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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1권



상사화 1권 (1화)
서장(序章)


자현은 어딘가가 어긋난 듯한 뻐근한 몸이 불편해 눈을 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라 입에서 어눌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멍한 정신으로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자현은 확연히 느껴지는 불편함과 이질감에 흠칫 깨어났다.
이상했다. 소름 끼치도록 엄습해 오는 불쾌함에 다시 입을 열었으나 역시나 흘러나오는 말은 끊어질 듯 미약한 신음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자현은 자신의 몸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다.
눈은 가려져 있고 입 또한 잔뜩 벌어져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각이 없는 두 팔은 단단하게 결박되어 있어 그것을 인식하자마자 손목이 욱씬 고통을 호소해 왔다.
비단 고통을 호소하는 곳은 손목뿐이 아니었다. 마치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몸에 감각이 없었고 움직여 보려고 해도 힘이라고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꾸만 힘없이 늘어지는 몸은 확실히 무언가 이상했다.
그래서인지 자현은 이 이상한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 퇴근을 하자마자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잠들었다. 그런 자신이 침실이 아닌 곳에서 깨어난 것도 이상한데 이런 꼴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설마 자는 사이에 납치라도 된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에게 해를 입힐 이들은 그들뿐이다. 피로 이어진 아버지라는 작자와 이복형제들. 자신을 항상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그들이라면 자신을 몰래 납치해 와 이런 꼴을 만들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또한 이해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이제 와서 무엇 때문에? 자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나. 이미 그 집안과 연을 끊은 지 오래였고 그들과는 가는 길 또한 달랐다. 그런데 또 무엇이 불안해서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단 말인가.
기어코 자신을 죽여서라도 불안요소를 없애고자 함인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자현이 허탈한 웃음을 흘릴 때였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철컹거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를 끝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자현은 당혹스러워하며 가려진 천 밑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더 했다가는 죽을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네?”
“무슨 상관이야? 삼황자가 직접 지시하고 청룡대장이 묵과한 일이라는데. 그리고 이 정도는 고신도 아니지. 감히 황족을 독살하려고 한 놈이다. 천벌 받아 마땅한 놈이지.”
“그렇긴 하지만 삼황자라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왜 자백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자백을 받아야 빨리 목을 칠 거 아닌가? 그런데 굶겨서 고신만 하라니.”
“그러게? 그 점은 나도 이해가 안 되네? 에이, 몰라! 우리 같은 놈들이야 높은 분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 아닌가? 자자, 잡소리 그만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삼황자는 누구고 청룡대장은 또 누구란 말인가? 게다가 황족 독살이라니.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자현은 침음을 흘렸다. 어딘가 익숙한 단어였지만 정확하게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그들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들이 아니라면 누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고사하고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 이외에도 자신에게 반감을 가진 이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것 같아 자현이 포기하려는 찰나 퍼뜩 스치는 위화감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러고 보니 사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이상했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나.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한국어가 아니다. 영어도 무엇도 아니었다. 난생처음 듣는 언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하는 말을 자신이 알아듣고 있다는 사실에 자현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제대로 정리하기도 전에 거칠게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에 입에 물린 무언가를 이빨이 으스러지도록 악물었다. 단순한 물이 아니다! 벌어진 입안으로 비린내와 짠맛이 느껴졌다. 동시에 물이 피부에 닿자 따갑다는 말로는 모자랄 만큼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마치 살을 녹이는 듯한 괴로움에 자현이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리자 사내들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미처 반응할 정신도 없이 곧바로 등과 가슴을 강타하는 매서운 고통에 두 눈을 크게 뜬 채 억눌린 비명을 터트려야 했다.
머릿속을 채운 혼란을 단번에 날려 버릴 정도의 고통에 자현은 더는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오직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뒤를 이어 몸을 강타하는 매서운 채찍질 소리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자신이 지금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고통이 지나쳐 이제는 감각마저 사라져 가는 육체에 자현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만을 떠올렸다. 그만큼 호된 매질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의식마저 흐릿해져 갔다.
그때였다.
“멈춰라! 당장 고신을 멈춰!”
