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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7화)
제2장 백운(白雲)의 방문자(4)


유기준은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고작 열 살짜리 아이에게 이만큼이나 받았으면 됐다.
이젠 그도 뭔가를 보여 주어야 할 때.
그는 얼굴 가득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삼 년 전쯤에도 흑임촌에 한 번 왔는데, 그때 이 마을의 맛이 제 입맛에 딱 맞았습니다.”
“삼 년 전에 오셨다구요?”
“예. 그때는 홍 대장님 댁에 머물렀지요.”
“어머나, 그래요? 왜 내가 그걸 몰랐을까요?”
“그때는 한창 어수선했으니까요. 모르셨던 것도 당연합니다. 홍 대장님이 그날, 대장 자리에 오르셨거든요. 하하, 마을 전체가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 그때……!”
“예. 그때 홍 대장님의 댁에서 먹은 밥도 맛있었으니 분명 오늘 먹을 식사도 제 입맛에 딱 맞을 겁니다.”
“호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아참, 이럴 게 아니지. 잠시만 기다리세요. 시장하실 테니 밥부터 내드릴게요.”
중년 여인은 기분이 좋아진 듯 서둘러 주방으로 향했다.
지붕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데다,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보리와 감자를 넣어서 찌고 있는 밥 냄새가 솔솔 풍겨 오던 참이었다.
풍서가 말한 것처럼 한참이나 배를 곯은 불쌍한 몰골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할 테지만, 분명 먼 길을 떠나온 터라 허기가 좀 져 있기는 하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자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꽤나 컸는지, 풍서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넌 참 특이하구나.”
“에에, 그래요?”
“그래. 일부러 내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하며, 적당히 화제를 골라서 아주머니를 구슬린 것하며. 사람을 상대하는 데 재능이 있어.”
“그,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풍서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신기한 아이야.’
유기준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풍서를 지켜보았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능란하다 싶지만, 또한 이렇게 사소한 걸로 부끄럼을 탈 정도로 순박한 일면이 있다.
보통 어렵게 사는 아이는 세속적으로 변한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 편견이 있거나, 어떻게든 이득을 얻어 보려는 얄팍한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풍서는 그런 게 없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순진하게 진심으로 대한다.
‘아마 그러니까 모두한테 사랑받는 거겠지.’
마을 입구에서 지나쳤던 광산의 사내들, 그리고 여기서 만나본 마을 아낙. 어느 누구도 풍서를 미워하거나 깔보거나, 또는 업신여기지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처럼 풍서를 아껴 주는 걸 보면, 풍서가 이 마을에서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잘하면 마을을 대표하는 상인이 되겠어.”
“어? 제가요?”
“그래.”
“에이, 제가 어떻게 상인이 되겠어요.”
풍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저는 가게를 열 만한 돈도 없어요. 물건을 어디서 가져와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걸요.”
“호오, 그 정도까지 생각했다고?”
풍서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붕붕 젓고 있지만, 유기준이 보기엔 풍서는 상인이 천직이었다.
상점의 물건이 어디서 가져오는지 의문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가격을 얼마로 측정하느냐에 따라 이득의 크기가 결정된다는 것.
그걸 이해하고 있는 것만 봐도 보통 열 살짜리의 사고(思考)와는 전혀 다르다.
“이 마을을 위해서도 실력있는 상인은 필요한 법이야. 이 세상에 물건 없이는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없고, 그 물건을 구해 오는 건 상인이거든.”
“헤에…….”
“하지만 상인들은 성인군자가 아니지.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 게 상인이니까. 멋모르고 있다가는 바가지를 써서 힘들게 모은 식량이나 돈을 빼앗길 수도 있어.”
“그 정도로는…….”
“한 사람당 동전 하나만 덤터기를 써도 삼천 명이면 동전 삼천 개야.”
“아…….”
“알겠지? 그러니 마을을 대변해서 교섭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한 거야. 흑임촌을 진심으로 위하는 상인이 한 명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유기준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풍서는 간지러운 듯 코끝을 곰실거렸다. 그 와중에도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 걸 보니 새삼 뭔가를 가르쳐 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이만한 마을에 전담 상인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하지.’
촌락 이상, 도시 미만.
그 정도 크기의 마을이다 보니 자연스레 거쳐 가는 변화 과정쯤 될 것이다.
물론 이 마을에도 상점이 몇 개 들어와 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이미 대륙에 크게 자리를 잡고 있는 거대한 상회의 지부쯤 되는 곳이다.
억지로 덤태기를 씌우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진 않는다.
같은 물건을 놓고 볼 때, 도시에서와의 가격을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편에 든다.
물건을 운송하는 데 드는 비용이라든가, 외진 곳에서의 독점 판매라는 우위점 같은 것들을 톡톡히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그건…… 필요하겠네요.”
잠시 후, 생각을 정리했는지 눈빛을 반짝이는 풍서.
유기준은 빙긋 웃었다.
어쩌면 그는 지금, 훗날 흑임촌을 대변할 만만치 않은 전담 상인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아, 드세요. 별로 차린 건 없지만…….”
“아닙니다. 너무 잘 차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기준은 상째로 들어다 주는 중년 여인에게서 재빨리 상을 받아 들었다.
예상대로 보리와 감자를 넣어서 찐 밥에 정갈하게 볶은 소채, 닭고기를 삶은 뒤 잘게 찢어서 양념을 한 요리가 올라와 있었다.
척 보기에도 맛있어 보인다.
특별히 대단한 요리는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렇게나 맛있는 상을 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외지인인 유기준의 경우, 풍서가 없었다면 이런 곳을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였을 것이다.
“식사를 하기 전에…….”
하지만 풍서의 말대로 공짜로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기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매어 둔 달구지에서 작은 가죽 주머니를 하나 들고 왔다.
“별건 아닙니다만, 맛있는 식사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이건……?”
아주머니는 얼떨결에 가죽 주머니를 받아 들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죽 주머니를 펼치자 그 안에 갇혀 있던 고소한 냄새가 확 퍼진다.
“천부화생(天府花生:땅콩)입니다. 사천을 지나는 길에 좀 샀습니다.”
“어머나, 이 귀한 걸……!”
“별말씀을요. 이 식사와 비교하면 별것 아닙니다.”
실제로 유기준이 아주머니에게 건넨 것은 그리 상급품도 아니고, 애초에 여행길에 주전부리로 좀 먹을 요량으로 샀던 것이다.
하지만 바깥과 교류가 힘든 마을로 오게 되면 그것도 상당히 귀해진다.
“이거, 정말 받아도 되려나……?”
“그럼요. 별것 아닙니다.”
“그럼 고맙게 받을게요. 아참, 반찬 좀 더 드려야겠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잔뜩 담은 대접을 가지고 왔다. 하나하나 쌓여 가는 그릇이 탁자 위를 꽉 채웠다.
“하하…….”
유기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딱히 아주머니가 세속적이라 그런 게 아니었다. 인간관계란 본래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공평한 관계다. 누구든 자신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겐 더 잘해 주고 싶은 법 아니겠는가.
“호호, 그럼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저는 일이 있어서…….”
“아, 예. 살펴 가십시오.”
“조심해서 가세요―!”
아주머니가 한결 편안한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간 뒤, 유기준은 풍서와 단둘이서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풍서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기준이 먼저 한술 뜨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식사 예절이라는 건가.’
부모 없는 아이치고는 특이한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부모가 없는 아이이기에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더욱 그렇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먹자.”
“네!”
그가 먼저 밥을 입에 넣자, 그제야 풍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유기준도 먼 길을 오며 허기져 있던 탓에 한 번 수저를 들자 멈출 수가 없었다.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두 사람은 조금 많은 듯했던 식탁 위의 음식들을 깨끗이 비웠다.
식사는, 역시나 맛이 있었다.

