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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연인의 자세
1화
프롤로그
“야, 이 상놈의 자식아. 너는 상도덕도 몰라? 어? 어디서 남의 자리를 제집 안방처럼 차지하고 앉아 있어? 당장 여기서 안 꺼져!”
“미친. 네가 전세라도 냈어? 길바닥에 주인이 따로 있냐? 먼저 와서 맡으면 주인이지, 이게 어디서 주인 행세야?”
소리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말다툼을 불안한 눈으로 보며 발을 굴렀다. 노점상을 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적응이 되거나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었다. 소리는 자신이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뛰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아, 제발, 두 분 다 진정하시지…….
“이 개 상놈의 자식이!”
그러나 소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씩씩대던 중년 사내가 거칠게 달려들어 상대방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살집이 좀 있는 상대방의 몸이 그 힘에 비틀거리다가 소리의 가판대를 덮쳤다.
“앗! 안 돼!”
소리는 다급히 가판대에 진열해 놓은 인형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우지끈, 가판대가 부서지면서 그 위에 진열되어 있던 인형들이 한꺼번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안 돼. 안 되는데…….”
소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바닥에 떨어진 인형들을 줍기 위해 쭈그리고 앉았다. 이 인형들은 소리에게 단순한 인형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까지 도안을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직접 하나하나 원단을 고르고,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만든 것들이 바로 이 인형들이었다.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들을 함께 버텨 준 존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가 붉어진 눈을 깜빡이며 작은 기린 인형을 줍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중년 사내의 발이 먼저 기린 인형을 밟았다.
“씨발, 이건 또 뭐야? 꼴같잖은 게…….”
중년 사내는 발에 밟힌 물컹한 느낌이 불쾌했는지 인상을 구기며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툭, 하고 인형을 발로 걷어찼다. 소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일어서며 항의했다.
“아저씨! 이렇게 함부로 인형을 발로 밟으시면 어떻게 해요!”
“넌 또 뭐야?”
중년 사내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소리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계집년이 함부로 나대? 어? 이게 겁대가리 없이. 뭐야, 이깟 인형들 파는 주제에 어디 어른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 어? 야, 넌 애비, 에미도 없어? 네 부모가 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어른한테 대들고…….”
“함부로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요!”
소리는 발끈해서 외쳤다. 방금 전까지는 인형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형 때문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려고 지금껏 얼마나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한테 부끄럽게 산 적 없어요! 사과하세요!”
억울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너무나 죄스러웠다. 이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몫까지 견뎌야 했던 삶을 이런 식으로 조롱당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버티고, 또 버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망할 년이!”
중년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새 중년 사내와 싸우던 남자는 뒤로 물러선 채 두 사람을 보고만 있었고 그 주위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화가 치밀었는지 자그마한 소리를 위협적으로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이년이…… 길거리에서 물건이나 파는 주제에 뭐가 잘나서 큰소리야? 어? 네 부모가 퍽이나 널 부끄러워하지 않았겠다, 응? 나이도 어린 게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뻔하지, 뭐. 하긴, 자식을 보면 그 부모도 알 수 있다고, 네 부모도 어떤 수준일지…….”
“우리 부모님, 당신한테 그런 말 들을 분들 아니야!”
소리는 중년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욕을 먹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 자그마한 소리는 비교도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바로 앞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흐려졌다.
“이 쌍년이, 진짜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중년 사내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소리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는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 사람은 질끈 눈을 감았다. 큼직한 손에 얻어맞는다면 저 자그마한 여자는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다칠 것만 같았다.
“그만하시죠.”
그때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어떤 폭력도 소리에게 날아들지 않았다. 한껏 움츠러들었던 소리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막아선 사람을 막 확인하려는 찰나, 중년 사내가 신음을 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더구나 연약한 여자한테 할 짓입니까, 지금 이게?”
소리와 중년 사내 사이에 서 있는 젊은 남자는 어떻게 보면 수상해 보일 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시커먼 모자에 선글라스, 그리고 까만 재킷까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는 너무나 쉽게 사내의 팔을 붙든 채 차분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마치 가벼운 뭐라도 쥐고 있는 사람처럼, 사내가 아무리 팔을 비틀어 빼려고 해도 놓아주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남자의 덩치가 크거나 근육질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델처럼 키도 크고 늘씬한 스타일이었다.
그런 상반된 이미지 탓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젊은 남자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중년 사내 역시 다르지 않았는지 잔뜩 당황한 채 젊은 남자를 보다가 말을 더듬었다.
