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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1권 (4화)
二章. 어긋나다 (3)


몸이 완쾌될 때까지는 될 수 있으면 이주의 성질을 긁지 않는 게 안전하다. 하지만 무진이 감정을 깨달으며 상황이 변해 버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들이닥친 이주의 기세를 봐서는 그 변화를 느꼈을 테고 자운을 향한 경계와 불안은 극심해졌을 것이다.
그건 곧 자운에게 어떤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유모와 옥이만을 옆에 둔 자신으로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위험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한다. 그보다 현실적이고 확실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안심이 될 것 같다.
그러자면 역시 무진의 변화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지금으로서는 그것 이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왕이면 황제의 명을 받은 전의가 이주의 패악을 직접 보고 그걸 그대로 보고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과연 뜻대로 일이 풀릴지는 자신할 수 없다.
또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자니 그 또한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라 결국 시도는 해 보자 싶어 나직하게 숨을 고르고 여전히 노려보는 이주를 무시하며 다시 자리에 누우려고 했다.
이런 행동만으로도 이주의 성격이라면 참고 넘어가지 않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반응은 곧바로 나왔다. 일언반구도 없이 무시하는 자운의 행동에 분노한 이주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고, 바로 자운의 머리채가 거칠게 휘어 잡혔다.
그것도 모자라 강제로 끌어당기는 행동에 자운의 몸이 어정쩡하게 들려 뒤틀렸다. 그 탓에 몸 곳곳을 강타하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운이 억눌린 비명을 흘린 것도 잠시 이주의 악에 받친 소리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이게 죽으려고! 너 따위가 감히 나를 무시해?! 버림받은 주제에 질긴 놈! 너 같은 건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어!”
역시 미쳤다. 아니 단순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이런 행동을 해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미친 짓이라니. 밖에서도 이 소란을 들었을 터, 점차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져 갔다. 자운은 머리채가 잡힌 그대로 이주를 보며 보란 듯이 입술을 비틀어 비웃음을 흘렸다.
그에 이주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튄 것은 한순간이었다. 퍽 소리와 함께 얼굴을 강타하는 충격에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머리채가 잡힌 상태에서 몸 곳곳에 닥치는 대로 가해지는 발길질에 최대한 내상을 입지 않도록 몸을 잔뜩 웅크렸다.
미친놈을 이 집안에서 끌어낼 수만 있다면 이까짓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봐야 완전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일로 적어도 한동안은 잠잠할 테니까.
필사적으로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낼 때였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전의와 유모, 옥이가 경악하며 뜯어말렸다.
“마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황자님! 마님을 놔주십시오! 아픈 분이십니다!”
“이것들이! 당장 비키지 못해?!”
“제정신이십니까?! 폐하께서 직접 하명하시어 보살피는 분이십니다. 거동도 못 하시는 분을 어찌 이리 막 대할 수 있습니까?!”
“하! 그래서 지금 감히 내 명령을 어기겠다는 거야?”
“아무리 황자님이라도 폐하의 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유모와 옥이 자운의 몸을 덮듯이 감싸고 전의가 강제로 이주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마나 악착같이 틀어쥐었는지 이주의 손은 자운의 머리채를 더 거칠게 흔들 뿐이었다. 그때 무진이 소란을 듣고 들이닥쳤다.
“송이주! 무슨 짓이지? 당장 그 손 놓고 물러나.”
“너, 너! 남무진, 너 지금 이 녀석 걱정하는 거야? 아니지?”
“당장 손 놓고 물러나라고 했다.”
“싫어! 이게 어쨌는지 알아? 나를 비웃었어. 버림받은 주제에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나를 비웃었다고!”
송이주의 말대로다. 자신이 비웃었다. 비록 버려졌다고는 하나 핏줄부터 남다른 자운의 비웃음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주에게 견딜 수 없는 치욕일 테다. 하물며 근 2년 동안 무슨 짓을 해도 묵묵히 인내한 자운이 아닌가.
이주에게 자운은 연적이자 막 대해도 되는 등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운이 이주를 비웃었으니 꼭지가 돌 만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주의 평판은 최악인 반면 자운은 지나치게 어질어 바보 소리마저 듣는다.
반응은 뻔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진 또한 믿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이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느껴져 자운은 두피가 몽땅 뜯겨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그 눈은? 왜 그런 눈으로 봐?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왜! 이젠 이런 놈 더는 필요 없잖아?!”
“송이주!”
“닥쳐! 네가 나빠. 누구 마음대로 변하래? 맹세했으면서! 이놈만 없으면 너도 변할 일이 없어! 어차피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따위 죽여 버리는 게 나아!”
