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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1권 (2화)
一章. 연자현과 연자운 (2)
그대로 돌아서는 남무진을 향해 유모도 옥이도 대답하지 않았다. 배신감과 괘씸함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무진이 그런 말을 했다는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송이주의 시선이 더 날카로워졌다.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듯한 사나운 시선이었지만 이런 것쯤은 이미 익숙한 일이기에 어떠한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결국 거친 발걸음으로 송이주까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두 사람이 다가왔고 자현은 그때야 느릿하게 눈을 뜨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우스운 상황이 아닌가. 자신은 소설 속의 인물에 빙의했다. 말도 안 되는 일에 난데없는 날벼락이라 여전히 혼란스럽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은 이 황당한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앞으로는 연자운의 인생을 연자현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닮은 두 사람이라도 분명한 차이점은 있었다.
연자운의 나이 24세이지만 연자현은 36세이다. 연자운이 자현의 어머니처럼 희생적인 숭고한 사랑을 하는 이라면 연자현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또한 연자운이 닥친 시련을 감내하는 성격이라면 연자현은 얼마든지 헤쳐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 차이점은 분명 전혀 다른 결말을 불러올 것이다.
* * *
정신을 차리고 하루가 더 지났다. 숨죽인 침묵 속에서 전의가 놓는 침의 위치를 살피는 것으로 대략 몸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짐작컨대 손발톱이 모두 뽑혀 나갔고 온몸은 징그러운 채찍자국으로 도배가 되어 있을 것이다. 군데군데 흉하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구멍도 숭숭 뚫려 있을 테고 인두 자국으로 지진 곳은 화농이 심해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일 테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무진이 가져올 영약이라면 온전히 낫지는 않더라도 흉터만 남게 될 정도로 회복이 될 테니까.
문제는 내상이다. 영약만 잘 복용한다면 내상도 별 탈 없이 치유가 되겠지만 영약보다 송이주의 방해가 먼저 들어올 것이라 결코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현재 자신은 오랜 굶주림과 물리적인 강한 타격에 장기가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나마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아 다행이지만 영약이 오기까지 버티는 게 관건이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점은 소설의 내용이 바뀜으로 인해 유모와 옥이 두 사람이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송이주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방해가 될 테니 말이다.
결국 전의에게 직접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는 건가. 다른 의원이 오면 늦는다. 지금으로서는 이중치료를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아 생각을 정리할 때쯤 치료가 끝이 나자 내내 침묵을 지키던 남무진이 입을 열었다.
“어째서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그게 이상합니다. 상세가 심하기는 하지만 깨어나도 벌써 깨어났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하루 이틀 더 경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전의의 대답이 탐탁지 않은 듯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곧 온몸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감싸는 유모와 옥이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잠시간 침묵이 돌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 후 잠시의 틈을 두고 눈을 뜨며 얕은 숨을 토해냈다.
“괜찮으세요, 마님?”
“응. 괜찮아. 수고했어, 두 사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신경 쓰지 마시어요. 그보다 들키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구먼요.”
“많이 아프셨을 텐데 잘 참으셨어요, 마님.”
또다시 눈시울을 붉히며 훌쩍이는 두 사람을 향해 희미하게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실제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전의가 통각을 느끼지 않도록 침을 놔준 덕분이기도 하고 폭력이라면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당했던 터라 어지간해서는 참을 만했다.
연자현으로 살아오며 죽을 고비만 수차례 넘겨 오지 않았나. 결국 한쪽 다리마저 잃어 병신 소리까지 들었었다. 그러고 보면 빙의하고 좋은 점도 있는 건가. 온몸에 고신으로 흉한 흉터는 남게 되었지만 다리가 멀쩡하다.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멀쩡하게 걸을 수 있으며 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거 하나만은 기뻤다. 의사 면허를 따고 응급실에 배치되었을 때 다리 때문에 무던히도 눈총을 받았으니까.