“거, 거…… 이 팔 좀 노, 놓고 얘기합시다. 예?”
“……괜찮아?”
젊은 남자는 중년 사내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려 소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예? ……저요?”
소리는 갑자기 변해 버린 상황에 얼떨떨한 얼굴로 젊은 남자와 중년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다가 되물었다. 그러자 젊은 남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그래, 너. ……한소리.”
“예?”
누구……. 저를 아시는지……. 소리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묻자, 남자가 중년 사내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소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전 사내의 발에 밟혔던 기린 인형을 주워서 소리에게 내밀며, 소리에게만 보이게끔 슬쩍 선글라스를 내리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소리야.”
“……!”
소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떴다. 이미 6년 전에 끝났던, 소리 자신의 손으로 끊어 냈던 인연이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 정도연, 너…….”
“자리 좀 옮길까? 너 놀란 건 알겠는데, 내가 좀 곤란해서.”
젊은 남자, 정도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리며 작게 말했다. 소리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라도 금방 정도연, 아니, ‘정이준’을 알아볼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정이준.
대한민국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배우였다. 3년 전, 홍창익 감독의 영화 ‘그림자’를 통해 데뷔하자마자 그 해의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받았고, 작년에는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배우들 중 하나로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는 배우 정이준.
그런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스캔들 하나 없이 차근차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가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늘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모습으로 영화계 쪽의 사람들이나 기자들 사이에서도 호감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갑자기 등장해서 실패 없이 화려하게 날아오른 만큼 쉽게 초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는 단순히 인기나 돈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역할조차도 받아들여서 멋지게 소화해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소리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아픈 순간을 함께하기도 했고.
“…….”
소리는 가슴속 어딘가가 쓰라린 것만 같아서 무심코 목 아래를 문질렀다. 한 군데에 구멍이 크게 뚫린 것도 같고, 여기저기 베인 상처들을 건드린 것처럼 불편하기도 했다.
“소리야. 응?”
소리는 가만히 도연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가 내밀고 있는 손에는 작은 기린 인형이 들려 있었다. 기린 인형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6년 전의 기억처럼 말이다.
1. 다시 만나다(1)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소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2학년 1학기가 끝나 가던 무렵이었다.
여름방학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교복 하복조차도 살갗에 감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던 것으로 소리는 기억한다. 체육 시간이 끝난 뒤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담임이 창백한 얼굴로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순식간에 귀가 꽉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도, 주변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소리는 그 뒤의 일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누군가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휘둘리고, 또 휘둘려야 했다.
기억나는 것은, 코끝을 맴돌며 사라질 줄 모르던 향을 피우는 냄새. 그리고 누군가의 통곡.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 그리고 그녀의 쌍둥이 동생, 오리의 부재(不在)가 전해 준 서늘함.
그 와중에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화장장에서 부모님의 유골함을 받아 들었고,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했다. 소리는 그 모든 과정을 흐릿한 머리로 간신히 이어 나가야 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모든 일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진행되어서 그 속도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소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야,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홀로 남은, 모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집에 돌아온 뒤에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하나뿐인 혈육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리, 내 동생. 소리는 다시 현관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복조차 벗지 못한 채 도착한 병원의 중환자실 출입문 앞에서, 그녀는 그제야 무너지고 말았다. 굳게 닫혀 있는 차가운 문은 그녀에게 큰 절망처럼 다가왔다.
* * *
“오리는…… 그 뒤로 계속 깨어나지 못한 거야?”
“응.”
“…….”
소리의 대답을 들은 도연은 잠시 침묵했다. 소리는 고집스럽게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의 차를 타고 오리가 입원해 있는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지 십 분은 지난 것 같다. 딱히 볼 것도 없는 지하주차장의 하얀 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다시 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뭐가.”
“한 번도 들러 보지 못해서.”
“…….”
“너랑 헤어졌어도…… 그래서 너와는 끝이었다고 해도 오리는 내 친구였으니까, 그건 변함없는 것이었으니까 오리를 보러 왔어야 했는데. 많이…… 서운했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런 마음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었다.
소리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밖은 추워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만드는데, 차 안은 훈훈하다 못해 더운 것도 같았다.
소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 보았다. 땀이 난 것도 같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차가운 손이 닿자마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따뜻한 날에도 소리의 손은 늘 차가웠다. 도연은 잠시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전한가 보네.”
“응?”
“손 차가운 거. 그래서……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시고는 했었잖아. 여자애가 손 차면 안 좋다고.”
