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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상회 1권(19화)
제6장 절망의 밤[夜](4)
극도의 공포.
생명을 위협받는 두려움 속에서 아래턱이 덜덜 떨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두렵니?”
강씨는 웃고 있었다.
“걱정 마라.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너 같은 아이는 쓸모가 많거든.”
“…….”
“자, 이 손을 잡고 일어나렴. 함께 교단으로 가자. 그럼 아무 문제도 없는 거야.”
강씨의 손가락은 길고 곧았다.
풍서는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이 손을 잡으면 살 수 있을까?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런 공포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걸까?
“웃기지 마!!”
풍서는 바닥의 흙을 한 움큼 쥐어 강씨에게 집어 던졌다.
“윽! 이놈이!!”
강씨는 방심하고 있었는지, 눈에 흙이 들어가자 괴로워했다.
풍서는 달렸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 입구다.
골목을 하나만 더 꺾으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을 테니 강씨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콱!
“악……!”
하지만 풍서는 뒷덜미가 채여 바닥을 굴렀다.
뒤통수가 땅바닥에 부딪치는 순간, 눈앞이 껌껌해지면서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턱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천천히 실눈을 뜨고 바라보니, 강씨가 풍서의 가슴을 발로 짓밟고 있었다.
“겁이 없구나, 너.”
강씨가 자신의 입술을 핥는다.
안 그래도 새우처럼 작은 눈으로 그런 행동을 하자, 정말로 뱀이 노려보는 것 같았다.
“건방진 녀석.”
“으윽……!”
콱, 하고 목이 졸리며 몸이 위로 떠오른다.
강씨가 풍서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말을 들을래? 이 자리에서 귀라도 한쪽 잘라 줄까?”
강씨가 어느새 꺼냈는지 손바닥 반만 한 짧은 단검을 꺼내 칼날 부분으로 풍서의 볼을 툭툭, 두드렸다.
“으으…….”
풍서는 덜덜 떨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호오, 무섭지 않니?”
“아저씨는 잘못됐어요.”
“뭐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죽이면서 아무것도 못 느끼나요? 그건 사람이 아니에요. 짐승만도 못한 거예요.”
“허어?”
강씨는 분노하기보다는 황당한 듯했다.
“이거, 아주 물건이구만?”
강씨가 씩 웃었다.
뱀같이 차가운 얼굴로 눈꼬리가 휘어진다.
“넌 귀 한쪽 확정이다.”
“읏……!”
“자, 귀를 대.”
풍서는 덜덜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강씨에게서 눈을 피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난 왜 이렇게 힘이 없을까.’
풍서는 자신을 자책했다.
복 아주머니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도 구하지 못했다.
너무나 무력했다.
“멈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강씨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풍서의 눈빛이 흔들린다.
차분한 듯하면서 무감정하고 냉정한 목소리.
그러면서도 아직 소년의 느낌이 가시지 않아 변성기의 느낌이 남아 있다.
“보하 형?!”
“이를 악물어!”
그건 누구에게 한 말이었을까.
풍서는 강씨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공보하의 몸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제7장 섬광의 무사(武士)(1)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풍서는 공보하가 왜 이를 악물라고 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풍서의 멱살을 잡고 있던 방앗간 강씨는 허리를 얻어맞고 뒤쪽으로 몸을 둥그렇게 굽혔다.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풍서의 얼굴이 방앗간 강씨의 얼굴과 부딪치게 된다.
만약 풍서가 이를 악물고 있지 않았다면 혀를 깨물거나 이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윽……!”
강씨와 뒤엉켜서 땅을 구르는 것과 동시에 입안이 찢어졌는지 피맛이 났다.
“이 건방진 놈!”
강씨가 벌떡 일어선다.
어느새 양손엔 작은 단검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안 돼!”
풍서는 손을 뻗어 강씨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당장에라도 달려갈 것 같던 강씨가 움찔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공보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쪽 주먹을 강씨의 옆구리에 꽂아넣었다.
“쿨럭……!”
비록 열세 살에 불과하지만, 매일같이 무예를 단련하고 있는 공보하다.
민첩성과 정확함을 겸비한 주먹은 웬만한 어른의 주먹 못지않게 위력이 강했다.
강씨가 허리를 굽힌다.
하지만 순순히 당할 생각은 없는지, 번뜩이는 칼날이 공보하의 어깨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하 형!”
풍서가 놀라 외쳤다.
빠악!!
“와아……!”
하지만 번뜩이는 칼날을 보며 놀란 것은 풍서뿐인 모양이었다.
공보하는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칼날을 피하고 손목을 후려쳐 단검을 빼앗았다.
“이 약삭빠른 녀석!”
강씨가 이번엔 왼손에 든 단검을 공보하의 허벅지를 향해 휘둘렀다.
공보하가 자세를 낮추어 보지만 결국 옷과 함께 상처가 길게 생겨났다.
“끝이다, 이 녀석!”
허벅지에 상처가 났으니 민첩하게 움직이기는 힘들 터.
강씨가 이번엔 공보하의 목을 노렸다.
채앵!!
“이, 이 녀석……!”