휴식을 취하다가도 호출을 당하면 급하게 환자를 봐야 함에도 자신은 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다리병신이 의사라는 사실에 환자들도 대놓고 믿을 수 없다며 거부했었던 일도 허다했다. 거기에 동양인이라는 것도 불신에 한몫 했을 것이다.
물론 인종차별 없이 순수하게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밀어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도 높고 견고했다. 고작 다리 하나가 없는 것뿐인데 한계를 넘어서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니 더 피나는 노력을 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하기에는 그때 당시 많이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한의학으로 방향을 바꿔 버렸고 확실히 그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양의학을 배운 것이 실제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고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으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자면 한의학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조금은 길이 보이는 것 같아 만족하며 두 사람을 돌아봤다.
“옥아, 심부름 좀 해야겠다.”
“심부름이요?”
“응. 침술과 의술에 관한 서책하고 약제에 관한 서책 좀 사 와. 최대한 다양하게 사 오도록 하되 많으면 며칠 나눠서 나가면 되니까 이왕이면 들키지 않게 비밀리에 가져와.”
“안 그래도 천을 사러 나갈 참이었어요. 거기에 감춰 오면 될 것 같지만 갑자기 의서는 왜요?”
그야 그곳에서 배운 것과 차이가 있을 테니까. 문제는 과연 이곳의 글자를 읽을 수 있느냐이다. 말을 알아듣는 데 문제가 없으니 글을 읽을 수 있을 가능성도 높지만 만약 아니라면 글공부를 새로 해야 하는 건가. 생각지도 못한 난제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다가 느껴지는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냥 좀 볼 게 있어서 그래. 그리고 탕약을 준비할 때 누군가 지켜보거나 접근하면 내게 필히 말해 주고. 전표는 알아서 꺼내 가도록 해.”
“예, 마님.”
옥이 방을 나가고 유모에게 미음을 부탁하고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한 정적에 몇 번이나 읽었던 상사화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상사화라는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이 아닌 동성애 소설이었다.
그러한 소설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제목하고 표지에 이끌려 샀었다. 알았을 때도 딱히 놀라거나 혐오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읽을수록 연자운의 처지가 자신과 너무도 닮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그대로 책에 옮겨 담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물며 성도 같고 이름마저 마지막 한 자만 다르다. 연자현이 연씨 가문의 정통 핏줄이자 고귀한 혈통 소리를 들었듯이 연자운도 마찬가지다.
연자운은 고위귀족인 연씨 세가의 적자로 역시 같은 고위귀족이자 명망 높은 홍씨 세가의 금지옥엽 홍연희에게서 태어났다. 연씨 세가의 수장인 자운의 조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고 집안을 이을 보다 완벽한 핏줄을 원했다.
그래서 제 아들의 혼인 상대로 선택한 상대가 홍씨 세가의 홍연희였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여인이 있었고 배태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반발은 당연했으리라. 당연한 수순처럼 그는 아비에게 반항하고 연씨 세가를 뛰쳐나갔다.
제 아비가 그랬듯이 그도 몇 년간은 들고 나간 패물들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고생 한 번 안 해 본 이가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한계가 찾아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연씨 세가로 돌아갔다.
그렇게 홍연희와 혼인까지 하여 겨우 다시 아들로 인정을 받았지만 그는 정실부인인 그녀를 배척하고 경멸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을 첩으로 들이고 그 아들들까지 당당하게 같이 생활했으니 홍연희의 삶은 뻔한 것이다.
모진 남편이라 하나 일부종사라 극진하게 모셨고 어디 한 곳 하소연할 곳도 없이 그저 속으로 삭이고 감내했으며 안주인 행사를 하는 첩의 행실에도 투기하지 않았다. 제 어머니처럼 미련할 정도로 착한 인물이었다.
그렇다 보니 철저히 고립된 채 상처는 쌓이고 점점 더 속으로 곪아 갔다. 그러다가 아이를 가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됐지만 남편의 모진 구박과 첩의 더러운 암수에도 꿋꿋하게 견디며 겨우 낳은 아이가 연자운이었다.
