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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지훈이 칭찬한 대로 레스토랑 음식은 꽤나 맛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 다음에 찬혁이랑 한 번 더 오자.”
“그래요. 그럼 누나 먼저 나가 있어요. 계산하고 화장실 좀 갔다가 나갈게요.”
“그래.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는 지훈을 따라 일어선 민영은 그렇게 대답을 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도대체 타이밍이 왜 그런 걸까? 같이 식사를 하던 이 교수는 어디 갔는지 혼자 밖에 서 있는 한진서, 그 남자의 모습이 민영의 눈에 들어왔다.
왠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민영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민영보다 진서의 시선이 더 빨랐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두 번 까딱까딱 흔드는 그 남자의 행동에 민영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진서를 향해 다가갔다.
“왜 도망가?”
삐딱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진서에게 민영은 슬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도망간 거 아닌데요?”
“그래? 식사는 맛있게 했냐?”
여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자신을 대하는 진서였다. 이제 더 이상 열아홉 살 소녀가 아닌 것을 이 남자는 모르나 보다.
“네. 아주 맛있네요.”
“그렇지? 이 집 아주 맛있기로 유명해.”
이 레스토랑 자랑하려고 부른 거야, 뭐야?
쓸데없는 말만 내뱉는 진서를 민영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애인은 어디 갔어? 이름이 윤지훈이었던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지훈을 애인이라 칭하는 이 남자의 말에 민영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애인 아닌데요?”
“흠, 그래?”
애인이 아니라는 민영의 대답에도 진서는 그저 무신경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럴 거면서 도대체 왜 물어본 건지.
“그러는 선생님, 아니 교수님 애인은 어디 갔는데요?”
진서의 무신경한 반응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뒤틀려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직도 기억하는 건가? 혜연이를?”
진서의 말에 민영은 그제야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 여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혜연, 생긴 것만큼 이름도 예쁘다고 그 당시 생각했었는데. 너무 긴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여자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럼요. 기억하죠.”
애인이라던 그 여자를 소개받던 날,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민영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처음으로 실연이라는 아픔에 심장이 무너져 내렸던 날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
“여전히 사귀나 봐요…….”
이 말을 입 밖에 내뱉으면서, 아니, 내뱉는 그 순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이런 말은 왜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 한진서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 말을 내뱉은 자신에 대한 원망에 민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한진서의 얼굴이 자신의 눈앞으로 쑥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입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지으면서.
“뭐, 뭐예요?”
깜짝 놀란 민영은 다리를 살짝 굽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서에게 물었다.
“여전하구나?”
진서의 말에 민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도대체 뭐가 여전하다는 것일까?
“뭐가요?”
“11년이 흘렀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여서.”
굽혔던 무릎을 펴며 하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변했어요, 나. 그때처럼 철없지도 않고,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잘 알아요, 이젠.”
“그래도…….”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진서를 민영은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예뻐, 너.”
이,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건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다.”
진서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민영이 멍하게 서 있는데, 그 남자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에 와서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예전에 민영이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약속을 잘 지켰을 때 해 주던 것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진서, 그 남자였다.
“선생님?”
“그럼 다음에 보자.”
진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민영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섰다. 왜 혼자 여기 서 있었던 걸까? 설마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걸까?
“선생님!”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진서를 민영은 재빨리 불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뒤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민영의 말에 진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 위로 오후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진서를 더욱 반짝여 보이게 했다.
“그때 왜 갑자기 그만둔 거예요? 나 수능 볼 때까진 있어 주기로 해 놓고 왜 갑자기 말도 없이 그만둔 거예요?”
민영의 물음에 진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진서의 얼굴을 가리는 햇살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랬어요?”
예전엔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만 사정상 그만둔다고 말하고, 사라져 버린 저 사람 때문에.
“……네가 너무 예뻤으니까.”
그렇게 말한 진서는 민영에게 가볍게 손을 젓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진서의 그 한마디에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뛰는지도 모르는 듯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니, 참 이상한 자신의 심장이었다. 왜 저 사람에게만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남자들을 보아 왔고, 그리고 간혹 자신에게 대시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남자에게도 뛰지 않았던 심장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저 남자 앞에서만 이 심장이 반응했다. 마치 이 심장의 주인이 저 사람인 것처럼.
애인도 있는 남자인데. 그리고 지금은 사랑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데. 그런데 저 사람을 향해서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누나. 너무 늦었죠?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 좀 하고 나오느라고요.”
