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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제1장
대학만 오면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십 년 동안 민영이 꿈꿔 오던 대학교 캠퍼스 로망은 일주일 만에 아주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유민영. 현재 나이 서른. 수능 시험 전날,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어린 시절 광고학과 학생들의 꿈과 사랑을 다룬 한 드라마를 보고, 그렇게 멋진 광고쟁이가 되고 싶었던 민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함과 동시에 그 꿈을 깨끗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돌봐 줘야 할 어린 두 동생들을 위해, 민영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민영은, 자신은 비록 꿈을 접었지만 동생들만큼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민영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우유 배달을 시작으로, 돈 되는 일이라면 몸 파는 것 빼고는 모두 다 해 본 그녀였다.
그렇게 긴 인고의 세월 끝에 드디어 두 동생들을 대학 졸업까지 시킨 후, 그제야 민영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이 서른에 문화 대학교 광고홍보학과에 지원, 당당히 합격하였다.
새파랗게 어린아이들과 함께 대학을 다닐 생각에 조금 두렵기도 했으나, 공부와 나이는 상관없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지지에 힘입어 꿋꿋이 입학을 결정했다.
여기까진 정말 좋았다. 하지만 민영은 그곳에서 정말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고 말았다. 바로 광고 마케팅학 강의의 교수이자, 자신의 담당 교수인 한진서라는 인간을 말이다.
처음 그를 봤을 때 민영은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저 사람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3 때 자신의 과외 선생님이자, 민영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에게 처음으로 실연의 상처를 안겨 주었던 그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한진서, 그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출석을 부르면서 자신의 얼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엔 어떤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니, 표정 변화는커녕 눈빛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11년 전보다 훨씬 멋진 모습으로, 무심한 시선으로 자신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출석부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였으니까.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걸까? 11년 전과는 너무 다르게 변해 버렸으니까.
삶에 찌들어 외모를 가꿀 생각조차 못했던 민영이었기에 힘들었던 그 세월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겨져 버렸다.
어릴 땐 제법 예쁘단 소리를 들었건만, 지금의 자신은 예쁘긴커녕 보잘것없었다. 빼빼 마른 몸에 화장을 해도 생기가 없고, 파릇파릇한 이십 대 초반 어린것들 사이에 끼여 있으니 더욱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래.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거겠지.
알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져 왔다. 너무도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이 서글펐고, 무상하게 흘러간 세월이 아쉬웠다. 그리고 이런 자신과 다르게 더욱 멋있어지고, 품위 있어진 첫사랑 앞에서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불쌍해서 민영은 심장이 저려 왔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는 딱 적당한 톤의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 한진서, 그 남자의 강의가 민영의 귀엔 도통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민영은 강의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이제는 아련한 진서와의 추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또 떠올리고 있었다.
톡톡.
그렇게 옛 생각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민영은 책상을 두 번 두들기는 누군가의 손짓에 간신히 그 추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책상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 수업이 무척 지루한가 보군. 불러도 모를 정도로 딴생각에 잠겨 있는 걸 보면.”
11년 전과 달라진 거라곤 눈가에 움푹 팬 매력적인 주름밖에 없는 진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고 있었다. 그런 진서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민영은 재빨리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목이 잠겨 쉰 소리가 나왔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마치 다시 열아홉 살 소녀가 되어 버린 그런 기분이 들었다.
“뭐, 어쨌든 좋아. 첫날부터 수업에 집중 안 한 벌은 이따가 묻기로 하지. 강의 끝나면 곧장 교수실로 오도록.”
“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민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이가 좀 있다더니, 벌써 귀까지 먹은 건 아니지?”
퉁명스럽게 내뱉는 진서의 말에 강의실에 순간 웃음꽃이 피어났다. 나이 공격에 잔뜩 굳은 민영만 빼놓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린 것이다.
“사실 난 두 번 말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특별히 예외로 하지. 강의 끝나면 교수실로 올 것. 이젠 알아들었나?”