도연은 문득 기억난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도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도연은 혀를 차며 자신의 실수를 탓했다.
“미안.”
“……아니야. 그래도, 우리 엄마…… 기억해 주니까 좋네, 뭐.”
소리는 억지로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소리는 당황한 마음에 서둘러 손으로 뺨을 닦았다.
“여기, 손수건.”
그때 도연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리는 정면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도연이 손수건을 내밀며 소리를 응시했다.
“……고마워.”
소리는 도연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뒤, 다시 앞을 보았다. 손수건이 그녀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그것을 눈물을 닦는 데에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연은 잠시 소리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면회 시간이 몇 시부터라고?”
“아…… 이제 올라가 보면 될 거야.”
소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도연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였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소리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도연은 소리를 몰래 바라보다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딱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처음은, 우연이었다. 어떻게 달리 표현할 말도 없을 만큼, 정말 지독한 우연이라 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기대조차 한 적 없었다. 6년이나 지난 시간은, 기억을 깊숙한 곳 어딘가에 묻히게 할 정도로 길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그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한창 영화를 촬영하느라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와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 여배우가 촬영 펑크를 내는 바람에 하루가 고스란히 비어 버리게 되었다. 딱히 다른 스케줄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하루를 온전히 영화 촬영에 할애했던 터라, 갑자기 펑크가 난 일정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려웠다.
어떤 충동이었을까.
본래 그렇듯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충동적으로 행동했었다. 비어 버린 하루를 그냥 보내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차 키를 집어 들고 나와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며 드라이브를 했다. 딱히 뭔가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소리를 보았다.
작은 몸집의 여자가 바쁘게 가판대에 인형을 진열하며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박힐 듯이 들어왔다. 바늘을 한 줌 집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도연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1화
프롤로그
“야, 이 상놈의 자식아. 너는 상도덕도 몰라? 어? 어디서 남의 자리를 제집 안방처럼 차지하고 앉아 있어? 당장 여기서 안 꺼져!”
“미친. 네가 전세라도 냈어? 길바닥에 주인이 따로 있냐? 먼저 와서 맡으면 주인이지, 이게 어디서 주인 행세야?”
소리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말다툼을 불안한 눈으로 보며 발을 굴렀다. 노점상을 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적응이 되거나 익숙해지는 일은 아니었다. 소리는 자신이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뛰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아, 제발, 두 분 다 진정하시지…….
“이 개 상놈의 자식이!”
그러나 소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씩씩대던 중년 사내가 거칠게 달려들어 상대방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살집이 좀 있는 상대방의 몸이 그 힘에 비틀거리다가 소리의 가판대를 덮쳤다.
“앗! 안 돼!”
소리는 다급히 가판대에 진열해 놓은 인형들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우지끈, 가판대가 부서지면서 그 위에 진열되어 있던 인형들이 한꺼번에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 안 돼. 안 되는데…….”
소리는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바닥에 떨어진 인형들을 줍기 위해 쭈그리고 앉았다. 이 인형들은 소리에게 단순한 인형이 아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새벽까지 도안을 그리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직접 하나하나 원단을 고르고, 밥 먹을 시간까지 아껴 가면서 만든 것들이 바로 이 인형들이었다. 홀로 견뎌야 하는 시간들을 함께 버텨 준 존재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리가 붉어진 눈을 깜빡이며 작은 기린 인형을 줍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중년 사내의 발이 먼저 기린 인형을 밟았다.
“씨발, 이건 또 뭐야? 꼴같잖은 게…….”
중년 사내는 발에 밟힌 물컹한 느낌이 불쾌했는지 인상을 구기며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툭, 하고 인형을 발로 걷어찼다. 소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일어서며 항의했다.
“아저씨! 이렇게 함부로 인형을 발로 밟으시면 어떻게 해요!”
“넌 또 뭐야?”
중년 사내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소리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계집년이 함부로 나대? 어? 이게 겁대가리 없이. 뭐야, 이깟 인형들 파는 주제에 어디 어른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 어? 야, 넌 애비, 에미도 없어? 네 부모가 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어른한테 대들고…….”
“함부로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아요!”
소리는 발끈해서 외쳤다. 방금 전까지는 인형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인형 때문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려고 지금껏 얼마나 발버둥을 치며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을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한테 부끄럽게 산 적 없어요! 사과하세요!”
억울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너무나 죄스러웠다. 이런 말을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몫까지 견뎌야 했던 삶을 이런 식으로 조롱당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자신에게는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버티고, 또 버티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망할 년이!”
