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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잠이 안 온다. 큰일이야.”
병원에서는 시간이 참 안 간다. 그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TV를 보거나 책을 보지만 대부분은 그냥 잔다. 그것도 낮에 잔다. 이상하게 낮에 잠이 더 잘 오는 것이다. 머리를 다쳤기에 되도록 머리 쓰는 일은 피하려 한 연우도 어쩔 수 없이 잠의 부류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연우의 밤과 낮은 바뀌게 되었다.
또한 쉴 새 없이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다른 환자로 인해 잠들 수 없는 연우는 두 귀를 막아 버렸다. 심하게 코를 골아 대는 아저씨의 코골이를 듣다 보면 정신까지 이상해질 지경이다. 연우는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왔다. 차라리 운동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나을 것 같았다. 병실에서 버티다가는 아저씨를 어떻게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살인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밤의 휴게실은 조용하여 운동하기에 좋았다. 어두컴컴한 휴게실에서 지지대를 끌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다 보니 목덜미에 조금씩 땀이 배어났다. 잠깐 쉬려고 의자에 앉은 연우의 눈에 한쪽에 마련된 컴퓨터가 눈에 띄었다. 그동안 침대에만 누워 있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빠르게 카페를 훑어보던 연우의 눈이 어느새 음흉해졌다. 새로 올라온 제목이 시선을 자극한 것이다.
‘레이싱 모델(엄빠주의)’라고 적혀 있는 제목을 클릭하자 아슬아슬하게 가린 레이싱 모델들이 요염한 포즈를 취한 채 자동차에 기대어 있었다.
“우와아~ 좋다.”
연우가 감탄을 터트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차에 걸터앉은 모델의 위치가 오묘해서 잘 하면 속옷도 보일 것 같았다. 연우의 시선이 모델의 속옷을 향해서 틀어졌다. 보일 리 없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래도 수컷의 본능이라 어쩔 수 없었다.
“뭐하냐?”
연우가 모델에 심취했을 때 피곤에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연우의 주치의인 고야였다. 일 때문에 피곤한지 볼 때마다 다크서클이 늘어져 있었다. 당황한 연우가 창을 급히 내린다는 게 오히려 커다랗게 키워 놓고 말았다. 연우의 뒤로 모델들이 포즈를 취하자 피곤에 찌든 고야의 눈이 순식간에 반짝였다.
“야야. 좀 비켜 봐. 나도 좀 보게.”
“아, 뭡니까. 선생님.”
“꽃밭이다. 꽃밭.”
모델을 바라보는 고야의 눈이 둥글게 휘며 감탄을 터트렸다.
“여기 사이트 어디야? 나중에 알려 줘.”
“알려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선생님도 이런 거 봐요?”
“나는 뭐 남자 아니냐?”
“하긴. 그건 그렇네.”
고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빠주의 모델에 빠져 한동안 허우적대던 고야는 어느새 피곤한 얼굴로 꿀물을 홀짝였다. 연우는 고야가 뽑아 준 벌꿀이 가득 든 음료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이트를 알려 준 대가로 음료수를 대접하겠다던 고야가 뽑아 준 것은 연우가 제일 싫어하는 벌꿀 음료였던 것이다.
“난 커피가 마시고 싶었는데.”
“커피는 무슨. 넌 그거나 마셔.”
“뭡니까? 저도 제 마음에 드는 음료를 고를 권리는 있다고요.”
“한동안 커피 마시지 마. 평소엔 마셔도 상관없는데 넌 지금 환자잖아. 푹 자고, 쉬고, 싸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커피는 각성효과가 있어서 잠을 못 자게 하거든. 너도 그런 것쯤은 알잖아?”
“알죠.”
“아는 녀석이 밤에 잠 안 자고 이리 나와 있어?”
“제 방에 가 보세요. 코골이…… 그거 정말 대단해요.”
코골이라는 단어에 고야가 감을 잡은 듯했다.
“아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조은수 환자?”
“예.”
“조금만 참아. 조은수 환자 곧 6인실로 옮겨 간다고 했으니까.”
“진짜요?”
“그래. 한 이틀은 걸리겠지만.”
