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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부유한 영지가 아니다?”
“예. 기드온 백작령은 광산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희귀광물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채굴되는 철의 질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만 소모하고 다른 곳으로 유통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자급자족형 경제로 굴러가는 영지라는 소리인가?”
“완전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그쪽일 겁니다.”
가난한 영지가 부유한 운영을 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약탈.
대상이 타 영지가 되었든, 아니면 자기 영지민이 되었든 말이다.
뭐, 후자는 약탈보다 수탈이라 불리는 거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작령인데, 어느 정도 규모는 되지 않나?”
“마도혁명 이전이라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도혁명 이후, 군사력의 중심은 보병에서 기간트병으로 옮겨졌고, 그에 따라 마석 광산이 없는 영지는 약소 세력이 되었습니다. 기드온 백작령에서는 아쉽게도 마석이 채굴되지 않습니다.”
병력의 양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한 기간트가 전쟁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라…….
보병이 아무리 많다고 해 봤자, 기간트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기간트를 다루는 실력만 뛰어나다면 상대가 아무리 나보다 수가 많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말도 되겠지.
“…소대장님?”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카트린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불렀다.
그때, 잠깐 자리를 비운 기드온 백작이 헐레벌떡 다시 돌아왔다.
“하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식사를 하는 건 내일 아침으로 미뤄도 될 런지요?”
그런데 기드온 백작이 돌아오자마자 나와 카트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인상이 구겨졌다.
돌아온 기드온 백작의 몸에서 정체모를 기분 나쁜 악취가 났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라도 같이하시지요.”
어지간하면 여기서 하루를 신세진 뒤, 내일 아침에 바로 본성을 떠날 생각이었다.
기드온 백작과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한 것에 그 어떠한 아쉬움도 없었지만, 여기서는 조금 입에 발린 말을 해 주기로 했다.
“하하하, 역시 도련님! 도련님의 모습을 보니 할아버님이신 선대 루겐바인 후작님이 생각나는군요.”
“저희 할아버님을 아십니까?”
“예? 그분도 언급 금지입니까?”
“…예?”
“예?”
무언가 대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드온 백작,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뭔가가 있는 건가.
하지만 묻는다고 해서 기드온 백작이 자세히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신들에게 말해 두었으니, 식사를 끝내면 녀석들이 방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내일 뵙지요.”
기드온 백작이 다시금 식당 밖으로 벗어났다.
참 바쁜 사람이네.
식사를 하다 말고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소대장님, 정말 내일 여기서 아침까지 해결하시고 가실 겁니까?”
“그냥 한 말이지. 그나저나 카트린, 아까 기드온 백작에게서 난 악취가 뭔지 아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사과장님은 무언가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사과장님이?”
“제가 듣기로는 그분이 연금술에 약간의 조예가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냄새를 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맞는 말입니다. 샘플을 채취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나와 카트린은 거기까지밖에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가슴이 드러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지?”
“오늘 밤 도련님의 밤 시중을 들 여자입니다.”
병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
현대에도 성접대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것을 받아본 적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병사들이 성접대를 할 소녀를 데려오자 순간적으로 마음에 큰 동요가 발생한 것이었다.
“…소대장님이 요청하신 겁니까?”
아냐! 아니라고!
요 한 달간 카트린의 시선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근면 성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늘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경멸, 불신, 이해, 기대 순으로 그녀의 시선은 분명 변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단 한순간에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카트린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이 자식, 개과천선한 척하더니, 딱 걸렸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다.”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병사들 보고 손사래를 쳐 소녀를 물리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소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묘한 일이 일어났다.
소녀가 병사들을 뿌리친 후, 내게로 달려와 내 오른발을 잡고 발밑에 얼굴을 비비며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대장님, 백작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하룻밤을 같이 보내시지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카트린의 말에 놀라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카트린은 손에 작은 식사용 나이프를 쥐고 소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와, 그렇게 짧은 순간에 혹시나 자객일까 싶어서 전투태세를 갖춘 거야?
그녀의 말과 행동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뭐? 하지만…….”
그때, 카트린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짚이는 게 있습니다. 일단 방으로 여자애를 데려간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카트린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나에게 다가오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깍듯하게 경례를 올리고는 소녀를 내버려 둔 채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솜털도 아직 안 벗겨진 앳된 얼굴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무슨 일이냐?”
내 질문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우…어…으…….”
“뭐?”
소녀는 말이라기보다는 신음 소리 같은 것만 냈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자 카트린이 소녀의 턱을 잡은 후 입을 살짝 벌렸다.
소녀의 입 안을 보자마자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혀가 잘렸습니다. 이빨도 다 뽑혔고 말입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보기 힘든 광경.