한쪽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묻는 그 사람의 말에 민영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못돼 처먹은 인간 같으니라고. 대놓고 늦깎이 대학생이라고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의 발언이 민영의 귀엔 그저 못마땅하게 들릴 뿐이었다.
한진서, 11년 전도, 지금도 참으로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진심으로!
♣ ♣ ♣
교수실은 한진서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너무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그만의 공간엔 작은 꽃 화분조차 없었다. 덩그러니 놓인 책상,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만이 그의 교수실 안에 존재할 뿐이었다.
“내 강의가 그렇게 재미없었나? 첫 강의부터 딴생각에 잠기게 할 만큼?”
굳은 얼굴로 진서의 교수실을 둘러보던 민영은 그의 물음에 재빨리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흠, 그래? 영 믿음이 안 가는데.”
기다란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지며 하는 그 사람의 말에 민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부턴 열심히 듣겠습니다.”
“그 말도 영 믿음이 안 가고.”
삐딱한 말투로 툭툭 받아치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슬슬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어떡하면 믿음이 가시는데요?”
“매일 보고해.”
“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민영은 영 이해가 안 가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도대체 뭘? 뭘 보고하라는 말인가? 회사도 아니고. 도대체 뭘?
“내 수업이 끝난 후 강의를 잘 들었다는 증거물 제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여전하구나, 유민영?”
피식, 비웃음을 터트리던 그 사람이 가늘게 눈을 뜨며 민영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남자! 자신을 알아본 걸까?
이런 의문이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면서 민영의 머릿속을 송두리째 휘저었다. 민영은 눈을 무척이나 느릿하게 깜박였다.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게 너무나 큰 충격이어서 신체 감각마저 느릿해지는 것 같았다.
“……나 알아보는 거예요?”
너무나 변해 버린 자신인데, 이제 자신조차 예전 모습이 어색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알아본 걸까?
“당연하지. 제자 얼굴 잊어버리는 선생도 있냐? 더군다나 넌 내 첫 제자인데.”
차가운 인상과는 반대로 미소를 지을 때 진서는 무척이나 따뜻해 보였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긴 겨울에 비해 따사로운 봄이 짧듯 그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머무는 시간이 너무나 짧다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이 사람이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이 사람을 웃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민영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따뜻한 진서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미소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너무 따뜻해서, 꽁꽁 얼어붙은 자신의 마음에 그 미소가 너무 따뜻하게 다가와서 민영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왜 이제야 온 거야?”
잠시 자신의 나이를, 처지를 잊고 열아홉 살 소녀처럼 흔들렸던 마음이 그런 진서의 목소리에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뭐가요?”
“대학 말이야.”
그랬다. 여름방학까지만 과외를 해 주고 그만둔 이 사람은 자신의 사정을 다 알지 못했다. 그럭저럭 살 만한 집안의 철딱서니 없는 여자아이로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겪은 험난했던 삶에 대해서 이 사람은 알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어요.”
“흠, 그래? 연애하느라고 공부를 소홀히 했던 건가?”
무심한 눈길로, 관심 없다는 목소리로 잔인한 질문을 내뱉는 진서의 말에 민영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관심 많았잖아? 공부가 아니라 남자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제일 잘 아는 그가, 자신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가슴앓이를 했는지 제일 잘 아는 그가 어떻게 저토록 잔인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걸까?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교수님이라도 제자의 사생활에 관심 갖는 건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닌 거 같은데요?”
“뭐, 아니면 됐어. 어쨌든 남들보다 훨씬 늦게 대학에 들어왔으면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질책이 담긴 날카로운 진서의 눈빛에 민영은 슬며시 그를 외면했다.
“전공과목 수업은 특히 더 중요하지. 그러니 앞으로 잊지 말고 제출하도록. 내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는 증거물을.”
“그 증거물이란 게 뭔데요?”
“간략하게 그날그날 내 강의의 요점을 정리한 노트면 되겠군. 내 강의가 끝난 후, 교수실로 와서 제출하고 가.”
