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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다시 만나다(2)


헷갈린다거나 할 것도 없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한소리’였다. 자그마한 몸집에 종종거리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움직임이 작은 다람쥐를 연상시키는 것도 다를 것이 없었다.
6년 전, 도연은 종종 그녀를 다람쥐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고는 했었다. 추운 겨울에는 자신의 패딩 점퍼를 입혀 주고는 날다람쥐라고 놀리기도 했다. 그러면 소리는 파르르 떨며 발끈하면서도 곧바로 춥지 않냐고 걱정하면서 다시 패딩 점퍼를 도연에게 벗어 돌려주려고 낑낑대고는 했었고.
“가방은 두고 올라가. 무겁잖아.”
“아니야. 오리 얼굴만 보고 바로 집에 가야지.”
소리는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데려다줄게, 도연은 그 말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6년 전, 이미 끝나 버린 관계였다. 친구일 수도 없고, 다른 무엇일 수도 없었다. 데려다주겠다는 말조차 쉽게 나올 수 없는, 그런 애매한 사이였다.
“……그래. 가자.”
도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지우며 소리에게 말했다. 소리의 까만 눈이 잠시 도연에게 머물러 있다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도연은 소리의 그 시선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 미쳤구나.’
그리고 곧바로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는 얼굴을 쓸었다.

