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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운명적 재회는 잘했어?”
여전히 민영이 사라진 문 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진서를 향해 혜연이 다가오며 물었다.
“모르겠네. 잘한 건지.”
“왜?”
“여기가 너무 떨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거든.”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하는 진서의 말에 혜연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예뻐 보여? 내가 보기엔 유민영 쟤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예전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뭐…….”
“변했지, 많이.”
“그렇지? 역시 세월엔 장사 없…….”
“더 예뻐졌어, 예전보다.”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진서의 말에 혜연은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예뻐져? 너 유민영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적어도 내 눈엔 그래. 늘 상상해 오던 모습보다 더 예뻐.”
“정말 못 말리겠다, 한진서. 배고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하는 혜연의 말에 진서는 조용히 웃었다.
“먼저 차에 가 있어. 챙길 서류가 있어서.”
진서의 말에 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얼른 나와.”
“그래.”
진서는 혜연이 교수실 밖으로 나가자,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를 챙겼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진서의 눈에 막 사과대 건물을 빠져나가고 있는 민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진서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유민영, 그 애가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이. 처음 수강 신청서에서 이름을 발견했을 때도, 학적부에서 민영의 얼굴을 확인해 보았을 때도 믿기지 않긴 했었다. 그래도 직접 보면 실감이 나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여전히 진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혹시 늘 꾸던 꿈이 아닐까? 혹시 자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그런 환상이 아닐까? 방금 전까지 이곳에 민영과 함께 있었건만, 그것마저 아득한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손을 뻗어 민영을 만지고 싶었다. 따뜻한 그 촉감을 느낀다면, 그런다면 조금은 더 실감이 날 것만 같았다. 사실 아까도 그녀를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고 얼마나 힘에 겨웠는지 모른다.
정말, 그 어떤 여자도 민영처럼 이렇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11년 전, 열아홉 살인 민영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을 이토록 뜨거운 욕망에 들끓게 하는 것은 오로지 저 아이뿐이었다. 그 시절, 얼마나 힘들게 참아 왔는지 모른다. 당장이라도 민영을 탐하고 싶은 마음과 진서는 끊임없는 사투를 벌어야 했었다.
자제력 강하기로 유명한 자신이 순진한 여고생에게 이런 추악한 욕망을 느낀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좀처럼 그 욕망은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욕망은 점점 더 강해졌다.
어린애라고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달콤한 민영의 향기를 맡을 때면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은 멀리멀리 날아가고 주체할 수 없는 엄청난 욕망만이 그를 지배했다.
11년이란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민영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여전히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자신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회갈색의 또렷한 눈동자, 오뚝한 콧대, 동그랗고 귀여운 코,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투명한 피부, 그리고 미치도록 입 맞추고 싶은 붉은 입술. 정말 변한 게 없었다.
아니, 혜연에게 말한 것처럼 진서의 눈에 지금의 민영은 더욱 예뻐 보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무척이나 수척해진 민영의 몸이었다. 열아홉 살 때는 얼굴에 젖살도 남아 있고, 적당히 통통해서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는데.
너무 말라 버린 것 같아 진서는 심장이 아릿해져 왔다.
바람이 차갑게 부는 교정 위에 서 있는 가녀린 민영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진서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렇게 창밖으로 민영을 훔쳐보고 있자니,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욕정이 진서의 마음을 휘저었다.
민영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자신을 지배했던 그 엄청난 욕정에 침식되지 않기 위해 진서는 재빨리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위험했다, 유민영은. 여전히 자신에게 위험한 존재였다.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마음을 민영에게만 느꼈다. 11년 전도, 지금도.
차분해지자, 한진서. 이제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시간은 충분해.
♣ ♣ ♣
“무진장 혼났나 봐요?”
사과대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두 팔을 벌리고 숨을 들이마시던 민영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영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지훈아! 어쩐 일이야? 오늘 수업 없다고 하지 않았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누나 보려고 잠깐 들렀어요. 아직 점심 전이죠? 같이 먹으러 갈래요? 내가 살게요.”
씩 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지훈을 보며 민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민영의 막내 남동생인 찬혁의 오랜 친구였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문화 대학교 학생이기도 했다.
유학은 꿈도 못 꾸고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기 바빴던 찬혁과 다르게 지훈은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작년에 귀국을 했다. 그리고 올해 복학을 한 녀석이었다. 지훈은 3학년으로, 나이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학번은 민영보다 훨씬 위였다.
그러나 생긴 것도 샤방샤방 꽃미남인 녀석이 성격도 얼마나 좋은지, 민영이 수능을 준비할 때 무척이나 많이 도와주었다. 그 덕분에 단번에 문화대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교수님 강의 시간에 딴짓하다가 걸려서 교수실로 불려갔다면서요?”