흐릿한 의식 너머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를 끝으로 자현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一章. 연자현과 연자운 (1)


세계 상위권에 드는 제성그룹의 회장은 오직 돈과 권력만을 좇는 전형적인 권세가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연상철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열등감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이였다.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에 좋은 소리 한 번 듣지 못한 그는 성장하며 점점 더 심해지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급기야 현실에서 도망쳤다. 전형적인 소설 속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동거를 하고 자식까지 본 철모르는 도련님의 일탈은 그렇게 행복한 듯했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에서 언제나 떠받들려 살아온 그가 고생이라고 해 봤을까. 자유를 찾아 떠난 것은 좋았으나 집안의 원조가 완전히 끊긴 순간 웃음은 줄어들고 가난이라는 칙칙하고 지긋지긋한 현실의 막막한 벽에 부딪힌 것이다.
기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월급쟁이로 평소 그의 씀씀이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수입이었다. 하물며 하찮게 여기던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의 밑에 들어가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처지가 지독히도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타고난 태생이 오만한 그는 어떤 일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겨우 얻은 일자리에서도 매번 쫓겨나거나 스스로 뛰쳐나왔다. 그러니 살림인들 온전했겠는가. 지긋지긋한 가난은 질기도록 따라붙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그는 점점 지쳐 갔다.
결국 견디다 못해 친우들에게 손까지 벌렸지만 제성그룹을 버린 그에게 돌아오는 건 무시와 경멸뿐이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제성그룹이라는 버팀목이 없는 이상은 결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철없는 도련님의 일탈은 3년을 견디지 못하고 끝이 났다. 회장은 돌아온 그를 여전히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다시 예전의 부를 누리게 해 주었다. 결혼을 시켜 가문의 세를 키우는 패로 쓰기엔 어리석은 아들도 유용했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이용한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의 이치였다. 그리고 연상철은 다시 부를 누리는 대신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또한 정치가 가문의 고귀한 아가씨와 결혼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제성그룹을 이을 후계자는 반드시 귀한 집안의 여인과 연씨 가문의 피가 섞인 완벽한 핏줄이어야 한다는 회장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사랑하는 그녀와 아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겠지만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무조건 회장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리라. 그렇게 그는 결혼했다. 상류층 아가씨답지 않게 여리고 동화 속 소녀 같은 꿈을 꾸었던 고귀한 그녀와.
어릴 때부터 집안의 희생물로 길러져 오로지 내조하고 순종하는 것만을 엄격하게 배우며 자란 그녀는 거짓 웃음을 보이는 남편을 믿었고 사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이었다. 그녀가 임신하자마자 그는 그녀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원망 한 번 없이 남편의 첩과 그 자식들까지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어야 했다. 다른 여자들처럼 첩을 찾아가 협박을 하든지 권력으로 찍어 눌러 다시는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외면과 경멸, 독한 첩의 악독한 짓들에 점점 고립되어 가고 지쳐 갔다. 그나마 회장이 원하는 대로 간신히 완벽한 핏줄인 아들을 낳았지만 상황은 그때부터 더 악화되었다.
처음에는 가난이 싫어 회장의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다시 붙잡은 권력에 연상철에게 점점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차지가 되었어야 할 권력이 사랑하지도 않은 여자가 낳은 아들의 차지가 되는 걸 그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열등감에 시달려 온 자신과 달리 어린 나이부터 영특해 회장의 집중적인 관심과 기대를 받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아니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라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러한 비틀린 감정은 아들이 성장할수록 더 심해져 끝내 증오하기에 이르렀다.
아들만 없어지면 다시 후계자가 될 수 있다. 그녀가 낳은 아들만 사라지면 자신이 사랑하는 진짜 아들들이 그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이후부터 그는 내내 자신의 아들을 죽일 생각을 하였고 집안에서는 첩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본부인을 몰아붙였다.
첩의 두 아들은 자신들보다 월등히 뛰어나 언제나 비교대상이 되는 이복형제를 지독하게 증오했고 틈만 나면 주위를 맴돌며 괴롭혔다. 그런 환경 속에서 그녀와 아들은 힘에 겨워 지치면서도 끝내 오연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그들을 더 자극했으리라. 아들의 나이 14세, 그녀와 아들이 탄 차가 사고를 당했다. 의문이 많은 그 사고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아들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한쪽 다리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웃으며 환호했다. 어머니를 잃은 걸로도 모자라 한쪽 다리까지 잃은 충격에 고통받는 어린 아들을 찾아온 그들은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듯 만족해했다. 그 모습을 끝으로 누구도 아들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몇 개월의 병원 신세에서 벗어나며 사라진 한쪽 다리 대신 의족을 찬 아들은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 조용히 유학을 떠났다. 비록 한순간에 어머니를 잃고 병신이 되어 버렸지만 아들은 차라리 그 끔찍한 집안을 벗어난 것에 만족했다.
