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야누스 1권
목차

프롤로그
1. 8개월 전
2. 낯선 호기심
3. 다가오다
4.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마음
5. 초대



/(1)/



프롤로그


“하아, 하아, 하아.”
고야는 거친 숨을 뱉으며 도로를 달렸다. 시계를 흘낏 보니 10시 50분을 넘기고 있었다. 급하게 달려가느라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눈으로만 사과를 한 채 다시 달리자 뒤에서 거친 욕설이 들렸다. 만약 그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대로를 무리하게 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여느 때처럼 평범한 퇴근을 맞이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계가 10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야는 콧노래를 부르며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재우가 무슨 좋은 일 있냐며 놀려 댔지만 고야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퇴근 후에 연우와 술 한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고야가 손목시계를 흘낏 바라보았다. 10시 30분. 이 시간이면 연우가 일을 끝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11시 전에 연우가 일하는 매장에 도착할 듯싶다.
병원 밖으로 나온 고야는 추운 날씨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며칠 있으면 4월이지만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듯 꽃샘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렸다. 봄이라며 얇은 옷만 걸치고 나간 연우가 감기 걸리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상점에서 연우에게 어울리는 목도리를 산 고야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목도리를 두르면 추위로 얼어붙은 연우의 얼굴이 밝게 펴질 것이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고야가 걸음을 멈췄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에 눈이 사시인 볼품없는 할머니가 고야를 잡아당겼다.
“젊은이. 잠깐만.”
“무슨 일이십니까?”
고야가 의아해하자 할머니가 고야의 얼굴을 보며 깊이 혀를 찼다. 사시였지만 고야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이 꽤나 강렬하여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걱정이 가득한 할머니의 눈빛에 고야는 당황하였다. 낯선 할머니의 시선에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질 무렵 할머니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젊은이는 오늘 죽을 거야.”
“예?”
뜻밖의 말에 고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것이 순리인 게지.”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농담하시는 거죠?”
“그랬으면 좋겠네.”
“무슨 그런 말을. 할머니 정신 나갔어요?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해요? 진짜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겁니까?”
고야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불편했는지 할머니가 한 걸음 물러서자 고야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미친 늙은이 같으니…….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내던 고야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저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라고 하기엔 강렬한 눈빛이 신경 쓰였다.

10시 40분. 할머니의 예언대로라면 고야의 삶은 이제 1시간 20분 남았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술이 바싹 말라 온다. 분명 헛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 말을 믿다니 형도 참 한심하다며 연우가 크게 웃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혹시?’하는 의심이 싹트고 있었다.
내가 오늘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어. 헛소리야, 헛소리라고.
고야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 말이 사실이면 어쩌지? 정말 죽어 버리면 어쩌지? 혼자 남겨질 연우는 어쩌지? 얼마나 어렵게 이룬 사랑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어.
고야가 숨을 헐떡이며 미친 듯이 뛰었다. 할머니의 예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젠 중요치 않다. 오직 연우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

11시. 아르바이트를 끝낸 연우가 서둘러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옷 상태를 확인하고, 모자에 눌린 머리도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정돈하였다. 거울 속 단정한 얼굴이 보이자 연우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 정도면 오케이.
같이 일하는 견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매장 밖으로 나오자 싸늘한 기운이 몰려왔다. 코를 훌쩍이며 몸을 움츠린 연우의 시선에 저 멀리 고야의 모습이 보였다. 고야를 발견하고 반갑게 웃던 연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야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나?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고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건널목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뛰어오느라 힘들었는지 고야가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연우가 손을 흔들자 고야도 허리를 펴고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무슨 일 있어?”
연우가 소리쳐 물었지만 자동차 소리에 묻혀 버리자 핸드폰을 꺼내 고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뛰어와?”
“네가 보고 싶어서.”
걱정했던 것과는 다른 얘기가 나오자 연우는 안도했다.
“그런 거야? 괜히 걱정했네. 그런데 형, 나 감기 걸렸나 봐. 이따가 집에 가서 벌 받을까?”
“응.”
“형 말 안 들어서 그런가 봐. 벌칙으로 내가 형 몸 씻겨 줄게. 구석구석.”
“그래……. 그러자.”
“구석구석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가서 화장실 청소나 해.”라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고야가 순순히 승낙하자 연우는 쾌재를 불렀다.
“형도 감기 걸렸어? 목소리가 좀 떨리는 거 같은데?”
“나도…… 감기 걸렸나 봐.”
“진짜? 형도 벌칙 받아야겠네. 같이 목욕 어때?”
“그래.”
음흉한 벌칙을 제안했지만 이번에도 고야가 승낙하자 연우가 헤벌쭉 웃었다.
“진짜지? 무르기 없기다? 아…… 신호가 너무 길다. 빨리 형이랑 만나고 싶은데.”
“곧 만날 수 있을 거야.”
신호가 바뀌고 고야가 주위를 살피며 건너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도 바른 생활 사나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주위를 신경 쓰며 걷고 있었다. 연우가 그런 고야를 맞으려 한 걸음 내딛자 커브 길에서 맹렬한 속도로 자동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정지되어 있는 차들 사이를 뚫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고야를 비추었다. 길을 건너던 고야의 몸이 굳어 버렸고, 그 광경을 고스란히 시야에 담은 연우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빵빵빵빵.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쾅!
커다란 소음이 들리고 연우의 눈에 굳어 버린 고야가 커다랗게 들어왔다. 시간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처럼 주위가 어지러웠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1. 8개월 전