대학이란 곳은 생각보다 소문이 무척이나 빠른가 보다. 생글생글 웃으며 묻는 지훈의 말에 왠지 모르게 민망해진 민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좀 그럴 일이 있었어.”
“조심해요. 한 교수님 깐깐하기로 무지 유명하거든요. 뭐, 그만큼 실력은 있지만요.”
지훈의 말에 민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더 이상 그 남자에게 찍히기는 싫었으니까.
“근데 학교 식당으로 가는 거 아니야?”
민영은 아예 학교 밖으로 나가는 지훈에게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물었다.
“누나한테 처음으로 사 주는 밥인데 그런 데서 먹을 수는 없죠. 학교 밖에 굉장히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어요. 아마 누나도 좋아할 거예요.”
“레스토랑? 비싼 거 아니야?”
“알죠? 나 돈 많은 집 아들이라는 거. 그러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아요.”
지훈의 보드라운 갈색 눈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한진서, 그 남자 못지않게 잘난 척이 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녀석의 잘난 척은 그렇게 얄밉지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봐 와서 그런 건지, 그저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강의 시간에 잘 이해되지 않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알았죠?”
“알았어. 나중에 귀찮다고나 하지 마.”
“누나가 귀찮을 리가 없죠.”
“어? 그 말 녹음해 놓는다?”
“해요, 얼마든지.”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지훈이 붉은색 기와가 놓여 있는 파스텔 톤의 예쁜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프로방스>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었다.
“여기예요. 귀엽죠?”
“그러게. 무지 귀엽다.”
“안은 더 귀여워요. 음식 맛도 예술이고요.”
슬그머니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하는 지훈의 말에 민영은 기대감에 찬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
“먹고 반하지나 마세요. 들어갈까요?”
“응, 그래.”
예쁜 종이 매달려 있는 문을 열고 기다리는 지훈의 매너 있는 행동에 민영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지훈이 문을 닫지 않고 놀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훈아, 왜 그……!”
그런 지훈의 행동에 민영은 뒤를 돌아보며 그를 부르다가 문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바로 한진서와 그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기에.
“어? 한 교수님, 이 교수님! 점심 드시러 온 거세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게 반갑다는 듯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향해 지훈이 보드라운 갈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응. 지훈이 너도 점심? 아, 유민영 학생이랑 같이 온 거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는 한진서와 다르게 이 교수라 불린 여자는 친근하게 웃으며 지훈을 향해 물었다.
그렇게 지훈과 그 여자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민영은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 여자의 옆에 있는 진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하지만 민영은 어딘가 모르게 차가운 진서의 눈빛에 예의상 미소도 지을 수가 없었다.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어 버려서.
그렇게 허공에서 오랫동안 진서와 민영의 눈빛이 얽혀 있었다. 자신을 질책하는 듯한 그의 눈빛에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겨 민영은 먼저 그 시선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걸까? 기분이 나쁘면서도 한편으론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눈싸움도 그리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지훈과 대화를 끝낸 이 교수가 자연스럽게 한진서 옆에 가서 서는 걸 본 민영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너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식사 맛있게 해요.”
미소마저 세련된 이 교수의 말에 민영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들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지훈아, 가자.”
그렇게 인사치레를 한 후, 민영은 얼른 지훈을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그 손짓에 재빨리 다가온 지훈과 함께 민영은 제일 안쪽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최대한 저 두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어서.
“누나, 괜찮아요?”
제일 안쪽 자리에 앉는 자신을 바라보며 지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뭐가?”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자신의 앞에 앉아 걱정하는 지훈의 말에 민영은 환하게 웃으며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기분 안 좋을 리 있겠어? 네가 비싸고 맛있는 밥도 사 주는데.”
“진짜 괜찮아요?”
“괜찮다니까. 음, 이 집 뭐가 맛있어? 이왕 먹는 거 제일 맛있는 걸로 먹어야겠다. 네가 골라줘 봐.”
어린 녀석에게 자신의 감정을 들켰다는 게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 민영은 일부러 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지훈을 향해 말했다. 다행히 그런 자신의 연기가 통했는지, 지훈은 그제야 걱정스러운 눈빛을 거두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럴까요? 이 집 A정식 맛있는데 그걸로 시킬까요? 게살수프가 아주 예술이거든요.”
지훈의 말에 민영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하지만 민영의 눈엔 그런 지훈의 모습보다 자신들 자리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앉은 그 사람의 모습이 더 잘 들어왔다.
꽤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 때문일까? 민영의 눈엔 오로지 진서만 들어올 뿐이었다.