연우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드디어 코골이 아저씨와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연우가 좋아하자 고야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요. 그 고통 안 당해 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요. 정말 살인충동 느낀다니까요.”
연우가 투덜거리자 고야가 그도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 봐야겠다. 아 참. 김연우 환자.”
“예?”
“적당히 봐라. 머리에 피 쏠리면 안 좋다.”
“…….”
고야는 연우에게 손을 흔들며 어두운 병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혼자 남게 된 연우는 고야를 향해 썩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고야의 말대로 이틀 후 코골이 아저씨는 다른 병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동안 밤에 잠 못 자고 병실을 서성여야 했던 시간도 드디어 끝난 것이다. 아저씨가 다른 병실로 옮겨간 날 연우는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
점심시간에 맞춰 어머니가 도시락과 이런저런 보따리를 들고 오셨다. 커다란 찬합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연우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해 주신 정성 어린 음식은 달아났던 식욕도 다시 불러올 정도였다. 또 다른 봉투를 발견한 연우가 호기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예요?”
“떡이야.”
“웬 떡?”
“그동안 선생님이 널 많이 봐 주셨잖니. 감사차 드리는 거야.”
“에이, 그럴 거 없는데.”
떡을 돌린다는 말에 연우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어머니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럴 거 없기는. 너 정신 못 차리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 엄마가 얼마나 선생님한테 위로받았는지 너 모르지?”
“…….”
“내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단 말이야.”
“죄송해요.”
“하여간 넌 참 어렸을 때부터 유별났다니까.”
어머니는 못 말리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 슈퍼맨 놀이 하다가 크게 다쳤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 그땐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지만 심하게 다쳤다는 얘기를 친척들한테 듣곤 했었다. 그 외에는 소소한 사고만 쳤을 뿐이다. 헌데 이번에 또다시 대형 사고를 쳐서 부모님 뵐 면목이 없었다.
“이거 인절미인데 선생님 좋아하실까?”
“모르죠. 난 그거 싫던데. 뻑뻑하고 맛없어.”
연우가 투덜거리자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너 어렸을 땐 인절미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거든.”
“그래요? 기억 안 나는데.”
“그랬었어. 그런데 갑자기 인절미는 쳐다도 안 보더라. 그래서 입맛이 바뀐 건가? 하고 생각했지.”
“뭐 입맛이야 계속 바뀌는 거니까요.”
어머니가 상을 치우고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 고야가 병실로 들어왔다. 고야를 본 어머니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마침 잘 됐네요. 이거 드셔 보세요.”
“이게 뭐예요?”
고야가 의아한 얼굴로 봉투를 보자 어머니가 연우를 가리키며 생긋 웃었다.
“얘가 식성이 특이해서 밥보다 떡을 더 좋아하거든요. 연우 떡 사는 김에 선생님도 맛 좀 보시라고 몇 가지 샀어요. 별거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시고 드세요. 입맛에 맞아야 할 텐데. 인절미 좋아하세요?”
“인절미요?”
고야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환하게 웃었다. 음식을 거절하려 했지만 제일 좋아하는 떡에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떡이 인절미거든요.”
“아유, 잘됐네.”
어머니가 봉투를 내밀자 고야가 두 손으로 그 떡을 받았다.
“잘 먹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우리 애에게 신경 써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좀 드시고 가세요. 그거 그냥 들고 갔다간 다른 선생님한테 다 뺐길 텐데?”
연우가 중간에 끼어들자 고야는 고뇌의 눈빛으로 봉투를 바라보았다. 입안에 군침이 가득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는 게 당장이라도 맛보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다.
“맛만 보세요.”
연우가 봉투를 뺏어 개봉했다. 콩고물이 골고루 묻은 인절미에서 특유의 향이 느껴지자 고야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얼른 하나를 집어먹었다. 오물오물거리며 떡을 먹는 고야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한 번 맛을 보면 그 다음은 쉽다고 하나를 먹자 두 개째, 세 개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두유를 꺼내 권하자 고야는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두 손에 두유를 꼭 붙들고 쪼옥 빨아 댔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의 눈빛이 따뜻하게 변했다.