꼬일 대로 꼬인 뒤틀린 속내를 토해내듯이 악에 받쳐 내지르는 이주의 얼굴은 흡사 광인과도 같았다. 그런 이주의 손아귀에 잡힌 자운의 처참한 모습에 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곧 자운의 머리채를 잡은 손목이 무진의 커다란 손에 잡혔고 강한 악력이 가해지자 이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아파!”
“손가락 부러트리기 전에 당장 놔.”
처음으로 듣는 무진의 싸늘한 음성에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이주는 거칠게 떼어져 방구석으로 나동그라졌다. 무진이 그의 손목을 으스러트릴 듯 잡은 것도 모자라 집어던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에 이주는 충격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런 이주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상처가 다시 터져 새하얀 의복을 붉게 물들인 자운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할 정도로 너무도 처참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상태가 아닌가. 그런데 이런 꼴을 당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 다들 입을 다물고 있는 와중 자운의 입에서 울컥 핏물이 토해지자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새하얗게 질렸다.
경악하는 이들과 여전히 충격으로 굳어 있는 이주를 눈동자만 굴려 슬쩍 돌아본 자운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이것으로 최선의 방비책은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만족했다.
이윽고 눈앞이 까맣게 물들며 자운은 정신을 잃었다.

* * *

피투성이로 정신을 잃은 자운을 보고도 주춤하기는커녕 오히려 악착같이 죽이려고 덤벼드는 이주를 무진은 질린 얼굴로 가병들을 시켜 끌어냈다. 몇 명이서 달라붙어 겨우 그의 처소에 밀어 넣고 문까지 잠갔지만 이후로도 악에 받친 이주의 고함소리는 끊기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런 이주의 행태에 무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도 잠시였다. 생각보다 더 심한 자운의 상세에 무진은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모진 발길질에 멀쩡한 곳이라고는 없었고 피비린내는 진동을 했으며 한 움큼 뜯겨 나간 머리카락이 방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 처참한 상황에 무진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치료하는 내내 자운의 곁을 지켰다. 근 반 시진 가까이 치료가 계속되고 그럴수록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만약 이대로 잘못되면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만으로도 돌연 목구멍으로 뜨거운 덩어리가 왈칵 치밀었다.
안일했다. 이주의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 뒤늦게 깨달은 감정의 무게에 허우적거리느라 너무도 안일하게 대처한 것이다. 아무리 독해도 설마하니 죽다 살아난 이를 상대로 이런 짓까지 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니, 이주가 그렇게까지 독할 거라고는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이미 한 번 그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모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멍청하지 않은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모순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다.
결국 그를 또다시 위험하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어느새 무진의 눈동자는 절망과 후회, 미어지는 슬픔으로 얼룩지고 물기가 차올랐지만 찰나라도 놓치면 마지막일까 두려워 먹먹함을 억누르고 눈에 힘을 줬다. 무사할 것이다. 이대로 잘못될 리가 없다.
차게 식은 손끝을 말아 쥐고 덜컥거리는 불안감을 필사적으로 떨쳐내며 창백한 자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지났을까. 새까맣게 애가 탈 지경에 이르러서야 전의가 식은땀을 훔쳐내며 물러나자 무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후우, 급히 손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위독한 상태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고신 때문에 장기가 타격을 받고 울혈이 맺힌 상태에서 또다시 모진 발길질이 이어져 상세가 더 심해졌습니다. 게다가 토혈까지 한 걸 봐서는 위나 식도까지 타격을 받은 상태라 이대로는 미음은 고사하고 탕약조차 드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상세를 더 신중하게 살펴봐야겠지만 며칠은 제대로 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레 동안 굶주린 데다 가택으로 돌아오고도 묽은 미음으로 겨우 연명하지 않았는가. 병을 치유하자면 그것을 견딜 수 있는 기운이라도 남아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한 탕약을 사용할 수도 없고 침술로만 치료를 한다고 해도 시일이 오래 걸리게 된다. 과연 그때까지 병자가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어 전의가 난감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무진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허면 당장 손을 쓰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지금으로서는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우선 하루는 더 지켜보고 탕약 대신 위와 식도를 보할 수 있는 약제를 물 대신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의의 대답에 뒤로 물러나 있던 유모와 옥이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뚫어질 듯 자운만 바라보는 무진의 눈시울 또한 붉게 물들었다. 그런 세 사람을 보며 전의가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오래지 않아 표정을 단호하게 굳혔다.
