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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1화)
제4장 광도(鑛道) 사건(1)
“풍서야!”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는 한적한 통나무집에 공보하와 을유랑이 함께 와 있었다.
“풍서야! 좀 나와 봐!”
두 사람은 걱정스런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둘은 오늘 잡화점 앞에서 있던 일을 전해 듣자마자 달려온 길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종대의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고 들었다.
그것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듣자마자 풍서가 걱정되었다.
항상 웃고 있지만 사실 속은 여린 아이다. 친구로서, 또는 친한 형으로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풍서가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걱정이 되었다.
“큭, 도대체 왜……!”
을유랑은 분한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종대의 아버지는 도대체 왜 풍서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 것일까.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비켜.”
“보하 형?”
“비켜. 문 열 테니까.”
공보하의 가슴까지도 안 오는 나지막한 나무 문은 지금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굳게 닫혀 있었다.
공보하는 긴 다리로 성큼 다가가 문 너머로 팔을 넘겨 걸쇠를 열어 버렸다.
“보, 보하 형?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직접 문을 열어 버리는 건…….”
“풍서와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상관없어.”
공보하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을유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주춤거리며 공보하의 뒤를 따라갔다.
“풍서!”
공보하는 곧장 큰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벌컥 열어젖힌 순간,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기, 형? 풍서는? 풍서는 어떻게 됐어요?”
졸지에 공보하에게 시야가 가려 버린 을유랑이 궁금해서 좌우를 기웃거린다.
“으음…….”
공보하가 신음을 흘렸다.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가자 을유랑에게도 방 안의 풍경이 보였다.
“아……?!”
잠시 놀라서 굳어졌던 을유랑이 ‘읏!’ 하고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어? 보하 형? 그리고 유랑이도 왔네?”
풍서는 그제야 두 사람을 알아차린 듯 방바닥에 엎드린 채로 방긋 웃고 있었다.
왼쪽 뺨이 벌겋게 물들어 있는 건 분명 종대의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후유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풍서는 웃고 있었다.
을유랑은 그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되는 한편,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부글부글 끓었다.
“너……!”
“너! 밖에서 부르는데 왜 대답을 안 한 거지?”
을유랑은 군자답지 못하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공보하가 한발 빨랐다.
“어? 밖에서…… 불렀어요?”
“…….”
“으음. 미안해요, 형. 미안해, 유랑아. 내가 좀 집중하고 있었거든.”
들고 있던 세필 붓의 손잡이로 머리를 긁적이는 풍서의 순진한 표정을 보자 두 사람은 긴장이 턱하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화를 낼 마음도 싹 사라져 버린다.
풍서의 순진무구한 표정은 두 사람이 동시에 허탈한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휴우, 그나저나 뭐 하고 있었어? 이게 뭐야?”
을유랑은 방 안으로 쪼르르 들어와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바닥을 점유하고 있는 종이들로 시선을 옮겼다.
광산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누런 마분지에는 마치 나무가 가지를 펼치듯 풍서가 앉아 있는 곳으로부터 글씨들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홍 대장님, 장욱 아저씨, 복 아줌마……. 어? 이 두 분은 왜 나뉘어져 있지? 금 아주머니네 집이랑 우리 집이랑……. 이게 다 뭐야?”
을유랑은 바닥에 놓인 글씨들을 쭉 읽어 나가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을유랑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정보를 읽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나열한다.
사서삼경을 일곱 살 때 다 뗀 업적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빠른 사고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을유랑은 순식간에 마분지에 적힌 글자들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혹시 이거…… 태극교에 관한 거야?”
을유랑의 눈에는 이미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응, 맞아. 유랑이 넌 바로 알아채네?”
풍서가 감탄하듯 박수를 쳤다.
“복 아주머니와 장욱 아저씨가 나뉘어져 있는 걸 보고 알았어. 근데 이건 왜 나눈 거야?”
“그냥……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확인? 뭐를?”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으음, 그냥 나눠 보고 싶었어.”
풍서는 스스로도 설명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 우물거렸다.
한편, 공보하는 을유랑과 풍서의 사이에서 마분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보하는 을유랑처럼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고 추리하는 것엔 자신이 있었다.
공보하는 풍서가 왜 이런 걸 만들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풍서, 너. 태극교가 우리 마을을 얼마나 장악했는지 알고 싶었던 거야?”
“응? 으응, 맞아요. 그거예요.”
풍서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바로 그거라는 듯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보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종대 아버지가 칠성태극교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종대 아버지의 편을 드는 마을 사람들을 보니까 나눠 보고 싶었어요.”
명확하지 못한 말투는 풍서가 열 살짜리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준다.
흑임촌 마을 사람들의 숫자는 천 단위가 넘는다.
그걸 집중해서 정리하다 보면 공보하와 을유랑이 찾아온 것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그래?”
공보하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런 풍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어느새 풍서의 옆에 앉아 마분지에 아는 이름들을 추가해 나가고 있는 을유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번갈아 이름을 말하며 점점 마분지에 글씨를 늘리고 있었다.
“너희들 참…… 특이하다.”
공보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런 열 살짜리들이 있을까?
“네에?!”
“보하 형이 더 특이하죠! 저희가 뭐가 특이해요?”
풍서는 놀랐고, 을유랑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따졌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모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너희가 더 특이하다. 그건 논란의 여지가 없어.”
“윽, 그럴 리가 없어요!”
“나처럼 무예를 수련하는 아이들은 저 밖에 나가 보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거야. 하지만 너희처럼 뭔가를 그리고 탐구하는 열 살짜리 애들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공보하는 풍서와 을유랑이 지도를 그리는 취미도 알고 있었다.
풍서가 자랑 삼아 보여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으응, 그치만 재밌어서요…….”