“이게 어찌된 일이지?”
“노리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빨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방해가 된다… 뭐, 그런 거겠지 말입니다.”
카트린의 설명에 소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초경도 안 왔을 것 같은 어린 소녀에게 이 무슨…….”
사람의 치아는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말도 하지 못하고, 음식도 씹을 수 없을 것이었다.
단지 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한 인간의 미래를 송두리째 짓밟은 것이었다.
기드온 백작의 인륜을 저버린 행위에 치가 떨려 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마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세계라 소녀의 치아를 복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몰골을 당한 것을 보니 있는 집안의 자식은 아닐 테고, 소녀가 자력으로 시술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우선 방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여기는 개방된 곳이라 보는 눈이 많습니다.”
카트린의 의견에 동의하며 식탁에 놓인 종을 울렸다.
그러자 예의 그 뚱뚱한 집사가 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처음에 집사는 나와 카트린의 방을 따로 주려고 했지만, 내가 카트린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요구하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레나라 하는구나. 좋은 이름이네.”
마치 유기견을 돌보듯 카트린이 따스한 손길로 레나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잔뜩 겁에 질려 울먹거리던 레나는 이제 호흡에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볼수록 신기한 도구군.”
레나의 앞에 놓인 것은 카트린이 가방에 꺼낸 그림 책자였다.
해당 그림 책자에는 생활에 친숙한 것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카트린은 책자에 그려진 물건과 동식물을 가리켜 레나와 의사소통을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물체의 첫음절을 글자로 대체한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미꾸라지’, ‘안개’.
이렇게 순서대로 가리켜 ‘미안해’라는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었다.
카트린은 관련 자격증이라도 딴 상담사마냥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유도했다.
“보통 평민들은 일자무식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도적떼한테 당했다든지, 아니면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실어증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글보다는 이게 더 효과적입니다.”
카트린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처음에는 그냥 로보트를 타고 싸우는 일반 전투 부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본업에 들어가 보니 순회순찰대가 어떤 일을 하는 관군인지 바로 체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민정시찰을 하면서 백성들을 도와주는, 그런 부대였구나.
그림 책자를 이용해 대화를 이어나가던 카트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지?”
“막혔습니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냈는데, 여기서부터는 현지 영역이라 이곳의 지도 같은 게 필요합니다.”
카트린이 레나와의 상담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 이름은 레나.
― 농가의 자식.
― 부모님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이곳으로 끌려왔음.
“끔찍하군.”
“영지민을 지키지 못할망정…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고 하다니…….”
“바로 본대에 연락할까?”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는 영장이 청구되지 않습니다.”
“왜지? 레나가 평민이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평민을 괴롭혔다고 해도 저희가 찾아낸 건 아직 한 명뿐이라서 죄질이 그리 중하지 않습니다. 기드온 백작을 벌하려면 좀 더 증거를 모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책으로만 보던 암행어사가 된 기분이었다.
부패한 영주는 흡사 탐관오리가 생각나게 했고, 그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증거를 모아야 하는 것은 어사가 수사 활동을 하는 것과 유사해 보였다.
“음?”
레나와 상담을 하느라 피곤해진 카트린이 잠시 머리 좀 환기 시킬 겸 창가로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소대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
카트린의 손짓을 따라 2층 창문에 기대 아래를 쳐다봤다.
거기에는 우락부락한 남정네 서너 명 모여 파이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지낼 때도 창문 바로 아래에서 흡연하는 몰상식한 놈들 때문에 고통받은 적 있었는데, 여기도 다를 게 없네.
하지만 카트린은 간접흡연 때문에 나를 부른 것 같지 않았다.
“소대장님, 저들은 영방군이 아닙니다.”
카트린의 말을 듣고 아까 식당에서 본 병사들의 복식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때 본 복장과 지금 아래층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일치하지 않았다.
“휴식 중이라 잠깐 환복한 것은 아닌가?”
내 말에 카트린이 고개를 저었다.
“팔에 묶인 매듭과 왼쪽 심장 위쪽에 그려진 마크를 확인해 보십시오.”
카트린의 말에 눈을 찡그리고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까마귀인지 제비인지 모를, 까만 새가 그려져 있었다.
“저건 흑연(黑燕, 검은 제비)용병단의 심볼입니다. 즉, 저들은 용병이라는 소리입니다.”
“용병……?”
“흑연용병단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만 주면 뭐든 하기로 유명합니다. 대신에 가격이 꽤 센 용병단입니다.”
제국 서부 지대에서 쉬이 구하기 힘든 라즐리베리에 몸값이 비싼 용병단까지, 가난한 영지치고는 수상한 점이 제법 많았다.
