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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황 1권(19화)
10장 13년(1)


-1-

크리스티나 에멘로스트 10대 초반, 황태자 로스만 키즈 30대 중반.
정략적 관계의 필요한 결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반항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순종했다.
나이 차이가 꽤나 심했지만 여자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적어도 기사(로드 스타트)가 되지 않는 여자에게 결혼은 시작이고 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남편이 가진 신분과 앞으로 그녀가 지니게 될 힘이 너무나 강대했고, 처음 만나는 순간, 만나기 전에는 단순하게 늙은 아저씨로 생각했던 크리스티나의 생각과 달린 의외로 멋진 남자였다.
약간 무뚝뚝하고, 포커페이스인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도 남자답다는 생각에 크리스티나는 나름 괜찮은 결혼이 아닌가 하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첫날 밤.
두려움에 떠는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로스만 키즈가 아주 매너 좋게 말을 하였다.
“아직 어린 너를 범할 수는 없다. 그러니 성인이 되는 시간까지 기다려 주겠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크리스티나는 행복했다.
주변 귀족들이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하고 다른 첩들을 들이라고 난리였지만 로스만은 그런 재촉 속에서도 크리스티나를 보호하고 지켜봐 주었다.
결혼을 하고 사랑을 느낀다.
크리스티나가 바로 그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식이 끝나고 첫날밤을 치르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로스만 키즈는 기뻐해 주었다.
포커페이스라서 얼굴로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도 기뻤다.
어느 동화책의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 결말처럼 그들의 행복 역시…….
아니 크리스티나의 행복 역시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다.