* * *

― 야, 이준아! 너 지금 어디야, 인마!
면회를 하러 들어가기에 앞서, 도연은 휴대폰을 꺼 놓았던 것을 잊고는, 반대로 켜져 있는 것을 끌 생각에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 바람에 휴대폰이 켜졌고, 기다렸다는 듯 벨소리가 울려서 전화를 받아야 했다.
바보같이 전화 꺼 놓은 걸 잊어버리다니……. 도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매니저, 박상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잠시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병원이야.”
― 뭐? 병원? 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어? 그래서 연락이 안 된 거야? 어디야? 어느 병원인데? 누구, 같이 있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니야, 그런 거…… 병문안 온 거야.”
도연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멀찌감치 보이는 중환자실 글자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더듬듯이 바라보았다. 오리가 저 안쪽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무려 6년이나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도 했다.
도연의 머릿속에 환하게 웃던 자신의 친구가 떠올랐다. ……왜 이렇게 됐을까. 너도, 나도, 그리고 소리도…… 우리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일까.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리는 듯한 둔통이 일었다.
― 병문안? ……후우, 야, 인마. 그렇다고 나한테도 말 한마디 없이 잠적해 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여기 지금 완전히 난리난 거 알아? 촬영하던 놈이 갑자기 사라져서 아주 한바탕 뒤집어졌어, 인마. 알아? 사장님까지 생난리를 쳤다니까. 어디서 냄새 맡고 왔는지 벌써 기자들 몰려왔어. 어슬렁거리는 게 딱 하이에나 같은 게, 완전히 세렝게티 초원이 따로 없더라. 아마 지금쯤 네 집 주변에도 기자들이 깔려 있을걸?
그때, 간호사실 쪽에서 나온 소리가 도연에게 다가오다가 통화 중이란 것을 알아차리고 멈칫거렸다. 도연은 소리에게 잠깐만, 하며 입 모양으로 말하고는 다시 박상호에게 말했다.
“어쨌든 형한테 부탁 좀 할게. 감독님께는 내가 직접 사과할 테니까 집 근처의 기자들이나 수거해 줘.”
― 기자들이 무슨 쓰레기라도 되냐? 수거는 무슨 수거. 하여간, 너 이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너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착실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너랑 말 몇 번만 주고받으면 자기네들이 얼마나 착각했는지 깨달을 텐데 말이야. 안 그러냐? 하긴, 나도 너랑 처음 만났을 때는 아주 제대로 속았지만.
박상호는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 이준이, 너…… 진짜 무슨 일이야? 단순히 병문안 가겠다고 전부 펑크 내고 무책임하게 잠수할 놈은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성격은 더러워도 일 하나는 완벽하게 하는 놈이 무슨 일이기에……. 도연은 걱정스럽게 말끝을 흐리는 매니저의 목소리에 희미하게 웃었다.
어쨌든 일을 떠나서라도, 상호는 자신에게 제법 소중한 사람이기는 하다. 오히려 자신을 방치하고 버렸던 부모보다도 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니…….
도연은 다시 소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통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그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중환자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연이 소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뭐…… 참을 수가 없었어.”
― 뭘? 뭘 참을 수가 없어서?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상호의 물음에 도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친 듯한 웃음이 금방이라도 버석거리며 부서질 것 같았다.
“아니.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어. 도연은 그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6년 전,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오리야…….”
소리는 도연과 함께 중환자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오리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도연은 소리의 뒤를 따라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소리의 뒷모습이 지쳐 보였다.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인형을 파느라고 지쳤을 게 분명했다. 더구나 오늘은 시비에 휘말려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도연은 잠시 소리의 뒷모습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생소한 광경이었다.
도연은 이를 악물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알던 이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이 알던 한오리가 맞았다. 그러나 비쩍 말라서 생기 없이 누워 있는 이는 예전에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던 친구가 아니었다.
“…….”
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리는 그런 도연을 잠시 돌아보았다가 다시 오리가 누워 있는 침대 쪽으로 눈을 돌렸다.
오리는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누가 와 있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소리는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눈을 깜빡이다가 오리의 손을 잡고는 간신히 입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오리야, 누가 온 줄 알아? ……정도연. 도연이 왔어. 기억하지? 전도연이랑 이름 비슷하다고 처음에 이름 듣자마자 네가 막 웃는 바람에…… 도연이랑 너, 처음 만나자마자 싸웠었잖아.”
그리고 곧바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잖아. 소리는 뒷말을 삼킨 채 오리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오리의 체온은 소리보다 높았다. 수족냉증을 앓아서 겨울이 되면 더욱 고생하는 소리와는 달리 오리의 손은 따뜻해서 맞잡고 있으면 금세 그 온기가 전달되어 소리의 손도 따뜻해지고는 했었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보면 남매지간에는 이성에 눈을 뜨면서 어색해지기도 하고, 일부러 더 고약하게 굴기도 하고, 싸우기도 자주 싸우는 것 같았지만 소리와 오리는 달랐다.
쌍둥이인 그들은 중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누구보다도 친한 단짝으로 지냈다.
고등학교는 다른 곳을 갔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으로 문자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바람에, 그것을 본 반 아이들이 오리를 두고 ‘소리의 남자친구’라며 오해를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가끔 먼저 수업을 마친 오리가 소리의 학교 정문 앞에 서서 기다리곤 해서 그 오해는 꽤 오래 이어졌었다.
“생각나? 그 뒤로도 너희, 진짜 많이 싸웠던 거. 툭하면 싸워서 둘 다 판다처럼 눈 시퍼렇게 멍들어서 엄마한테 혼나고. 그래 놓고 금세 까먹었는지 엄마가 간식 만들어 주면 서로 먼저 먹겠다고 또 싸우다가 팔 들고 벌섰던 거……. 너희 그러는 거 보면서 내가 다 부끄러웠어. 알아? 유치원생도 아니면서 하는 행동들은 어쩜 그렇게 둘 다 유치했는지.”
소리는 코끝이 찡해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도연이 그녀의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오리야, 바로 그 유치했던 정도연이 왔어. 너랑 툭하면 싸웠던 도연이. 창피하지? 민망하지? 왜 예전 일을 다시 꺼내나 싶지?”
그러니까 일어나. 일어나서 창피하니까 그만 좀 하라고, 얼굴도 붉히고 그래 봐. 응? 소리는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속으로 삼키며 도연을 돌아보았다. 도연이 짐짓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진짜 유치했는지 알겠다.”
“유치했거든?”
“너만큼 유치하지는 않았을걸? 나랑 오리랑 둘이서 목욕탕 간다고 얼마나 심통 부렸었는지 기억 안 나? 뻔히 억지라는 걸 알면서, 로마 시대에는 남녀 혼욕이 가능했다는 둥…….”
“야! 너야말로 그런 건 좀 잊어 주면 안 돼?”
“그 재미있는 걸 왜 잊어? 두고두고 떠올려야지.”
도연은 픽,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도연의 턱이 몇 번이나 경련을 일으킬 것처럼 움직였지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도연은 잠들어 있는 오리를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늦었다. 미안.”
도연은 오리에게 사과했다. 소리와 헤어졌다고 해서 오리와도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도연은 오리를 찾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6년이 지났다.
“변명이겠지만…… 너 사고당하고 조금 지나서 미국으로 쫓겨났었거든.”
소리는 오리의 손을 잡은 채 도연의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그러나 도연은 소리를 쳐다보지 않은 채, 오리를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두 분 모두 나를 맡지 않겠다고 하시는 바람에, 이리저리 떠돌다가 미국에 사는 고모한테 보내졌어.”
소리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지만 말을 꺼내는 도연은 오히려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계속 돌아오지 못했어. 아니, 돌아올 마음이 없었어. 이곳에 남은 건 상처뿐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러다가 운 좋게 미국에서 홍창익 감독님을 알게 되었어. 거의 낙하산으로 영화를 찍고, 그러다 보니까 다시 한국에 돌아오기는 했는데…… 너를 만나러 오는 게 무섭더라고.”
“…….”
“알잖냐. 내가 겁쟁이인 거.”
도연은 마치 깨어 있는 사람에게 말하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들, 미국에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한국에 돌아와 ‘정이준’이 되어서 어떻게 지냈는지, 하는 이야기들. 소리는 가만히 오리의 손을 잡은 채 도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이토록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도연’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리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상처를 주었던 도연은, 그 뒤에 또 상처를 입었다. 부모의 이혼, 그리고 버림.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상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사춘기 시절의 여자친구와 자신을 낳아 준 부모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으니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모가 모두 외면해서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떠나야 했던 그는, 어떤 마음으로 떠났던 것일까. 소리는 가슴속이 저릿해지는 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숨을 멈추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어린 나이였다. 그리고 현실은 차가웠다.
소리는 그 현실이 유독 자신에게만 차갑다고 느꼈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힘들게 살아 낸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좋아한다며 그녀를 붙잡던 도연에게조차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던 것도 같다.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는 왜 그런 말만 하는 거야, 하는 원망. 그랬기에 헤어지자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너도 아파 보라고. 너도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아파 보라고.
도연도 자신만큼 어렸고, 그의 현실 또한 차가울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채.
“너, 지금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지? 속으로 나 겁쟁이라며 웃고 있지? 다 알아, 인마. 내가 널 모르냐? 한오리, 내가 너를…… 모르겠냐?”
소리는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도연의 뒤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리에게 뭔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열여덟 도연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 스스로 놓아 버렸던 인연이었다. 모든 것이 힘들고 괴로워서, 그래서 괜한 원망을 품고 끊어 버렸던 인연이었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버렸던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리웠던 사람이었다. 열여덟의 서툰 첫사랑이었다. 남들에게는 그저 어린애들의 감정 따위로 치부될 수 있는, 그런 풋풋한 감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리에게는 너무나 그립고, 절실한 사람이기도 했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후회했는지,
다시 돌아온 너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나는 그 어떤 것도 너에게 얘기할 수 없어.
“…….”
소리는 눈물이 가득 고였던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오리를 향해 서 있는 도연에게 등 뒤의 소리가 보일 리 없었다. 소리는 그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중환자실 밖으로 몸을 돌렸다.