할아버지는 비로소 완벽한 핏줄이 태어났다는 것에 만족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본시 탐욕이 많은 데다 정치로 바쁜 할아버지가 제대로 신경을 써 줄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몸이 약해진 그녀와 자운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을 이어 가야 했다.
부친과 첩실, 이복형제들에게 이리저리 치인 자운은 언제나 위축된 채 숨을 죽이고 자라야 했고 그 나이 열둘에 홍씨 세가에 불운이 닥쳤다. 처가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미의 병은 더 깊어지고 결국 자운의 나이 열셋에 명을 달리했다.
그로 인해 홍씨 세가의 그 많은 재산 중 일부는 황실에 반납되고 나머지는 연자운의 차지가 되었지만 할아버지라는 인간과 탐욕에 찌든 아비에게 반 이상을 뺏기게 된다. 그나마 그녀가 미리 이리될 것을 예감하고 아들을 위해 남은 재산을 빼돌려 놓았기에 다 뺏기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재산이 아니었다면 자운은 죽어도 벌써 죽었을 터였다. 할아버지라는 인간은 재산의 행방을 찾고자 손자를 구슬려 압박했고 아비라는 작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협박을 했음에도 자운은 끝내 불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목숨과 직결된다는 걸 어린 자운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운은 유모와 하녀 옥이와 함께 허름한 별당으로 내쳐졌다. 그곳에서 감시를 당하며 하루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이들의 행패를 꿋꿋하게 견디며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란다.
그사이 아비는 첩을 정실로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제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자운의 할아버지도 평민인 첩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며느리를 들인 것이다. 그 이후로는 감시가 조금 소홀해졌다. 새로운 안주인을 경계해야 했으니 당연하리라.
그리고 그때쯤 우연찮게 만난 이가 남무진이었다. 어릴 때부터 지켜 주고자 맹세했던 삼황자 송이주가 일언반구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 그 빈자리에 괴로워하던 무진은 자운에게서 이주와 닮은 면을 찾아낸다.
그 이후로는 뻔했다. 자운은 무진을 보는 순간 그의 강함에 반하게 되며 동경을 품게 된다. 닮고 싶다. 가지고 싶다. 처음으로 자운의 마음속에 욕심이라는 것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진 또한 자신도 모르게 자운에게 이끌리게 되면서 만남을 이어 간다.
자운은 점점 무뚝뚝하면서도 다정하게 대하는 무진을 향해 남몰래 연심을 키워 나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연심은 일방적이었으니……. 무진은 그를 이주의 대용품 이상으로 보지는 않았다. 아니 남무진 또한 성격상 문제가 있어 진실된 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어긋나게 시작된 두 사람의 감정이었으나 만남을 이어 가며 서서히 깊이를 달리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자운의 나이 21세에 무진이 연락 한 통 없는 이주에게 지치고,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에 결국은 청혼을 한다.
그때 당시 새로 들어온 연씨 세가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기에 허락은 쉽게 떨어졌다. 아비와 그 첩실은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 또한 재산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언제나 위축되어 있던 자운이 탐탁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세력을 넓히는 데 같은 고위귀족이자 승상 가문인 남씨 세가만큼 좋은 먹잇감도 없었던 터라 두 사람의 혼인은 평탄히 이루어졌다. 그렇게 자운은 그 지긋지긋한 연씨 세가에서 벗어났다. 처음 일 년은 마냥 행복했다.
남씨 세가에서 내쳐진 무진이었지만 승상과 큰아들은 자운을 마음에 들어 했고 자운은 비로소 진정한 가족을 가진 것 같아 안도하며 행복에 빠져 살았다. 실제로도 무진은 무뚝뚝하지만 다정했고 집안은 평화로웠다.
자운의 연심이 깊어질수록 무진에게도 변화가 찾아오며 점차 이주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제 감정을 뚜렷이 자각하지 못하면서도 언제나 헌신적이고 단아하게 미소 짓는 자운의 모습에 점점 이주와 다른 면을 찾아 가며 무진의 감정도 변해 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정적인 행복은 갑자기 나타난 이주로 인해 너무도 쉽게 깨어졌다.