햇볕이 내리쬐는 방 안은 눈이 부시다 못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8월 말에 접어든 계절은 여전히 맹렬한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더위에 잠을 제대로 못 잔 연우가 피곤한 얼굴로 거실에 나왔다. 거실에는 선풍기 한 대가 탈탈탈 소리를 내며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밑에서 신문을 보던 아버지는 연우가 비실거리며 나오자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일어났냐?”
“네. 뭐하세요?”
“신문 보지.”
“이 더위에?”
“참을 만해.”
“아버지. 에어컨 사요. 네?”
연우가 간절한 어조로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피식 웃었다.
“인마, 에어컨 돌리는 데 전기 누진세가 얼마나 비싼 줄 알아?”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일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엄살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넌 아무리 봐도 일사병으로 안 죽어.”
“거 애한테 왜 그래요? 우리도 에어컨 있으면 좋지. 하여간에 자린고비야.”
어머니가 연우 편을 들자 아버지가 눈을 흘겼다.
“아니 이 사람이. 자린고비가 뭐가 어때서? 그렇게 아꼈으니까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거야.”
“뭐요? 그렇게 아끼는 사람이 낚싯대는 그리 비싼 걸 사나?”
“그건 내 유일한 취미라니까.”
“어이구. 취미 좋아하네.”
과일을 깎던 어머니가 한 소리 하자 기세등등하던 아버지가 움찔했다. 아버지는 소문난 낚시꾼으로 좋은 장비가 나오면 아낌없이 투자를 했기에 낚시 얘기만 나오면 늘 작아지셨다.
“나 더운 거 못 참으니까 이번에 장만해요.”
“여름 지나면 세일하니까 그때 사자. 응?”
“또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지나가려고?”
“이번엔 진짜로 산다니까.”
아버지가 살살 달래자 어머니가 못 이기는 척 피식 웃었다.
“엄마, 속지 마요. 아버지 말만 저러지 찬바람 불면 그냥 또 지나갈걸? 기계는 한 시즌 지나면 구형이라서 별로 안 좋다고 하면서. 내 말이 맞죠?”
“그래. 아들 말이 맞아. 어차피 살 거라면 당장 사러 갑시다. 응?”
“저저저저, 저놈의 자식.”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길 바랐던 아버지는 중간에 연우가 톡 끼어들자 눈을 흘겼다. 어머니도 이번엔 오기가 생겼는지 물러서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토록 원하던 에어컨이 생긴다는 기쁨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이럴 땐 얼른 도서관으로 튀는 것이 상책이다.

집을 나서자 푹푹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에 연우는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선크림을 잔뜩 발랐지만 태양에 닿은 피부가 금방이라도 붉게 타오를 것 같다. 연우가 자전거에 걸어 둔 체인을 제거하고 있을 때 아파트 위층에서 까르르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더운 여름에 체력도 좋다.”
땀을 흘리며 자전거에 타려던 연우는 아파트 화단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보았다. 울긋불긋한 것이 옷 같기도 하고, 인형 같기도 하다. 다가가 살펴보니 털이 보송보송한 곰 인형이었다. 곰 인형 주변에 다른 인형과 레고 조각도 함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연우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집 아이가 장난을 치는지 모르지만 이대로 두면 다른 사람이 맞을까 걱정되었다.
‘어?’
올려다본 아파트 위층에서 붉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퍽!
순식간에 몸이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힘없이 쓰러졌다. 머리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연우는 눈을 깜박여 보았다.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만화에선 보통 별이 반짝거리던데 별이 아닌 암흑이 덮쳐 왔다. 곧 연우의 시선이 흐릿해지며 모든 생각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