“뭔가… 뭔가 있군.”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레나한테서 뭔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개를 돌려 레나를 쳐다봤다.
레나는 마음이 안정되자 카트린이 바닥에 펼친 그림 책자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셋에서 열일곱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
이런 어린 아이에게 욕정을 품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분노가 치솟았다.
“애시당초 기드온 백작이 성노리개 감으로 쓰려고 부모를 살해하고 데려온 아이입니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할 겁니다.”
카트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대장님, 중대장님께 지금 보고하실 겁니까?”
중대장이 우리를 데이트 보내며 내린 명령은 단순히 활동 시작의 허가를 받고 오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장교수첩에 적힌 행동강령에는 순회순찰대의 업무 특성상 선조치, 후보고를 해도 괜찮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이대로 부대에 복귀해서 중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 방법이 가장 정석이지만, 우리 3소대가 인원이 적은 것을 생각하면 이 일은 1소대나 2소대에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기껏 실적을 올릴 기회인데 다른 소대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둘째, 통신을 통해 중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 방법도 그렇게 내키지 않았다.
우선 아까 카트린이 말한 것처럼 지금 현재 단계에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중대에서 지원을 해 줄지, 안 해 줄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기드온 백작령 본성에 있는 상황이라 도청당할 염려도 있었다.
마지막 방법은 우선 중대에 약식으로 보고한 뒤, 나와 카트린이 자체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이었다.
일단 확실한 증거를 잡은 뒤에 지원을 요청하면 이 건은 무조건 우리 3소대의 실적으로 처리될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은 나머지 두 방법에 비해 위험성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법.
“카트린, 우리 둘이서 먼저 수사한다. 보고는 나중이다.”
“부유한 영지가 아니다?”
“예. 기드온 백작령은 광산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희귀광물이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그나마 채굴되는 철의 질이 그다지 좋은 편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체적으로만 소모하고 다른 곳으로 유통되지는 않습니다.”
“철저히 자급자족형 경제로 굴러가는 영지라는 소리인가?”
“완전히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그쪽일 겁니다.”
가난한 영지가 부유한 운영을 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약탈.
대상이 타 영지가 되었든, 아니면 자기 영지민이 되었든 말이다.
뭐, 후자는 약탈보다 수탈이라 불리는 거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작령인데, 어느 정도 규모는 되지 않나?”
“마도혁명 이전이라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도혁명 이후, 군사력의 중심은 보병에서 기간트병으로 옮겨졌고, 그에 따라 마석 광산이 없는 영지는 약소 세력이 되었습니다. 기드온 백작령에서는 아쉽게도 마석이 채굴되지 않습니다.”
병력의 양보다는 질적으로 우수한 기간트가 전쟁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라…….
보병이 아무리 많다고 해 봤자, 기간트한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기간트를 다루는 실력만 뛰어나다면 상대가 아무리 나보다 수가 많더라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말도 되겠지.
“…소대장님?”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자, 카트린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불렀다.
그때, 잠깐 자리를 비운 기드온 백작이 헐레벌떡 다시 돌아왔다.
“하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식사를 하는 건 내일 아침으로 미뤄도 될 런지요?”
그런데 기드온 백작이 돌아오자마자 나와 카트린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인상이 구겨졌다.
돌아온 기드온 백작의 몸에서 정체모를 기분 나쁜 악취가 났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어 정말 아쉽게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라도 같이하시지요.”
어지간하면 여기서 하루를 신세진 뒤, 내일 아침에 바로 본성을 떠날 생각이었다.
기드온 백작과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한 것에 그 어떠한 아쉬움도 없었지만, 여기서는 조금 입에 발린 말을 해 주기로 했다.
“하하하, 역시 도련님! 도련님의 모습을 보니 할아버님이신 선대 루겐바인 후작님이 생각나는군요.”
“저희 할아버님을 아십니까?”
“예? 그분도 언급 금지입니까?”
“…예?”
“예?”
무언가 대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드온 백작,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뭔가가 있는 건가.
하지만 묻는다고 해서 기드온 백작이 자세히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신들에게 말해 두었으니, 식사를 끝내면 녀석들이 방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내일 뵙지요.”
기드온 백작이 다시금 식당 밖으로 벗어났다.
참 바쁜 사람이네.
식사를 하다 말고 계속 왔다 갔다 하고.
“소대장님, 정말 내일 여기서 아침까지 해결하시고 가실 겁니까?”
“그냥 한 말이지. 그나저나 카트린, 아까 기드온 백작에게서 난 악취가 뭔지 아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인사과장님은 무언가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사과장님이?”
