?]
“…아무 것도 아니다. 토파즈가 재생성되면 내가 찍어 주는 포인트로 데리고 와라. 너희 둘과 만나서 건네줄 게 있다.”
[옛썰! 대장!]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이후 잠시 침묵이 흐르는 방 안.
옵시디언이 고심 끝에 통신기를 다시 한번 건드렸다.
이번에는 드레스를 입은 채 부채로 턱을 가리고 있는 어느 여성의 실루엣이 비춰졌다.
해당 실루엣의 밑에는 ‘음성만 출력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옵시디언?]
통신기 너머에서 맑고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옵시디언이 보는 이가 아무도 없건만 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푸른 장미님.”
[내가 함부로 통신을 연결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계획에 약간의 혼선이 발생한 것 같아 확인 차 연락드렸습니다.”
옵시디언이 이윽고 푸른 장미라 불린 여자에게 아쿠아와 백작에게 들은 상황을 정리해 보고했다.
[흐음, 들은 바가 없네요. 어차피 프로젝트는 이미 가동했어요. 이쪽에서 더 이상 컨트롤하는 것은 무리라고 봐요.]
“그 부분은 저도 동의합니다.”
[현장 담당은 스켈터와 옵시디언이니까, 둘이 알아서 잘 해결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혹 저희가 그자를 죽여도 될 런지요?”
[마음대로 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사람도 불빛도 없는 빈 공간에서 늑대교단, 스틸 브리드의 대장인 옵시디언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아멜 루겐바인… 흐음…….”
***
모의전과 1소대장과의 대련을 끝으로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특별할 것이 없는 군 생활을 보냈다.
일어나서 소대 정비하고 부대 분위기 파악하고, 가볍게 기초 체력을 단련하고.
하지만 그런 나에게 특별한 일이 찾아왔다.
“두 분 다 잘 어울리십니다. 누가 봐도 훈남, 훈녀 커플로밖에 안 보이겠지 말입니다.”
“어, 그래…….”
네드 분대장의 입에 발린 말에 영혼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데이트를 나간다고 하니까 소대원들이 열심히 나를 가꿔 줬다.
그 결과, 나름 잘 꾸민 모양새가 된 나.
하지만 문제는 역시 스타일링을 담당한 게 군인들이라 그런지, 아무리 꾸며도 내 눈에는 내가 군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원판 자체가 워낙에 훌륭해서 그런 단점이 잘 드러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괜찮아?”
그런 내 옆에는 잔뜩 긴장한 채로 서 있는 카트린이 있었다.
카트린 역시 사복 차림에 약간의 꾸밈이 있었는데, 문제는 이게 엄마 화장품 몰래 빌려 쓴 여고생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쪽도 얼굴 자체가 워낙에 반반해서 그런지, 어색한 화장을 미모가 다 커버했다.
“그러면 중대장님한테 외박 신고를 하러 가자.”
“그, 그러지 말입니다.”
“카트린, 연인 사이에는 그런 말투 안 써.”
“아, 응이지 말입니다.”
“그러니까 뒤에 빼라고.”
“알겠습니다. 빼지 말입니다.”
카트린의 말투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는 누가 봐도 군인들이라고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잔뜩 굳은 카트린을 데리고 중대장 게르에 도착했다.
“단결. 소위 아멜, 데이트 활동을 보고하러 왔습니다.”
“그래, 단결. 우리 자기는 이번이 첫 데이트지?”
“예.”
“주의 사항은 아까 말했으니까 더 말 안 해도 되지?”
“예. 문제 없습니다.”
“그럼 둘 다 데이트 잘하고 와.”
중대장한테 경례를 올리자, 그녀 역시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화답해 줬다.
나와 카트린은 중대장 게르를 나와 위병소로 향했다.
경비병들을 지나 야영지 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카트린.
“후우, 카트린. 이래서 데이트 할 수 있겠어?”
“하,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못할 것 같은데.
아까부터 일부러 몸에 힘 좀 빼라고 먼저 편하게 말해 주고 있는데도 카트린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흐음, 좋아. 그러면 소지품 확인해 봐.”
