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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대를 해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그러면요?”
“어째서 내 모습이 보이는 걸까. 신기해서 따라와 봤습니다.”
“정말…… 저한테 이상한 짓…… 하려는 건 아니죠?”
청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말요?”
“예. 약속드리죠.”
“……믿겠습니다.”
청년이 이불 속에서 슬그머니 나오자 비연이 손을 내밀었다. 청년은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에 빠진 눈치다.
“볼 수 있다면 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청년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미쳤다. 미쳤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귀신이 내민 손을 잡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자신을 타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연이 내민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뻗은 청년의 손이 비연의 손에 닿자 비연이 힘차게 잡았다. 서로의 손이 통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청년의 손은 비연의 손안에 들어왔다. 청년도 비연도 서로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군요. 어째서 그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걸까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저도 모르죠.”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걱정 말아요. 그대에게는 조금의 해도 입히지 않을 겁니다. 이름은?”
청년이 주저하자 비연이 부드럽게 달랬다.
“안……견.”
“안견?”
“네.”
견은 불안한 눈으로 비연을 응시했다. 견 자신 또한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보는 것도 힘든데 접촉도 가능하다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저기요.”
“비연입니다.”
“저…… 비연 님. 혹시 이상한 귀신들이 다 저한테 들러붙는 건 아니겠지요?”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예?”
견의 걱정에 비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견의 특이한 능력은 비연으로서도 의심스럽기만 했다. 영을 보는 것도 어려운 법인데 접촉까지 할 수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혹 소산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한 번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견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은 불안했다. 몰랐다면 모르되 특이한 능력을 안 이상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비연은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 허공에 손을 뻗었다. 비연의 왼팔을 타고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와 형태를 갖추었다.
“비연 님. 뭐하시는 겁니까?”
“잠시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그냥 가시면 되지 뭐하러 이런 걸 꺼내세요?”
검은 연기가 뱀처럼 꿈틀거리자 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따라왔다더니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한 것을 자신의 방에 놔두려 하였다. 얼굴도 곱상하고, 말투도 정중했지만 역시나 귀신은 믿을 게 못 되는 것이다.
“견을 지켜 줄 겁니다.”
“안 지켜 줘도 되는데.”
견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검은 연기를 거부했지만 비연은 할 말을 마친 후 재빨리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이거 가져가야죠. 이거!”
견이 질색을 하며 손가락으로 검은 연기를 가리켰을 때에는 어느새 연기가 형태를 갖춰 견을 빤히 응시했다. 금색의 눈을 가진 작고 검은 여우가 휘리릭 뛰어오르더니 견의 목을 휘감았다.
“으아아아! 내 목에서 내려와!”
졸지에 여우 목도리를 하게 된 견이 비명을 지르며 거부했다. 그러나 여우는 견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꼬리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