응급실로 한 대의 앰뷸런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시끄럽게 사이렌을 울려 대던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위급한 누군가를 기다렸다. 구급대원이 문을 열자 축 늘어진 젊은 청년의 몸이 간이침대로 옮겨졌다.
출혈량이 많은지 하얀 붕대를 비집고 새빨간 피가 뭉실뭉실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의사들이 손전등으로 청년의 눈꺼풀을 뒤집는 사이 구급대원이 청년이 왜 다쳤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의사 한 명이 급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공반응이 없습니다.”
“CT 찍어 보고 긴급 수술할 수 있게 수술실 수배해 놔. 출혈량이 상당하니까 수혈 준비하고. 보호자에게 연락은 됐나?”
“지금 이쪽으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응급수술 들어가야 하니까 수술동의서 받아 놓는 것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의사가 지시를 내리자 청년을 살펴보고 있던 어린 의사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이 상황을 내내 지켜보던 비연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청년의 상황은 위급했지만 수술만 잘 마치면 괜찮아 보였다. 비연이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신이 멍하니 맑지 못했다. 비연이 막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옆 침대의 환자가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환자의 호흡을 돌려놓기 위해 심장을 압박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비연은 이내 자신의 옆에 낯선 여인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인은 눈앞의 광경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의사들의 노력에도 환자는 생명을 다했다. 고인의 얼굴에 침대시트가 쓰이고 의사들이 허탈한 얼굴로 고인의 사망시간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생을 살아오면서 가족과 친척들의 죽음을 지켜봤어요. 병원에 입원하면서 여러 죽음도 봤지만 죽음은 익숙해지지 않네요.”
“인간인 이상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겠죠. 왠지 슬프네요.”
여인은 뒤로 물러섰다. 영혼이 떠난 육신이 침대에 실려 응급실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고인의 마지막 길을 사람들이 안타까운 얼굴로 비켜 주었다. 그 뒤를 유가족이 오열하며 뒤따랐다. 여인은 두려운 눈으로 비연을 바라보았다.
“저 좀 데려다 주실래요?”
“혼자 가는 게 무섭습니까?”
“조금 용기가 안 나네요.”
“그러세요.”
여인은 비연과 나란히 걸으며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커다란 항아리에 향을 피워 놓았다. 여인은 애잔한 눈길로 급히 마련된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비연이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제부터는 즐거운 기억을 떠올려 보세요.”
“좀처럼 그게 안 되네요.”
“못다 한 말이 있습니까?”
“예. 마지막까지 미안하단 말을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에요.”
“지금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비연의 말에 여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보다 먼저 간 사람인데?”
“진심은 통하게 마련이니까요.”
여인은 후우 긴 숨을 쉬었다.
“내가 돈 못 벌어 온다고 구박하고 힘들게 한 거 정말 미안하다. 당신이 미울 때도 있었어. 아주 웬수 같았거든. 그래도…… 당신 정말 사랑했다! 진심이야!”
여인의 고함소리가 텅 빈 장례식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여인은 후련한 얼굴로 비연을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도움이 됐어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그래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을 위해 주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늘 궁금했어요. 내가 죽으면 날 위해서 울어 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군요.”
“그게 중요한 거죠. 그만 가실까요? 당신을 데리러 온 사자가 기다리고 있군요.”
여인은 비연의 손짓에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는지 사자가 여인을 향해서 다가왔다. 사자는 정중한 태도로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예. 그럼…….”
“명복을 빕니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비연은 여인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빌어 주었다. 여인을 데리러 왔던 사자가 비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비연은 영정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조금 전 사자의 손에 이끌린 여인이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리를 떠나려던 비연은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오랜만이지?”
오랜만에 보는 비연이 반가운지 소산이 환하게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맑은 옥구슬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한 옷차림은 저승사자라기보다는 천상계의 사람처럼 보였다.
“비연, 자네가 돌아왔다는 건 이제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군. 그렇지?”
“그래.”
“어때? 오랜만에 나와 본 소감은?”
“이제야 살아 있는 것 같아.”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우린 이미 머나먼 옛날 생을 마감했다고.”
“알아. 그동안은 깨어날 수 없는 긴 잠을 잤으니까. 나한텐 그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어.”
“하긴.”
소산은 빙그레 웃으며 비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니까 행동의 제약도 많을 거야.”
“그렇겠지.”
“부탁인데 제발 도를 넘는 행동은 하지 마라.”
“명심하지.”
소산이 ‘정말 내 말을 명심하는 거냐?’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아쉬운 얼굴을 하였다. 소산이 맡은 사람들 중 한 명의 삶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을 안전하게 저승까지 인도하는 것이 일인 소산은 비연을 향해서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만 가야겠다. 또 보자.”
“벌써 가는 거야?”
“나는 자네처럼 한가하지 않거든. 녀석의 삶이 끝날 때까지 길 잃은 영혼이나 추슬러 보내 주게.”
“고생하게.”
비연이 작별 인사를 건네자 소산은 한줄기의 불꽃이 되어 화르르륵 사라져 갔다. 소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지만 장례식장 안의 누구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비연은 장례식장을 나와 화려한 조명이 빛나는 거리 속으로 몸을 숨겼다.