“청룡대장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폐하의 명을 받잡고 남소부인을 치료하러 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일을 폐하께 그대로 보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황제에게 직접 운신이 가능할 때까지는 성심을 다해 보살피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이런 변고가 생겼으니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꼴이 된 것이다. 만약 자운이 잘못된다면 전의는 그 모든 책임을 지고 목을 내놔야 한다.
기가 막히고 억울한 노릇이라 전의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심 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대로 보고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상대가 삼황자였다. 게다가 남무진과 삼황자의 사이가 각별하다는 걸 알기에 전의는 난감했다.
그 무엇보다 황제의 명령이 우선이지만 무진의 아버지인 승상 남문성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어 신경이 쓰인 탓이다. 이번 일을 황제가 알게 되면 어찌 되겠는가. 황자로서 기반도 없는 송이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사태를 방관한 남무진도 문책을 받을 것이다.
어쩌면 직접적인 책임을 물을지도 모른다. 그건 곧 승상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황태자에게도 흠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전의는 막상 말을 꺼내 놓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러한 전의의 고민은 무진의 시린 표정과 단호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끝이 났다.
“오늘 일, 거짓 없이 그대로 보고하십시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흘러나오는 단호한 답에 전의의 얼굴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어릴 때부터 삼황자와의 사이가 각별했던 남무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연자운과 혼인을 했지만 삼황자가 돌아오자 바로 돌변하지 않았나.
한 집안에 들인 것뿐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삼황자와의 사이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렇다 보니 쉬쉬하지만 알 만한 이들은 세 사람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리 단호한 대답이 돌아올 줄이야. 전의가 다소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문책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이 일로 승상께서도 구설수에 오르실 터인데 정말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이 일로 이주는 황궁으로 끌려갈 것이다. 당시 황태자의 옹호와 황후까지 나서면서 황제의 죄책감이 조금은 작용한 탓에 황자로 인정을 받았다고는 하나 기반 세력이라고는 없었고 여전히 황궁에서 겉도는 이주의 처지라면 상황이야 불 보듯 뻔하다. 황제가 보아 주고 넘어갈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황자로 인정받고부터 몸을 낮추고 행동을 조심하였다면 어떻게든 무마를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나. 그동안 이주가 보인 행동만으로도 이미 평판은 최악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연자운이다. 비록 연씨 세가에서 버려졌다고는 하나 자운은 환수국에서 대우를 받는 고위귀족의 핏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황제가 생전에 그리도 아끼었던 태사의 단 하나뿐인 외손자가 아닌가.
어쩌면 이번 일로 황제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마저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뻔하지 않은가. 황자라는 신분 때문에 당장은 강력한 처벌은 피하더라도 황제의 화가 풀릴 때까지는 황궁에 감금당할 것이다.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를 말함인지 무진도 알고 있었다. 단순히 감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이주의 성격상 최악으로 치닫게 되겠지만 지금은 자운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었다. 이대로 이주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가는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않나.
아니, 이주의 다음 행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에 더더욱 황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를 향한 진실한 마음을 깨닫는 순간 이미 그릇된 신념과도 같은 어릴 때의 맹세는 깨어진 것이다. 그런 이상 더는 어긋나게 둘 수 없었다. 가련한 그를 위하고 어리석은 자신을 위하고 스스로를 망치는 이주를 위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잘못을 했으면 문책을 받는 게 마땅합니다.”
무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답했다. 그에 전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남은 두 사람까지 방에서 내보내자 그제야 표정 없던 서늘한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자운. 운아.”
그리 불렀던 때가 있었다. 고즈넉한 달빛 아래에서 처음 청혼을 하며 혹시라도 거절이 돌아올까 저어되어 다정하게 불렀었다. 그는 짐짓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지는 환한 미소로 답해 주었었다.
봄 햇살보다 더 따스했던 그 미소는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고아한 달빛의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덩달아 미소를 지었었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은은한 달빛과도 같이 가슴에 스며들고는 했으니까.
단지 그것을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고 가벼이 치부하고 넘겼다. 처음부터 이주의 대신이라는 생각이 확고했던 터라 그를 깊게 알려고 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미소를 보고 싶어 했고 그의 다정함에 안식을 찾고 싶어 했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모순이었다.
언제나 여전할 거 같았던 그의 미소는 이주가 나타난 후부터 변해 갔다. 향기가 묻어나던 미소가 자신의 외면으로 인해 서서히 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입술 끝에 잔잔한 미소는 남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마지못해 웃는다는 듯이 힘없는 그 미소를 볼 때면 가슴이 옥죄여 오며 답답해졌다. 상처로 흔들리면서도 올곧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 혼란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더라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을.
그저 미련하게 악착같이 밀어내고 외면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몰두했었다. 정말이지 아둔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리라. 어째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도 외골수적인 생각만을 했는지 모르겠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었다.