저 사람은 왜 자신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한 교수님한테 심하게 혼났어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서를 몰래 흘낏흘낏 훔쳐보고 있던 민영은 그 질문에 깜짝 놀라 지훈을 바라보았다.
“응?”
“무지 긴장한 얼굴로 저쪽만 훔쳐보고 있는 거 같아서요.”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진서가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묻는 지훈의 말에 민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냥. 잔소리 좀 들었지. 늦게 대학 왔으면 더 정신 차리고 하라고.”
“꽤 직설적이죠, 한 교수님?”
“그런 거 같더라.”
꽤가 아니라 대놓고 직설적인 그 성격을 이미 예전에 겪어 본 민영이었다. 힘들게 한 자신의 고백도 무척이나 직설적으로 거절해 버린 그 남자였으니까.
“그래도 희한하게 학생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특히 여학생들에게.”
“그래?”
“그럼요. 우리 대학에서 인기 최고일걸요? 아직 총각이라는 점 때문에 더 인기가 많은 거 같기도 하고요.”
지훈의 말에 민영은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왜 저 사람이 결혼을 안 했다는 사실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래도 애인은 있는 거 같은데?”
민영은 눈짓으로 진서의 옆에 있는 이 교수를 가리키며 지훈을 향해 물었다.
“아, 이 교수님요? 사실 저 두 사람 사이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누나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죠? 뭐, 두 분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늘 저렇게 붙어 다니는 게 그냥 친구 같지는 않아요.”
지훈의 말에 민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애인 사이는 맞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러게. 잘 어울린다, 저 두 사람.”
한때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저 남자 옆에 서는 꿈을. 하지만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이제 민영은 너무 잘 알았다. 더 이상 열아홉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었으니까.
♣ ♣ ♣
민영이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혜연과 마주친 순간 당황하던 민영의 얼굴이 진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민영의 감정을 정리시키기 위해 친구인 혜연에게 애인 행세를 부탁했던 진서였다.
민영을 향한 강렬한 욕망 탓도 있었지만, 그때 그 일의 배경엔 민영의 부모님도 연관되어 있었다. 진서가 과외를 시작한 이후, 성적이 떨어진 민영이었다. 그리고 민영이 공부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진서 때문이란 걸 안 그녀의 어머니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진서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민영이를 가르치는지 잘 알아요. 그런데 민영이가 좀처럼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민영 어머니의 말에 진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진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민영이 가르치느라고 고생한 진서 학생한테 이런 말 꺼내기 참 미안해요.”
“아닙니다.”
“우리 민영이가 진서 학생을 많이 좋아하는 거 알죠?”
어머니의 물음에 진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영이에겐 진서 학생이 첫사랑일 거예요. 물론 나도 진서 학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만, 지금이 민영이한테 엄청 중요한 시기잖아요.”
“네.”
“그러니까 지금은 민영이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줘요. 혹시 진서 학생도 우리 민영이를 괜찮게 생각한다면, 대학 들어가서 만나도 되잖아요. 그땐 내가 적극적으로 두 사람 밀어줄 테니까. 조금만 민영이에게 시간을 줄래요?”
차분하게 이어 나가는 민영 어머니의 말에 진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의 말이 구구절절 다 옳았으니까. 민영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백까지 꿰뚫고 있는 어머니의 눈빛에 진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럼 민영이 감정 정리에 대한 부분은 진서 학생에게 맡길게요.”
“네, 어머니.”
“민영이 대학 가면 우리 꼭 다시 만나요. 알겠죠?”
“네.”
자신에겐 민영이, 민영에겐 자신이 처음 만난 순간부터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진서 역시 민영을 만난 이후 좀처럼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이 엉망이 되었다. 민영과 함께 있을 때는 손을 뻗어 만지고, 안고 싶은 추악한 욕망에 시달려야 했고,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낸 적이 없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건 자신 하나면 족했는데. 민영 역시 성적이 떨어질 정도로 영향을 받고 있다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음은 계속해서 민영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다 외쳤지만, 한편으로 그녀를 망치게 될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진서는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말았다. 친한 친구인 혜연을 가짜 애인으로 내세워 민영이 감정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상처 입은 민영의 회갈색 눈에 한없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진서는 애써 냉정하게 굴었다.
그렇게 민영과의 시간은 끝이 났다. 아니, 이때만 해도 진서는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11년 가까이 민영을 만나지 못할 걸 알았다면, 그때 저런 바보 같은 선택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영이 수능을 무사히 치르고 대학생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진서는 굳게 믿었었다. 그 믿음 하나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2학기 때 내정되어 있던 6개월간의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난 후, 진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민영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수능이 끝나 있는 12월이었다. 이제는 당당하게 민영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꽃집에 들러 예쁜 꽃다발을 산 진서는 떨리는 마음으로 민영의 집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고 곧 모습을 드러낼 민영을 상상하며 혼자 웃고 있는데, 대문이 열리며 낯선 중년의 여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시죠?”