갑자기 떠나야 했던 이주의 유학에 황제와 아버지인 승상이 개입된 사실을 알게 된 무진은 괴로워한다. 이제야 겨우 돌아온 자신을 두고 혼인한 사실에 원망을 쏟아내는 이주를 감싸 안으며 무진은 자운에 대한 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처음에 생각했던 바를 털어놓는다.
자운은 단지 이주를 떠올리게 하는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말에 이주는 만족했고 몰래 엿듣게 된 자운은 절망한다. 그럼에도 무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자운은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한다.
그때부터 무진은 오직 이주를 위해 자운을 멀리하며 외면한다. 한순간에 사라진 다정함과 뒤따르는 외면에 자운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매일같이 작정하고 덤벼드는 이주의 비웃음과 경멸은 갈수록 심해졌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장면을 무진이 몇 번이나 봤음에도 외면하고 이주만을 감싼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무진은 이미 자운에 대한 마음이 깊어 가고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운을 보며 혼란스러워지는 감정 또한 그저 미안함이 큰 탓이라 여겼다. 그리고 자운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당연하게도 점점 지쳐 갔다.
진실한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혼란으로 치부하며 이혼을 바라는 어리석은 무진과 어머니를 닮아 오로지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자운.
남무진의 변화를 지켜보며 불안해하고 어떻게든 자운을 몰아내려는 이주까지 더해 세 사람의 감정은 점차 뚜렷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자운은 온전한 사랑을 했고 무진은 불안정한 감정에 혼란을 느꼈으며 이주는 집착했다.
사실상 무진과 이주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강박관념과도 같은 집착적인 관계였다. 다만 그 사실을 자운은 모르고 있었기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정작 사랑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던 당사자인 두 사람도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나날이 계속 이어지던 세 사람의 인연은 이주의 계략으로 막바지에 달했다. 자운의 나이 24세, 이주는 미리 해약을 먹고 자신이 먹을 차에 독을 탄 것이다.
그 차를 마신 이주가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들이닥쳐 황족을 독살했다는 혐의로 자운을 막무가내로 끌고 간다. 그때 무진은 자운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과 이주가 자작극을 벌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끌려가는 자운을 보며 양심에 괴로워하면서도 이주가 돌아온 이상 불필요한 존재로 판단하고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한다. 이주는 그 사실에 만족했고 미리 지시를 해 놓은 대로 자백 받지도 않고 고신만 시킨 것이다.
그 때문에 자운은 차디차고 끔찍한 고문실에서 이레 동안 눈과 입이 막힌 채 고신을 당하며 비로소 무진에 대한 사랑을 체념한다. 그러는 사이 무진은 자꾸만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한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자운의 처연한 눈빛이 떠올라 점점 더 괴로워한다.
결국은 자책을 이기지 못해 닷새째가 되는 날 이주에게 자운을 풀어 달라고 하지만 이주는 이를 무시하며 오히려 무진을 몰아붙인다. 보다 못한 무진은 이레째가 되었을 때 친우인 황태자를 찾아가 진실을 그대로 고변한다.
황태자는 불같이 화를 내며 무진과 이주를 책망하고 자운을 풀어 주라 명령한다. 고신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풀려나 무진의 가택으로 돌아온 자운은 사죄의 의미로 황제가 보낸 전의의 치료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들어온 소설 속 전개 내용이다. 그리고 원래 소설대로라면 풀려난 자운은 전날 깨어났어야 하며 용서를 비는 무진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웃음에 무진은 그동안 혼란으로 치부했던 자운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깨달아 가야 했고.
자신으로 인해 이야기의 전개가 바뀌었지만, 소설에서는 그러한 무진의 변화로 인해 완전히 미쳐 버린 이주의 이간질과 계략으로 이후로도 두 사람 사이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영약 덕분에 석 달을 겨우 버텼지만 이주가 쓴 독수에 자운은 무진을 향해 희미하게 웃으며 사모하였다, 유언을 남기고 끝내 죽는다.
