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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1권 (3화)
二章. 어긋나다 (2)
아직 동도 떠오르지 않은 시각이라 어둑한 사위에 무진은 성급한 걸음으로 자운이 머무르는 처소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무진이 굳게 닫힌 문고리를 잡는 순간 멈칫했다. 작은 문고리를 잡은 커다란 손이 잘게 떨렸다.
문만 열면 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를 볼 자격이 있을까. 그를 저 지경으로 몰아세워 놓고 이제 와서 걱정이라니. 이것 또한 위선이 아닐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상념에 선뜻 결정하지 못하던 무진이 결국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확인만 하자. 무사히 살아 있다는 걸 확인만 하면 된다. 애써 흐트러진 심기를 가라앉히고 완전히 기척을 죽인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이 눈에 익자 방 한쪽에 잠든 유모를 힐끔거리고 자운의 곁으로 다가간 무진이 천천히 머리맡에 앉으며 얕은 숨을 토해냈다.
어둑한 방 안으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에 무진이 왈칵 그리움이 솟구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하얀 백삼을 입고 자신을 보며 단아하게 미소 짓던 모습.
이제 더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리라. 그 미소를 앗아간 게 자신이다. 그 단아함을 망가트리고 잔인하게 꺾은 것 또한 자신이었다. 뼈저린 후회로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이 빛이 꺼진 듯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온기를 나눠 주듯 천으로 감아 놓은 자운의 상처투성이 손을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천으로 두껍게 감았음에도 팔목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뱃속에서부터 묵직한 응어리 하나가 목구멍으로 치밀고 올라왔다.
굳어 버린 표정과는 달리 완전히 흐트러진 내부에서는 후회와 절망, 지독한 아픔이 휘몰아치며 끝없이 무진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럴수록 내내 마음을 어지럽히던 혼란이 서서히 가라앉아 갔고 무진은 비로소 자운을 향한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왜 몰랐을까. 자신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렇게도 모질게 밀어내고 외면하며 상처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연자운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야 깨달은 진정은 단단하게 빗장을 걸어 놓았던 무진의 마음을 거침없이 흔들었다.
무진은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납득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것이라 부정하고 또 부정을 해서라도 착각이라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여도 한 번 열린 빗장이 다시 닫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거침없이 몰아치는 감정의 무게에 무진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몸을 짓눌러 산산이 부수려는 듯이 무진의 가슴 깊숙이 박혀 버렸다. 무진의 두 눈이 풍랑을 만난 듯 흔들리고 서늘한 얼굴은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후회만이 깊숙이 밀려들어 또다시 숨이 턱하니 막혀 왔다. 모질기만 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무진은 뒤늦게야 고통스러워하는 제 못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악문 입에서 억눌린 조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왜 지금에서야 깨닫는단 말인가. 차라리 깨닫지 못했어야 했다. 상처 주고 망가트리고 비참하게 꺾은 후에야 깨달은 감정이라니. 뭉클 부풀어 오르는 시야에 자운의 팔목을 감싸고 있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뒤늦은 깨달음이 불러온 감정의 실체가 무겁게 심장을 짓눌렀다. 숨통을 죄어 오는 고통에 무진이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무진의 얼굴 위로 회한이 스치며 자운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관심을 가지고 만남을 이어 오고 끝내 혼인까지 하여 두려움에 몸을 떠는 그를 달래며 소중하게 보듬었던 기억. 그때 자신은 어찌했나. 이주를 생각하며 그를 안았다. 정작 그 전까지는 이주를 안아 본 적도 없으면서 모순적이게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를 탐했다. 그 순간만큼은 이주의 생각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실소를 흘렸지만 그를 안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품 안에서 파르르 떠는 보드라운 몸이 기꺼우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그의 용도는 그것이라 내색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안함에 어울리지도 않게 더 다정하게 대했다.
더러운 제 속내도 모른 채 한결같은 모습으로 헌신하는 그를 볼 때면 죄책감이 더 커졌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주가 있으니 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게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변해 갔다.