애초에 그 모든 불행한 일들에도 그는 슬픔을 거의 느끼지도 못했으니까. 그저 신경 감각만이 살아 있어 육체의 고통을 느꼈을 뿐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아비라는 인간은 더 끔찍해하며 학을 뗐을 테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그가 일반적인 아이들과는 달랐다는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숨을 쉬기에 살아가고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며 뛰어난 두뇌 하나로 버텨 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 소식 한 통 없던 회장이 찾아왔다. 다리는 없어도 머리만 있다면 후계자 자격이 된다는 이유로. 그리고 듣게 된 소식은 아버지라는 작자는 물론 제 이복동생들도 여전히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 첩도 본부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당연했기에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회장의 성격상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은 미천한 핏줄과 부족한 아들을 아쉽다고 해서 다시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들만이 망상에 빠져 헛된 꿈을 꾼 것이다. 회장은 다른 고귀한 핏줄의 며느리를 새로 들였다. 그러나 바람대로 손자를 낳지 못하고 손녀를 낳게 되자 회장은 버렸던 손자를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가 없어도 뛰어난 두뇌가 있기에 놓치기는 아까웠던 것이다. 그 뻔뻔한 작태에 그는 기가 막혔지만 회장의 성격을 알기에 생각해 본다는 이유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바로 들이닥친 아버지라는 작자는 여전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버린 아들을 상대로 협박했다.
살고 싶으면 후계자를 포기하라고. 안 그러면 다시 죽일 거라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수치도 죄악도 잊은 채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미친 듯이 악을 쏟아붓는 아버지란 작자를 보며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아버지란 작자가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의 다리마저 잃게 했다는 걸.
그는 미쳐 날뛰는 아버지라는 작자를 보면서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상 복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굳이 돈으로 사람을 사서 죽일 필요도 없이 자신의 한마디면 정식 후계자가 될 것이고 그 순간부터 아버지란 작자와 첩, 그 아들들은 다시 비참한 거리로 내쫓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복수보다는 다시 그 집안에 들어가 그들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그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복수한다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사라진 다리가 생겨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는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고 계획대로 의대에 들어갔다. 6년의 과정을 거쳐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면허까지 취득했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로를 바꿔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의족을 찬 불편한 다리로 현실의 벽을 깨기란 쉽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평소 관심이 많던 한의학 쪽을 파고들었다. 다시 대학을 다니고 학위를 따고 면허를 획득하며 그렇게 몇 년을 정신없이 보낸 그는 36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다리 하나가 없어도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금싸라기 땅을 차지한 번듯한 한의원과 실력 있는 한의사로 이름을 떨쳤다. 눈에 띄는 단정한 외모로 늦은 나이임에도 괜찮다 싶은 집안의 청혼이 끊이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제성그룹과 연씨 가문의 도움 없이 완벽하게 홀로 선 것이다. 그것이 연자현으로 태어나고 살아온 36년 삶의 마지막이었다.

* * *

세상엔 닮은 사람이 셋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과도 닮을 수 있는 것일까 묻는다면 답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현실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 자신과 닮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살아온 삶을 말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믿을 수 없게도 그 가공의 인물과 마주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가공의 인물이 사는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온 듯하다. 그것도 연자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과 너무도 닮은 삶을 살아온 연자운이라는 인물의 몸속으로.
“우리 마님 가련해서 어찌한대요. 주인나리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마님께 이럴 수는 없구먼요.”
“예, 억울해서 미치겠어요. 우리 마님을 아시면서 그런 죄를 뒤집어씌우다니요? 속이 문드러져도 말 한마디 못 하고 꾹꾹 눌러 참아 오신 분께 이러시면 안 되지요. 천벌을 받을 것입니다.”
천벌이라. 글쎄. 지금 이 상황을 생각하면 그 천벌은 자신이 받은 것 같은데.
정말이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소설 속의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왔으니 이럴 때는 빙의라고 해야 하나. 황당한 건 고사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자신이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축 늘어져 감각 없는 몸에 의문을 느꼈을 때 어둠 속에서 당했던 채찍질의 고통이 떠올랐고,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느끼는 고통이 이렇듯 사실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통각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또 이상한 점은 눈앞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는 두 사람의 존재다. 연자현에게는 없었던 사람들.