넋이 나간 얼굴로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한진서, 그 남자의 뒷모습을 찾고 있는 민영의 귓가에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너무 예뻤으니까.’라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어서.
제2장
굉장히 피곤한 하루였다. 오후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정도로. 하지만 퇴근하고 돌아올 동생들을 위해 집에 일찍 오는 날이라도 직접 자신이 저녁을 해 먹이고 싶어, 민영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세 남매가 살기엔 비좁은 방 두 개짜리 낡은 빌라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세 남매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살 수 있다는 것에 민영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무너지면서 원래 가족들이 함께 살던 전원주택풍의 예쁜 그 집은 빚 때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덕분에 처음에 세 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영은 더욱 열심히 돈을 벌었다. 친척집에 신세를 지며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동생들이 너무 안쓰러워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셋이 함께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버지 지인 분이 취직을 시켜 주어서 민영은 몇 달간 모은 돈으로 달동네에 단칸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더욱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비록 전세지만, 주방까지 딸려 있는 지금의 빌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처음에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애인이 있는 민희 결혼도 시키고, 찬혁이 장가까지 보내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만 했다.
이왕이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간다고 동생들 고생시키는 것 같아, 그게 그저 미안한 민영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자신의 동생들이 참으로 착하고 예쁘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해해 주고, 자신을 따라 주었던 동생들. 민영에겐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옛 생각에 잠긴 민영은 퇴근하고 돌아올 동생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희와 찬혁이 특히 좋아하는 강된장찌개를 끓이고, 호박잎을 데쳐 상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자신의 바로 밑에 여동생인 민희가 퇴근을 해 집에 도착하였다.
“어쩐지 일찍 오고 싶더라니. 진짜 맛있겠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식탁 앞으로 쪼르륵 걸어와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조용히 웃었다. 큰 키, 균형 잡힌 몸매, 거기다가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긴 서구형 미인인 민희는 돌아가신 엄마를 아주 빼다 박았다.
어릴 때부터 이런 민희가 민영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생겨 귀엽다는 인상이 강한 자신과 다르게 인형같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저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으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와. 그런데 찬혁인? 늦는데?”
민영의 물음에 민희는 고개를 슬며시 내저었다.
“언니 또 깜박했구나? 찬혁이 오늘 회식 있다고 그랬잖아. 어제 언니한테 얘기하드만.”
웃으면서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그제야 어제 찬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회식이라 많이 늦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라던 말이. 오늘 한진서, 그 남자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상태라, 찬혁이 했던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민영이었다.
“아, 맞다. 그랬지?”
“하여튼 이런 게 우리 언니의 매력이라니까. 기다려. 금방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올게.”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한 민희는 민영과 함께 쓰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는, 정말 빠른 속도로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다.
“난 언니가 이거 해 줄 때가 제일 좋더라. 잘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서둘러 식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는 민희를 민영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음식을 참으로 복스럽게 잘 먹는, 정말 너무 예쁜 자신의 동생이었다.
“언니는 어때? 대학 생활은 할 만해?”
“응. 재미있어. 하고 싶었던 공부하니까 아주 신나.”
자신의 대답에 민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커다란 까만 눈을 가늘게 뜨며 민영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공부만 하지 말고 연애 좀 해라, 언니. 우리 때문에 연애 한 번 못해 봤잖아? 대학도 갔으니까 괜찮은 대학생 있으면 잡아.”
“나보다 한참은 어린애들이거든? 그리고 연애 같은 거 별로 관심 없어. 너나 얼른 시집가, 이것아.”
자신 때문에 일부러 민희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벌써 삼 년째 사겨 온 애인이 청혼까지 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거절을 한 민희였다.
“언니가 안심을 시켜 줘야 결혼을 하지. 언니 좋은 남자 만날 때까진 결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 나 얼른 치우고 싶으면 좋은 남자 만나. 뭐, 학생이 싫으면 잘생긴 총각 교수라도 찾아봐. 알았지?”
자신을 위하는 민희의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너무 빨리 철들어 버린 민희가 안타까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민희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자신이 그 나이 땐 부모님께 참 철없이 굴었는데, 이 아이는 그래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나 재욱이한테 무지 원망 듣겠다. 이 언니 욕 먹이기 싫으면 적당히 튕기다가 시집가. 알았지? 월급도 부지런히 모으고. 내 학비는 걱정하지 마.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니까.”
“됐어. 아르바이트는 할 생각도 하지 마. 여태껏 우리 위해 일해 놓고 무슨 아르바이트야, 아르바이트는? 그러기만 해 봐. 나 정말 화낼 거야. 하고 싶은 공부나 열심히 해. 알겠지?”