퇴궐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반겨 주는 그 미소가 좋았고 따뜻한 온기가 도는 집에서 안정을 찾아갔다. 그를 안으며 점점 이주를 생각하는 횟수 또한 줄었지만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이주가 다시 나타난 순간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미 자신의 마음은 자운을 향해 기울어 가고 있었기에 그걸 인정하지 못해 더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비웃음과 경멸을 당하는 그를 외면하고 보란 듯이 이주를 감싸 안았다. 일부러 상처를 주고자 그가 보는 앞에서 입맞춤을 하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모순적이다. 그때 자신은 이주와 입맞춤을 하면서도 그의 반응에만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웃기지 않은가. 이주를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안았으면서 정작 이주를 안지 않았다. 아니 안을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면서 이주를 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이주는 언제나 지켜 줘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리 맹세했고 신념으로 삼았으며 자라면서 사랑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장은 하나뿐이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포기할 것 같아서 그가 보는 앞에서 이주를 감싸고 다정하게 속삭이며 상처 주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참담했을 것이다. 상처받은 그의 가슴에 재를 뿌리고 더 깊게 상처를 낸 것은 자신이었다. 지치고 지쳐 끝의 끝까지 몰아붙여 끝내 그를 망가트리지 않았나.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감정을 깨닫다니. 정말이지 기가 막힐 지경이다.
등신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어리석게도 그를 향한 감정을 깨닫자 이주에 대한 마음 또한 뚜렷하게 보였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토록 이주를 아끼며 옆을 지키면서도 단 한 번도 안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았다.
그저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다. 황궁이라는 거대한 감옥에서 홀로 울며 지쳐 가는 그 아이를 자신만이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그것이 마땅하다 여겼다. 점차 자라면서 그것은 의지가 되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신념으로 굳어 갔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사랑이라 여긴 것이다. 그 때문에 정작 진짜 사랑을 어리석게도 놓쳐 버렸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자신은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었다. 무진은 깊은 회한에 잠긴 얼굴로 그저 멍하니 죽은 듯이 잠든 자운만을 내려다봤다.
마치 눈 안에 단단히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어렴풋이 보이는 얼굴을 하나하나 천천히 더듬는 새까만 눈동자에 짙은 슬픔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창밖으로 서서히 먼동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처럼 파랗게 멍든 새벽이 밝아 와 그제야 또렷하게 보이는 자운의 처참한 모습에 무진은 이를 악물었다. 건드리면 깨어질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검붉은 딱지가 앉아 갈라져 터진 입술을 매만지고 창백하게 여윈 뺨을 쓸어 보았다.
손끝을 타고 손바닥에서 머리로, 심장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옅은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에 무진이 움찔 놀라며 뻗은 손을 거둬들였다.
깨어나려는 것인가.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본 무진은 곧 드러나는 검은 눈동자에 숨을 멈췄다.
몇 차례 깜빡이자 초점이 돌아오는 듯 올곧게 부딪혀 오는 시선은 찰나와도 같은 놀라움을 담았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예상했음에도 따뜻함이 사라진 무감정한 눈빛에 무진의 수려한 미간이 아프게 찌푸려졌다.
마지막까지 자만하였던가. 그를 죽이려고 해 놓고 또다시 어진 마음에 기대를 품었나 보다. 모진 상처에도 언제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라면 어쩌면 용서를 해 줄지 모른다고 주제넘은 욕심을 부렸나 보다. 무진은 제 스스로의 뻔뻔함에 역겨움이 치밀었다.
자신은 끝까지 이기적이다. 무슨 자격으로 따뜻함을 바라는가. 아무리 어진 그라도 이제는 질렸으리라. 그것이 당연한 결말이라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그런 무진을 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던 자운이 오랜 침묵을 깨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메마른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갈라지고 힘이 없어 탁했지만 감정이 담겨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나치게 담담했다.
