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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후드
블러드후드 (1화)
Prologue
거리에 어둠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채즈 로시는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골목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겁에 질려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구석에 몰린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피하고자 발버둥치는 남자와 압도적인 힘으로 그를 압박하는 남자. 칠흑의 어둠이 그 남자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살려줘, 제발!!”
채즈 로시는 자신의 불운을 저주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 손에 돈이 들어오자 이젠 더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그저 기뻤을 뿐이다. 돈이 있는 자들이 그런 것처럼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고 자신의 행운을 자랑하고. 그런 것들을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채즈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을 이용해 은밀한 작업을 원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운반했고, 그 대가를 받고 즐겼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채즈 로시.”
남자가 나직이 채즈를 불렀다. 낮은 울림의 목소리가 귀를 통해 채즈의 목을 조였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공포가 채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넌 혈족의 규율을 어겼다.”
남자는 한 걸음 채즈를 향해 움직였다.
“아, 아니야. 나, 난…….”
채즈는 로시 가문의 직계가 아니었다. 방계 중의 방계. 직계가 끊어진 가문의 이름을 잇기 위해 멀고 먼 친척인 그가, 로시가(家)의 피라고는 몇십 분의 1만 겨우 섞여 있는 채즈가 ‘로시’의 성을 이어받았을 뿐이었다.
‘혈족의 이야기를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된다.’
언젠가 술에 취해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했던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혈족의 능력을 인간에게 들켜서도 안 된다.’
채즈는 몇 분간의 눈속임으로 상대가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재주만 있는 피라미였다. 가문의 이름을 대표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런 자신의 이름에 대한 중요성도 알지 못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재주가 무언가를 운반하는데 유용하게 쓰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해 먹고살았을 뿐.
남자는 채즈가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열심히 하던 변명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혈족의 이름을 이은 이상 무지(無知)도 죄(罪).”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어둠 사이로 스치고 지나간 빛이 남자의 얼굴을 잠시 드러냈다. 남자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까만 동공을 중심으로 피처럼 붉은색이 퍼지기 시작했다. 슬쩍 말려 올라가는 남자의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본능적인 공포가 솟구쳤다. 아무리 방계라도, 아무리 피라미라도, 혈족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는 자는 그 모습을 모를 수 없었다.
인간이 경외를 담아 부르는 모습을 유일하게 간직한 혈족의 공포. 배신자가 있을 때 그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나타난다는 악몽의 존재.
채즈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것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슬쩍 입가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제, 제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남자가 다시 한 번 움직인 순간.
“크, 클…….”
채즈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끝맺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악―――――!!!”
검은 밤하늘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공포와 어둠이 순식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사그라졌다.
잠시 후, 다시 일상적인 소리와 함께 골목은 평소와 다름없는 광경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남자도 채즈도 없었다. 언제 어둠이 존재했냐는 듯, 맑은 달빛이 골목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1 (1)
런던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기에는 그 말을 음미하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아직 9월이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매서운 기운과 차가운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다. 그래도 아직 살이 에이는 느낌까지는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지난겨울은 몹시 추웠다는 기억만 기에에게 남아 있었다. 이번 겨울도 그렇게 춥다면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기에 마치니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카이 섬 근처, 조그만 섬 이솔라(Isola)에서 자랐다. 기에가 자란 이솔라는 하이랜드에 위치해서 날씨도 지형도 험할 것 같지만, 마치 남쪽의 섬처럼 녹지도 많고 기후도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기후보다는 따뜻한 편이었다. 섬에서 자랄 때는 그 고마움을 몰랐었는데 막상 이렇게 런던의 학교에 진학하고 1년의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내고 보니 고향의 따뜻함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 것 같았다. 같은 영국인데도 런던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고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습하고 날카로웠다.
이번 학기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런던의 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에는 그 바람 하나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이, 나 왔어.”
기에는 코트를 벗으며 습관처럼 룸메이트 제이에게 말했다. 쌀쌀한 바람을 헤치고 룸쉐어 하고 있는 집으로 들어오니 얼었던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제이가 아직 집에 있었는지 거실의 벽난로에는 불이 켜져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밤이 되면 삐걱거리는 집 울음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지만 밝고 쾌활한 룸메이트 덕분에 금방 잊을 수가 있었다.
제이와 함께 산 것도 벌써 2년. 들어왔을 때의 느낌만으로도 제이가 있는지 없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제이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보아 아무래도 제이가 12년을 기다렸다고 감격하며 흥분한 게임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왔어? 잠깐만 기다려.”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잠시 뒤 제이가 목에 헤드폰을 건 채 손에 뭔가 들고 방에서 나왔다.
“고향에서 편지 왔어.”
그가 내민 편지 봉투에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고풍스러운 필체로 기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컴퓨터로는 느낄 수 없는 따뜻함이 그의 필체에 흐르고 있었다. 이 편지를 보낸 이는 평생 소식을 편지로 전했고 앞으로도 그럴 사람이었다.