연자운에게는 진심으로 걱정하며 아껴 주는 유모와 하녀 옥이 있었고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당황스럽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이들이고 가공의 인물들임에도 마치 오래도록 같이 있었던 것처럼 당연하게도 자신은 의문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은 이 황당한 상황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이런 기분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기시감보다 뭐랄까.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은 느낌?
왜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들이 속한 상사화(相思花)라는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낯설고도 묘한 기분에 사실 아직까지는 모든 것이 얼떨떨하기만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어째서 자신은 소설 속에, 그것도 자신과 닮은 연자운의 몸에 빙의를 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무엇 하나 답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아니 답 자체가 있을지 의문이다. 그저 우연히 사게 된 소설 속에 들어오다니 생각할수록 황당하지 않은가.
애초에 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허무맹랑한 소설에 빠져들 만큼 감성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고 한의학 서적을 사기 위해 들른 서점에서 단 한 권의 책이 유독 눈에 띄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점도 이상하기만 하다. 한의학 서적들이 있는 곳과는 상관없이 서점 제일 구석진 곳에 꽂혀 있던 책이 어떻게 눈에 띈 것이란 말인가. 마치 홀린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책이 있는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상사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그것을 어머니는 자신과 어울리는 꽃이라며 쓴웃음을 짓고는 했었다. 어리석은 아비라는 작자에게 배신과 경멸, 끝내 죽임까지 당해야 했던 고결하고 깨끗하기만 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꽃이었다.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제목을 보고 무턱대고 손을 뻗었고 어두운 색 표지에 시들어 가는 상사화 꽃이 그려진 표지를 보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렸었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 그것은 낯설고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자신은 평범한 인간처럼 감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뿐 결코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다리 한쪽을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겠는가.
그런데 가슴이 아리다니. 뿐만 아니라 무엇 때문인지 잔잔한 심장에 파동이 일듯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혹 이러한 상황이 올 것을 예감하고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인가. 의문을 품어도 여전히 답이 나오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하긴 이런 일에 해답이 나올 리가 없다.
어쨌든 자신은 지금 연자현이 아닌 다른 인물에 빙의했다. 그리고 그때 샀던 단 한 권의 그 책이 지금 자신이 들어온 세상을 만들어낸 소설 ‘상사화’였다.
문득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비로소 안정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살아 보나 했는데 난데없이 소설 속에 빙의하다니.
그것도 누구 하나 행복해지지 않은 새드 엔딩 소설 속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었다. 지금 시점이라면 거의 소설 막바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석 달 안에 자신이 빙의한 연자운의 죽음을 시작으로 눈앞에서 울고 있는 이 두 사람도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이지 막막하다.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연자운은 삼황자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황궁에 잡혀가 일주일간 고신을 당했을 것이다. 정신을 잃기 전 멈추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자신이 빙의한 시점은 그 일주일의 마지막일 테고.
그리고 사흘 만인 오늘 깨어났다.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그의 뒤늦은 고변으로 삼황자의 거짓 모함이 들통 나 황태자가 멈추게 한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 황제가 사죄의 의미로 보낸 황궁 전의가 치료를 하고 있다지만 육체는 이미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주일간 간신히 목을 축일 수 있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고신을 당했다. 어디 한 곳 잘려 나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타격을 받은 장기를 비롯해 아마 지금 연자운의 몸은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안심할 수 없는 건 연자운이 살아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 삼황자가 이 집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삼황자의 다음 행동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점이지만 과연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 몸으로 그것을 무사히 피해 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혼자는 무리일 테지.
적어도 혼자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을 기해야 한다. 그러자면 두 사람의 도움은 필수일 터라 힘겹게 숨을 내뱉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내 눈물바람인 유모와 두 눈이 퉁퉁 부은 옥이를 향해 바짝 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물.”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마님.”
유모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서 입에 넣어 주는 미지근한 물을 몇 번에 걸쳐 마시자 그제야 갈증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입안도 다 터지고 갈라져 침을 삼키는 것도 힘들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해가 기울면 그와 삼황자가 올 것이다.
이 집안의 주인이자 연자운이 사랑하는 남자. 연자운을 삼황자 대용품으로 이용하며 이 지경까지 내몰리도록 방관한 어리석은 남무진. 그리고 남무진에게 집착하며 연자운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삼황자 송이주.
뒤늦은 죄책감을 느끼는 남무진과는 달리 삼황자는 탐색을 하러 오는 것일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두 사람 다 부딪혀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연자운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게 된다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우선은 건강을 회복하는 게 먼저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몸을 사리고 조심할 수밖에.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어 유모가 먹여 주는 미음 한 그릇을 억지로 먹고 다시 물로 갈증을 해소했다. 그제야 조금은 살 만해진 상태에 안도하며 몇 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유모. 옥아. 한동안 내가 깨어난 걸 비밀로 해.”
