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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후드 (2화)
1 (2)


이솔라는 작은 섬이지만 오래전부터 ‘혈족(Bloodhood)’이라 불리는 기에의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 혈족은 여러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각의 가문에는 그 가문을 책임지는 우두머리―수장―가 모든 것을 관할했다. 오랜 씨족 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혈족들은 각각의 가문이 맡은 바를 수행하며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 가끔은 말썽 많은 후계자가 있기도 했고, 그 후계자 덕분에 가문이 골치 아파하기도 했지만 오랜 전통을 이어오는 집단답게 오래 이어져 내려온 여러 가지 현명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할아버지, 주세페 마치니는 혈족의 어른 중 한 분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방문하고는 했다. 그것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뭔가 중요한 일이 생기면 꼭 할아버지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우연히 나왔을 때, 제이는 ‘시골이라 친척이 많구나.’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했다. 하지만 그런 집안의 관습도 기에에게는 하나의 생활이었고,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다. 좋은 재산이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고, 기에도 그 말씀에 동의했다.
오래도록 할아버지와 요아힘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
“……안……되는…….”
“……. 그……, 지금 나에게…….”
언제 잠이 들었는지 바깥의 부산한 소리가 조금씩 끊어져 들려왔다. 잠에 섞여 분명한 단어가 되지 못한 채 간간이 들려오던 소리들이 파도처럼 갑자기 확 밀려왔다.
“제가 왔습니다, 돈 마치니! 스쿠알로 가문의 수장이 돈과의 대화를 원합니다.”
그리고 함께 커진 목소리. 경박하기 짝이 없는 소란함이 기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건만 저 목소리의 주인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어둑해지는 바깥 풍경을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적어도 기본적인 예의와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는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 돈을 만나겠다고 하고 있어!”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주인어른의 시간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소란은 1층 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홀이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자 당황한 얼굴로 요아힘의 뒤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마르타가 눈에 들어왔다.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들이, 정확히는 큰 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고 있는 사람을 호위하듯 두 사람이 뒤에 서서 사나운 눈초리로 마르타와 요아힘을 노려보고 있고, 그것보다 더 한 걸음 뒤에 머리를 완전히 넘겨 짧게 묶은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서 있었다. 협박하듯 눈을 부라리는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자와 뒤를 받치듯 마지막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누가 어떻게 협박을 해도 상관없다는 듯 요아힘은 태연하게 서 있었지만 마르타는 기분 나빠 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히 집사 따위가 지금 오랜 가문의 수장을 방해하겠다는 건가?!”
“가문의 수장이시라는 분이, 혈족의 큰 어르신의 휴식을 방해하시다니, 그 가문의 가풍이 어떤지 알만하군요.”
“뭐야?!”
요아힘의 일침에 기분이 상한 듯 가운데의 남자가 발끈했다. 그의 흉포함은 꽤 유명한 편이었지만 요아힘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조용히 상대를 바라보며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 상대를 더 기분 나쁘게 하고 있었다.
“일개 종복 따위가 가문의 수장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네놈이 더 예의를 모르는 게 아닌가?! 종복이면 종복답게, 혈족 중요 가문의 수장에게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아야지!”
“…….”
요아힘은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요아힘이 지금 상대하고 있는 남자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지금 그는 지금 이 시간에 집안일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대도 그런 요아힘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놈!”
“이게 무슨 소란이지? 할아버님이 주무시는 것을 잊었어, 요아힘?”
발끈한 남자가 요아힘의 멱살을 움켜쥔 순간, 기에가 계단을 내려가며 소리를 냈다. 요아힘을 책망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상대방에게 뭐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파비오 스쿠알로.
그는 혈족의 오래된 가문 중 하나인 스쿠알로 가문의 수장.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만 이제는 가능하다면 서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기에가 런던의 대학으로 진학하기 전만 해도 그는 스쿠알로가(家)의 말썽 많은 후계자일 뿐이었는데, 기에가 이솔라를 떠나 있는 동안 가문을 이어받게 된 모양이었다.
“아하, 이게 누구야? 돈의 귀여운 손자, 기에 마치니가 아닌가.”
계단을 내려오는 기에를 본 파비오 스쿠알로가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곧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벌리며 인사했다.
“런던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얻을 게 있을 때는 돌아오는 모양이지, 기에?”
“스쿠알로 님!”
파비오 스쿠알로의 말에 날카롭게 소리친 것은 기에가 아닌 요아힘이었다.
“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요아힘? 기에까지 나타난 것을 보니 돈께서 드디어 결심을 하셨다는 게지. 안 그런가?”
스쿠알로의 목소리에는 빈정거림이 담겨 있었다.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기에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모습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향하는 기에의 반응에 파비오 스쿠알로는 씨익 웃었다.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기에 마치니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돌아가 주십시오, 스쿠알로 님. 이 이상 무례를 범하시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요아힘은 조금 전까지와 다르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스쿠알로가 그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 같았다.
“……보자 보자 하니까…….”