“요즘도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네. 이메일 한 통이면 돈도 안 들고 금방 전달될 텐데.”
옆에서 같이 편지를 보고 있던 제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기에는 살짝 웃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기에의 집안인 마치니가(家)의 살림을 맡고 있는 집사, 요아힘이었다. 기에의 본가인 마치니가는 영국의 귀족 가문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가문이었다. 기에 본인도 순수한 이탈리아 혈통은 아니긴 했지만 엄연한 마치니가의 자손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기에도 자신의 집안이 오랜 세월을 이어온 유서 깊은 가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요아힘이 마치니 가문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요아힘은 고전적인 방법으로 편지를 쓰고 봉한 후 전달하는 것을 즐겼다. 진심을 담아, 정성껏 글을 쓰는 것이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늘 말했고, 어렸을 때 기에에게도 메모를 보내 전달을 한 적도 있었다. 기에는 요아힘의 글씨체가 좋았다. 영국 왕실의 초대장을 쓰는 장인보다 요아힘의 글씨체가 더 유려하고 귀족적이었으며 힘이 있었다. 본인은 아무 말 하지 않겠지만 기에는 알고 있었다. 요아힘은 아마 인편으로 직접 건넬 수 있는 편지였다면 밀랍 인장까지 찍어 보냈으리라는 것을.
기에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편지를 뜯었다.
― 손님이 방문하십니다. ―
편지지에 쓰인 것은 봉투와 똑같은 필체로 쓰인 단 한 줄.
“뭐야, 이건. 겨우 이 한 줄 보내려고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거야?”
옆에서 훔쳐보던 제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에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마치니가의 집사가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것은, 그 손님이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할아버지, 주세페 마치니에게 오는 중요한 손님이며, 때문에 기에가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집에 갔다 와야겠어.”
기에는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제이의 시선을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집? 설마 그 촌구석?”
“촌구석은 아니야.”
“그게 그거지.”
기에가 눈썹을 찌푸리며 편지를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뿐만 아니라 비행기 티켓도 들어 있었다.
런던에서 출발하는 내일 아침 9시 20분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지정해서 표를 준비했을 줄이야. 게다가 돌아오는 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방문자의 목적에 따라 체류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학기 시작하면 어떡하려고.”
“금방 올 거야. 일주일 정도면 되겠지. 하프텀(Half Term: 학기 중 방학)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기에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일주일. 일주일이면 방문자의 볼일도 끝날 것이다. 어떤 방문자든 간에 기에 본인에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기에는 관자놀이를 살짝 문질렀다.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람도 동물이라서 본능적인 직관이란 것이 있다고 하던가. 두려움이라고 하기에는 나쁘지 않고, 들뜬 기대감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기에의 가슴을 메우고 있었다.
언덕 위에 검은색의 마세라티 한 대가 웅장한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차를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본다면 군침을 흘릴 만한 모델이었다. 검은색의 차는 마치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장신의, 균형 잡힌 몸매의 남자였다. 남자는 잠시 멀리 펼쳐져 있는 평원을 바라보다 품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흩어졌다. 남자는 잠시 연기를 시선으로 쫓다가 시계를 보았다.
3시 15분.
이 시간은 ‘돈(Don: 귀인의 존칭) 마치니’의 낮잠시간이라 들었다. 언제 방문해도 괜찮다 들었지만 돈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떡해야 하나…….
남자는 다시 깊게 담배를 들이켰다. 하얀 연기가 공기 중에 사라졌다. 마치 인간들의 짧은 인생 같았다. 화려하게 시작해서 하얗게 사라지는.
자신답지 않다, 생각을 한 남자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이 슬쩍 비쳤으나 곧 사라졌다.
남자는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그 아래에 펼쳐져 있는 평원. 멀리서 풍겨오는 바다 내음.
마치 폭풍 전의 마지막 휴식 같은 느낌.
평소의 그답지 않은 감상이 남자의 눈동자에 어렸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모든 감각을 음미했다. 조용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 소리를 죽인 채 격렬하게 맴돌며 뻗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힘까지.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머지않았다는 것은 남자는 알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가 눈을 떴다. 조금 전과 달리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더 이상 남자의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한 시대를 지켜오던 현자가 마지막을 고하려 하고 있다. 조금 천천히 움직여도 괜찮으리라.
남자를 태운 검은 색의 마세라티는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듯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버스에서 내려 낯익은 언덕을 넘자 그리운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장미 덩굴이 휘감듯 늘어져 있는 낮은 담장을 쭉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서 낯익은 검은색 테일 코트를 입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요아힘.”
스스로의 목소리가 들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기에는,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오셨습니까, 도련님.”
기에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는 순간, 기에는 요아힘의 정중한 목소리와 행동이 그리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늘 그렇듯이 깔끔하게 테일 코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한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기에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동안이기 때문에 머리 모양에 특히 더 신경 써야 한다고 투덜대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공항까지 모시러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린애도 아닌데. 할아버지는?”