***

삑― 삑― 삑― 삑―
규칙적인 소음이 귓가를 간질거리고 있었다. 낯선 기계 소리에 연우의 손이 꿈틀거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긴 잠을 잔 것처럼 머리가 무겁고 답답했다. 마치 온몸에 줄이 칭칭 감겨 있는 느낌이다. 눈이 떠지지 않는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삑삑거리는 저 소리뿐이다. 마치 거대한 기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낮과 밤의 구분도 없어졌다.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걸까?
고민해 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연우의 의식이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만지는 느낌에 연우의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머리를 꽉 죄던 것이 벗겨져 시원했다. 그러나 축축하고 불쾌한 무언가가 피부에 닿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연우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며 항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 좀 해. 아파. 아프다고.
눈을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던 그 순간 연우의 긴 속눈썹이 거짓말처럼 올라갔다. 낯선 천장이 보였다. 삑삑거리는 기계의 소음도 들렸다.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보던 연우의 시선이 움직였다. 처음엔 이곳이 어디인지 몰랐으나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기계 소리, 그리고 흰 가운을 입은 젊은 남자.
부드러운 호흡 소리와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찌르는 듯한 통증은 이 사람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통증과는 별개로 그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김연우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환자는 며칠째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의료진은 물론이고 그의 부모님들까지 애태우고 있었다. 청년의 주치의를 맡게 된 후, 고야는 시간이 날 때마다 보러 갔다. 그러나 청년은 아직 깨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빨리 의식이 돌아와야 할 텐데…….
미래가 창창한 젊은 청년이 병원에 누워 있는 게 안타까웠다.
고야는 연우의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병실에 들어왔다. 여전히 미동 없이 누워 있는 연우의 모습에 고야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눈을 뜨려나? 기대했지만 야속하게도 굳게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상처에 소독약을 발랐다. 꽤나 따끔할 텐데도 청년은 고요하기만 했다. 차라리 아프다고 투덜거렸으면 좋을 텐데. 그 정도의 투덜거림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내일이면 깨어날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고야는 소독약을 바르고 다시 붕대를 감았다. 머리를 보호하는 그물망 같은 모자를 조심스럽게 씌우고 주변을 정리하던 고야는 연우의 멍한 눈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고야가 환하게 웃었다. 청년의 맑고 까만 눈이 마치 ‘걱정 많이 했죠? 저 깨어났어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눈을 떴구나.”
울림이 좋은 목소리에 연우의 눈이 돌아갔다. 자신을 바라보는 젊은 의사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겠어?”
“……병……원.”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어눌한 발음에 연우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았어. 머리가 아프지는 않니?”
“……으……응…….”
아…… 또다. 마치 23살에서 20살을 빼 버리고 3살이 된 것 같았다. 눈앞의 의사는 잘했다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의 어눌한 발음에 놀라 눈을 껌벅거렸다.
이게 뭐야. 말투가 왜 이래?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좋아질 거야.”
연우가 당황한 것을 눈치챈 고야가 위로하였다. 고야는 이불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병실의 불을 껐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연우의 까만 눈동자가 ‘방금 한 말 농담은 아니지?’라고 묻는 듯해 웃음이 나왔다.
