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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2화)
제4장 광도(鑛道) 사건(2)
“으읏…… 차!”
풍서는 오십 개째의 나무 상자를 옆으로 옮긴 뒤 이마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냈다. 종각이 시킨 일은 창고 안쪽에 쌓여 있는 곡식 상자를 꺼내기 쉽게 입구 근처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
하나하나의 무게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게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다 보면 지치는 건 당연하다.
게다가 풍서는 아직 육체적으로 덜 발달한 열 살짜리였다.
풍서는 금세 지쳐서 오뉴월의 개처럼 헉헉거리고 말았다.
“으아, 힘들다. 종각 아저씨는 매일 이런 걸 하는 건가?”
인상도 강하고 몸도 우락부락해서 강해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예전에 광산에서 있던 일로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된 사람일 뿐이다.
아무래도 힘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은 무리일 것이다.
풍서는 종각이 신경질적이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된 것도 이유가 있겠구나 싶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예전엔 홍 대장님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 했어.’
심지어 어제 풍서를 감싸 주었던 장욱 아저씨와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했다.
그랬던 두 사람이 다리가 불구가 된 후 성격이 정반대로 뒤바뀌면서 원수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으음, 계속해야 하는데…….”
풍서는 저릿저릿한 어깨를 스스로 주무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빨리 짐을 옮긴 뒤에는 청소도 해야 했다. 지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으윽, 일단 조금만 쉬자.”
홍 대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에 휴식도 일이라는 말이 있다.
풍서는 속이 텅 빈 것처럼 소리가 나는 나무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지듯이 주저앉았다.
안 하던 일을 하다 보니 어깨와 팔이 욱신거렸다.
“으윽, 근육이 뭉쳤어―”
풍서는 뭉친 어깨를 주무르다가 귀를 쫑긋 세웠다.
“……수 없어. 처리를…….”
풍서의 눈이 커졌다.
“어……?”
비록 작게 들리긴 하지만, 거칠게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종각의 것이었다.
풍서는 본능적으로 벽에 귀를 가져다 댔다.
허술하고 낡은 나무 벽은 속이 텅 빈 건지, 벽 너머의 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교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처리해야 하네. 교단에선 이곳 흑임촌을 빨리 교의 산하에 두고 싶어 하네.”
“으음, 그렇지만 무슨 수로?”
“방법은 수도 없이 많지. 최근에 부임한 양료관이 우리 교의 사람이니 어려운 일은 없을 걸세. 중요한 건 방해가 되는 홍 대장이나 장욱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문제야.”
“…….”
“혹시 옛정 때문에 고민되나? 그렇다면…….”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야. 그깟 놈 때문에 내가 여기서 멈출 리가 없지.”
종각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교사부(敎師父)께선 내게 새로운 인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어. 칠성일원(七星一元) 태극만상(太極萬象)!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좋아, 그 기개일세.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자네가 이 지역의 교부(敎父)로 선정될 확률이 높다고 하더군.”
“후후, 교사부께는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게. 홍 대장은…… 조만간 ‘사고’로 죽을 테니까.”
풍서는 턱, 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아랫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홍 대장이 죽는다?
죽는 게 뭐지?
‘사고’로 죽는다고?
홍 대장이 어떻게 사고를 당하지?
항상 밝고 강건하며, 풍서를 챙겨 주던 홍 대장이 도대체 어떤 일을 겪으면 죽을 수 있지?
정말로 홍 대장은 죽는 것일까?
“사람은…… 쉽게 죽잖아…….”
풍서의 어머님은 어릴 적에 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몇 년 전에 타계했다.
죽음이란 건 생각보다 쉽게 일어난다.
실제로, 새로 뚫던 광도가 무너져서 사람이 죽는 일은 몇 년에 한 번씩 꼭 일어나곤 했다.
“안 돼, 안 돼…….”
풍서는 석상처럼 굳어진 채 잠시 고민하다가 창고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마을 안에는 태극교의 신자들이 많다. 전체의 절반을 넘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째서일까.
이 순간 풍서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얼마 전에 만난 외지의 상인이었다.
‘홍 대장님네 집에 가야 돼.’
홍 대장과 부인은 이곳에 없을 테지만, 그곳엔 분명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딘가 나른해 보이고 세상의 모든 일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풍서에게 앞으로의 일에 대한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빨리, 한시라도 빨리.’
풍서는 숨이 턱에 닿을 만큼 빠르게 달렸다.
멀리 홍 대장의 집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흑임촌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붉은색 지붕이다.
풍서는 단단한 통나무 대문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쿵쾅거리는 소리가 안쪽까지 울려 퍼졌다.
풍서는 걱정이 되었다.
분명 그는 유기준에게 이곳에서 잘 것을 추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시간에 집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다.
‘홍 대장님이 죽을 수도 있어. 위험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어.’
너무나 초조해서 문이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누굽니까, 밖에?”