“돈께서는 오수(午睡)를 즐기고 계십니다.”
요아힘에 말에 안심을 한 듯 기에의 얼굴이 풀어졌다. 손님이 방문한다는 편지에 출발했지만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요아힘이 편지를 보낸 목적이 손님의 방문이 아닌 다른 것에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던 중이었다.
“조금 마르신 듯합니다, 도련님.”
“마르타가 해주는 음식을 먹지 못해 그래.”
“마르타가 들으면 기뻐하겠는데요.”
“혼자 먹기 힘들 정도로 음식을 많이 해주겠지.”
이런 대화가 그리웠었다. 소소한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가족이. 학교에서 사귀게 된 친구나 룸메이트 제이와도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눌 수는 있지만, 편하게 응석 부리듯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가족이 최고라는 것을 기에도 잘 알고 있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십시오. 돈께서 일어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아힘은 기에의 가방을 들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요아힘은 금방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결정한 대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는 것은 여전했다. 기에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요아힘을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니가(家) 저택은 작은 섬, 이솔라(Isola)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토에서 오는 몇 안 되는 배편으로 이솔라에 도착해서 버스나 자동차로 동쪽 지구로 이동하면 넓고 한적한 평원과 함께 마치니 저택이 보인다.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석조 건물이 이제는 세월의 흐름으로 회색빛에 가깝게 변해 있지만 기에에게 있어서는 그 어느 곳보다 마음 편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기에는 순수한 이탈리안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탈리안(Italian: 이탈리아 사람)과 잉글랜더(Englander: 잉글랜드 사람)의 혼혈인 아버지와 동양의 작은 나라인 한국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 기억에는 없으나 할아버지와 요아힘의 말로는, 기에는 어렸을 때 어머니의 고국에서 잠시 살았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후 간신히 연락이 닿은 할아버지가 기에를 찾아왔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자를 거두어 이렇게 키워 주신 것이 할아버지, 주세페 마치니였다.
지금도 기에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요아힘은 기에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것 때문에 느끼는 슬픔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가 느끼는 것과는 달랐다. 깊은 곳에서 오는, 말로 잘 표현할 수 없지만 그것은 좀 더 원초적인 공포에 가까웠다.
“쉬십시오. 저녁 식사는 두 시간 후입니다.”
“요아힘.”
방까지 안내한 후 요아힘이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하자 기에가 생각이 난 듯 그를 불렀다.
“방문한다는 손님이 누구지?”
“……거기에 대해서는 주인님께서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손님이 오시니 준비하고 도련님께 연락을 취하라는 말씀뿐이었습니다.”
“그래…….”
요아힘의 대답에 기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님이 오실 때 할아버지와 함께 맞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기에가 런던으로 유학을 간 후에는 그런 일이 뜸해졌다. 그래도 방학에 이솔라로 돌아와 있을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손님을 맞이했다. 집안의 큰 어른이신 할아버지는 방문하는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을 즐겼고,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 손자가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셨다. 자신의 사랑하는 손자를 많은 사람에게 소개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할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요아힘과 마르타는 웃으면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손님이 올 것이라 귀띔을 해주었고, 손님과 자리에 맞는 차림을 하도록 했었다. 이렇게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은 적은 없었다.
“중요한 분이라 하셨으니 저녁 식사 시간에 말씀해주시겠지요.”
요아힘은 기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기에는 잠시 방을 둘러보았다. 1년 만에 돌아온 방은 그동안 비워놓은 방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끗했다. 늘 사용하고 청소한 것처럼 침대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기에가 돌아오면 금방 다시 잠들 수 있도록 온기가 머물러 있었다. 아마도 오늘 돌아올 기에를 위해 탕파로 자리를 따뜻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세심하긴.”
기에는 침대에 털썩 누우며 중얼거렸다. 그 말 속에는 살짝 미소가 어려 있었다. 침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신기한 일이다. 같은 석조 건물이건만, 런던의 석조건물은 차갑고 춥다. 축축하다 못해 으슬으슬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마치니 저택은 항상 온기가 돌았다. 그립고 따뜻하고. 고향이라 그렇다고 누군가가 그랬지만 다른 뭔가가 있었다.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섬이라 영국에,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에 이런 섬이 있는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룸메이트 제이도 처음 들어보는 이곳에 대해 한 마디로 촌구석이라고 정의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에는 서운함도 있었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남이 시골이라 부르면 섭섭한 감정이랄까. 제이가 장난처럼 시골에서 왔다고 얘기하면 자신의 고향이 얼마나 좋은지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북쪽 지역이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녹지가 우거진 곳이 이곳, 이솔라(Isola)다. 돌아오면 언제나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고, 초록의 내음이 항상 기에를 맞았다. 따뜻한 계절에는 따뜻한 공기가 포근히 감싸 안으며 기에를 맞았고, 추운 계절에는 신비한 이야기를 숨긴 채 서늘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아름다운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요아힘이 자신을 맞아주는 이곳을, 기에는 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