그리고 자운이 죽는 순간에야 어리석은 무진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가 누구인지 온전히 깨닫는다. 자운의 죽음으로 이주는 만족했지만 충격과 실의, 후회와 그리움에 빠져 괴로워하는 무진을 보며 분노하고 불안해한다.
또한 자운의 죽음을 밝히려는 황태자의 명령에 이주는 먼저 선수 쳐서 유모와 옥이를 진범으로 몰아넣고 비참하게 죽인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무진은 처음으로 화를 내며 이주를 가택에서 내치게 된다.
하지만 미쳐 버린 이주의 집착은 더 심해진다. 결국 무진은 자운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 놓친 사랑에 통한을 쏟아내며 자결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꽃. 잎이 메말라 떨어진 후에야 피어나는 상사화. 살아 있을 때 어긋나고 함께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과연 죽어서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상사화라는 책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무진에게 집착했던 이주 또한 그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다가 끝내 모든 사실을 알아낸 황태자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뭐랄까.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다. 자운을 비롯한 세 사람 다 정상적이기보다는 결점과 심적 모순을 안고 있는 인물들이라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남아 행복해진다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비참한 죽음 이외에는 다른 결말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자신에게 이곳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닌 부딪혀야 하는 현실이 된 것이다. 자운의 몸에 들어온 이상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그랬듯이 자운도 이곳을 벗어나야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자면 내가 완벽한 연자운이 되어야겠지.”
二章. 어긋나다 (1)
밤새워 뒤척이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한 무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며칠째 불면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몸을 혹사해도 소용이 없었다. 잠은 고사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반항 한 번 없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며 처연하게 바라보던 그 시선이. 원망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차라리 원망 한마디 했다면 이렇듯 속이 답답하지는 않았으련만 그는 끝끝내 그리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끝에 끝까지 몰려 체념해 버린 눈빛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주의 모함도 자신이 이주를 위해 그가 끌려가는 걸 외면하리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러한 눈으로 바라본 것이리라.
“하, 내가 무슨 짓을…….”
막았어야 했다. 그리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끌어들인 이였다. 먼저 다가가고 만남을 이어 오고 이주의 빈자리를 채울 요량으로 그와 혼인까지 결심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는 그저 믿고 따라와 준 것이다.
한결같은 눈빛과 단아한 미소로 허전하게 비어 있는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의 헌신에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안정을 찾아가지 않았나. 그와의 혼인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이었다.
언제나 삭막하고 싸늘하게만 느껴졌던 집 안에 온기가 느껴졌고 반겨 주는 다정한 미소에 자신도 모르게 하루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도 가슴 설레고 애가 타지 않아도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또한 착각이었다. 이주가 돌아오고 그의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뭐랄까. 그를 볼 때면 불편하고 답답해졌다. 그와의 혼인이 후회되고 그를 마주할 때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상처받은 그를 애써 외면했다.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그저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가 없었다. 이주가 그리하기를 원했고 자신 또한 사랑을 줄 수 없을 바에는 그것이 마땅하다 여겼다.
어차피 이주가 돌아온 이상 그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비록 어린 나이에 한 치기 어린 맹세라지만 황자로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채이며 지독히도 상처받아 온 이주를 자신만은 유일한 편이 되어 지켜주고자 했다.
상처가 쌓이고 쌓여 급기야는 악밖에 남지 않는 이주를 볼 때면 언제나 안타까웠다. 이주에게 있어 자신은 유일한 희망이고 위안이라는 걸 알기에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릴 때의 그 순박했던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주는 열다섯에 겨우 황자로서 인정받자마자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 버렸다. 그 빈자리의 허전함과 충격은 상당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그리움 속에서 허덕이다가 그를 만난 것이다.
어딘가 위축되어 당황하던 그 눈빛이, 말갛게 바라보던 그 시선이 이주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른 성격이고 외모인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어쩌면 그 또한 핑계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외로웠고 이주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그래서 그와 혼인했다.
