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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영주 1권(18화)
Chapter Eight 고블린 국왕(2)


3

밖으로 나오자, 영지민들에게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는 피터가 보였다. 루멘이 물었다.
“뭐야?”
“영주님이 아는 숫자로는 세기 미안할 정도의 고블린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몇 마리라는 거야?”
“타밀론 후작령이 위험할 정도의 숫자라는 겁니다.”
“……!”
피터의 말에 루멘이 깜짝 놀랐다. 피터는 싸가지가 살짝 부족하기는 해도 머리는 똑똑했다.
아니, 머리가 좋아서 싸가지가 없는 건가?
아무튼 피터가 이런 걸로 거짓말할 리가 없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었다.
“그만큼 모일 수가 있어? 걔네들 지능으로?”
고블린들은 지능이 떨어진다. 지능하고 단체를 이루는 것하고 별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나,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다.
우선 많은 숫자가 모이면 식량이 부족할 때가 가끔씩 존재한다. 그러면 이성이 본능을 이기지 못하는 저능아들인 고블린들은 동족의 식량을 빼앗는데, 그러면 결국 다툼이 생기고 무리는 와해된다.
한 수십 명이라면 그들 중 가장 강한 자가 제지를 하거나 하겠지만, 피터가 말한 인원은 절대로 불가능한 숫자였다.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마기를 사용하여 강한 힘을 발휘하는 ‘마족’이라 불리는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 할지라도 결국 손이 안 닿는 부분은 있기 마련.
그렇다면 절대 피터가 말한 수만큼 모일 수가 없다.
“고블린들 사이에서 그랜드 마스터가 태어난 건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루멘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
위대한 마스터. 한마디로 괴물 중의 괴물이라 불리며, 전 대륙을 뒤져 봐도 열 명밖에 되지 않는 초인(超人).
공식 집계에 의하면 10명, 그중 할버드 제국에 4명이 속해 있었다.
수천만 인구를 자랑하는 할버드 제국에도 겨우 4명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초인(超人)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지만, 아무리 그들이라 할지라도 힘의 한계는 있기 마련.
피터가 말한 수라면 족히 수만은 될 터인데, 아무리 그랜드 마스터라 할지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면 가능하겠지요.”
마법사들도 경지를 나눈다.
세 개 미만의 마력 홀을 지닌 존재는 견습 마법사, 다섯 개 이하의 마력 홀을 생성한 마법사는 정식 마법사, 일곱 개 이하는 상급 마법사, 일곱 개보다 많은 수의 마력 홀을 만든 존재는 마도사 혹은 마스터 메이지(Master Mage)라 불렀다.
그리고 열 개의 마력 홀을 만든 마법사는 대마도사 또는 그랜드 마스터(메이지)라고 불렀다.
신체적인 능력에서는 대마도사가 다른 초인들에 비해 떨어질지 몰라도, 다른 초인들이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고블린들을 조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랜드 마스터 없어도 수만 마리의 고블린을 어떻게 막을 건데? 아니, 근데 그것들이 전부 다 고블린은 맞아? 수만 마리면 산맥의 고블린들 중 절반은 될 텐데?”
“산맥의 반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만 마리가 되는 건 확실합니다. 다들 대가리에 검은색 뿔이 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이사이에 갈색 뿔이 나 있었을 수도 있잖아.”
머리에 뿔이 난 몬스터는 고블린과 코볼트밖에 없었는데, 검은색의 뿔은 고블린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다. 코볼트의 상징은 갈색 뿔이었다.
“그게 중요합니까?”
“아니.”
그것보다는 몬스터가 그만큼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루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피터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이, 어느새 고블린들은 눈에 보일 정도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4

수만의 고블린을 이끄는 존재가 있다.
자신들의 동족을 이끌며, 요즘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인간들을 토벌하러 왔다.
몬스터가 인간을 토벌한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으나, 고블린들 중 이것을 이상히 여기는 자는 없었다.
그들의 군주.
자신들의 왕은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하고, 강하며, 대단한 인물이기에.
감히 어떤 이도 함부로 쳐다볼 수 없으며, 머리를 조아려야 하기에.
그 어떤 괴물이라도,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들의 왕의 기분을 더럽힌 놈은 죽어 마땅했다.