중년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느새 중년 사내와 싸우던 남자는 뒤로 물러선 채 두 사람을 보고만 있었고 그 주위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화가 치밀었는지 자그마한 소리를 위협적으로 내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이년이…… 길거리에서 물건이나 파는 주제에 뭐가 잘나서 큰소리야? 어? 네 부모가 퍽이나 널 부끄러워하지 않았겠다, 응? 나이도 어린 게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는 거 보면 뻔하지, 뭐. 하긴, 자식을 보면 그 부모도 알 수 있다고, 네 부모도 어떤 수준일지…….”
“우리 부모님, 당신한테 그런 말 들을 분들 아니야!”
소리는 중년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욕을 먹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욕을 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 자그마한 소리는 비교도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바로 앞조차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흐려졌다.
“이 쌍년이, 진짜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중년 사내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소리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는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식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떤 사람은 질끈 눈을 감았다. 큼직한 손에 얻어맞는다면 저 자그마한 여자는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다칠 것만 같았다.
“그만하시죠.”
그때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어떤 폭력도 소리에게 날아들지 않았다. 한껏 움츠러들었던 소리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막아선 사람을 막 확인하려는 찰나, 중년 사내가 신음을 뱉으며 몸을 비틀었다.
“뭐, 뭐야! 이거 안 놔?”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더구나 연약한 여자한테 할 짓입니까, 지금 이게?”
소리와 중년 사내 사이에 서 있는 젊은 남자는 어떻게 보면 수상해 보일 법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깊숙이 눌러쓴 시커먼 모자에 선글라스, 그리고 까만 재킷까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그는 너무나 쉽게 사내의 팔을 붙든 채 차분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마치 가벼운 뭐라도 쥐고 있는 사람처럼, 사내가 아무리 팔을 비틀어 빼려고 해도 놓아주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남자의 덩치가 크거나 근육질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델처럼 키도 크고 늘씬한 스타일이었다.
그런 상반된 이미지 탓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젊은 남자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중년 사내 역시 다르지 않았는지 잔뜩 당황한 채 젊은 남자를 보다가 말을 더듬었다.
“거, 거…… 이 팔 좀 노, 놓고 얘기합시다. 예?”
“……괜찮아?”
젊은 남자는 중년 사내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려 소리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예? ……저요?”
소리는 갑자기 변해 버린 상황에 얼떨떨한 얼굴로 젊은 남자와 중년 사내를 번갈아 보고 있다가 되물었다. 그러자 젊은 남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그래, 너. ……한소리.”
“예?”
누구……. 저를 아시는지……. 소리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묻자, 남자가 중년 사내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소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 전 사내의 발에 밟혔던 기린 인형을 주워서 소리에게 내밀며, 소리에게만 보이게끔 슬쩍 선글라스를 내리고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소리야.”
“……!”
소리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눈만 크게 떴다. 이미 6년 전에 끝났던, 소리 자신의 손으로 끊어 냈던 인연이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너…… 정도연, 너…….”
“자리 좀 옮길까? 너 놀란 건 알겠는데, 내가 좀 곤란해서.”
젊은 남자, 정도연은 난처한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리며 작게 말했다. 소리는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지만, 누구라도 금방 정도연, 아니, ‘정이준’을 알아볼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정이준.
대한민국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배우였다. 3년 전, 홍창익 감독의 영화 ‘그림자’를 통해 데뷔하자마자 그 해의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을 받았고, 작년에는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쥐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배우들 중 하나로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는 배우 정이준.
그런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스캔들 하나 없이 차근차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 가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늘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성실한 모습으로 영화계 쪽의 사람들이나 기자들 사이에서도 호감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갑자기 등장해서 실패 없이 화려하게 날아오른 만큼 쉽게 초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는 단순히 인기나 돈만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위해서라면 사소한 역할조차도 받아들여서 멋지게 소화해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소리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을 함께 공유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아픈 순간을 함께하기도 했고.
“…….”
소리는 가슴속 어딘가가 쓰라린 것만 같아서 무심코 목 아래를 문질렀다. 한 군데에 구멍이 크게 뚫린 것도 같고, 여기저기 베인 상처들을 건드린 것처럼 불편하기도 했다.
“소리야. 응?”
소리는 가만히 도연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가 내밀고 있는 손에는 작은 기린 인형이 들려 있었다. 기린 인형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했다. 마치,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6년 전의 기억처럼 말이다.