욱씬, 또다시 심장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무진이 잘게 떨리는 손을 힘껏 끌어 쥐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모두 나 때문이다.”
어떤 원망이라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다. 평생을 두고 갚으라고 한다면 그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를.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할 뻔뻔한 말을 삼킨 무진이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무진의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늦었습니다.”
너무 늦었다. 무진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하얗게 물드는가 싶더니 곧 어둡게 변했다. 눈을 번쩍 뜬 무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려 했지만 심연처럼 고요한 눈길로 응시해 오는 시선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착각했노라고? 사랑인지 몰라 그동안 혼란스러웠노라고? 그래서 더 외면하였노라고? 죽을 줄 뻔히 알면서 잡혀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고? 그리해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고, 제 감정을 깨달았다고?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어찌 한단 말인가. 자신은 자격을 잃었다. 이제는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봐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이혼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 사실에 무진의 절망은 더 깊어졌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그를 놔주어야 하는가. 과연 그를 안 보고 살 수 있을까.
무엇 하나 자신할 수 없었다. 당장 답이라도 바라는 듯 응시해 오는 시선에 무진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 어떤 답도 해 주지 못한다. 지금이라도 그가 이혼을 요구할까 두려워진 것이다. 뻔뻔한 줄 알면서도 당장은 이 자리를 모면하고자 무진은 쉬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는 무진을 보며 자운이 입을 열었다.
“죽었습니다.”
우뚝 무진의 발이 멈췄다. 넓은 등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진의 심장이 불안으로 술렁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운은 담담한 목소리로 또렷하게 말했다.
“남무진에게 헌신하고 사모하였던 연자운은 죽었습니다.”
욱씬,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깊게 파헤쳤다. 악다문 입술을 비집고 억눌린 침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뒤돌아선 그대로 주먹 쥔 손을 잘게 떠는 무진을 보며 자운은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이기적인 당신들이 죽인 겁니다.”
자운의 말이 다시 한 번 심장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에 무진은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쓰디쓴 기운이 명치끝에서 목구멍까지 화르륵 치솟았다. 고통을 새긴 두 눈이 거칠게 흔들리고 깨문 입술에서 선명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죄여 오는 숨통에 무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방을 나왔다.
간신히 버틴 게 무색하게도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무진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순식간에 흥건한 눈물로 젖어 들었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가슴을 적셨다. 누르고 눌러도 새어 나오는 울음에 당황스러워하며 무진은 간신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참아내려 애썼다.
못난 제 자신이 미워 무진은 울고 또 울었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갓난아이 때를 제외하고는 사내로 태어나 무예를 닦고 장성한 어른이 될 때까지 길었던 그 시간 동안 자신은 눈물을 한 방울도 흘렸던 적이 없었다. 울 일이 없었다.
사내로 태어난 이상 울어서도 안 되었고 울 만큼 나약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도저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팠다. 어리석은 제 자신이 너무도 미웠고 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그리고 눈앞에 드리운 암담한 절망이 더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깨달은 마음은 이미 늦어 버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뼈저린 후회에 무진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 * *
문밖에서 들려오는 억눌린 울음소리에 자운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물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자운이 죽고 난 후에 그가 우는 장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뭐랄까. 묘한 기분이다. 가슴이 먹먹하다고 해야 할지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할지. 너무도 낯선 감정에 이성과 심장이 따로 노는 생경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책을 보며 느낀 남무진이라는 사내는 집안도 좋고 무력도 강하며 외모 또한 완벽한 인물이었다.
강건한 체격의 사내를 아름답다 표현하는 것이 의아했는데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너무나도 강하고 압도적인 사내라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본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는 점도 마음에 들었었다. 실제로 본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소설에서 묘사한 것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한눈에 봐도 완벽할 정도로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결점이 더 돋보이던 인물이었다. 하나를 목표로 삼으면 오로지 그 하나만을 보느라 주변 모든 것을 외면하는 지독히도 외골수적인 면이 그러했다.