안쪽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서는 문 위로 다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있었다.
유기준이 평소대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나른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어? 너는……?”
유기준은 잠시 놀란 얼굴로 풍서를 쳐다보다가 곧 이상함을 느꼈는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유기준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풍서는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굳어 있다가 말했다.
“홍 대장님이…… 위험해요.”
풍서는 조금 긴장하며 유기준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나타나서 홍 대장님이 위험하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을까?’
말을 하는 자신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오해는 하지 않을지.
혹시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들어와.”
하나 유기준은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풍서의 한 손을 잡아 주며 방 안으로 이끄는 얼굴엔 진지한 빛을 품고 있었다.
풍서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믿어 줬어.’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의 말을 믿어 주었다. 그것도 어딘가 나른하고 만사가 귀찮아 보이던 첫인상과는 정반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 준 것이다.
풍서는 그 순간, 유기준과 처음으로 만난 것만 같았다.
***
“자, 일단 물부터 한 잔 마시고, 좀 진정해라.”
유기준은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능숙하게 물을 한 잔 따라서 풍서에게 건네주었다.
물잔을 건네받는 풍서의 손은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제 진정이 좀 됐니?”
유기준은 풍서가 물을 마시며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하는 것을 끈기있게 기다려 준 뒤 물었다.
“네. 이제 괜찮아요.”
아직까지도 손끝이 덜덜 떨렸지만, 풍서는 다부진 얼굴로 그렇게 답했다.
“그럼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있겠어?”
“네.”
“말하기 힘들면 좀 더 기다려 줄 수도 있다.”
유기준은 의외로 굉장히 상냥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할 텐데도 풍서를 배려하고 있었다.
“홍 대장님이 위험해요.”
풍서는 용기를 내서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종각 아저씨네 가게에 갔어요. 어제 있던 일을 사과하고 일을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창고에서 방앗간 강씨 아저씨랑 이야기 나누는 것을 우연히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들었니?”
“태극교의 앞날을 위해서라고…… 홍 대장님은 ‘사고’로 죽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홍 대장님이 없어지면 종각 아저씨가 교…… 교…….”
“교부?”
“네, 교부가 된대요.”
“음.”
풍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교부라는 말이 나온 순간, 유기준의 얼굴은 무섭도록 차가워 보였다.
“그 사람이 홍 대장님을 죽이겠다고 직접 말했니?”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교사부께는 걱정 마시라 전해 달라고, 홍 대장님은 ‘사고’로 죽을 거라고 말했어요.”
풍서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서 대답했다.
“그런가…….”
유기준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그래, 알았다. 이 일은 내가 홍 대장님과 상의해서 처리할게.”
“네. 저기, 홍 대장님 괜찮으실까요?”
“일단은 미리 알고 있으면 막을 수 있는 것도 많을 거야. 지금부터 대처해야겠지. 그보다 풍서, 너는 그것 말고 혹시 더 들은 이야기 없니?”
“아, 저기…… 양료관이 자기 편이라고 말했어요.”
“……!”
그 말에 유기준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양료관? 과연. 그래서…….”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너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니까.”
그렇게 말하는 유기준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보였다. 깊게 가라앉은 두 눈에서 범상치 않은 빛이 번뜩였다.
“저기, 저…….”
“응?”
“저는 도움이…… 됐을까요?”
“물론이지. 양료관 이야기도 그렇고, 홍 대장님께 위험을 알려 준 것도 그렇고……. 이번에 일이 잘 풀려서 홍 대장님이 무사하게 된다면 그건 다 네 덕분이다.”
유기준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봄바람이 부는 날의 따뜻한 햇살 같은 웃음이다.
풍서는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역시 아저씨한테 말하길 잘했어.’
마을 사람들은 누가 태극교의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외지인이면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유기준을 찾아온 건데, 그건 역시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지, 풍서야.”
“네?”
“이왕 도와준 거, 조금만 더 도와주지 않을래?”
“어떻게…… 요?”
“간단해. 너한테는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일 거야.”
유기준은 덥수룩한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며 씩 웃었다.
두 눈은 반짝이고, 입꼬리는 말려 올라갔다.
마치, 못된 장난을 계획한 악동 같은 웃음이다.
“아저씨.”
“응?”
“……이상한 일 아니죠?”
“저얼―대 아니지.”
“…….”
풍서는 더더욱 미심쩍어졌다.
“꼬맹이, 나를 못 믿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어떤 일인데요?”
“한다고 하면 말해 줄게.”
“그, 그런 게 어딨어요. 역시 이상한 일인 거죠?”
“그런 게 어딨긴. 여기 있지.”
“윽……!”
“이걸 하면 홍 대장님을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될걸?”
“……알았어요. 할게요.”
풍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되잖아요.”
“자알―! 생각했어!”
풍서는 짝!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얻어맞았다.
풍서는 절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웃었다.
그 감촉은 아프고 따가우면서도 따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