“맞아요. 이런 건 왠지 집중이 돼요.”
두 사람은 그게 왜 이상한지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공보하는 손을 내저었다.
“됐다. 너희는 그걸로 괜찮아. 그보다 풍서, 너 그거 그만둬도 돼.”
“네?”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에?”
풍서와 을유랑이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쳐다봤다.
공보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품 안에서 가죽으로 덧댄 종이를 한 장 꺼내 풍서에게 건네주었다.
“보하 형, 이건……?”
“한 번 봐.”
풍서는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종이는 중간에 세로로 길게 선이 하나 그어져 있고, 좌우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풍서와 을유랑이 하고 있던 일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에……?”
“보하 형, 혹시 먼저 하고 있던 거예요?”
공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다!”
“이런 건 언제 다 했어요?”
공보하는 잠시 문밖의 기척을 살피더니, 곧 이야기해 주었다.
“너희니까 해 주는 말인데, 이건 내가 시작한 게 아니야.”
“네?”
“홍 대장님이 나한테 부탁하신 거다. 난 이걸 한 달째 조사하고 있었어.”
풍서와 을유랑이 눈을 끔뻑거렸다.
먼저 사태를 알아차린 건 을유랑이었다.
“음, 그럼 홍 대장님이 태극교에 대해 의심하고 계시다는 건가요?”
“생각이 빠르구나.”
“우와, 유랑이. 대단한데?”
공보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서가 옆에서 을유랑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홍 대장님은 오늘 있던 일처럼 마을 내부에서 서로 대립하는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고 했어. 그걸 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었다.”
“에, 그래요? 그럼 그 태극교의 사람들이 홍 대장님을 싫어하는 거예요?”
“싫어한다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저 감정적으로 싫어하는 것과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이들은 아마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건 아무리 머리가 좋고 특이한 아이들이라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경험이 있지 않으면 그 둘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런 면에선 내가 특이한 건가?’
공보하는 자조하듯 웃었다.
“자,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 그보다 풍서, 너는 괜찮은 거냐?”
“네? 뭐가요?”
“오늘 있던 일 말이야.”
“아, 생각해 보면 종각 아저씨가 기분이 나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뭐.”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풍서.
“그…… 래.”
공보하는 순간 눈이 부시다고 느꼈다.
풍서는 그런 ‘척’을 하는 게 아니다.
화가 나는데 참는 것이 아니다. 착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결과, 공보하는 풍서가 진짜로 저렇게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기 욕심이 없고 이기적인 면도 없다.
남들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진실로 공감할 줄 안다. 그런 점에서 특별한 아이다. 공보하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아? 얻어맞을 정도의 일은 아니었잖아?”
을유랑은 그 일을 다시 떠올리자 화가 나는 듯 풍서를 다그쳤다.
“솔직히 좀 억울하긴 하지만…… 괜찮아.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 그보다는 장욱 아저씨랑 종각 아저씨가 나 때문에 싸우셨어. 그게 걱정돼.”
“그거야말로 별거 아닌…… 휴우, 말을 말자. 됐어. 앞으로는 그런 데 끼지 마. 팔극상회 쪽은 근처에도 가지 말고.”
을유랑이 딱 부러지는 말투로 충고했다.
“으응…….”
풍서는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공보하와 을유랑은 그런 풍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다음 날, 풍서는 팔극상회의 앞에 서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솔직히 긴장되었다.
어제 바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곳까지 오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도 해야 돼.’
풍서는 마음을 다지듯 다시 한 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종대 아버지와 장욱 아저씨가 서로를 노려보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다.
앞으로는 두 분이 싸우지 않도록 그가 노력해야만 했다.
“저기…….”
풍서는 팔극상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며 조심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딸랑― 하고 문에 매달려 있던 풍경이 소리를 낸다.
안쪽에는 수많은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곡식과 말린 과일에서부터 자그마한 머리빗이나 노리개 같은 잡화까지, 없는 게 없는 듯한 풍경이다.
풍서는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가게의 풍경을 감상하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요?”
안쪽에서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거한이 걸어나왔다.
종대의 아버지, 종각이다.
사나운 인상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온 그는 가게에 들어온 게 풍서라는 걸 확인하자 도깨비처럼 인상을 썼다.
“너 이놈, 네가 왜 여길……!”
“저기, 아저씨!”
풍서는 종각의 앞으로 달려가서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도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일을 돕겠다고?”
“네. 그동안은 다른 분들께 미리 약속했던 일로 바빴으니까요. 오늘은 괜찮아서 와 봤어요.”
종각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풍서를 노려보았다.
“이깟 일로 내 기분이 풀릴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네놈이 워낙 잔머리를 잘 굴리는 터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종각은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저씨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니까, 오늘은 약속대로 도우러 온 거예요.”
“흐음.”
“그러니 일을 하게 해 주세요. 네?”
풍서가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띠자 종각의 사나운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집스러운 얼굴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사이, 풍서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각, 바쁜가?”
풍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봤다.
최근에 유난히 종각과 친하게 지낸다는 방앗간의 강씨였다.
새우처럼 유난히 작은 눈, 그리고 허리춤에 태극 문양의 방울을 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풍서는 다시 종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종각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잠시 짓다가, 이내 심각한 얼굴로 풍서를 쳐다봤다.
“아니, 괜찮네.”
“그럼 다행이군. 이야기를 좀 했으면 싶은데.”
“그러지.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이 녀석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종각은 풍서에게 손짓했다.
“창고 일을 도와. 단, 오늘 일삯은 동전 네 개. 그 이상은 못 준다. 알았냐?”
동전 네 개.
지금부터 하루종일 일하는 것치곤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지만 풍서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따라와.”
종각은 풍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가게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따각. 따각.
목발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