“후우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냐?”
루멘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고블린들이 제국의 정예병들처럼 두 눈에서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가장 앞에 선, 다른 고블린들에 비해 덩치가 두 배는 큰 고블린이 손짓 한 번만 하면 자신들의 뿔이 닳아 버리더라도 무식하게 돌진할 것만 같았다.
“누가 왕이냐?”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고블린이 말했다.
인간의 언어다.
고블린의 말을 들은 루멘은 한순간 아무런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고블린이 사람의 말을 했다.
사람이 짐승의 소리를 내기는 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냥 대충 흉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저놈의 고블린은 확실하게 ‘의사’가 전달되는 말을 했다.
“에…… 다시 한 번 말해 보렴?”
루멘이 얼이 빠진 표정을 되물었다.
“누가 왕인지 물었다.”
고블린이 대답했다.
루멘이 피터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피터도 루멘을 마주 보며 눈짓을 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고블린이 말을 해? 내 말에 대답도 하는 거 봤지?’
‘내 압니까?’
……아무 말도 없이 눈빛으로 이런 대화가 오갔다.
“다시 한 번 더 말하게 하지 마라. 누가 왕이냐?”
고블린이 힘주어 말했다.
순간, 루멘을 비롯한 사람들은 무거운 돌덩이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
몸이 버티지 못해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집채만 한 바위가 자신의 몸을 꾹 눌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아니, 그것은 루멘만의 입장이었다.
일반 영지민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고, 스카는 저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으며, 나머지도 그리 멀쩡하지는 않았다.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기현상은 장담하건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우락부락한 고블린이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은 고블린이다.
아무리 마족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기세도 느끼지 못하고, 단지 말에 힘 좀 줬다고 해서 사람들을 무릎 꿇릴 수는 없다.
초인이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도 불가능한 일이다.
백보 양보해서 한두 명이라면 강압적인 기세로 무릎 꿇릴 수 있을진 몰라도, 수백의 인간은 불가능하다.
“……왕은 없다.”
루멘이 답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을 제외하고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했다.
“왕이 없다고? 그렇다면 너희들의 왕은 어디 있지?”
고블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수도에 있다.”
“그 수도란 곳이 어디지?”
“길은 나도 모른다.”
루멘의 말을 들은 고블린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럼…… 여기서 가장 왕에 가까운 자가 누구지?”
“나다.”
“너인가?”
고블린이 루멘을 빤히 쳐다보았다. 고블린의 눈은 루멘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루멘은 자신의 내장까지 고블린이 살펴보는 듯한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너희 인간들의 손에 죽어 간 동족의 수가 천을 넘었다. 이 일에 대해 설명을 좀 해 줬으면 좋겠군.”
고블린의 말에 루멘은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꿈이 아닌가 싶었다.
무슨 고블린이 동족 천 명이 죽었는데 어떻게 해명할 거냐고 묻고 있다.
지나가던 개새끼가 웃을 얘기인 것이다.
‘내가 혼절한 건가?’
혹시 자신이 괴물과 싸워서 졌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지금 자신은 반쯤 미친 상태가 아닐까?
“죽기를 원하는 것인가?”
루멘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자, 고블린이 물었다. 순간, 몸을 짓누르고 있던 압력이 더욱더 커졌다.
하지만 역시 쓰러질 것 같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후우! 후우!”
갑자기 숨이 가빠 온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간다.
‘빌어먹을. 왜 하필 지금…….’
눈앞이 흐려져 왔다.
몸이 달아오르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괴물은 그 거대한 주둥이를 다시 한 번 들이밀고 있었다.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이 상황은 꿈이 아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고블린이 말하고, 인간에게 동족을 죽인 일에 대해 해명하라고 하는 일은 꿈이 아닌 현실이다.
다만.
‘제길…….’
더 이상 루멘에겐 고블린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피터가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갑자기, 그야말로 부지불식간에 강한 압력이 자신을 누르는 듯하더니,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반대로 평온해 보이던 루멘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지며, 루멘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신들을 압박하던 힘을 루멘에게 집중한 것인가?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엑스퍼트에 오른 스카가 쓰러졌다.
상급 기사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기운이 스카를 누르고 있는 것일까?
한데, 그러면 자신은 갑자기 왜 몸이 가벼워진 것이지?
피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하고, 알렌이나 아론도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은 어느새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 건가?’
압력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고블린이 내뿜는 기세가 왜 이리 대단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깨어나고 있다.
그 어떤 존재보다 두렵고, 그 어떤 존재도 말릴 수 없으며, 그 어떤 존재라도 배척해야만 하는.
괴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