카트린은 메고 있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줬다.
가방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소정의 돈과 물, 그리고 간이식 몇 세트와 좌표 설정에 쓰일 마도구 및 무기로 사용될 단검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순회순찰대 마크가 그려진 마패가 있었다.
그렇다.
데이트라는 것은 순회순찰대에서 사용하는 군사적 은어였다.
그 실상은 민간인으로 위장해 영지를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거나 아니면 민심 파악 등을 하는 암행 활동이었다.
한 달 전에 중대장이 나보고 카트린이랑 데이트를 다녀오라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이게 암행 활동을 의미하는 은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김이 팍 샜는지.
“카트린, 하나씩 설명해 봐.”
“네, 넵. 먼저… 이건 간이식입니다. 비상시에 허기를 채워 줄 겁니다.”
“그럼 이건?”
“좌표 설정용 마도구입니다. 혹여 기간트를 사용해야 할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기간트를 부르는 용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건?”
“마패입니다. 순회순찰대의 이름이 필요한 상황에 저희의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입니다.”
가방 안에 든 물품을 일일이 재확인시켜 주면서 최대한 카트린의 긴장감을 풀어 주려고 했다.
별로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의외로 꽤 효과가 있었다.
“후우, 그럼 인사를 드리러 갈까…요?”
순회순찰대는 지방 귀족의 영지가 활동권이었다.
귀족의 권력이 황가의 그것보다 센 이 리바크르 제국에서 관군이 지방 귀족을 무시하고 해당 영지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다.
말이 좋아 관군이지, 실질적으로 강제력이 그리 큰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누군가 불온한 생각을 가진 이가 없는지, 아니면 제후들 간에 불화가 발생했을 경우 무력 다툼으로 이어지기 전에 중재를 한다든지.
그런 것들이 우리가 맡은 임무였다.
때문에 우리를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황가가 아니라 사대귀족을 비롯한 제후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암행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영지에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 영주에게 찾아가 활동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물론, 우리의 뒤에는 사대귀족과 황가가 존재하고 있기에 말만 허가지, 실질적으로 선포에 가까운 행위였다.
다만…….
“흥, 무시를 해도 정도가 있지. 감히 내 영지에서 활동하겠다면서 고작 소위 하나랑 하사 하나가 와? 순회순찰대는 제정신인가?”
영주들이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어디까지 사대귀족일 뿐이지, 황가는 아니었기에 엄연히 황가 직할에 해당하는 관군에 대해 갑질을 해대는 게 영주들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한 소리 아니냐! 이 몸은 백작이다! 나, 기드온 백작을 영접하는 데 있어 최소한 대령급은 찾아와야 하거늘! 어찌 소위 따위가 찾아온 것이냐!”
잔뜩 성을 내는 기드온 백작.
— 그거야 그게 우리 순회순찰대가 자기를 영입한 이유 중 하나인걸.
왜 하필 내가 임무 시작 선포 및 데이트를 해야 하냐는 질문에 돌아온 중대장의 답변.
이렇게 갑질을 해 대는 영주를 보고 있자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가 갔다.
“하아, 백작님. 혹시 아멜 루겐바인이라고 아십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제국 서부 아니 제국 전체를 통틀어 있을까? 후작위임에도 불구하고 공작들과 더불어 사대귀족이라 불리는 가문, 제국제일검이라 불리는 검성 진 후작님이 가주로 계시는 가문, 모든 서부 귀족들의 대표! 위대한 루겐바인가의 자랑스러운 장남 아니시더냐?”
기드온 백작의 말에서 서부 귀족들에게 있어 루겐바인가라는 가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라면 이런 식으로 가문을 이용하기 싫었지만, 데이트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이번 한 번만 딱 눈감고 가문의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게 바로 접니다.”
“뭐?”
“아멜 루겐바인, 그게 제 이름이라고요.”
내 정체를 들은 기드온이 잠시 뇌정지가 온 것처럼 3초 정도 멍하니 있더니, 이내 얼굴색이 잿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