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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3화)
제4장 광도(鑛道) 사건(3)


“그래서…… 어디서 나왔다고 하셨습니까?”
“백운상회의 상주입니다. 아까 입구에 계시던 낭관(郎官)분께 말씀을 드렸는데요.”
“아, 그래요? 보시다시피 제가 최근에 일이 많아 정신이 없다 보니 보고를 제대로 듣질 못합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로……?”
“팔극상회에 대해 상의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호오, 그래요?”
유기준은 능청을 떨고 있는 늙은 너구리를 눈앞에 두고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음습한 인상에 눈이 작고 얼굴이 각져 있는 사내.
이런 인상은 천성적으로 남을 잘 믿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런 일로 엮이지 않은 상태에서 만났다면 아마 평생 상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척하긴. 거만한데다 능청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상인의 본분이다.
유기준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방 안의 풍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딱 필요한 것만 놓여 있고, 나머지는 전체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살풍경한 방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태극교와 관련된 문양은 방 안에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집무용으로 보이는 책상에는 서찰과 자료 뭉치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비단 천으로 싸여 있는 서찰 몇 장이 눈에 띄었다.
유기준은 다시 눈앞에 있는 거만한 양료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뜬 양료관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백운상회의 상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양료관이라는 자리는 마을에 들어가는 식량과 마량을 감독하는 자리이지요?”
유기준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렇습니다만?”
“그럼 흑임촌으로 들어가는 물량도 감독하고 계시겠군요?”
“허허, 감독이라기보단 그저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정도입니다만.”
양료관은 마치 고위 관료처럼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예에, 그렇지요.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상인들과 상대하는 것이 양료관이 하는 일입니다. 마을에서 하는 자체적인 상행위는 특별히 ‘죄가 없는 한’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유기준은 마치 새로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심쩍게 바라보는 양료관의 시선이 따가웠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예?”
“함께 데리고 온 그 아이는 누굽니까?”
“아아, 이 아이 말입니까?”
유기준은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풍서의 손을 놓고, 덥수룩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가 이곳 지리를 잘 모르기에 안내해 달라고 부탁한 꼬마이지요. 대가로 맛있는 것을 사 주기로 했는데, 아마 그걸 사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모양입니다.”
“……그렇습니까? 현지 아이들과 벌써 친해지신 듯하군요. 허허, 상인의 귀감입니다.”
“아이쿠, 별말씀을요. 아이에게 믿음조차 주지 못한 못난 상인인데 그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습니다.”
말과 함께 유기준은 풍서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꼬마야, 진지한 이야기를 할 건데, 잠시 나가 있지 않겠니?”
“싫어요.”
“이 녀석, 어른들이 할 이야기가 있다면 비켜 줘야 하는 거야. 내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그러냐?”
“…….”
“쯧쯧, 의심이 많구나. 으음, 그렇다면 이 방 안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거라. 그럼 모습이 보이니까 상관없겠지? 우리 두 사람은 긴히 나눌 말이 있다.”
“네에.”
풍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료관은 그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유기준은 그런 양료관에게 씩 웃어 주었다.
“자, 그럼 관리님. 잠시 드릴 말씀이…….”
“예, 말씀하시지요.”
“태극에 관련된 일입니다.”
움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양료관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극이라니요?”
“아, 태극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군요. 팔극상회 말입니다.”
유기준은 진지한 얼굴로 양료관을 응시했다.
양료관도 유기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째서 숨기십니까?”
“무, 무엇을 말입니까?
“교와 친분이 있으신 걸 말입니다. 부끄러워하시는 겁니까?”
“예? 그게 무슨…….”
“관청으로 납입되는 물건은 언제부턴가 팔극회에서 모두 주관하게 되었지요. 저희 백운상회의 입장에선 날벼락을 맞은 듯한 일이었습니다만, 그래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팔극회의 물건은 저희 물건에 비해 값이 싸니 말이죠.”
“예. 뭐, 그런 점에선 대단합니다만…….”
“그래서 말입니다, 팔극회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예? 그러면 팔극회의 지부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상회 쪽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어서 말입니다.”
유기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즉, 팔극회의 지부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지부와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물론,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양료관은 그제야 유기준의 뜻을 알아챈 듯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어이쿠, 이거 감사합니다.”