조용한 강의실에선 수업이 한창이었지만 견은 그 수업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다. 자신의 목에 달라붙은 수상한 여우 때문이다. 떼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치적거리고 불편하지만 비연이 올 때까지 목에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건지……. 귀신을 쉽게 믿은 자기 자신이 무척 한심했다.
견이 한숨을 크게 쉬자 친구들이 이상한 눈으로 견을 바라보았다. 늘 쾌활하던 견이 오늘은 우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너 어디 아프냐?”
민우가 걱정스레 물어보자 견은 고개를 드는 것도 귀찮은지 손만 뻗어 휘휘 저었다.
“민우야. 너 이거 보여?”
“응?”
견이 느닷없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보이냐는 엉뚱한 질문을 하자 민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견의 목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민우가 인상을 썼다.
“새끼, 좀 씻고 다녀라. 목이 까맣다.”
“……그런 거 아니다.”
“그럼 뭔데? 혹시 목에 무슨 문제 있냐?”
“하아……. 관둬라.”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우를 가리켜 봤자 자신만 이상해질 뿐이었다.
“뭔데? 사람 궁금하게.”
“라면 몇 개 있으면 내놔 봐. 나 아사 직전이다.”
“그런 거였냐? 진작 말하지. 인마, 휴대폰은 뒀다 뭐하냐? 어제 얘기했으면 집에서 몇 개 가져왔잖아.”
“너무 늦어서 전화하기 그랬어.”
“그럼 오늘 아침에라도 했어야지.”
민우가 혀를 끌끌 찼다. 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돼서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민우가 집에 들렀다 가라며 속삭였다. 넌 먹을 복이 넘쳤다며 집에 갈비가 기다린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견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민우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만약 ‘어젯밤 아름다운 귀신이 내 목에 여우를 둘러놓고 갔어. 보여? 여기에 여우가 있다니까.’ 이런 말을 했다면 민우는 소설 쓰냐며 코웃음 칠 게 뻔했다.
뜻하지 않게 생활고는 해결됐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원인인 여우는 손도 못 대고 있는 형편이라 견의 한숨은 더욱 짙어졌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간단히 씻으려 화장실에 들어온 견은 옷을 훌훌 벗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피곤에 찌든 청년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이놈은 뭐야.”
손으로 쿡쿡 찔렀지만 여우는 여전히 꼼짝도 안 했다. 어딘가에 다녀오겠다던 비연은 하루가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그 귀신에게 속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몸이 아프거나 기운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것을 목에 감고 다녀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정말 괜찮은 건가? 무속인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이런저런 근심에 휩싸여 고민하던 견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비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귀신이 흉악한 악귀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돌아올 것이다. 견은 조금만 참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

비연이 소산을 다시 만난 것은 어느 장례식장 안에서였다. 소산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혼을 다독이고 있었다. 겨우 설득에 성공한 소산이 영혼을 먼저 보낸 후 긴 한숨을 쉬었다. 영혼이 끝내 가기를 거부했다면 무력까지 동원해야 했을 급박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직전에 해결되어 한숨 돌린 소산이 지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짓도 못 해 먹겠어. 준비가 안 된 자들을 설득하려니 기운만 빠지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인가? 자네 얼굴이 심각하군.”
소산이 비연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견의 일을 생각하느라 근심에 잠겨 있었나 보다.
“인간들 중에 우리와 접촉할 수 있는 자들도 있나?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닌 신체적 접촉 말일세.”
“뭐?”
소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살아 있는 인간들 중에는 저승사자를 볼 수 있는 특수한 자들이 있고, 실제로 그런 자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헌데 비연의 질문은 그 수준을 상회했다. 접촉할 수 있는 자가 있냐니…….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저승사자와 접촉할 수 없다. 저승사자는 죽어서나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런 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있다는 것이야?”
“그래.”
“누구야? 그 사람이?”
소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비연은 결코 허언을 할 자가 아니다. 지금은 죄를 짓고 벌을 받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한 자였다.
“안견이라는 자야.”
“정말 접촉을 했어?”
“그래. 저승사자를 보기에 혹시나 하고 손을 잡아 봤는데 잡히더군. 자네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군.”
“나도 처음 듣는 말이야. 그 사람을 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영혼을 인도하고 곧장 돌아오겠네. 그 후에 함께 보러 가세나.”
소산은 지금 당장이라도 비연이 말한 그자를 보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아쉬움을 눌러 참았다. 비연은 저승으로 돌아가려는 소산을 붙들었다. 비연 스스로 저승으로 갈 수 없으니 견에 관한 처분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분명 견과 같은 특수한 자들에 관한 처분이 있을 것이다. 그 답이 내려오기까지 안전하게 지켜볼 필요성이 있었다.
“잘 부탁하네.”
“맡겨 둬.”
소산이 저승으로 돌아간 후 비연은 견의 집으로 향하였다. 견에게는 안전장치를 붙여 두었고 위험신호도 없었다. 몇 백 년 동안 사자로서 일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견의 집 근처에 도착해 주위에 수상한 것은 없는지 샅샅이 살펴보았다. 다행히 걱정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견 또한 안전하게 잘 있었다. 몸에 들러붙은 여우가 거슬렸는지 잠결에도 떼어내려고 버둥거렸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본 비연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맺혔다.