왜 자신은 눈을 가리고 그를 그토록 상처 입히고 잔인하게 몰아붙이는 일에 그리도 당당했단 말인가. 그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자신을 다정하게 감싸 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를 어찌 대했나. 단 한 번도 진정을 보여 주지 않았다. 뻔뻔하게 책임전가도 모자라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는 이기심에 더 외면만 했다. 골이 점점 메우지 못할 만큼 깊어 가는 것이 훤히 보이는데도 죄 없는 그를 밀어내며 상처를 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애초부터 이주를 대신할 이로 여겼기에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에게는 이주가 있노라고. 이주만 있으면 다른 건 다 필요 없다고. 그렇게 그릇된 신념에 사로잡혀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헤집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바라는 대로 돼 버렸다. 그 멍청한 짓의 대가를 이제야 돌려받는 것이다. 올곧게 바라보던 시선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고 따스함이 묻어나던 목소리는 감정의 응어리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더없이 차가워졌다.
그 먹먹한 단절감에 무진은 통증을 호소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기억의 편린들이 어지럽게 휘몰아쳤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온통 그를 상처 입힌 기억뿐. 그동안 그에게 행했던 상처들이 이제야 되돌아왔다. 가슴이 고통으로 서걱거렸다. 저지른 죄의 무게가, 몰아치는 회한이 몸도 마음도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아, 나는…… 자신이 없다.”
그를 보내고 혼자 남겨질 자신이 없었다. 그가 곁에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동시에 스스로를 향한 너무나도 큰 분노와 절망으로 미칠 것 같았다. 마음에 담아 버린 단 한 사람을 놓치고 살아가야 할 시간이, 회한과 외로움이 더없이 두렵고 무서웠다.
“미안…… 미안하다.”
도저히 놔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진정도 알아차리지 못한 아둔한 인간이지만 어찌할까. 끝까지 이기적이라 해도 어쩌겠는가. 자신같이 모자란 인간은 그가 있어야 한다. 평생을 용서받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를 자신의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감당하리라. 그의 곁에 머물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올곧게 바라보며 웃어 주지 않아도 참을 수 있었다. 설사 경멸하고 치를 떤다고 해도 그가 있어야지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은 깨달음은 후회 속에서도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하게 했다. 그를, 연자운을 사랑한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뻔뻔한 제 자신에 조소를 흘리며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창백하게 질린 여윈 뺨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옅은 숨소리가 바스러질 듯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또다시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갈라져 하얗게 부르튼 입술 위로 가만히 입을 맞췄다. 잠시의 틈을 두고 찢어진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가라앉은 목소리가 음울함을 담고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놔줘야 하는데,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을 것 같아.”

* * *

난장판이 된 방 안 한가운데 주저앉은 채 이주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악을 쓰고 난리를 피웠는지 붉은 입술 사이로 쌕쌕 내쉬는 숨결은 꺼질 듯 힘이 없었고 흐트러진 의복과 아름다운 얼굴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듯 굳게 닫힌 문만을 노려보는 두 눈이 분노로 검게 일렁였다. 온다. 반드시 올 것이다. 무진이 자신을 이리 내치고 외면할 리가 없으니까. 자신에게 그가 전부이듯이 그에게도 자신이 전부였다.
누구도 감히 그 사이를 침범하지 못하리라. 그 사실만큼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가 오면 다시 예전처럼 다정하게 감싸 줄 테니까. 자신에게는 언제나 한 수 접어 주고 들어가던 그가 아닌가.
오늘 자신을 이리 내친 것도 황제가 보낸 전의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한 것일 테다. 그게 아니라면 그의 행동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2년이나 외면해 왔던 연자운 따위를 이제 와서 신경 쓸 리가 없잖은가.
처음에는 그의 혼인이 충격이고 배신이었지만 자신을 대신할 이가 필요했다는 말에 마음에 차지 않아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돌아온 이상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실제 자신의 말 한마디에 그는 보란 듯이 연자운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자신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잠시라도 그의 곁에 다른 이가 있었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소름 끼치도록 불쾌했다.
단아한 외모도 오연함을 잃지 않는 그 당당함도 잘난 고위귀족의 핏줄을 타고난 사실도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봐야 태사가 죽고 난 후 홍씨 세가는 힘을 잃었고 연씨 세가에서는 버림받은 쓰레기가 아닌가.