처음 일 년은 괜찮았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원래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나. 그를 생각할 때면 미안하고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지만 외면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리하다 보면 그가 먼저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청해 올 것이라 여기고 비겁하게 한 발 물러난 것이다.
두 사람의 혼인은 가문 간의 결합의 성격도 있었던 데다 먼저 청혼한 것도 자신이라 이혼까지 먼저 요구한다면 이주를 비롯해 걸리는 게 너무도 많았다. 그 또한 이주를 위한 일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언제나 곧은 시선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 핑계 저 핑계로 그가 먼저 이혼을 청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냉정한 외면에 상처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었고 이주의 비웃음과 경멸에도 이렇다 할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속도 없는 사람처럼 견디기 힘든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정말 담담하였을까. 아닐 것이다. 따뜻하게 반짝이던 말간 눈동자가 자신의 외면으로 흔들렸고 그 시일이 길어지며 이제는 빛을 잃고 침잠했다. 확연한 그 변화를 자신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자신이 그리되도록 방관하고 몰아간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를 망가트렸다. 처음부터 그가 이주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은 전혀 하지 않았다. 대나무와도 같이 곧은 그의 성격이라면 오히려 해를 입었으면 입었지 결코 남에게 해를 입힐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이주가 독을 먹고 쓰러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마치 미리 지시를 받은 것처럼 증좌까지 내밀며 막무가내로 그를 끌고 가 버렸다. 그리고 이주는 보란 듯이 다음 날 정신을 차렸다. 미리 해약을 먹었으니 회복도 빨랐으리라.
돌아가는 상황이 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자신은 막지 않았다. 황족 독살 혐의라면 모진 고신이야 뻔하고 끝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알 수 없는 욱신거림도 무시하며 그 처연한 시선을 끝내 외면했다.
자신에게는 이주만 있으면 된다. 어차피 연씨 세가에서도 버림받은 그다. 이 일로 책임을 묻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필요하고 거슬리는 존재인 그가 사라진다면 어긋나 버린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 여기고 제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것이 얼마나 편협하고 이기적인 생각인지 알면서도 자신은 그리 믿고자 필사적이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만 사라지면 알 수 없는 답답함과 혼란도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그가 죽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그뿐이라 죄책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결국 닷새째가 되어서야 이주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막무가내로 울음을 터트리며 화를 내는 이주를 달래느라 이틀을 더 허비하고야 더는 견디지 못하고 황태자를 찾아갔다.
이로 인해 자신은 황태자의 신임을 잃을 것이고 불안정한 이주의 위치도 다시 한 번 흔들리게 될 테지만 그를 그대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뒤늦게 후회하는 자신의 꼴이 역겨웠지만 우선은 그를 살리는 게 먼저였다.
살아만 있으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속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만신창이로 망가진 그를 본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비쩍 마른 몸은 온통 끈적끈적한 고름과 피투성이였다.
비단결 같았던 머릿결은 이레 만에 푸석해졌고 손발톱은 다 빠져 멀쩡한 곳 없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찢어지고 뜯겨 나간 살갗은 고름 섞인 피로 선연했으며 인두로 지진 상처에서는 진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온몸 곳곳에 새겨진 모진 고신의 흔적은 그토록 처참했다.
그나마 얼굴만은 멀쩡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은 싸늘한 시체 같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했다. 고신이 지독했으리라는 걸 예상했음에도 그토록 망가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충격이 컸던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그를 필요에 의해 끌어들여 놓고, 상황이 바뀌자 외면하고 상처를 줬다. 그러고도 모자라 끝내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트린 것이다.
순간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에 무진은 입술이 찢어지도록 깨물었다. 한줄기 선혈이 주르륵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생각할수록 자신의 뻔뻔함과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를 그리 몰아세웠단 말인가.
차라리 먼저 이혼을 요구했어야 했다. 비겁하게 물러서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를 온전한 모습으로 놓아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이미 그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하물며 벌써 닷새가 지났는데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이대로 그가 잘못된다면. 갑작스럽게 스치는 소름 끼치는 생각에 무진이 흠칫 놀라며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