스쿠알로가 주먹을 움켜쥐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와 함께 스쿠알로의 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서 있던 두 사내도 스쿠알로와 함께 앞으로 내디뎠다. 소란이 일어나려는 순간.
――――――!
날카로운 살기가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기회를 만난 듯 험악한 표정으로 움직이려던 사내들이 순식간에 기(氣)에 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에는 단지 섬뜩한 느낌만 받았을 뿐이지만 스쿠알로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안색이 파랗게 질릴 정도로 굳어버렸다. 그래도 한 가문의 수장이라고 파비오 스쿠알로는 약간의 식은땀만 흘렸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부들부들 몸까지 떨고 있었다. 사내들은 뱀 앞에 놓인 작은 들쥐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때까지 조용히 서 있던 사내의 눈이 가늘어지며 경계하듯 한쪽을 바라보는 것이 기이했다.
갑자기 변해버린 상황에 어리둥절해 있는데, 청명한 종소리가 공기 중에 울렸다. 소리는 작고 낮았지만 종소리는 분명하게 울려 귀에 들어왔다. 1층 홀에 서 있던 사람들 중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돈 마치니가 집사 요아힘을 찾을 때 나는 소리였다.
“실례하겠습니다.”
요아힘은 언제 파비오 스쿠알로를 상대했냐는 듯 가볍게 인사한 후 안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섬뜩하게 공기를 가르던 기운이 사라졌다. 싸우려던 당사자가 사라지자, 스쿠알로도 김이 빠진 듯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그 기운을 누가 낸 것인지 찾고 싶은 눈치였지만 찾지 못한 채 곁에 서 있던 수행원에게 짜증만 낼 뿐이었다.
마르타는 금방이라도 주방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어린 도련님이 불한당과 둘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어,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 기에 옆에 바짝 붙었다. 요아힘이 안으로 들어간 이상, 또 행패를 부리면 이제는 자신이 내다 꽂겠다는 기색이었다. 기에는 마르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 지을 필요 없잖아, 기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 좀 웃어 보라고.”
스쿠알로도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이 샌 목소리였다.
“친구?”
기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친구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게 스쿠알로 가문의 예의야, 파비오?”
한때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이이긴 했다. 아이가 드물었던 혈족이었기에 비슷한 또래인 두 사람이 자주 어울려 놀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자라면서 스쿠알로가 심술 맞아졌지만 적어도 이 섬에, 낯선 곳에 와서 적응하는데 그가 많이 의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가문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형제처럼 자랐었다.
“돈께서 나를 피하시니 강하게 나갈 수밖에.”
“할아버지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셔.”
“글쎄. 돈께서도 손자가 엮이다 보니 피하고 싶으신 거겠지.”
“……무슨 말이야?”
기에의 말에 스쿠알로가 의외라는 듯 반응했다.
“너도 알고 돌아왔잖아.”
“알아……? 뭘?”
“끝까지 시치미를 떼겠단 말이지. 좋아, 네가 언제까지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기에. 곧 카니발이 시작될 텐데.”
“카니발?”
“순진한 척하지 마. 그건 축제야. 드디어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던 때가 온 거지, 기에 마치니.”
파비오 스쿠알로는 웃으면서 말했다.
카니발?
기에는 스쿠알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불안함이 먹구름 깔리듯 자리하기 시작했다.
요아힘이 보낸 편지에는 단순히 손님이 방문한다고만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신데 그것을 숨기기 위해 손님이 오신다는 핑계로 자신을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스쿠알로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기에가 모르는 그 어떤 이유가.
“파비오…….”
기에가 뭔가 말하려 할 때, 요아힘이 나와 바로 스쿠알로에게 향했다.
“스쿠알로 님, 주인님께서 내일 오후에 방문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만나겠다 하셨습니다.”
“……내가 이번에는 돈과 기에의 얼굴을 봐서 가도록 하겠지만.”
스쿠알로는 한 걸음 성큼 요아힘에게 다가갔다.
“두고 봐. 언젠가 네 그 건방진 낯을 한번 손봐줄 테니까.”
“…….”
스쿠알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내뱉고는 돌아가 버렸다. 스쿠알로를 따르던 사내들도 함께 모두 돌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제야 마르타도 일이 밀렸다고 투덜거리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소란함이 사라진 곳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드물게 요아힘이 한숨을 내쉬고는 안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향해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큰 소란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방해가 되지 않았다면 좋겠군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 깊은 저음의 목소리가 기에의 귀를 자극했다.
“제가 방문할 시간을 잘못 맞췄습니까?”
그림자가 깔려 있던 곳에서 누군가가 움직였다. 기에는 그제야 1층 홀 한쪽이 평소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택의 1층 홀은 채광이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아무리 해가 지고 어둑해졌다고 하지만―, 홀 안쪽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림자 속에서 나왔다. 한눈에도 위압감을 느낄 만한 장신의 남자였다.
그것은, 어둠의 존재가 빛으로 스며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지독히도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의 주변을 이공간(異空間)으로 만들며 존재하는 느낌.