“팔극회 쪽으로 들어가고 싶으신 겁니까?”
“꼭 그렇다기보다는, 직접 만나면 좀 더 서로 이득이 되는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상인분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꼭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허허, 그렇겠지요. 하지만 관직은 딱딱하고 불평불만도 많은 자리라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내일 오전 중에 이곳으로 다시 한 번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럼 팔극회 지부의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내일 서로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허허,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유기준은 양료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풍서가 벽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문밖으로 나올 때까지 양료관은 웃는 얼굴로 배웅하고 있었다.
처음의 긴장한 모습이 완연하게 사라진 얼굴이었다.
“풍서야.”
“네.”
“성공했냐?”
“……네.”
풍서는 볼이 부루퉁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서자, 풍서가 손바닥만 한 종이 몇 장을 꺼내 유기준에게 건네주었다.
“과연. 내 말뜻을 잘 이해했구나, 풍서야.”
“네…….”
“중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언제든 집을 수 있게 놓인 비밀스런 서류였지?”
“벼루로 눌러 두고 있었어요.”
“과연. 그건 확실하구나. 몰래 집는 데 어렵지는 않았니?”
“의외로 쉬웠어요. 그게 문제였지만요…….”
양료관은 유기준에게 전면적으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서류를 빼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풍서의 얼굴은 어두웠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의 물건을 슬쩍한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이건 도둑질이 아니야.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풍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네, 알고 있어요.”
“풍서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장사를 하고 있단다.”
“네?”
“장사란 다른 사람에게 내 물건을 최대한 비싸게 팔면서 이득을 얻는 과정이야. 그러기 위해선 때론 거짓말도 해야 하고 과장도 해야 돼.”
“…….”
“단, 그 거짓말과 과장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면 안 돼. 장사 도중의 거짓말과 과장은 오직 가격 협상을 위한 것에 국한되어야 한다. 물건값을 한두 푼 더 준다고 해서 삶에 지장이 생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지. 장사는 그러한 규칙 아래에서 하는 놀이 같은 거야.”
풍서는 묵묵히 유기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장사를 하는 상인은 자기 물건을 좀 더 가치있게 만들기 위한 것에는 무슨 수든 다 사용해야 돼. 단, 인정(人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
“오늘은 그 연장선이야. 방금 네가 한 일은 이 마을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벌인 협상 중에 가격을 낮추기 위해 한 일에 지나지 않아.”
“가격…… 이요?”
“그래. 마을을 지킨 대가가 홍 대장님의 목숨이라면 너무 비싸지 않겠니?”
“……!”
풍서는 그 순간 유기준이 말하는 ‘장사’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장사란 곧 삶이다. 누구든 장사를 하며 살고 있어. 파는 건 꼭 물건이 아닐 수도 있거든. 자기 능력을 팔 수도 있고, 자신의 시간을 팔 수도 있는 거지. 누군가는 그걸 어느 정도의 값을 치러 사고. 그러면서 세상은 돌아가는 거야.”
“아…….”
“세상은 큰 장사판이야.”
풍서는 멍하니 그 목소리를 들었다.
세상은 큰 장사판.
물건이든, 능력이든, 시간이든.
자신이 가진 걸 내다 팔고, 그걸 필요한 사람이 적당한 가격을 주고 사가는 거대한 시전.
‘모든 것은 장사…… 사람들은 모두 상인…….’
풍서는 그 순간, 온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듯했다.
“방금 너는 팔극회와 양료관이 담합했다는 증거를 손에 넣었어. 그리고 그 덕분에 홍 대장님을 살릴 수 있는 길에 더 가까워졌다. 다시 말해 지불해야 할 가격을 낮춘 거야.”
“아…….”
풍서는 빙긋 웃는 유기준이 처음으로 대단하게 보였다.
그랬다.
그러고 보면 일이 시작된 뒤로 유기준은 단 한 번도 얼굴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압박감 속에서 웃을 수 있다니.
너무나 대단했다.
“자, 가자. 이젠 본격적인 싸움이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유기준은 손을 내밀었다.
풍서는 그 손을 붙잡고…… 유기준과 비슷해지기 위해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