짐짓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흘겨보며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그저 조용히 웃었다. 비록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두 동생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 큰 행복을 느끼면서.
정말 이걸로 충분했다. 이런 예쁜 동생들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거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유민영,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시간 낭비하지 말자.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한진서, 그 남자의 얼굴을 밀어내며 민영은 조용히 다짐했다. 사랑 말고도, 자신은 할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 ♣ ♣
“누나, 만 원씩 회비 걷을게요.”
강의실에 들어서는 민영에게 과대표인 형석이 다가오며 말했다.
“회비? 무슨 회비?”
갑작스러운 회비 이야기에 민영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내일이 한진서 교수님 생일이거든요. 우리 담임교수님이시니까 회비 걷어서 선물 사려고요.”
형석의 말에 민영은 회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진서, 그 남자의 생일이라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생일이 3월이란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민영은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형석에게 건네주었다.
“선물 산 다음 내역 공개할게요.”
“그래.”
멀어지는 형석을 보면서 민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회비를 내긴 했지만 진서에게 무언가 따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예전에 과외를 할 때 자신의 생일날 진서가 선물을 챙겨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닐까? 회비도 냈는데 따로 선물까지 챙기는 건. 그래도 왠지 그냥 넘어가기 아쉬웠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민영의 눈에 자신의 휴대폰이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만든 십자수 휴대폰 줄이 보였다.
이 정도는 몇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데.
그리고 십자수 휴대폰 줄 정도는 부담 없이 줄 수 있는, 괜찮은 선물 같았다.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니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민영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왕이면 진서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지훈이 칭찬한 대로 레스토랑 음식은 꽤나 맛있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 다음에 찬혁이랑 한 번 더 오자.”
“그래요. 그럼 누나 먼저 나가 있어요. 계산하고 화장실 좀 갔다가 나갈게요.”
“그래.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
계산서를 들고 일어서는 지훈을 따라 일어선 민영은 그렇게 대답을 하고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도대체 타이밍이 왜 그런 걸까? 같이 식사를 하던 이 교수는 어디 갔는지 혼자 밖에 서 있는 한진서, 그 남자의 모습이 민영의 눈에 들어왔다.
왠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민영은 그대로 뒤돌아서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민영보다 진서의 시선이 더 빨랐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두 번 까딱까딱 흔드는 그 남자의 행동에 민영은 살며시 한숨을 내쉬며 진서를 향해 다가갔다.
“왜 도망가?”
삐딱한 표정으로 물어보는 진서에게 민영은 슬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도망간 거 아닌데요?”
“그래? 식사는 맛있게 했냐?”
여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자신을 대하는 진서였다. 이제 더 이상 열아홉 살 소녀가 아닌 것을 이 남자는 모르나 보다.
“네. 아주 맛있네요.”
“그렇지? 이 집 아주 맛있기로 유명해.”
이 레스토랑 자랑하려고 부른 거야, 뭐야?
쓸데없는 말만 내뱉는 진서를 민영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애인은 어디 갔어? 이름이 윤지훈이었던가?”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지훈을 애인이라 칭하는 이 남자의 말에 민영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애인 아닌데요?”
“흠, 그래?”
애인이 아니라는 민영의 대답에도 진서는 그저 무신경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럴 거면서 도대체 왜 물어본 건지.
“그러는 선생님, 아니 교수님 애인은 어디 갔는데요?”
진서의 무신경한 반응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뒤틀려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남자의 눈빛이 날카롭게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아직도 기억하는 건가? 혜연이를?”
진서의 말에 민영은 그제야 기억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 여자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혜연, 생긴 것만큼 이름도 예쁘다고 그 당시 생각했었는데. 너무 긴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여자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럼요. 기억하죠.”
애인이라던 그 여자를 소개받던 날,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민영의 머릿속에 선명했다. 처음으로 실연이라는 아픔에 심장이 무너져 내렸던 날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
“여전히 사귀나 봐요…….”
이 말을 입 밖에 내뱉으면서, 아니, 내뱉는 그 순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이런 말은 왜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목소리가 너무 작아 한진서가 그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 말을 내뱉은 자신에 대한 원망에 민영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한진서의 얼굴이 자신의 눈앞으로 쑥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입가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지으면서.
“뭐, 뭐예요?”
깜짝 놀란 민영은 다리를 살짝 굽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서에게 물었다.
“여전하구나?”