***

연우는 주눅 든 눈으로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어머니와 멋쩍게 웃으며 “사내 녀석이 다 그렇지.”라며 어머니를 다독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연우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설마 했더니 역시나라고 주치의라는 그 인간이 부모님에게 술이 든 초콜릿과 야동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김연우 환자, 지금은 안정해야 합니다. 술이 든 음식물과 그런 영상이 회복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 가급적 삼가는 게 좋습니다.”라는 엄청난 폭탄발언에 부모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연우가 부모님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지만 이내 어머니의 강스파이크에 등짝에 불이 붙는 경험을 해야 했다.
“내가 너 때문에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여보. 남자애들은 그런 거 다 좋아한다니까.”
“좋아한다고? 같은 남자라고 감싸는 모양이지? 얘가 야동 야동 얼마나 노래를 불렀으면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해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너 각오해. 니 컴퓨터 확 처분할 테니까.”
“아악! 안 돼요. 엄마.”
“이놈의 새끼. 시끄럿!”
“진짜 아니라니까요. 초콜릿은 어쩔 수 없이 딱 한 개만 먹고 다른 사람 줬어요. 그리고 야동 건은 선생님 위로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요.”
“위로? 거짓말하지 마.”
어머니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진짜라니까요. 엄마는 아들을 그렇게 못 믿어요?”
“어디 그 위로가 뭔지 한번 들어나 보자.”
연우가 얼얼한 등을 손바닥으로 쓸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처음엔 진짜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겠다던 어머니도 부릅떴던 눈을 슬며시 풀었다. 연우가 오버하긴 했지만 선생님을 위로하겠다는 진심만은 사실이었다. 오해가 풀리자 호랑이 같았던 어머니가 보살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
“거 봐. 내가 아닐 거라고 했잖아. 괜히 아들만 잡았네.”
“그럼 진작 말하지.”
“우와~ 그러는 거 아니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강스파이크 날린 사람이 누군데?”
연우가 섭섭해하자 어머니가 연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미안하다. 아들. 삐친 거 아니지?”
“삐쳤거든요.”
“뭐 해 줄까?”
“……잡채. 고기 잔뜩 넣어서.”
“알았어. 알았어.”
잡채로 극적인 타협을 이뤄 낸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흔들자 아버지가 얼른 핸드폰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등짝 한 대로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잡채를 건지게 됐으니 아주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에 대한 처절한 응징은 꼭 하리라 다짐하였다.