* * *

소리는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복도에 있는 의자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았다. 그녀는 움츠러든 자세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를 그리워했던 가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뛰고 있었다.
다시 이렇게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놀라서 그런 것일까. 소리는 애써 가슴이 뛰는 이유를 예상치 못했던 재회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단순히 그런 놀라움이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소리는 허리를 숙여 무릎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병원 복도의 바닥을 가만히 응시했다.
“……미쳤어.”
이제 와서 왜…… 왜 이러는 거야. 소리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졌다. 소리는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러지 마.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도연이 이렇듯 다가온 것은, 아마도 지난날에 대한 추억, 그리고 자신에 대한 동정심, 그런 것들 때문일 거다.
더구나 이렇게 다시 만난 것 자체도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다. 착각하지 말자. 애당초 그가 나를 일부러 찾은 것도 아니고…… 그저 우연히 나를 보고 도와준 것일 뿐이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김에 이곳까지 함께 온 것에 불과하고……. 그러니까 그의 연민 섞인 호의에 이렇게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토록 상처를 주었으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으면서.
“소리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
“소리야?”
“…….”
도연은 중환자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웅크리고 있는 소리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다가갔다. 자그마한 몸집이 더욱 움츠러들어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처연해 보여서, 도연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몸을 숙였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소리를 살폈다. 소리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소리야.”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던 날이었어.”
소리는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도연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그녀가 누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오리의 이야기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모두가 변할 수밖에 없었던 날의 이야기였다.
“오리가 수학을 정말 잘했었잖아. 너도 알지? 그래서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대회에 갔었어. 게다가 그 경시대회를 주최한 곳이 오리가 가고 싶어 하던 대학교라서…… 꽤 오랫동안 경시대회를 준비했었어. 잠도 줄이고 새벽까지 공부하던 걸 몇 번 본 적이 있어. 잠 깨서 화장실 가다가…….”
소리의 창백한 뺨에 아픈 미소가 새겨졌다. 도연은 말없이 무릎을 꿇은 채 소리를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소리는 기억을 더듬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가…… 수업 끝나는 대로 집에 오라고 했었거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했었어. 아마, 오랜만에 외식이라도 하려던 건지도 몰라. 경시대회 준비하느라고 고생했던 오리한테 맛있는 것도 먹일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