“선생님도 우리 연우 아기 때랑 똑같이 드시네. 연우도 두유만 주면 꼭 두 손으로 먹었거든요. 지금은 다 컸다고 먹지도 않아요. 그건 그렇고 선생님 애인 있어요?”
“예. 있습니다.”
“그러셨구나. 우리 애는 공부머리도 별로면서 어째 연애도 소질이 없을까.”
“엄마. 그게 아들에게 할 소립니까?”
“어머 얘는. 내가 없는 말 했니? 어렸을 때는 그렇게 머리가 좋더니, 한 번 크게 아프고 난 후에는 그 후유증인지 영…….”
어머니가 혀를 차자 고야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 어렸을 때 아팠습니까?”
“7살 때요. 그때도 정말 죽다 살아났다니까요. 선생님은 어때요? 척 봐도 잘 자란 느낌인데. 부모님이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부모님이 사이가 좋으시죠?”
“아니요. 저희 부모님…… 각자의 인생을 사십니다.”
“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두 분 모두 즐겁게 사시니 더 보기 좋은 것 같아요.”
고야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어머니가 굉장히 미안해했다.
부르르르르르.
핸드폰이 울리자 떡을 집어먹던 고야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한 고야는 입가를 얼른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예. 그래요.”
어머니가 빙그레 미소를 짓자 고야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벗어났다.
“아, 맞다. 떡 드려야 하는데.”
어머니가 뒤늦게 떡 봉지에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3분의 2 가량을 고야가 먹어치운 후였다.
***
긴 잠에서 깨어난 후, 비연은 소산의 부탁대로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들을 추슬러 소산에게 인도하는 일을 하였다. 때론 자신의 집에 집착하는 할아버지를 설득하였고, 때론 남을 저주하는 자를 안타깝게 지켜보기도 했다. 비연의 설득에 쉽게 수긍하는 자가 있는 반면 끝까지 안 간다며 고집을 부려 비연을 난처하게 만드는 자도 있었다. 그들을 무사히 인도하고 혼자가 되면 비연은 쓸쓸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산과 같은 저승사자지만 지금은 저승으로 갈 수 없는 처지다. 자신의 잘못으로 벌을 받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원망은 없다. 다만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그들 또한 혹독한 벌을 받고 있을 테니까.
가까운 곳에서 소산의 기운이 느껴지자 비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승의 삶이 끝나가는 할아버지의 곁에 서 있던 소산이 비연을 알아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네 왔나?”
“일하는 중이구나?”
“그렇지. 조금 기다려야 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군.”
비연이 할아버지를 응시했다. 주어진 삶이 곧 끝나는 것을 느꼈는지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몹시 평온했으며 자신의 할 일을 이제 끝마쳤다는 안도감에 휩싸여 있었다.
“저 할아버지는 좋은 여행을 했구나.”
“그렇지?”
“평온해 보여.”
“그래. 무척 평범한 삶이지만 최후까지 온화했지. 특별한 욕심도 없고, 남에게 최소한의 피해도 끼치지 않았어. 평범한 것은 지루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엔 평범하게 사는 것도 힘든 세상이니까.”
“……그래.”
할아버지의 육신에서 영혼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완전하게 분리된 영혼은 솜털같이 가벼운 것에 위화감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소산의 존재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할아버지가 애틋한 눈으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소산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예.”
소산은 손을 휘저어 허공에 불꽃 원을 만들었다. 아름답게 출렁거리는 불꽃의 원에 할아버지가 주춤거리자 소산이 부드럽게 할아버지를 인도하였다. 할아버지가 먼저 불꽃의 원으로 들어간 후 소산은 비연을 돌아보았다. 비연이 저승으로 향하는 소산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부럽나?”
“……조금.”
“걱정하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자네도 곧 완벽한 사자가 돼서 저승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렇겠지?”
“물론이지. 파트너.”
비연을 위로해 주던 소산이 방긋 웃으며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비연은 두 사람이 사라진 허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처음엔 지루해 미칠 것 같던 병원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들도 병원에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위문품이라며 던져 놓고 간 책 덕분에 그나마 위안이 됐지만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간호사가 링거를 갈기 위해 들어오자 연우는 읽던 책에서 눈을 떼었다. 언제쯤이면 링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마치 수갑을 찬 것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링거 갈아 드릴게요.”