***

풍서와는 식사가 끝난 후에 헤어졌다.
유기준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느냐면,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기준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풍서가 할 일이 있다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성실한 아이다. 분명 웬만한 어른보다 더 제 앞가림을 잘할 것이 분명했다.
“뭐, 또 만나게 되겠지.”
왠지 그 아이와의 인연은 그리 짧지 않을 듯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외진 마을이니만큼 찾아서 만나려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히히힝―!
유기준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황남이 멈춰 서자 뒤에서 끌려오던 달구지도 동시에 움직임을 멈춘다.
유기준은 코를 가져다 대면 짙은 나무향이 날 것만 같은 거무튀튀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백운상회(白雲商會).

그건 흑임촌에 단 두 개뿐인 상점 중 하나의 이름이자, 또한 대륙 전역에 수백 개의 지점을 갖추고 있는 거대한 집단의 이름이기도 했다.
유기준은 달구지에서 내렸다. 마침 안쪽 창고에서 볏단 몇 개를 어깨에 짊어지고 나오고 있는 건장한 노인이 보여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헛……!”
노인은 처음엔 미간을 지그시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깜짝 놀라 볏단을 떨어뜨렸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불쌍할 정도지만, 유기준은 그게 다 저 노인의 연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노인은 볏단을 줍는 것도 잊은 채 한달음에 달려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오셨습니까, 대인!”
마치 고관대작이 비천한 농부의 집을 방문한 듯한 모습이다.
유기준은 감탄하여 손으로 이마를 탁! 하고 때렸다.
“나참, 이러깁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오랜만입니다, 강 점주님.”
유기준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노인도 껄껄 웃는다.
“허허, 오랜만입니다.”
“평소대로 해요, 평소대로.”
유기준은 질렸다는 듯이 양손을 내저었다.
“허허. 알았다, 이놈아.”
“그렇다고 너무 예전으로 돌아가진 마시고요. 저도 나름대로 지위가 있는 놈입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이 늙은이를 놀릴 셈이야?”
얼굴은 공손하게 웃고 있으면서 목소리는 살벌했다.
“나참, 당할 수가 없다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안으로 들어와라. 오랜만에 운남 특산 보이차의 진수를 보여 주지.”
“예이, 예이.”
아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이번엔 유기준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유기준이 끌고 온 달구지는 백운상회의 하인들이 가게 안쪽의 마굿간으로 데려갔다.
유기준이 찾아온 그날, 흑임촌의 백운상회는 지어진 후 두 번째로 대낮에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