진서의 말에 민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도대체 뭐가 여전하다는 것일까?
“뭐가요?”
“11년이 흘렀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여서.”
굽혔던 무릎을 펴며 하는 진서의 말에 민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많이 변했어요, 나. 그때처럼 철없지도 않고,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잘 알아요, 이젠.”
“그래도…….”
그렇게 말끝을 흐리는 진서를 민영은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예뻐, 너.”
이,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한 건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반갑다.”
진서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민영이 멍하게 서 있는데, 그 남자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에 와서 닿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예전에 민영이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약속을 잘 지켰을 때 해 주던 것처럼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진서, 그 남자였다.
“선생님?”
“그럼 다음에 보자.”
진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민영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섰다. 왜 혼자 여기 서 있었던 걸까? 설마 자신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왜 저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 걸까?
“선생님!”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진서를 민영은 재빨리 불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뒤돌아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민영의 말에 진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 위로 오후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어 진서를 더욱 반짝여 보이게 했다.
“그때 왜 갑자기 그만둔 거예요? 나 수능 볼 때까진 있어 주기로 해 놓고 왜 갑자기 말도 없이 그만둔 거예요?”
민영의 물음에 진서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니, 진서의 얼굴을 가리는 햇살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랬어요?”
예전엔 물어보고 싶어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만 사정상 그만둔다고 말하고, 사라져 버린 저 사람 때문에.
“……네가 너무 예뻤으니까.”
그렇게 말한 진서는 민영에게 가볍게 손을 젓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진서의 그 한마디에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뛰는지도 모르는 듯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였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니, 참 이상한 자신의 심장이었다. 왜 저 사람에게만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남자들을 보아 왔고, 그리고 간혹 자신에게 대시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그 어떤 남자에게도 뛰지 않았던 심장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저 남자 앞에서만 이 심장이 반응했다. 마치 이 심장의 주인이 저 사람인 것처럼.
애인도 있는 남자인데. 그리고 지금은 사랑 같은 건 생각할 수도 없는데. 그런데 저 사람을 향해서 또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누나. 너무 늦었죠?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 좀 하고 나오느라고요.”
넋이 나간 얼굴로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한진서, 그 남자의 뒷모습을 찾고 있는 민영의 귓가에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너무 예뻤으니까.’라는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어서.
제2장
굉장히 피곤한 하루였다. 오후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니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었을 정도로. 하지만 퇴근하고 돌아올 동생들을 위해 집에 일찍 오는 날이라도 직접 자신이 저녁을 해 먹이고 싶어, 민영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세 남매가 살기엔 비좁은 방 두 개짜리 낡은 빌라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세 남매가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 살 수 있다는 것에 민영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무너지면서 원래 가족들이 함께 살던 전원주택풍의 예쁜 그 집은 빚 때문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덕분에 처음에 세 남매는 뿔뿔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영은 더욱 열심히 돈을 벌었다. 친척집에 신세를 지며 눈칫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동생들이 너무 안쓰러워 악착같이 돈을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셋이 함께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아버지 지인 분이 취직을 시켜 주어서 민영은 몇 달간 모은 돈으로 달동네에 단칸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더욱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비록 전세지만, 주방까지 딸려 있는 지금의 빌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처음에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애인이 있는 민희 결혼도 시키고, 찬혁이 장가까지 보내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만 했다.
이왕이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그래서 동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늦은 나이에 대학에 간다고 동생들 고생시키는 것 같아, 그게 그저 미안한 민영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은 자신의 동생들이 참으로 착하고 예쁘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운 상황을 잘 이해해 주고, 자신을 따라 주었던 동생들. 민영에겐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옛 생각에 잠긴 민영은 퇴근하고 돌아올 동생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민희와 찬혁이 특히 좋아하는 강된장찌개를 끓이고, 호박잎을 데쳐 상을 차리고 나니, 어느새 자신의 바로 밑에 여동생인 민희가 퇴근을 해 집에 도착하였다.
“어쩐지 일찍 오고 싶더라니. 진짜 맛있겠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식탁 앞으로 쪼르륵 걸어와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조용히 웃었다. 큰 키, 균형 잡힌 몸매, 거기다가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하게 생긴 서구형 미인인 민희는 돌아가신 엄마를 아주 빼다 박았다.
어릴 때부터 이런 민희가 민영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생겨 귀엽다는 인상이 강한 자신과 다르게 인형같이 또렷하고 아름다운 저 얼굴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으니까.
“얼른 옷 갈아입고 와. 그런데 찬혁인? 늦는데?”