“제가 듣기로는 그분이 연금술에 약간의 조예가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냄새를 말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맞는 말입니다. 샘플을 채취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나와 카트린은 거기까지밖에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병사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 가슴이 드러난 흰색 원피스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뭐지?”
“오늘 밤 도련님의 밤 시중을 들 여자입니다.”
병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동공이 흔들렸다.
현대에도 성접대가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그런 것을 받아본 적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병사들이 성접대를 할 소녀를 데려오자 순간적으로 마음에 큰 동요가 발생한 것이었다.
“…소대장님이 요청하신 겁니까?”
아냐! 아니라고!
요 한 달간 카트린의 시선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가 근면 성실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늘 언행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경멸, 불신, 이해, 기대 순으로 그녀의 시선은 분명 변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단 한순간에 처음으로 돌아가 버렸다.
카트린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하긴, 나 같아도 ‘이 자식, 개과천선한 척하더니, 딱 걸렸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다.”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나는 병사들 보고 손사래를 쳐 소녀를 물리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인 후 소녀를 다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자 묘한 일이 일어났다.
소녀가 병사들을 뿌리친 후, 내게로 달려와 내 오른발을 잡고 발밑에 얼굴을 비비며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
이해할 수 없는 흐름에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소대장님, 백작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하룻밤을 같이 보내시지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카트린의 말에 놀라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카트린은 손에 작은 식사용 나이프를 쥐고 소녀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와, 그렇게 짧은 순간에 혹시나 자객일까 싶어서 전투태세를 갖춘 거야?
그녀의 말과 행동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뭐? 하지만…….”
그때, 카트린이 내게 귓속말을 했다.
“짚이는 게 있습니다. 일단 방으로 여자애를 데려간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카트린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나에게 다가오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은 깍듯하게 경례를 올리고는 소녀를 내버려 둔 채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소녀를 일으켜 세웠다.
솜털도 아직 안 벗겨진 앳된 얼굴에는 눈물이 흥건했다.
“무슨 일이냐?”
내 질문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아…우…어…으…….”
“뭐?”
소녀는 말이라기보다는 신음 소리 같은 것만 냈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러자 카트린이 소녀의 턱을 잡은 후 입을 살짝 벌렸다.
소녀의 입 안을 보자마자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혀가 잘렸습니다. 이빨도 다 뽑혔고 말입니다.”
차마 눈 뜨고는 보기 힘든 광경.
“이게 어찌된 일이지?”
“노리개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빨은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방해가 된다… 뭐, 그런 거겠지 말입니다.”
카트린의 설명에 소녀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초경도 안 왔을 것 같은 어린 소녀에게 이 무슨…….”
사람의 치아는 재생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말도 하지 못하고, 음식도 씹을 수 없을 것이었다.
단지 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해 한 인간의 미래를 송두리째 짓밟은 것이었다.
기드온 백작의 인륜을 저버린 행위에 치가 떨려 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이 마법이라는 게 존재하는 세계라 소녀의 치아를 복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몰골을 당한 것을 보니 있는 집안의 자식은 아닐 테고, 소녀가 자력으로 시술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우선 방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여기는 개방된 곳이라 보는 눈이 많습니다.”
카트린의 의견에 동의하며 식탁에 놓인 종을 울렸다.
그러자 예의 그 뚱뚱한 집사가 와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처음에 집사는 나와 카트린의 방을 따로 주려고 했지만, 내가 카트린과 같은 방을 쓰겠다고 요구하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레나라 하는구나. 좋은 이름이네.”
마치 유기견을 돌보듯 카트린이 따스한 손길로 레나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잔뜩 겁에 질려 울먹거리던 레나는 이제 호흡에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다.
“볼수록 신기한 도구군.”
레나의 앞에 놓인 것은 카트린이 가방에 꺼낸 그림 책자였다.
해당 그림 책자에는 생활에 친숙한 것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카트린은 책자에 그려진 물건과 동식물을 가리켜 레나와 의사소통을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물체의 첫음절을 글자로 대체한 것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미꾸라지’, ‘안개’.
이렇게 순서대로 가리켜 ‘미안해’라는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었다.
카트린은 관련 자격증이라도 딴 상담사마냥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유도했다.
“보통 평민들은 일자무식인 경우가 많은데다가, 도적떼한테 당했다든지, 아니면 뭐 여러 가지 이유로 실어증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글보다는 이게 더 효과적입니다.”
카트린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처음에는 그냥 로보트를 타고 싸우는 일반 전투 부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본업에 들어가 보니 순회순찰대가 어떤 일을 하는 관군인지 바로 체감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민정시찰을 하면서 백성들을 도와주는, 그런 부대였구나.