물론 수업 시간에 딴짓한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벌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제출을 하라니.
“딴짓하는 학생들한테 모두 이런 식이에요?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내 강의는 꽤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정평이 나 있어서.”
“그래서요?”
“그래서 너처럼 대놓고 딴짓하는 학생은 거의 없지.”
예전에도 잘난 척이 꽤 심했던 사람이었다. 그 성격은 11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나 보다.
뻔뻔한 한진서의 말에 민영은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넌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 중에 한 명이거든. 다른 학생들보단 더 특별하지.”
특별하다는 그 말에 바보같이 또 심장이 뛰었다.
솔직히 돈 버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 흔한 연애조차 해 보지 못한 민영에게 진서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비록 고백하자마자 차이고 말았지만, 이 남자처럼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특별하다는 말이, 민영에겐 정말로 특별하게 다가왔다.
“특별하다니요?”
“첫 제자잖아.”
아, 이런 의미의 특별함이었던 걸까? 하긴, 도대체 뭘 기대한 것일까? 이미 11년 전에 호되게 차여 놓고는.
“알겠습니다. 교수님의 무한한 관심에 감사드리며. 이만 나가 봐도 되죠?”
“그러도록 해.”
뭐가 그렇게 바쁜지 민영의 입에서 나간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기는 진서였다.
정말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이 남자는. 11년 전보다 더욱 남자다워졌다는 것 말고는, 정말 달라진 것이 없었다.
왠지 모를 아쉬운 기분에 민영은 교수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고개를 살짝 돌려 진서를 바라보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는 그 얼굴을 말이다.
솔직히 조금 얄밉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고맙기도 했다. 이렇게 많이 변해 버린 자신을 한눈에 알아봐 줘서.
그리고 또 한편으론 아쉽기도 했다. 예전에 저 사람과 헤어질 때 결심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게. 같은 문화 대학교 학생이 되어 선생과 제자가 아닌, 여자와 남자로 만났을 때 다시 한 번 대시하자고 마음먹었었는데. 애인이 있든 말든, 자신의 마음을 전하자 마음먹었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 교수와 학생이라는 관계로 다시 그를 만났다는 게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휴.”
그 사람의 귀에 안 들리게 낮은 한숨을 내뱉은 민영은 슬며시 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교수실 안으로 들어오는 한 여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어머, 깜짝이야!”
노크도 없이 안으로 들어오던 그 여자는 문 앞에 서 있는 민영 때문에 놀랐는지 두 손을 꼭 모으며 말했다.
무척이나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지독하게 기억력이 좋은 민영은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고 말았다. 11년 전에 봤었던 한진서, 저 사람의 애인이라는 것을.
설마 두 사람 만나고 있는 걸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렇다면 결혼까지 한 사이일까?
그 여자를 보자마자 수많은 의문이 민영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듯 고개를 젓는 민영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 의문들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둘이 사귀든 말든, 결혼을 했든 말든, 자신에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동생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대학을 다니는 주제에 한가하게 사랑 타령이나 할 순 없었다.
“나 때문에 많이 놀랐나 봐요?”
멍하게 서 있는 민영을 바라보며 그 여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곱고 예쁜 여자였다. 진서와 동갑이랬으니, 나이도 서른넷일 텐데. 오히려 자신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자신에겐 없는 생기가 있는 여자였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입학한 유민영 학생 맞죠?”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걸까?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 여자는 민영을 향해 너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원래 열정 있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아요. 늦게 입학했으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요. 광고홍보학과 교수로서 나도 열심히 도와줄게요.”
하얗고 고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하는 여자의 말에 민영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붙잡았다. 거친 자신의 손과 비교되는 너무나 고운 손이었다.
이 여자도 교수가 되었구나.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민영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곧장 한진서를 향해 다가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쌍인 화려한 펜던트 목걸이처럼 정말이지 너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었다.
왠지 모를 자격지심에 민영은 재빨리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교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애써 억눌러 왔던 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렇게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니 조금은 답답했던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