“비밀로요? 하지만 전의께서 오늘쯤 깨어나신다고 나리께도 말씀을 드렸을 텐데.”
“괜찮아.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해 줄 테니까, 탕약은 무조건 전의에게 직접 받아서 옥이 네가 달여라.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맡기면 안 돼. 한시도 눈을 떼서도 안 되고. 알겠지?”
“예, 마님. 그건 걱정하지 마시어요.”
지금 이것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겠지만 일단 손은 써야겠지. 소설에서 삼황자는 연자운이 회복하는 걸 방해한다. 처음에는 탕약과 먹는 음식에 회복을 더디게 하는 약을 쓰다가 나중에 전의가 돌아가고 다른 의원이 올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강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그나마 남무진이 가져다 준 영약 때문에 석 달이나 버틸 수 있었지만 독성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매수된 의원과 짜고 침을 엉뚱한 곳에 놓거나 계속해서 약을 투입을 했으니 제아무리 뛰어난 영약이라도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리라. 삼황자가 약을 쓰기 시작하는 건 깨어나고 이틀 후부터였다. 그 안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한다.
“유모도 마찬가지야. 미음하고 죽을 끓일 때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마.”
“예, 마님. 이 유모만 믿으시어요. 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습니까요? 마님 수발은 옥이하고 쇤네가 다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고마워. 두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심이다. 자신과 너무도 닮은 인생을 살아온 연자운을 보며 유일하게 부러워했던 게 두 사람의 존재였으니까.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들. 메마르고 각박했던 삶을 살아왔기에 안식처와도 같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부러웠다.
자신에게도 이런 이들이 있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리되기를 바란 적은 없었는데. 막막한 상황에 또다시 자현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자운이 두 사람을 유일하게 의지하고 편안하게 생각했듯이 자신 또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리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신이 살아야겠지. 자신이 살아야 두 사람도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고 살아남는다.
지금은 그것만을 생각하자 싶어 다시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두 사람에게 눈짓을 하고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유모와 옥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가까이에서 매섭게 꽂히는 시선 하나와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떨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무진, 만지지 마. 그보다 왜 아직도 안 깨어나? 전의 말로는 오늘 깨어난다고 했는데.”
삼황자 송이주. 얼굴을 쓰다듬는 남무진의 손을 거칠게 떼어 내고 차갑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정말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레 동안 굶으신 데다 지독한 고신으로 몸이 안팎으로 많이 상하시어 쉽게 깨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달라졌다. 자신의 부탁 때문에. 아니 어쩌면 자신이 들어온 자체로 이미 내용은 달라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원래는 연자운이 깨어나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남무진을 보며 괜찮다는 듯 힘겹게 미소를 지었어야 하는 내용이니까.
그 모습에 남무진의 자책은 더 심해지고 서서히 감정을 깨달아 가면서 송이주의 심기는 더 비틀리게 된다. 그리고 옥이나 유모는 신분 때문에 차마 두 사람을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꺼내지 못해 그저 울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저리 또박또박 대답을 한다.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었지만 그 목소리 안에 두 사람을 향한 원망이 깃든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두 사람 또한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라 혹 삼황자가 유모에게 무어라 할 것 같아 긴장했지만 곧바로 흘러나오는 비웃음에 속으로만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런 고신 따위로 며칠씩이나 정신을 못 차리다니 너무 약하지 않아?”
역시 미친놈답게 뻔뻔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이 순간 송이주의 머릿속은 남무진의 반응과 연자운에 대한 추악한 질투로 가득 차 유모의 말은 들어가지도 않은 것 같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벌써 트집을 잡아 죽이려고 덤벼들었겠지.
삼황자 송이주는 태생 때문에 혐오스러운 제 가족이라는 것들만큼이나 열등감으로 뭉쳐진 인간이니까. 그래서 어릴 때부터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었던 남무진에 대한 집착이 유별나다. 아니 거의 광적인 수준이다. 결국은 완전히 미쳐 버리기도 하니까.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그냥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나름대로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악수만 두는 멍청이일 뿐이다. 하여간 문제가 많은 성격이라 더 조심해야 한다. 만약을 위해 유모와 옥이에게도 경고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 남무진의 낮은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이 사람을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