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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황 1권(9화)
3장 레드 옥토퍼스(3)


-4-

레이온은 개운하게 창고를 나와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몸에는 피 향기로 진동을 했지만 지하에서 몸을 씻기에는 레이온의 신분이 너무나 높았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십사들 중 한 명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대천민의 앞에 대충 던졌다.
촤르르륵!
제국법에 노예는 상거래가 금지되어 있고, 천민은 물물 거래만 가능했다.
돈을 준다고 쓸모가 없을까 싶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수고스러움과 노력만 하면 천민도 얼마든지 돈을 쓸 수 있었다.(바가지요금이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천민은 피 냄새로 축축한 레이온과 쇼렌, 아서가 벗어 둔 옷을 더욱 탐욕적으로 보았다.
금화도 천민에게 큰 값어치를 하였지만 저 옷에 비하면 세발의 피였다.
고급 천감.
금과 은으로 된 단추.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
금과 은으로 된 금사와 은사,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세련 된 문양.
비록 피에 젖었지만, 그것이야 염색하면 되고, 지독한 피 냄새는 다른 향기로 지우면 되는 것이었다.
이 옷들은 세탁해서 가공만 하면 경매장에서 현재 받은 돈주머니의 수십 배는 가볍게 넘을 만한 액수의 금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옷이 무려 세 벌!
이 세 벌의 옷을 위해서 대천민은 대략 500∼1,000명에 이르는 노예를 죽이고, 충직했던 수하 천민들도 죽여야 하지만 그의 마음은 푸근하기만 하였다.
지하를 벗어나 중층부에 도달하였다.
피 냄새를 풍기며 11개의 별궁이 있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는 없었기에 중층부에서 피 냄새와 몸에 붙은 피딱지(노예 소년들의 것)를 제거하여야 했다.
레이온, 아서, 쇼렌은 네 명의 집사들 중 한 명의 방으로 갔다.
집사들은 모두 계승 귀족 집안의 장남이 아닌 남자들로 레이온을 주인으로 모시는 만큼 중층부에 방을 하나 배정받아서 살고 있었다.
물론 집사의 방에는 상층부에 살고 있는 레이온에 비해서는 한참 부족하지만 최소 2명, 최대 9명의 정도의 시녀들과 시종들이 있었다.
훌렁 훌렁.
어서 씻고 싶은 마음에 시녀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옷을 벗었다.
“쇼렌, 아서! 너무 늦어!”
아서와 쇼렌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었다.
이미 안으로 들어간 레이온은 스트레스가 말끔하게 해소된 표정으로 양손에 스무드 슬라임을 들었다.
본래 시녀들이 할 일이었지만, 레이온은 쇼렌과 아서를 향하여 스무드 슬라임의 입을 내밀었다.
“하하하하하 레, 레이온 님 제가 알아서, 하하하하하.”
아서는 스무드 슬라임의 입을 간지럽게 받아들였다.
레이온은 자신의 아버지(황제)처럼 선천적인 포커페이스를 가진 쇼렌에게도 슬라임을 붙였다.
움찔움찔.
온몸을 떨며 견디는 쇼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래도 안 웃어? 이래도 안 웃어? 이래도 안 웃어?!”
“풋, 푸하하하하! 레, 푸하하하하!”
“황자님, 뒤가 비었습니다!”
“악! 아서! 그, 그만, 그만, 그만해! 꺄하하하하하하하!!!”
욕실 밖에서 네 명의 집사들은 레이온과 두 측근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흐뭇하고 가슴이 훈훈해졌다.

***

초기 무림은 자치권을 둘러싼 전국시대였다.
무사들은 제각기 자신들끼리 편을 나누어서 무자비하게 자치권을 지키고 쟁취하고 이기기 위해서 살육이 엄청나게 일으켰다.
단 여기서 관군은 무사들이 양민을 해칠 때만 나타날 뿐, 무림인들끼리 싸울 때는 절대 끼어들지 않았다.
관군이 그렇게 나오자 무사들은 더욱 심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렇게 30년 정도가 흐르니 서서히 치열한 전국시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세력들이 있었다.
암흑대천(暗黑大闡).
천마신교(天魔新敎).
여래십호(如來十號).
위 세 개의 세력은 그 강함이 다른 집단의 수배로 강하여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더욱이 패배하였던 무사들이 서로 이 세 개의 세력으로 흡수되면서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이들은 다시 30년 후 무림은 삼분(三分)으로 나누어 지배한다.


4장 일곱 기사(1)


-1-

키즈 제국은 기본적으로 15등급으로 나누어진 계급제도를 사용한다.
1등급 황제, 2등급 황태자, 3등급 황비, 4등급 선황비 혹은 선황제, 5등급 황족(황자, 황녀), 6∼10등급 오등작(공, 후, 백, 자, 남), 11등급 명예시민, 12등급 시민, 13등급 평민, 14등급 천민 그리고 15등급 노예로 나누어진다.
그중에서 가장 복잡한 계급이 있으니 바로 오등작으로 나누어지는 귀족계급이다.
귀족계급의 복잡함은 수직 계열의 오등작(공, 후, 백, 자, 남)과 가로 계열의 사계층(영지계승, 계승, 단승, 준) 체계 때문이다.
사계층은 오등작 속에서도 네 개의 구분을 만든 것이다.