편한 길을 두고 가시밭길을 가는 이였고 모두가 걱정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철모르는 어릴 때 했던 맹세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념으로 바꿀 정도로 미련한 사내였다. 또 멍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멍청하기에 이기적이기도 했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더 잔인하다고 하지 않는가. 커다란 덩치의 남무진을 작은 아이들과 비교하는 자체가 우습지만 저 사내는 그러한 성격이었다. 제 편에게는 한없이 물러 터지고 정의감이 넘치나 그 때문에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
그런 그가 울고 있다. 당황스러워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보다 이상하게 마음이 착잡하다. 본래의 자신이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라니. 역시 이 육체 때문인가. 기묘한 기분이다. 그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왜 굳이 그런 말을 한 것인가.
답지 않은 짓을 했다. 그저 몸이 완쾌되는 대로 이혼을 하고 조용히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들이 아닌가. 완벽한 자운이 되기로 했다지만 그것은 빙의된 이후부터의 삶이지 그 이전의 삶까지 개입할 마음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었다. 소설을 통해 자세한 내막은 알고 있다지만 자신이 겪은 일이 아니지 않나. 무진을 만나 사랑을 하고 헌신하고 상처받은 것은 전적으로 자운의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자운은 체념하는 마지막까지 결코 그 사랑을 원망하지 않았고 후회 또한 하지 않았다. 죽어 가는 마지막까지 올곧게 한 사람만을 바라본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 무어라 한다는 건 확실히 주제넘은 짓이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 버렸을까. 힘없이 돌아서는 무진을 보자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틀렸다. 그래서 무심코 한 말이었다. 사실상 연자현의 이성으로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자운의 육체는 아니었다.
말을 입 밖에 꺼낸 순간 심장이 욱신거리다 못해 아프게 저미는 것 같았다. 마치 무진에게 상처될 말을 하지 말라는 듯이 거부반응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냉정한 이성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미어지게 아프다.
그러고 보니 자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렇다면 이 육체의 원래 주인인 자운 또한 살아 있어야 마땅하지 않나. 그런데 없다. 모두가 그대로인데 자운만이 사라졌다.
자신이 이 몸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라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아직 이 몸에 남아 있는 건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체념했기 때문에? 또 자신이 이곳으로 들어온 연유는 뭐란 말인가.
무엇보다 자신은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상황을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혹 이것도 자운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번 의문이 들자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내심 묻어 두었던 의문들이 한꺼번에 불거졌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지 않아 골을 후벼 파는 듯한 지끈거리는 두통에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지 못하고 포기했다. 사라진 자운이 나타나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 이상은 어차피 결론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다.
더 생각해 봐야 골치만 아플 터라 진득한 한숨을 내쉬고 가만히 천장만을 바라봤다. 잠시 후 밖이 조금씩 부산스러워지고 무진이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아마 하인들이 깨어나 돌아다니기 시작했기에 자리를 피했으리라.
그나저나 울음이라니. 생각할수록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심란하다. 스물여섯이나 되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성인 남성이라 하나 자신에 비해 한참이나 어리지 않은가. 그런 상대를 두고 주제넘게 나선 것 같아 나직하게 혀를 찼다.
게다가 무진의 성격 또한 자운만큼이나 미련한 외골수가 아닌가. 그 때문에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 후회하지만 그 또한 이용당한 것이기에 밉다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되는 부분도 있어 오히려 안타까웠던 인물이다.
그건 송이주 또한 마찬가지다. 상사화에서는 구제할 수 없는 악역이지만 개인적인 삶을 놓고 보자면 가장 가련한 인물이기도 해서인지 광적인 집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멍청함까지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 소설 내용이 자신의 현실이 된 이상 그 더러운 독수를 당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물며 미쳐 버린 상대가 아닌가. 소설의 막바지인 지금 이주는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이주의 세상은 오로지 무진이 전부였으니까.