단검은 공보하의 오른쪽 어깨 부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 대가로 공보하는 강씨의 양 팔목을 붙잡을 수 있었다.
“챠핫!!”
낭랑한 기합성과 함께 공보하는 머리를 크게 뒤로 젖혔다가 단번에 앞으로 내리찍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강씨가 주저앉는다.
뭉개진 코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크악……!”
공보하는 비명을 질러대는 강씨의 손에서 나머지 한 개의 단검마저 빼앗은 뒤 가슴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강씨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코가…… 코가……!!”
공보하는 절규하는 강씨의 몸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내려쳤다.
퍽! 퍽!
섬뜩한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다가 마침내 강씨가 의식을 잃은 듯 양손이 축 늘어졌다.
“보하 형!!”
풍서는 다급하게 공보하의 어깨를 붙잡고 말렸다.
이미 강씨는 의식을 잃었으니 이 이상 때리다간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공보하의 어깨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도 심상치가 않았다.
“형! 지혈, 지혈해야 돼요!”
“후우, 후우…….”
공보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주먹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주먹은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공보하의 상체 반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공보하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풍서는 황급히 그런 공보하를 부축해 주었다.
“보하 형, 괜찮아요?”
“……괜찮아.”
풍서는 만류하는 공보하의 상의를 벗기고 옷을 찢어서 상처 주변을 둘둘 휘감았다.
그렇게 풍서는 능숙하게 응급처치를 마무리했다.
“솜씨가 좋구나.”
“홍 대장님께 응급처치하는 법을 배웠거든요.”
“그래?”
공보하는 고맙다고 한 뒤, 바닥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강씨를 힐끗 쳐다봤다.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네? 형이 이기셨잖아요?”
“저 남자, 제대로 무공을 수련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도 칼을 들었다는 이유로 당황해서 상처를 입었다.”
그 말에 풍서는 놀랐다.
무표정하고 차분하게 싸워서 몰랐는데, 공보하도 칼날에 긴장을 하긴 했던 모양이다.
“풍서야.”
“네?”
“너는 괜찮은 거냐? 다친 데 없어?”
“……네, 괜찮아요.”
풍서는 잠시 당황하다가 겨우 대답했다.
복 아주머니가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시큰거리지만, 다행히도 몸은 멀쩡했다. 게다가 공보하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 수는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공보하는 풍서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가자.”
“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마을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입구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교성이 좋은 풍서로서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은 다들 등 뒤에 상당히 큰 짐을 짊어진 채 가족끼리 손을 꼭 붙잡고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 주변을 흘깃거리는 모습이 매우 불안해 보였다.
“홍 대장님……!”
그리고 그중 가장 앞쪽에 서서 남자들과 뭔가를 상의하는 사람.
건장한 체구에 솔직한 눈매를 지닌 중년 사내.
홍인후.
흑임촌의 촌장 역할을 맡고 있는 홍 대장이었다.
“풍서야! 무사했구나!”
홍 대장은 풍서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런데 홍 대장님은……!”
“아아, 이건 별것 아니란다. 중간에 싸움이 좀 있었어.”
홍 대장은 오른팔과 가슴을 천으로 둘둘 말고 있었다.
상당히 두껍게 말려 있는 천에는 겉으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크게 다치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 거예요?”
풍서는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을지환을 습격했듯, 홍 대장에게도 태극교의 사람들이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럼, 괜찮단다.”
“그럼…… 아주머니는요?”
“안사람도 괜찮단다.”
“다행이다…….”
홍 대장은 풍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한 번 내려다본 뒤, 마을 입구 쪽에서 짐마차에 올라타 있는 사내를 흘낏 쳐다봤다.
‘홍 대장님이 살아 계셔서 다행이야.’
풍서는 주변의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공보하와 함께 있는 을유랑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다행히 모두가 무사했던 것이다.
“커험!”
한편, 홍 대장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있었다.
“왕인, 사람들은 다 모인건가?”
항상 홍 대장을 잘 따르던 사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예.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다 모였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출발하세.”
홍 대장은 몸을 돌려 흑임촌의 광산과 마을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평생을 살아온 곳이다.
죽는 순간에도 이곳에서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쫓기듯이 떠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자, 갑시다! 상황은 아까 말했던 대로 심각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빠져나갑시다. 반드시 살아남읍시다. 마을로 돌아오는 건 그다음입니다.”
홍 대장의 연설은 짧지만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대장! 홍 대장!”
“자네는……?”
그때, 홍 대장을 찾아온 것은 왕인과 함께 광산에서 일하는 동료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이동할 길을 한 번 살펴보고 오는 중이었는데, 대체 무엇을 본 건지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태극교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태극교가……?”
사람들이 모두 수군거리며 불안해했다.
이렇게나 대처가 빠를 줄이야.
대체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모두 침착하고 자리를 유지하게! 대열을 흐트려서는 안 된다!”
홍 대장은 큰 소리로 외쳤다.
새로운 소식은 곧바로 그들을 덮쳤다.
어느새 마을의 입구 앞에는 삼십여 명의 사내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하나같이 잘 단련된 건장한 체구에, 흑색의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이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무공을 익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가슴과 죽립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진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