자신을 향해 묻는 여자의 말에 진서는 당황한 얼굴로 느릿하게 검은 눈을 깜박였다.
“민영이를 만나려고 왔는데요.”
“이 집엔 그런 사람 안 살아요.”
그 여자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서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분명 이 집이 맞는데.”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을 말하나 보네요. 그 사람들 이사 간 지 한 달 정도 되었어요.”
여자의 말에 진서의 머릿속은 멍해졌다.
“어디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어쨌든 이 집엔 그런 사람 없으니, 그렇게 아세요.”
그 말을 끝으로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진서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못 했었다. 당연히 민영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조차 걸어 보지 않고 찾아왔던 것이다.
진서는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민영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민영이 꼭 받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건만, 없는 번호라는 야속한 말만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진서는 완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3월에 문화대에 입학하는 학생들 중에 분명 민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온 학부를 다 뒤지고 다녔건만, 미치도록 그리운 민영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했을 텐데. 혜연과 자신의 모습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뒤돌아서던 민영의 모습이 진서의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영을 꼭 붙잡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어 버린 후회였다.
“진서야, 한진서.”
심각한 얼굴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진서는 자신을 부르는 혜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어? 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고. 근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혜연의 물음에 진서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냥 예전 생각.”
“생각 다 했으면 그만 내리자. 나 배고파.”
“그래.”
진서는 이렇게 대답을 하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11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이제라도 민영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이제부턴 서서히 민영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이렇게 만난 이상 절대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민영의 예쁜 얼굴을 떠올리며 진서가 웃는데, 먼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던 혜연이 걸음을 멈추는 게 보였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진서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민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민영뿐만이 아니었다. 문화대 최고의 킹카로 명성이 자자한 윤지훈의 모습도 진서의 눈에 함께 들어왔던 것이다.
윤지훈이랑 사귀는 걸까? 학적부를 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을 하긴 했지만, 애인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걸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순간 후회를 한 진서는 주먹을 꽉 쥐면서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역시 힘든 일이었다. 유민영과 연관된 일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조절한다는 것은 진서에게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다른 때에는 무척이나 쉽던 그 일들이 민영의 앞에선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
“우리도 앉자. 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지훈과 잘 아는 사이인 혜연이 얘기를 끝내고 돌아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진서를 향해 말했다. 그런 혜연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기면서도 진서는 좀 더 두 사람을 잘 관찰할 수 있게 민영이 정면에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그렇게 좋아?”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는 것도 혜연에게 떠넘기고 민영을 바라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는 진서였다. 그런 그를 향해 혜연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저 녀석이니까.”
“네가 너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고? 처음으로 마음을 준 여자라는 점은 이해하겠는데. 어떻게 사람 감정이 그렇게 하나도 안 변할 수가 있어? 그렇게 긴 세월을 안 보고 살았는데. 너 스스로 강박관념을 만들어 놓은 건 아니야? 변해선 안 된다, 이런 식의.”
혜연의 물음에 진서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저 녀석한테만 반응해, 내 심장이. 그 누구한테도 뛰지 않는 심장이 저 녀석한테만 두근거려. 단지 그거뿐이야.”
“다른 여자한테 관심 기울여 본 적은 있니?”
“저 녀석한테도 관심 기울이려고 한 적은 없어. 그냥 내 관심이 저 녀석한테 간 거지.”
사람들이 항상 자신에게 물었다. 왜 유민영이어야만 하냐고.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도 안 하고, 연애할 생각도 안 하고, 결혼엔 더더욱 관심도 없는 진서에게 사람들은 늘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진서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다른 여자에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 유민영처럼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지도 않고, 유민영처럼 자신을 지독한 소유욕에 들끓게 하지도 않았다, 다른 여자들은. 오로지 유민영만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하여튼 정말 못 말리겠다, 한진서. 그런데 많이 힘들겠는데? 지훈이랑 꽤 분위기 좋아 보이잖아?”
혜연의 말에 진서는 잔뜩 굳은 얼굴로 눈앞에 민영을 바라보았다. 들끓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주는 민영의 얼굴에 진서의 속은 또다시 비비 꼬이기 시작했다.
질투로 사람 돌아 버리는 꼴을 보고 싶은 거구나, 유민영.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진서는 눈앞에 스테이크가 윤지훈이라도 되는 양 거칠게 썰었다. 하지만 들끓는 질투만큼은 그런 행동에도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