가문 간의 문제와 태사를 유독 아끼고 안타까워하는 황제와 황태자의 협박만 아니었다면 연자운 따위는 자신이 돌아온 순간 내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하는 순간 자신은 또다시 황제와 승상에게 쫓겨나 타국을 떠돌 가능성이 있기에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떠밀려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떠나야 했던 지난 몇 년을 어찌 잊겠는가. 유일한 안식처인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 위해 악으로 버틴 세월이었다. 기껏 되돌아왔는데 또다시 쫓겨날 수는 없잖은가.
그래서 그의 바람대로 연자운이 먼저 이혼을 청하기를 기다린 것이다. 잘난 척해 봐야 말 한마디 못 하는 등신에 심약한 놈이니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 그 전에 주제를 알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도 질길 줄 누가 알았을까.
끔찍했다. 아무리 외면하고 구박하고 경멸을 퍼부어도 질기게도 따라붙던 그 시선만 생각하면 심장이 불쾌하게 술렁거리고 머릿속은 화기로 점점 타오르는 기분이었다. 참다못해 결국 수를 낸 것인데 그가 고변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동안 내심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가 깊을 거라고는 의심하지 않은 탓이다. 하물며 자신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가 나서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저 모르는 척 며칠만 더 버티면 고신 끝에 깔끔하게 죽일 수 있었는데 오히려 자신의 처지만 우스운 꼴이 돼 버렸다. 기가 막히게도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등신 같은 연자운 따위가 자신을 비웃지 않았나.
“하, 감히 제깟 놈이 무어라고.”
지금껏 말 한마디 못 하고 질기게 버티던 놈이 자신을 비웃다니. 생각만 해도 열화와도 같은 불덩이가 치솟았다. 겨우 가라앉았던 분기가 다시 치미는 통에 당장에라도 연자운을 찢어발겨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결국 휘몰아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이주가 다시 벌떡 일어나 문을 거칠게 흔들었다.
“열어! 당장 이 문 열어! 남무진! 아악! 남무진―!”
닥치는 대로 흔들고 발로 차고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요지부동 열리지 않는 문을 붙잡고 근 한 식경을 씨름한 끝에야 또다시 지친 이주는 허탈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고작 연자운 따위를 위해 그가 자신을 이리 대하다니. 어차피 내쳐질 놈이다. 죽어 사라져야 마땅할 놈이었다. 그런 놈을 무엇 때문에 신경 쓴단 말인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리된 것인가.
설마 그가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문득 스치는 생각에 이주의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이 아는 그는 절대 변할 성격이 아니었다. 남무진은 오직 송이주만을 위해 존재한다.
숱한 위험과 손가락질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곁을 지켜 주지 않았나. 집안의 반대에 오로지 자신을 위해 절연하다시피 뛰쳐나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작 연자운 때문에 변심을 하였다니.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면 오히려 말이 된다. 황제가 보낸 전의가 있었으니까. 아무리 승상과 황태자가 있더라도 뒷수습이 난감했을 테다. 연자운이 죽는다면 황제의 분노가 자신에게 향할 것을 걱정한 게 틀림없다. 그 이유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주는 그리 믿으려 필사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한쪽으로 몰아가도 한계가 있음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단단했던 믿음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자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오지 않는다. 믿음이 깨어지고 끝끝내 외면하고자 했던 진실이 보이는 것 같아 이주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며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심장이 불안으로 쿵쿵 날뛰고 가슴이 뭉그러질 만큼 아득해졌다. 가슴에 멍이 들도록 주먹으로 퍽퍽 두드려도 속이 풀리지가 않았다. 온몸이 마구 떨리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아 이주는 이를 악물고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지? 무진아, 변한 게 아니지?”
허공을 향해 멍하니 물음을 던지는 이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평소처럼 다정하게 대답하며 안심시켜 주던 그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든든하게 곁을 지켜 줬었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은 혼자였다.
그 사실에 충격과 혼란으로 어지럽게 흔들리던 이주의 눈빛이 조금씩 어둡게 가라앉았다.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 안에서 홀로 괴로워하던 무진의 모습. 며칠 동안 그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발 혼자 있게 해 달라 힘없이 부탁했었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불안감에 억지로 고집을 부려 마주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한없이 강하고 든든하던 그가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자신 이외의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그는 맹세코 처음이었다. 아니 자신 앞에서도 그 정도로 무너진 적이 없었다.
그가 점점 변해 간다. 믿을 수 없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찌 인정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게 연자운 때문이다. 연자운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리라.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가 더 변하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뺏기지 않아. 절대!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 가져.”
무진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이제 와서 뺏긴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것마저 뺏긴다면 자신은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어찌할까. 필요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되돌려 놓을 수밖에.
어둡게 가라앉았던 이주의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나고 이내 음험한 광기가 넘실거리며 입가에도 비틀린 웃음이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