“또 맞아요? 싫어 싫어.”
연우가 귀엽게 칭얼거리자 간호사가 곱게 눈을 흘겼다.
“퇴원하기 싫으면 안 맞으셔도 돼요. 하지 말까요?”
“퇴원은 언제쯤이나 됩니까?”
“주치의 선생님에게 물어보세요.”
선생님에게 물어보라는 말에 연우가 입을 삐죽거렸다.
“선생님은 너무 딱딱하다니까요. 저번에 얼마나 혼을 내는지 고막이 아직도 후들거리는 것 같아요.”
“그거야. 김연우 환자님이 잘못하신 거잖아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혼내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왜 술이 든 초콜릿을 드셨어요?”
“그러게요. 혼나도 싸지만요.”
그때의 일이 생각난 연우가 쓰게 웃었다. 문병이랍시고 가져온 초콜릿을 차마 못 먹는다고 할 수 없었다. 하나쯤은 괜찮겠지 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하필 그 순간 고야에게 딱 걸린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소독하는 내내 고야로부터 기나긴 잔소리를 들었다. 그때까지는 그냥 젊고 독특한 의사라는 인식밖에 없었다. 헌데 그 밤 이후 화나면 무섭고 시끄러운 의사로 바뀌어 버렸다.
“의사 선생님 화나면 무섭죠? 간호사 선생님들한테도 화나면 조곤조곤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게 더 무섭다니까요. 차라리 소리 한 방 지르고 뒤끝이 없으면 괜찮을 텐데, 이 양반은 목소리는 더 낮아지는데 그 분위기가 어후…….”
연우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죠? 맞아요 맞아. 심장이 쪼그라든다니까요. 그런데 이상하네? 선생님은 환자분들한테는 화 안 내시는데.”
막내 간호사가 맞장구를 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요. 얼마나 혼났는데요.”
“아니에요. 선생님은 환자분들한테는 화내기보단 달래는 편이거든요.”
“예? 그럼 왜 나한테만 화내지? 이거 차별 맞죠? 내가 그렇게 미운가?”
“김연우 환자분이 선생님 마음에 들었나 봐요. 예쁜 자식에게는 훈계를, 미운 자식한테는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잖아요?”
“그런 관심 필요 없거든요. 그냥 떡을 주시라고요.”
연우가 투덜거리자 막내 간호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밤, 낯선 손길에 연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구인지 확인하니 고야의 후배인 어린 의사였다.
“어? 오늘은 다른 선생님이네?”
“최 선생님이 급한 볼일이 있으셔서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죠?”
“예.”
“자, 다 됐습니다.”
의사는 소독을 마친 후 유유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침대에 누운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야는 아무리 바빠도 연우를 보러 왔다. 그런 고야가 치료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에 궁금증이 일었다.
한번 잠에서 깨어나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느니 가볍게 운동이나 하자는 생각에 연우는 휴게실로 향했다. 쉬고 있을 환자들을 생각해 까치발로 조심조심 걷다 보니 어느새 데스크 앞에까지 오게 되었다. 간호사의 낮은 이야기 소리에 연우는 걸음을 멈췄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야기 속의 인물이 아는 사람이라 연우도 어느새 귀를 기울였다.
“어머, 웬일이니. 그렇게 열정을 다해 치료했었는데…….”
“내 말이. 이제는 퇴원하는 일만 남았다 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 몰랐지.”
“최고야 선생님, 괜찮으실까?”
“마음이 복잡하시겠지.”
“몇 년 동안 그 정성을 들였는데. 역시 인명은 재천인가 보다.”
“그러게나 말이다.”
“오죽했으면 김연우 환자분도 다른 선생님에게 맡겼겠어?”
“빨리 마음을 추스르셔야 할 텐데.”