기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잠들어 있던 감각이 모두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심장이 무섭게 요동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2 (1)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요아힘은 몇 번이나 기에에게 사과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요아힘은 마치 자신에게 모든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요아힘이 잘못한 것은 없잖아. 파비오가 막무가내인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걸. 아니, 이제는 스쿠알로라 불러야 하나.”
한 가문의 수장이 되면 그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혈족의 규율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어렸을 때 스쿠알로와 함께 자랐다 하더라도 파비오 스쿠알로가 그 가문의 수장이 된 지금은 어렸을 때처럼 파비오라고 부르지 않고 스쿠알로라고 불러야 했다. 그것에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자기 좋을 대로 행동하는 스쿠알로를 생각하니 기에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분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상대한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딱 잘라 말하는 요아힘의 태도에 기에는 씁쓸하게 웃었다. 옛날부터 요아힘은 스쿠알로를 무시했다. 어렸을 때도 가능하면 어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스쿠알로가 요아힘에 대해 잘 발끈하는 이유도 요아힘이 자신을 우습게―또는 한심하게―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업자득이라 생각하지만 저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요아힘을 보면 스쿠알로가 살짝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스쿠알로의 태도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스쿠알로는 자기 나름대로 요아힘은 집사라고 자신을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행동 자체가 더 요아힘의 비웃음을 샀지만.
“……할아버지 말씀이 길어지시네…….”
마음속에 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기에가 궁금한 것은 스쿠알로가 할아버지를 만나려는 이유도, 요아힘이 스쿠알로를 싫어하는 이유도 아니었다.
그 남자.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오듯 나타났던 사람.
그를 보는 순간, 기에는 알 수 있었다. 그가 편지의 손님이라는 것을.
기에는 조용히 홍차를 따르는 요아힘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와 함께 투덜대던 그가, 아무 대답이 없이 홍차를 따르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누구지?”
“……아울렌티가(家)의 분이십니다.”
“아울렌티가?”
“아직 어린 분들께는 생소한 이름입니다만, 저희 마치니가처럼 오래된 가문 중의 하나입니다.”
요아힘은 기에 앞에 홍차가 든 잔을 내려놓았다. 포트메리온의 찻잔에 담긴 차에서 향긋한 향이 올라왔다. 요아힘의 홍차는 세계 최고의 맛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아힘이 즐기는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어떤 종류의 홍차를 끓여도 최상의 맛이 났다. 한적한 오후에 요아힘이 끓여주는 홍차를 마시는 것이 기에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그분을 왜 초대하신 거지?”
“…….”
주변을 정리하던 요아힘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움직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기에는 요아힘의 그런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조만간에 말씀해 주시겠지요.”
“그러시겠지.”
기에는 찻잔을 잡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펼쳐져 있는 녹지가 평화로워 보였다. 이곳은 안전하다. 이곳은 행복한 장소이다. 늘 그렇게 생각하며 자랐다. 그런데 지금 울렁이고 있는 이 감각은 무엇일까.
‘곧 카니발이 시작될 거야, 기에.’
스쿠알로가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스쿠알로의 말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수장이 되고 나서 입이 무거워진 것일까, 아니면 음흉해진 것일까. 자기중심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가끔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그것이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제의 스쿠알로를 생각하니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수행원이라고 뒤에 몇 사람을 끌고 다니는 것도 달라진 점 중의 하나였다. 맨 마지막에 서 있던 남자는 예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스쿠알로가(家)의 사람이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한 행동에 기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차는 상념 없이 느긋하게 즐기시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요아힘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마치 기에의 생각을 안다는 듯한 눈치였다.
“주인님께서 모두 말씀해 주실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세요.”
“……알았어.”
기에는 차를 마셨다. 그런 기에를 요아힘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그날 밤은 할아버지와 만나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꽤 오랫동안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할아버지를 기다렸지만 할아버지와 그 낯선 손님과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여독이 남아 있었던 탓인지 기에는 결국 할아버지께 돌아왔다고 인사도 못 드리고 잠이 들고 말았다. 덕분에 다음 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씻은 후 습관처럼 산책에 나설 수 있었다.
동트기 전, 이슬을 머금은 공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누군가가 가슴에 황량한 아름다움을 전하는 곳이 이 하이랜드라고,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질적으로 존재하는 마법의 땅이 이 작은 섬이라고 했다. 알고 있는 사람들만 알고, 허락받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올 수 없는 땅. 어렸을 때, 마법의 기사 놀이를 하면서 상상하던 곳이 이 작은 섬이었다.
기에는 음미하듯 공기를 천천히 들이켰다. 서늘한 기운이 가슴으로 들어가 몸을 정화하는 느낌. 런던에서는 이 공기를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기에는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걸었다.
푸른 숲의 끝이 바다와 맞닿은 곳에 다다를 무렵, 기에는 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마치 대기에 녹아든 듯 존재하고 있었다. 숲과 바다가 하나의 선을 이룬 곳, 깎아지른 절벽에 그가 서 있었다. 날카롭게 부서진 바위들 사이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