지독한 열등감도 모자라 세상을 어긋난 잣대로 바라보고 그것만이 전부라 믿을 정도로 꼬일 대로 꼬인 성격이다. 게다가 한 번 손안에 쥔 것은 절대 놓지 않을 정도로 집착도 심해 세상을 전부 준다고 해도 무진과 바꾸지 않을 인간이 송이주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무진의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할까? 절대 아니다. 변화를 알아차리는 순간 눈이 뒤집혀 완전히 미쳐 버릴 게 훤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운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자고로 미친놈은 피하고 보라는데 지금 처지로는 그것도 불가능하지 않은가. 문제는 무진의 반응이다. 얼핏 보기에는 격동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단순한 죄책감만을 느낀다고 하기에는 그의 전신에서 흐르는 깊은 고통의 기운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그런 말까지 해 버렸지만 결코 좋은 기분은 아니다. 무뚝뚝하고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울음까지 보였다는 건 역시 제 감정을 깨달았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것도 달라졌다. 책 내용에 따르면 지금 시점에서는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까. 깨어난 자운이 짓는 아련한 미소에 그제야 서서히 깨달아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전의 반응을 보자면 이제 막 깨닫기 시작한 사람의 반응이 아니었다.
대체 왜 변한 거지? 자신이 빙의했다고 해도 고작 이틀을 더 버티고 깨어나지 않은 척한 것뿐이다. 특별히 무언가 행동을 보여서 혼란을 준 것도 아니지 않나.
비록 잘라 내는 듯한 말을 했지만 그건 남무진의 반응이 나온 후였기에 감정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역시 자신이 들어온 것 때문인가?
예상은 했지만 이래저래 골치 아프게 됐다. 살아남자면 전개를 바꿔야 한다지만 무진의 반응은 지나치게 빠르다. 적어도 영약을 먹고 몸이 어느 정도 완쾌가 됐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시기가 안 좋다.
무진의 변화로 이주에게도 변화가 찾아올 테니까. 현재 제대로 운신조차 못 하는 몸으로 이주의 독수를 피해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개가 변하면서 더 독한 수를 쓸지도 모르지 않나. 아니 이주라면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후우, 골치야.”
약만 바꿔치기한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무진이 감정을 깨달았으니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관건이다.
책에서는 감정을 깨달아 가면서 내내 자운의 곁을 맴돌았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완전히 깨달았다면 더 적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 원래 하나밖에 모르던 외골수인 그 성격은 아무래도 문제가 많을 테니까.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무진의 변화로 송이주 또한 적극적으로 미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는 자신이 보게 될 건 당연지사.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사지육신 멀쩡하게 이 집을 떠나기 전에는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자니 문밖에서 기척이 들리고 옥이가 들어왔다.
“마님, 일어나셨어요?”
“응. 물 좀 주고 유모 깨워.”
마음 같아서는 더 자도록 놔두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전의가 오기 전에 한 번 더 당부를 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온몸을 강타하는 고통과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괜찮으세요?”
“하아, 허리 뒤를 좀 받쳐 줘.”
“그냥 누워 계세요. 아직 움직이시는 건 무리인데 어찌 이리도 고집을 피우세요?”
“세상에, 이 식은땀 좀 봐. 다시 눕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찮으니까 두 사람 다 진정해.”
몸만 멀쩡하다면 스스로를 지키는 것쯤은 문제가 없지만 지금은 무리다. 마냥 이대로 드러누워 있기에는 불안하고 하루라도 빨리 적응을 해야 한다. 그래 봐야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고통도 적응이라면 적응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이런 모습으로 뭐가 좋다고 웃으셔요? 하여간 속도 없으셔.”
“별거 아니야. 그보다 남무진이 내가 깨어난 걸 보고 갔어.”
“세상에. 언제요?”
“새벽에.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삼황자가 들이닥칠 거야. 오늘부터 각별히 행동도 말도 조심해. 괜히 나를 비호한답시고 삼황자 비위 건드렸다가 당하지 말고.”