민영의 물음에 민희는 고개를 슬며시 내저었다.
“언니 또 깜박했구나? 찬혁이 오늘 회식 있다고 그랬잖아. 어제 언니한테 얘기하드만.”
웃으면서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그제야 어제 찬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회식이라 많이 늦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라던 말이. 오늘 한진서, 그 남자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상태라, 찬혁이 했던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민영이었다.
“아, 맞다. 그랬지?”
“하여튼 이런 게 우리 언니의 매력이라니까. 기다려. 금방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올게.”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한 민희는 민영과 함께 쓰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는, 정말 빠른 속도로 욕실에 들어가 씻고 나왔다.
“난 언니가 이거 해 줄 때가 제일 좋더라. 잘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서둘러 식탁 앞에 앉아 식사를 하는 민희를 민영은 그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음식을 참으로 복스럽게 잘 먹는, 정말 너무 예쁜 자신의 동생이었다.
“언니는 어때? 대학 생활은 할 만해?”
“응. 재미있어. 하고 싶었던 공부하니까 아주 신나.”
자신의 대답에 민희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커다란 까만 눈을 가늘게 뜨며 민영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공부만 하지 말고 연애 좀 해라, 언니. 우리 때문에 연애 한 번 못해 봤잖아? 대학도 갔으니까 괜찮은 대학생 있으면 잡아.”
“나보다 한참은 어린애들이거든? 그리고 연애 같은 거 별로 관심 없어. 너나 얼른 시집가, 이것아.”
자신 때문에 일부러 민희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벌써 삼 년째 사겨 온 애인이 청혼까지 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거절을 한 민희였다.
“언니가 안심을 시켜 줘야 결혼을 하지. 언니 좋은 남자 만날 때까진 결혼할 생각 없어. 그러니 나 얼른 치우고 싶으면 좋은 남자 만나. 뭐, 학생이 싫으면 잘생긴 총각 교수라도 찾아봐. 알았지?”
자신을 위하는 민희의 마음이 느껴져 뭉클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너무 빨리 철들어 버린 민희가 안타까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민희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자신이 그 나이 땐 부모님께 참 철없이 굴었는데, 이 아이는 그래 보지도 못했다.
“그러다 나 재욱이한테 무지 원망 듣겠다. 이 언니 욕 먹이기 싫으면 적당히 튕기다가 시집가. 알았지? 월급도 부지런히 모으고. 내 학비는 걱정하지 마.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니까.”
“됐어. 아르바이트는 할 생각도 하지 마. 여태껏 우리 위해 일해 놓고 무슨 아르바이트야, 아르바이트는? 그러기만 해 봐. 나 정말 화낼 거야. 하고 싶은 공부나 열심히 해. 알겠지?”
짐짓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흘겨보며 하는 민희의 말에 민영은 그저 조용히 웃었다. 비록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두 동생들이 있다는 것에 무지 큰 행복을 느끼면서.
정말 이걸로 충분했다. 이런 예쁜 동생들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거 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유민영, 쓸데없는 감정싸움에 시간 낭비하지 말자.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한진서, 그 남자의 얼굴을 밀어내며 민영은 조용히 다짐했다. 사랑 말고도, 자신은 할 게 너무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 ♣ ♣
“누나, 만 원씩 회비 걷을게요.”
강의실에 들어서는 민영에게 과대표인 형석이 다가오며 말했다.
“회비? 무슨 회비?”
갑작스러운 회비 이야기에 민영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내일이 한진서 교수님 생일이거든요. 우리 담임교수님이시니까 회비 걷어서 선물 사려고요.”
형석의 말에 민영은 회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진서, 그 남자의 생일이라니.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생일이 3월이란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민영은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형석에게 건네주었다.
“선물 산 다음 내역 공개할게요.”
“그래.”
멀어지는 형석을 보면서 민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회비를 내긴 했지만 진서에게 무언가 따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예전에 과외를 할 때 자신의 생일날 진서가 선물을 챙겨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닐까? 회비도 냈는데 따로 선물까지 챙기는 건. 그래도 왠지 그냥 넘어가기 아쉬웠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민영의 눈에 자신의 휴대폰이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만든 십자수 휴대폰 줄이 보였다.
이 정도는 몇 시간이면 만들 수 있는데.
그리고 십자수 휴대폰 줄 정도는 부담 없이 줄 수 있는, 괜찮은 선물 같았다.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니 오후에 시간을 내어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민영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왕이면 진서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