고야가 왜 소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첫 환자였으니 굉장히 특별했을 것이다. 어느 만화책에서 보면 의사의 손에 죽은 환자만큼 의사는 성장한다고 하였다. 단순히 만화를 볼 때는 그렇구나,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헌데 입원 후 옆에서 지켜보니 조금은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혼자서 깡소주라도 마시나? 그러다 속 버리는데. 내일 숙취로 고생하는 거 아닌가 몰라.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척 봐도 바른 생활 사나이인데 술이 웬 말이야.
이럴 땐 누군가가 옆에 있어 줘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휴게실로 내려온 연우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고야를 보았다. 마치 동상처럼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육신은 이곳에 두고 혼만 멀리 다른 곳에 가 버린 것 같다. 그 모습이 무척 지치고 피곤해 보여 연우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다가갔다. 연우가 옆에 앉자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고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김연우 환자, 여기서 뭐해?”
연우는 대답 대신 능글맞게 웃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커피 잔을 들어 올리자 고야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번개 같은 속도로 종이컵을 홱 빼앗은 고야가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꽤 뜨거웠을 텐데도 물을 마시듯 꿀꺽해 버리는 모습에 연우는 경악했다.
“안 뜨거워요?”
“뜨거워.”
“커피는 물이 아닌데.”
“됐고. 왜 안 자? 정말 커피 마시러 나온 거야?”
“아니요. 그냥 잠이 안 와서.”
“잠이 안 와서 커피를 마셔?”
고야가 눈을 부릅뜨자 연우가 입을 삐죽였다.
“아니거든요. 선생님이 지치고 피곤해 보여서 한 잔 뽑아 준 거였단 말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그냥 주지. 입천장 다 데었잖아.”
“우와. 언제 말할 틈이나 줬나? 자업자득입니다.”
연우가 투덜거리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고야가 피식 웃었다.
“뭐…… 어쨌든 잘 마셨어. 다음엔 커피 말고 벌꿀음료로 부탁해. 난 그 음료가 제일 좋더라.”
“그게 부탁하는 사람 태도입니까?”
“이왕 줄 거면 내 기호에 맞는 걸 달라는 얘기였어. 그럼 마시는 사람도 좋고 주는 사람도 좋잖아.”
“알았어요. 알았어. 다음엔 꼭 그러죠.”
“그놈의 벌꿀음료 노인네가 따로 없어.”라며 연우가 투덜거리자 고야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대화가 끊어진 후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고야가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평소 같으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텐데 오늘은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연우는 상심해 있는 고야를 어떻게 하면 달래 줄 수 있을까 눈치를 살폈다.
‘그 환자분 돌아가셨다면서요? 안 됐어요.’라고 먼저 알은체를 할 수도 없었다. 최대한 돌려서 표현할 방법을 찾던 연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무슨 고민 있어요?”
“응? 그렇게 보여?”
“네. 평소에도 눈 밑이 까맣더니 오늘은 절정인데요? 무릎까지 늘어지겠어요.”
“음……. 조금 힘든 일이 있어서.”
“혹시 사채 썼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출해 드립니다. 그거?”
“아닌데.”
“그럼 뭘까? 혹시 여자 친구가 속 썩여요?”
사채라는 엉뚱한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고야가 여자 문제에 이르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넌 생각 수준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냐?”
“아, 그럼 뭐예요? 말을 해야 알지.”
연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항의하자 고야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오늘…… 내 첫 환자가 돌아가셨어.”
“아…….”
“내가 처음으로 맡은 환자분이었는데 이렇게 가 버리시니까 기분이 이상해.”
“선생님. 혹시 환자의 죽음이 처음이었어요?”
“아니. 그동안 많이 봤지. 처음으로 맡은 분이라 남달랐거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했는데, 다시 입원하셨을 때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 드릴걸…….”
고야가 그분을 생각하는지 침울해졌다.
“선생님 성격상 엄청나게 잘 해 드렸을걸요. 그분은 분명 선생님께 만족하셨을 거예요.”
“…….”
“그리고 난 선생님의 치료에 충분히 만족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덧나도 소송은 안 할게요.”
“뭐?”
“그건 그렇고, 머리카락 확실히 다시 나오겠죠? 자라는 속도가 너무 느린데. 야한 동영상 보면 머리카락 빨리 자란다는 거 그거 사실일까요? 사실이라면 만날 봐야겠네.”