병실을 나온 고야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의식을 되찾았으니 이제 한고비는 넘겼다. 젊은 청년이니 상처 또한 순조롭게 아물 것이다. 그렇다면 보름 후엔 퇴원할 수 있겠지? 고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사고의 원인은 위층에서 꼬마가 던진 물건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빨간 돼지 저금통이라는데 떨어지는 가속도가 붙자 엄청난 힘과 무게로 떨어졌다. 남들은 돼지가 품에 들어오면 복권부터 산다는데 돼지 저금통에 맞았으니 그나마 행운인지, 아니면 더럽게 불행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큰 후유증은 없을 거라는 말에 부모님도, 꼬마의 부모님도 깊이 안도하였다. 문병을 온 꼬마가 잔뜩 얼어서 주춤거리는 모습이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다 살아난 것도 , 머리에 흉터가 생긴 것도 그렇지만 의식이 없는 동안 거시기에 소변 줄을 꽂았더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처음 그것을 제거하던 날 간호사 누나의 친절한 얼굴이 며칠 동안 눈앞에 아른거렸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나니 머리를 더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고야가 소독을 위해 붕대를 풀고 있었다.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고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깼어?”
“몇 시예요?”
“새벽 1시.”
“선생님은 잠도 없어요?”
“졸려 죽겠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일 더 남았어요?”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
고야가 상처에 약을 바르자 연우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밀어 버려 대머리가 되어 있었다. 군대도 다녀왔기에 까까머리에 대한 저항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처음 자신의 빛나는 머리를 보고 연우는 충격을 받았다.
“내 머리 웃기죠? 나중에 엄청 커다란 땜통 생길지도 모르겠어요.”
땜통이라는 말에 고야가 풉 웃음을 터트렸다. 고야의 웃음에 연우는 더욱 우울해졌다.
“웃는 거 보니까 심각한가 보네.”
“아니. 그 정도는 아냐. 머리카락으로 가려질 거야.”
“우리 아버지 봤죠? 그거 유전되면 머리로 가려지기 힘들걸요?”
“그럴 땐 가발이 있잖아.”
“에이……. 그건 위로가 안 되는데.”
연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M자 라인을 유지하는 아버지의 이마를 볼 때마다 자신도 저렇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연우가 우울해하자 고야가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부모님은 집에 가셨니?”
“아침에 오시라고 했어요. 위급한 상황도 아니고, 뭐하러 불편하게 이런 데서 자요.”
“하긴 그렇다.”
고야가 피곤한지 눈을 깜박거리자 연우는 냉장고를 눈으로 가리켰다.
“선생님. 냉장고에 비타민 음료 있으니까 그거라도 드세요. 피곤해서 일 제대로 하겠어요? 괜히 남의 머리에 구멍 낼까 겁나네.”
“그럴 일은 없어.”
소독을 마친 고야가 도구를 챙기자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지 말라고 말리는 고야의 손을 저지하고 기어이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낸 연우가 병을 쥐여 주었다.
“고맙다. 잘 마실게.”
고야가 병을 흔들자 연우는 그제야 자리에 누웠다. 고야의 눈이 부드럽게 휘며 연우의 이불을 따뜻하게 덮어 주었다.
“잘 자라.”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준 연우가 눈을 감자 고야는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잠에 빠진 병실은 조용했지만 데스크에는 간호사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데스크의 모니터를 보며 환자 상태를 체크하는 고야의 가운 주머니에서 음료수 병이 머리를 쏙 내밀고 있었다. 눈썰미 좋은 간호사가 병을 발견하고 웃었다.
병원이라는 특성상 음료수가 종종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고야는 그중에서도 비타민 음료를 질색하였던 것이다. 그런 음료수가 고야의 주머니에 얌전히 들어 있자 신기했나 보다.
“최 선생님. 비타민 음료 싫어하시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이거요? 김연우 환자에게 받은 거예요. 드실래요?”
“아니요.”
간호사가 웃으며 손사래를 치자 고야도 구태여 다시 권하지는 않았다. 숙직실로 돌아온 고야는 책상에 비타민 음료를 놓았다. 평소 같으면 벌써 처리했을 음료수를 이렇게 들고 오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음료를 한쪽으로 치워 놓은 고야는 작은 스탠드 불을 밝히고 곧 두꺼운 책을 펼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