준이란, 1대(나)에 한하여 귀족의 의무를 다하고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단승이란, 3대(나―아들―손자)까지 귀족의 의무를 다하고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계승이란, 무한의 시간 동안 귀족의 의무,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지 계승이란, 계승들 중에서도 단순하게 ‘귀족 이름’만이 아니라 ‘영지’도 함께 계승받는 것을 뜻했다.
귀족 세계에서 최고는 대공이고 최저는 준남작이었다.
보통 귀족계급 사이에서 계급과 체계 안에서 국가의 중요도를 나눌 때, 위에서부터 오른쪽 대각선(↙)의 순서로 보면 되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귀족들 중 누가 중요하냐고 하면 최고는 대공, 둘째는 공작, 셋째는 변경백, 후작. 넷째는 영지 자작(영자작), 계승 백작. 다섯째는 영지 남작(영남작), 계승 자작, 단승 백작. 여섯째는 계승 남작, 단승 자작, 준 백작. 일곱째는 단승 남작, 준 자작. 여덟째는 준 남작이다.

-2-

새벽까지 술과 음악이 함께하였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크리스티나와 일리아, 이프릴이 여름의 별궁을 떠났다.
애린을 옆방에 강제로 취침(이라 쓰고, 기절이라 읽는)을 시키고, 로엔하르트는 호마, 피나, 리즈와 함께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침대 위에서 로엔하르트와 세 명의 여성들과 한참 간질이는 장난을 칠 때 촛불에서, 물병에서, 어둠에서, 허공에서 네 명의 여성이 등장했다.
그들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던 로엔하르트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어서 와.”
로엔하르트의 환한 웃음.
크리스티나와 일리아, 이프릴 앞에서 지어 주었던 표정보다 더 생동감 있는 표정이었다.
어느새 호마와 피나, 리즈가 네 사람의 좌우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어 기사가 주군을 만날 때 하는 충성의 자세로 로엔하르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고, 그들을 맞이하는 로엔하르트의 표정은 한없이 자애로웠다.
로엔하르트의 일곱 기사!
이 일곱 여성이 바로 로엔하르트의 최측근들이었다.
검술 사부 슈마허 폴 포르츠, 마법 사부 현자 리드미스 이 두 사람을 제외하면, 로엔하르트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일곱 명의 여성들이었다.
정신의 루나 페레스, 암흑의 미첼 존 라플라스, 불의 아마테라스 썬 헬리오스, 물의 다프네 오시리스, 대영웅 호마 그리폰, 마린엘프 피나 칼리, 메이드 리즈 엠마.
일곱 소녀, 숙녀, 여성을 찬찬히 바라본 로엔하르트는 기사들의 중심에 충성의 자세를 하고 있는 하얀 갑주를 입은 루나 페레스를 바라보았다.
황제 친위기사단장의 외동딸로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검을 배워 뛰어난 이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약간의 야망이나, 그런 것이 없다.
하긴 뭐, 그 아버지도 비슷하니깐.
“루나.”
“예! 로엔하르트 님, 분부하십시오!”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
우렁차고, 영롱하게 대답하는 루나의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내 앞에서는 분명 긴장을 풀라고 하였는데.”
“아……! 명심하겠습니다.”
꾸중을 들었다는 생각인지, 풀이 죽은 루나의 모습을 풀어 주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방치하고, 루나 옆에 있는 자신만만한 표정의 미첼을 바라보았다.
미첼은 리드미스의 하나뿐인 막내딸이다.
“미첼.”
“예!”
“사부님에게 말하고 온 것이냐?”
“로엔하르트 님도 참, 제가 무슨 어린애인가요.”
“하지만 사부님께 걱정하지 않느냐, 제자가 된 도리로 사부님을 걱정시킬 수는 없지.”
“걱정 마세요, 엄마한테 다 말해 놨으니깐.”
‘사모님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빠에게 딸이란 지켜 줘야 되고 보호해야 되고 성벽 같은 존재로, 로엔하르트를 아끼는 리드미스 사부라도 자신의 딸과 함께 있는 걸 안다면 당장 뛰어올 사람이다.
그에 반해서 사모님은 미첼에게 친구 같고 큰 언니 같은 때때로 엄마 역할까지 하는 만능적인 존재였다.
……가끔 누나라고 불러 주면 굉장히 기뻐하신다.
“아마테라스.”
“예!”
목소리가 자신감에 차 있다.
그녀는 그럴 수 있었다. 제국에는 14명의 소드 마스터가 있는데 그중 10명이 변경백이고 1명은 황제 친위기사단장, 1명은 크리온 에멘로스트 대공, 1명은 홀드 졸 보르부 공작, 1명은 슈마허 폴 포르츠 공작이다.
아마테라스는 그 14명의 소드 마스터 중에서 유일한 여성 소드 마스터다.
‘마술사’―‘화염’―‘소드 마스터’.
홍일점이라지만 그녀의 실력은 결코 다른 남자 소드 마스터에 뒤처지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는 10명의 변경백(국경을 지키는 대신 많은 땅과 사병, 군대를 거느리는 것이 허락된 귀족에게 주어지는 개인의 명칭)들 중에서도 가장 험하다는 몬스터 산맥의 정면에 위치한 백작령(계승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을 거느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백작령은 몬스터나, 마물에게 침공을 당하기보다는 오히려 침공을 함으로 막대한 몬스터, 마물의 부산물로 부유해진 백작령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