야한 동영상을 생각하는지 연우가 히죽거리며 웃자 고야의 얼굴이 또다시 황당하게 변했다. 이건 위로를 해 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생각이 없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동영상 얘기에 흥분했는지 화제가 요상하게 흐르자 고야는 연우의 뒷덜미를 조용히 잡아 올렸다.
“김연우 환자. 머리에 피 쏠리면 안 좋다고 한 거 기억하지?”
“에이~ 선생님. 겨우 그거 보고 피 쏠리겠어요? 괜찮아요.”
연우가 손을 휘휘 젓자 고야의 표정이 음침하게 변했다.
“내일 부모님 오시면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겠어. 저번에 술이 든 초콜릿 건도 그렇고, 야동건도 그렇고.”
“치사하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빠른 쾌유를 위해서도 그런 동영상은 좋지 않아.”
“저번에 레이싱 모델 보고 선생님도 좋아했잖아요?”
“나는 괜찮아. 환자가 아니니까. 자, 김연우 환자. 이제 그만 들어가서 취침해야죠?”
“안 그래도 갈 거거든요.”
연우가 입을 삐죽이며 병실로 향하자 고야도 연우의 옆에 나란히 붙었다.
“왜 따라와요?”
“나도 같은 방향이거든.”
“그것 참 대단한 우연이네.”
연우가 걸음을 빨리하자 고야도 속도를 맞췄다. 이번엔 고야가 속도를 조금 높이자 연우가 질세라 따라붙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경쟁하듯이 병실로 향하게 되었다. 남들이 보면 유치하다고 비웃을 일이다. 헌데 정작 두 사람은 이상한 오기가 붙어 진지해졌다. 결국 한 걸음 뒤처진 연우가 안타까운 탄식을 뱉고, 승자가 된 고야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잘 자라는 인사에 성의 없이 손을 휘저어 준 연우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야를 위로해 주기 위해 사채니 소송이니 막말을 꺼냈다. 그러나 야한 동영상 얘기는 연우의 진심도 들어 있었다. 붕대에 가려진 까까머리를 본다면 군대 또 가냐며 친구들이 놀려 댈게 뻔했다. 까칠까칠한 머리를 조심스럽게 만지던 연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적어도 두, 세 달 동안은 모자와 한 몸이 될 듯싶다.
정말 야한 동영상 보면 빨리 자랄까?
그러고 보니 저 인간, 부모님한테 동영상 얘기한다고 했었지?
……에이 설마 그러겠어?
지나친 기우일 뿐이다.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연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연우가 잠에 빠졌을 무렵 고야도 피곤한 몸을 뉘었다. 환자의 죽음으로 우울했던 고야는 뻔뻔함을 가장한 연우의 위로에 웃고 말았다. 분명 며칠은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하늘은 새파랗고, 공기도 시원하여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기에 적당했다. 날씨만큼이나 온화한 하루다. 죄를 짓고 이승으로 쫓겨 온 몸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평화로웠다. 소산이 봤다면 팔자 늘어졌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것이다.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허공을 떠다니던 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젊은 청년과 눈이 마주쳤다. 청년은 비연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했다. 그러나 이내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청년은 무심한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비연이 꽤나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영을 볼 줄 아는 자인가?”
비연이 뒤를 따르자 청년의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이 보였다. 청년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비연도 속도를 내며 뒤따랐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비연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청년이 뛰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고, 미로 같은 길을 지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청년은 문을 잠그고 재빨리 이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사람이 만든 문이 영혼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철이 들면서 청년은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들을 본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 인간과 귀신이 사는 세계는 달랐기에 서로를 스쳐 지나가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과 귀신이 사는 세계가 겹쳐질 때에는 서로를 의식하였다. 눈이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가면 그들도 잘못 봤겠거니 하며 지나쳤다. 헌데 방금 그자는 뒤따라오기까지 하였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청년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길과 딱 마주쳤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관들이 걸치는 검은 철릭을 입은 남자였다. 상투를 틀지 않은 긴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여인처럼 고운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보입니까?”
비연이 말을 걸자 청년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