-2-

홀드는 첫눈에 반한다란 감정을 살면서 느껴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홀드에게 여성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자신을 대신하여 아이를 낳고 돌보고 키우는 존재일 뿐이었다.
사랑?
그건 씹어 먹는 것인가?
충성을 위해 죽고 사는 홀드였기에 그것은 급작스러운 감정이었다.
쿠웅!
하늘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던 새가 땅으로 떨어져 다시 날지 못하고 하늘을 애타게 쳐다보는 그런 심정이었다.
다시는,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기분.
깨끗한 길을 놔두고 진창길로 뛰어든 기분.
적어도 홀드가 동양의 여성을 보는 기분이 그러하였다. 도저히 상상도 이해도 가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가 홀드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저, 저기요. 저희 아가씨께서 아프신데요. 좀 도와주세요.”
“이름이?”
“진소율이요.”
“소율이군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홀드는 이 말을 하는 순간 온몸에서 짜리리릿! 뾰루지가, 그런 뾰루지가 온몸에서 투다다닥! 옥수수가 팝콘이 되듯이 온몸에 닭살들이……!
“소율 님, 가실까요?”
남궁화영은 기가 막혔다.
귀는 어디로 뚫린 것인지 자신을 소율로 부르는 코쟁이 아저씨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제 이름은 남궁화영이에요. 진소율은 제가 모시는 아가씨의 이름이구요!”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는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공작이! 공작인 자신이 고작 여자 앞에서 주눅 들어서 고개를 숙이다니!!!
홀드는 정말로 진창길에 몸을 구르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으면 됐어요. 어서요, 저희 아가씨는 지금 임신 중이시라 무척 아파요.”
남궁화영이 홀드의 손을 잡는 순간, 홀드의 진창길은 천상으로 올라가는 황금 계단으로 변하였다.
……썩 나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도착한 방은 동방의 무율 제국이 키즈 제국으로 보내온 공물들이 있는 장소였다.
그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다.
공물에게 자신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홀드의 입장에서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어서요!”
“예.”
상상도 못했지만, 거역할 수는 없었다.
정말 기분 나쁘고 또 나빴지만, 여인의 표독스러운 눈이 홀드를 바라볼 때면 그는 한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50만 군인 앞에서 당당하던 홀드답지 않아!
형님(로스만 키즈)이 이 모습을 보면 분명 실망하실 거야!
난 아내도 있어! 자식도 있다고!
그런 생각 그녀 앞에서만 서면 다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분이에요.”
남궁화영의 아가씨 진소율과 홀드의 만남이었다.
분명 아름다웠다. 특히나 붉은 보석마안(寶石魔眼)은 흥미를 끌어내기 충분하였다.
하지만 남궁화영을 먼저 만났기 때문일까.
홀드 눈에는 남궁화영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근데, 진짜 임신이잖아! 무율 제국의 황실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임산부를 공물로 보내오다니!’
무율 제국이 그들을 무시하는 처사 같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화영.”
‘아! 이름이 화영이구나! 아니 성인가? 동방의 풀 네임을 서양과 다르다고 하였지, 이름이 뭘까?’
남궁화영이 안타까운 눈으로 홀드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아가씨를 위해서 따뜻한 침상과 영양이 들어간 음식을 주세요. 부탁드려요.”
“물론이죠. 레이디.”
임산부를 자신의 별궁에 들이고 신관을 불러오고 요리를 대접하는 등 정성을 쏟아 부었다.
그녀도 아니고, 그녀의 아가씨라는 이유 하나로.
그런 지극정성이 성 안에 퍼지면서 묘한 소문이 돌자 홀드는 그녀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동시에 홀드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곳, 황실로…….)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형님(로스만 키즈 황제)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황실의 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서 황금 별궁을 찾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보게 된 형님(황제)이 대뜸 그에게 한마디를 하였다.
“너 왜 바보같이 웃고 있냐.”
로스만 키즈는 다른 귀족들을 상대할 때와 다르게 홀드에게는 정말 친하게 대했다. 심지어 같은 가족인 홀드의 아내인 이모에게도 그 포커페이스와 행동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직 홀드를 비롯한 정말 믿고 신뢰할 수 있는 홀드의 아버지나, 리드미스, 슈마허, 도미니크 정도에게만 자주 농담도 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하, 형님, 혹시 저에 대한 소문 들으셨습니까?”
“네가 무율 제국에서 보내온 공물들 중에서도 두 여인을 빼돌려 그중 한 명은 이미 아이까지 임신시켰다는 그 이야기 말이더냐? 이모님께서 매우 노하셨더구나.”
“하하! 그건 오해입니다.”
홀드는 매우 자세하게 말했다.
홀드가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은 그 임산부가 아니라 호위무사를 자청하는 ‘남궁화영’이었고, 임산부 ‘진소율’은 부가적인 짐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황실에 방을 주고 싶다는 소리와 함께 매우 가깝게 있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로스만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홀드를 보며 솔직하게 말해서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마음과 대견스러운 마음이 교차했다.
가까이 두기 위해서 이모님과 결혼을 시키기는 하였지만 이모님의 나이가 한참 위인데도 불평 없이 이모님과 결혼하여 혈통에 문제가 없음을 공고히 하여 군대의 군단장의 자리에 앉고, 그 이후에도 전과 변함없는 충성과 우의를 보내오는 홀드,
그러니 홀드가 당연히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홀드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파격적으로 두 동방의 여인 중에서 홀드가 점찍은 여인이 아니라 임산부를 첩으로 받아들이고 겨울 별궁을 주었다.
이 행동에 큰 뜻은 없었다.
겨울 별궁을 내어 준 것은 대가 없이 로스만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지해 준 홀드에 대한 감사를 이렇게라도 크게 보답해 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서 거지 같이 쫄쫄 굶던 시절의 A가 있는데, 친구인 B가 10년이고, 20년이고 사소하게 밥 사 먹는 것부터 해서 여자 친구에 대한 고민 상담, 결혼 상담,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는 같이 장례식도 해 주고, 기쁠 때는 같이 기뻐해 주는 그런 멋진 인생 친구가 이제는 부자가 된 A에게 사소한 부탁을 한다고 했을 때, 그 부탁을 정말 멋들어지게 B에게 해 주고 싶은 A의 마음이랄까?
남들이 볼 때는 너무 과하다 싶은 행사겠지만, 10년, 20년 성공하기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고, 도와준 베스트 프랜드 B에 비해서 자신이 해 준 것은 너무나 작아 보이는 A의 마음이 바로 로스만의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기반이 되어 겨울 별궁을 주었다.
겨울 별궁은 그냥 줄 수는 없어서 임산부를 첩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황제가 첩 1명 받아들이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대 황제는 총 700명의 첩을 두었고, 전전대 황제는 조금 적지만 40명 정도의 첩을 두었으니, 고작 한 명뿐이기에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봄의 별궁, 여름의 별궁, 가을의 별궁도 있는데.
겨울 별궁을 준 것에는 홀드의 별궁과 가장 가까운 동시에 비어 있는 별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로 귀족들이 말이 많았다.
동양인을 어디 황실에 들이느냐, 이건 역사적으로 있을 수가 없다.
이건 폭정이다.
이런 선례를 만들면 안 된다.
이건 모욕이다.
귀족들을 무시하는 것이냐.
이런 식을 해 봐라.
심지어 임산부이지 않느냐.
적어도 처녀를 첩으로 맞아라.
아니면 애라도 제거하고 첩으로 들여라.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다. 등등…….
다 일축(一蹴:제안이나 부탁 따위를 단번에 거절하거나 물리침)시켰다.
슬픈 일은 그의 어린 신부(크리스티나)의 기분이 살짝 나빴다는 것이었다.
그 기분을 풀어 주고자 로스만은 정말 열심히 밤이면 밤마다 크리스티나를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연년생의 이프릴과 레이온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