1. 다시 만나다(1)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소리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알게 되었다. 2학년 1학기가 끝나 가던 무렵이었다.
여름방학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교복 하복조차도 살갗에 감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난히 무더운 날이었던 것으로 소리는 기억한다. 체육 시간이 끝난 뒤 교실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담임이 창백한 얼굴로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와 소리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순식간에 귀가 꽉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도, 주변은 침묵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소리는 그 뒤의 일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누군가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휘둘리고, 또 휘둘려야 했다.
기억나는 것은, 코끝을 맴돌며 사라질 줄 모르던 향을 피우는 냄새. 그리고 누군가의 통곡.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 그리고 그녀의 쌍둥이 동생, 오리의 부재(不在)가 전해 준 서늘함.
그 와중에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화장장에서 부모님의 유골함을 받아 들었고, 납골당에 유골함을 안치했다. 소리는 그 모든 과정을 흐릿한 머리로 간신히 이어 나가야 했다.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는데, 모든 일은 너무나 쉽고 빠르게 진행되어서 그 속도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소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야, 그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홀로 남은, 모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겨진 집에 돌아온 뒤에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무너질 수 없었다. 그녀에게 남은 하나뿐인 혈육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오리, 내 동생. 소리는 다시 현관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상복조차 벗지 못한 채 도착한 병원의 중환자실 출입문 앞에서, 그녀는 그제야 무너지고 말았다. 굳게 닫혀 있는 차가운 문은 그녀에게 큰 절망처럼 다가왔다.
* * *
“오리는…… 그 뒤로 계속 깨어나지 못한 거야?”
“응.”
“…….”
소리의 대답을 들은 도연은 잠시 침묵했다. 소리는 고집스럽게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의 차를 타고 오리가 입원해 있는 병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지 십 분은 지난 것 같다. 딱히 볼 것도 없는 지하주차장의 하얀 벽을 보고 있으려니까, 다시 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뭐가.”
“한 번도 들러 보지 못해서.”
“…….”
“너랑 헤어졌어도…… 그래서 너와는 끝이었다고 해도 오리는 내 친구였으니까, 그건 변함없는 것이었으니까 오리를 보러 왔어야 했는데. 많이…… 서운했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런 마음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었다.
소리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밖은 추워서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게 만드는데, 차 안은 훈훈하다 못해 더운 것도 같았다.
소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 보았다. 땀이 난 것도 같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차가운 손이 닿자마자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따뜻한 날에도 소리의 손은 늘 차가웠다. 도연은 잠시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전한가 보네.”
“응?”
“손 차가운 거. 그래서……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시고는 했었잖아. 여자애가 손 차면 안 좋다고.”
도연은 문득 기억난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도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 도연은 혀를 차며 자신의 실수를 탓했다.
“미안.”
“……아니야. 그래도, 우리 엄마…… 기억해 주니까 좋네, 뭐.”
소리는 억지로 웃으려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소리는 당황한 마음에 서둘러 손으로 뺨을 닦았다.
“여기, 손수건.”
그때 도연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소리는 정면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도연이 손수건을 내밀며 소리를 응시했다.
“……고마워.”
소리는 도연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뒤, 다시 앞을 보았다. 손수건이 그녀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그것을 눈물을 닦는 데에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연은 잠시 소리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면회 시간이 몇 시부터라고?”
“아…… 이제 올라가 보면 될 거야.”
소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도연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였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소리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도연은 소리를 몰래 바라보다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이런 식으로 느닷없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딱히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처음은, 우연이었다. 어떻게 달리 표현할 말도 없을 만큼, 정말 지독한 우연이라 할 수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기대조차 한 적 없었다. 6년이나 지난 시간은, 기억을 깊숙한 곳 어딘가에 묻히게 할 정도로 길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그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한창 영화를 촬영하느라고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정도로 바쁜 와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상대 여배우가 촬영 펑크를 내는 바람에 하루가 고스란히 비어 버리게 되었다. 딱히 다른 스케줄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하루를 온전히 영화 촬영에 할애했던 터라, 갑자기 펑크가 난 일정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도 어려웠다.
어떤 충동이었을까.
본래 그렇듯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충동적으로 행동했었다. 비어 버린 하루를 그냥 보내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뭔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차 키를 집어 들고 나와서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며 드라이브를 했다. 딱히 뭔가를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 소리를 보았다.
작은 몸집의 여자가 바쁘게 가판대에 인형을 진열하며 종종거리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박힐 듯이 들어왔다. 바늘을 한 줌 집어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도연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