그림 책자를 이용해 대화를 이어나가던 카트린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지?”
“막혔습니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다 알아냈는데, 여기서부터는 현지 영역이라 이곳의 지도 같은 게 필요합니다.”
카트린이 레나와의 상담을 통해 알아낸 사실은 다음과 같았다.
― 이름은 레나.
― 농가의 자식.
― 부모님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하고 이곳으로 끌려왔음.
“끔찍하군.”
“영지민을 지키지 못할망정…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만 누리려고 하다니…….”
“바로 본대에 연락할까?”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는 영장이 청구되지 않습니다.”
“왜지? 레나가 평민이라서?”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평민을 괴롭혔다고 해도 저희가 찾아낸 건 아직 한 명뿐이라서 죄질이 그리 중하지 않습니다. 기드온 백작을 벌하려면 좀 더 증거를 모아야 합니다.”
어렸을 때 책으로만 보던 암행어사가 된 기분이었다.
부패한 영주는 흡사 탐관오리가 생각나게 했고, 그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증거를 모아야 하는 것은 어사가 수사 활동을 하는 것과 유사해 보였다.
“음?”
레나와 상담을 하느라 피곤해진 카트린이 잠시 머리 좀 환기 시킬 겸 창가로 갔다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지?”
“소대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
카트린의 손짓을 따라 2층 창문에 기대 아래를 쳐다봤다.
거기에는 우락부락한 남정네 서너 명 모여 파이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자취방에서 지낼 때도 창문 바로 아래에서 흡연하는 몰상식한 놈들 때문에 고통받은 적 있었는데, 여기도 다를 게 없네.
하지만 카트린은 간접흡연 때문에 나를 부른 것 같지 않았다.
“소대장님, 저들은 영방군이 아닙니다.”
카트린의 말을 듣고 아까 식당에서 본 병사들의 복식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때 본 복장과 지금 아래층에서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의 복장은 일치하지 않았다.
“휴식 중이라 잠깐 환복한 것은 아닌가?”
내 말에 카트린이 고개를 저었다.
“팔에 묶인 매듭과 왼쪽 심장 위쪽에 그려진 마크를 확인해 보십시오.”
카트린의 말에 눈을 찡그리고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까마귀인지 제비인지 모를, 까만 새가 그려져 있었다.
“저건 흑연(黑燕, 검은 제비)용병단의 심볼입니다. 즉, 저들은 용병이라는 소리입니다.”
“용병……?”
“흑연용병단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만 주면 뭐든 하기로 유명합니다. 대신에 가격이 꽤 센 용병단입니다.”
제국 서부 지대에서 쉬이 구하기 힘든 라즐리베리에 몸값이 비싼 용병단까지, 가난한 영지치고는 수상한 점이 제법 많았다.
“뭔가… 뭔가 있군.”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이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레나한테서 뭔가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고개를 돌려 레나를 쳐다봤다.
레나는 마음이 안정되자 카트린이 바닥에 펼친 그림 책자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열셋에서 열일곱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애.
이런 어린 아이에게 욕정을 품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분노가 치솟았다.
“애시당초 기드온 백작이 성노리개 감으로 쓰려고 부모를 살해하고 데려온 아이입니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할 겁니다.”
카트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대장님, 중대장님께 지금 보고하실 겁니까?”
중대장이 우리를 데이트 보내며 내린 명령은 단순히 활동 시작의 허가를 받고 오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장교수첩에 적힌 행동강령에는 순회순찰대의 업무 특성상 선조치, 후보고를 해도 괜찮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이대로 부대에 복귀해서 중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이 방법이 가장 정석이지만, 우리 3소대가 인원이 적은 것을 생각하면 이 일은 1소대나 2소대에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기껏 실적을 올릴 기회인데 다른 소대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둘째, 통신을 통해 중대에 지원을 요청한다.
이 방법도 그렇게 내키지 않았다.
우선 아까 카트린이 말한 것처럼 지금 현재 단계에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중대에서 지원을 해 줄지, 안 해 줄지 확신이 안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통신을 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기드온 백작령 본성에 있는 상황이라 도청당할 염려도 있었다.
마지막 방법은 우선 중대에 약식으로 보고한 뒤, 나와 카트린이 자체적으로 수사를 하는 것이었다.
일단 확실한 증거를 잡은 뒤에 지원을 요청하면 이 건은 무조건 우리 3소대의 실적으로 처리될 것이었다.
물론, 이 방법은 나머지 두 방법에 비해 위험성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원래 인생이라는 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법.
“카트린, 우리 둘이서 먼저 수사한다. 보고는 나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