무진의 변화로 이주의 불안 증세는 극심해질 것이다. 보나마나 시빗거리를 잡고자 눈이 벌게서 설칠 테다. 무엇보다 이 집 안에서 유일한 편인 두 사람을 걸고넘어지면 자운이 타격을 받는다는 걸 이주 또한 아는 이상 더 조심해야 한다.
“유모는 오늘부터 죽을 묽게 해서 준비해 주고, 옥이는 약 달일 때 누군가 접근해서 한다고 하면 모르는 척 넘겨. 그리고 내 약은 따로 비밀리에 달이도록 하고. 약방문은 나중 전의에게 별도로 받아 놓을 테니까 약제도 바깥에서 따로 사 와.”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설마, 이번 일이 있었는데 또 약에 수작을 부릴까요?”
“설마, 인간이 아무리 독해도 그렇게까지 할까? 이번 일은 황제폐하께서도 아시게 됐다면서요? 무슨 경을 치려고 또 악독한 짓을 하겠어요.”
그러면야 좋겠지만 문제는 이주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무진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하면 집착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대로 미쳤다. 미친놈이 물불 가리는 거 봤는가. 맛이 가 버리면 앞뒤 볼 것 없이 무턱대고 사고부터 치고도 남는다.
“쯧, 골치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당장 독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상처회복을 막는 약제를 쓸 거야. 그러니까 당해 주는 척하면서 버려야지. 또 언제 독수를 쓸지도 모르고.”
“맙소사. 정말 미친 거 아닐까요? 대체 삼황자님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마님께 이런답니까?”
“인간도 아니구먼요. 인간이라면 그런 짓은 못 하지요. 엄연히 마님이 계시는데 첩실 취급도 모자라 주인나리 부인 행세를 하는 것만 해도 천벌을 받을 것을. 어찌 인간들이 저리도 후안무치할 수 있답니까? 벼락 맞을 인간들!”
어지간히 분한 듯 이를 빠득빠득 가는 두 사람의 행동에 자운이 문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진정하고 전의 오기 전에 빨리 준비 좀 해줘. 아, 그리고 옥이는 약제 사러 갈 때 침통하고 구침 좀 만들어 달라고 해. 혹시 모르니까 두 개 만들도록 하고 무조건 좋은 걸로 해. 그거 만드는 곳 따로 있지?”
“예. 구침이나 침통이라면 단철장에서 만들고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나중에 보면 알아. 어서 서둘러.”
두 사람을 내보내고 잠시 시간이 있는 것 같아 이불 밑에 숨겨 놓은 의서라도 볼까 했지만 곧 손가락에 감겨 있는 천에 한숨을 내쉬고 포기했다. 이런 상태로는 팔을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책장을 넘기는 것도 무리일 테다.
결국은 별수 없다 싶어 허리를 받친 베개를 힘겹게 빼내고 다시 누우려는 찰나였다. 누군가의 거친 발걸음 소리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 문이 벌컥 열리고 신발까지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송이주를 보며 자운은 절로 흘러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삼켰다.
“역시 너 때문이었어.”
난데없는 이주의 말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자운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상한 변화를 보이는 그를 만나고 온 것일 테다. 불안해서 다짜고짜 확인하러 왔을 게 뻔해 자운이 한숨을 삼키고 성큼 다가와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듯 노려보는 이주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너, 죽다 살아나더니 간이 부은 거냐? 감히 황족을 보고 예를 차리지도 않아? 아니면 입이라도 다친 건가? 이상하네. 혀는 멀쩡할 텐데.”
여실히 느껴지는 비꼼에 자운은 실소를 흘리는 속내와는 달리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황족이라고 다 같은 황족이 아니었다. 하물며 스스로도 황족에 속하지 못해 열등감에 싸인 이주가 할 말은 더더욱 아니기에 자운은 대꾸하는 대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