***

“최 선생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그래 보여요?”
“네.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던데요?”
“별다른 일은 없는데.”
“선생님 미소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그렇게 웃고 다니시면 얼마나 좋아요? 난 미남이 웃는 게 좋더라.”
수간호사가 장난을 치자 고야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기분 좋은 일이라……. 조금 전 만난 김연우 환자의 부모님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건넨 게 다였다. 다만 그 말 속에 부적절한 동영상에 관한 것을 슬쩍 찔러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좀 심했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녀석, 한 번은 혼나야 해.’라며 납득하였다. 신성한 병원에서 야동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인가? 지금쯤이면 녀석도 부모님에게 한 소리 듣고 반성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구경이나 가 볼까?
고야가 사악하게 웃으며 연우의 병실에 이르렀다. 열린 문으로 연우와 부모님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오해라고 극구 항변하던 연우가 고야의 얘기를 꺼내자 고야는 눈썹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상황이 불리하니 자신을 걸고넘어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연우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고야의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들은 고야는 한숨을 쉬었다. 환자에게까지 걱정을 끼치다니……. 의사로서 빵점이다. 오해를 푼 부모님과 연우가 잡채로 극적 타결을 이끌어내자 고야는 이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왠지 입맛이 썼다.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몇 년 만일까. 자신의 부모님을 이해하고 그 뜻을 존중해 왔다.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며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헌데 연우의 가족을 본 후 부럽다는 감정이 슬며시 새어 나왔다. 다른 가족을 봐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을 왜 연우에게서 느끼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 여행갈까?”
“이번엔 고야가 특별히 원하는 곳으로 가자. 어디가 좋을까?”
꿈결처럼 부모님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15살이 된 고야가 눈썹을 찌푸리며 부모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나 공부해야 돼.”
“공부도 좋지만 가끔은 바람을 쐬는 것도 좋지 않겠니?”
“엄마 말이 맞아. 아빠랑 등산 어때?”
“별로…….”
“어허 이 녀석. 무조건 산으로 간다. 너 그렇게 공부만 하다간 체력도 바닥, 몸매도 저질이 될 거야.”
“여보. 애한테 저질 몸매가 뭐야.”
어머니가 눈을 흘기자 아버지가 머쓱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논쟁을 가볍게 무시한 고야가 무심하게 말했다.
“다담 주부터 시험기간인데?”
“그래서 안 가겠다고?”
“어머, 시험기간이었어? 그럼 시험 끝나고 갈까?”
“여보, 얘 몸 좀 봐. 얘는 지금 공부보단 운동이 먼저라니까.”
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야의 몸을 훑자 어머니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얘 몸이 어때서? 듬직하구먼.”
“이대로 두면 고도비만이 될 거야. 아들아. 산에 가는 거다. 응?”
“아니 이 양반이 무슨. 내가 보기엔 조금 통통한 정도인데.”
두 분이 또다시 언쟁을 벌이자 고야가 한숨을 푹 쉬었다.
15살인데도 중년 남자처럼 배가 튀어 나와 있었다. 자신이 또래보단 좀 뚱뚱하다는 것을 알지만 고도비만 소리를 들으니 정말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졌다. 거울에 비친 몸매는 자신이 봐도 다이어트가 필요해 보였다. 이참에 운동으로 살 좀 빼 봐? 하는 마음과, 어떻게 해서든 아들을 데리고 등산을 가겠다는 아버지의 고집에 고야가 한발 물러섰다.
“갈게요.”
“진짜지? 그 말 취소하기 없기다.”
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고야의 어깨를 두드리자 어머니는 또다시 아버지에게 눈을 흘겼다. 시험기간에 애를 데리고 산에 간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자 아버지가 살살 달랬다.
“여보, 그날 산행 끝나면 막걸리에 백숙 할까?”
“결국 그게 목적이었지? 백숙이랑 막걸리가 그렇게 먹고 싶었냐?”
“아니라니까. 내 목적은 오로지 가족의 화합과 단결을 위한 거야. 막걸리와 백숙은 그 뒤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거고.”
“부수적인 거 좋아하네.”
“진짠데.”
아버지가 정말로 가족의 단합을 위해서라는 말을 강조하자 어머니가 눈썹을 찌푸리며 비웃었다.
“알았다고. 백숙 좋아하면 실컷 드셔. 대신 난 감자전.”
“감자전 오케이.”
어머니의 싸늘한 반응에 기가 죽었던 아버지는 감자전이라는 말 한 마디에 화색이 돌았다.
어휴……. 유치해.
두 분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고야가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지켜보던 싸움이다.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유치함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다. 시험공부를 위해 방으로 향하던 고야는 뒤를 돌아 부모님을 보았다. 이제는 TV 채널 쟁탈전을 벌이는 부모님의 한심한 사랑싸움에 15살의 고야가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31살의 고야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

물통을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연우가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향긋한 레몬냄새가 코를 찌르자 연우가 사악하게 웃었다.
순도 100% 레몬즙, 이 특별 음료의 주인은 고야가 될 것이다. 고야의 고자질로 호되게 곤혹을 치른 연우는 고야가 신 음식을 질색한다는 것을 듣고 이걸 준비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으니 이제 복수만이 남았다.
문제는 이 음료를 어떻게 먹이느냐인데……. 커피라고 뻥 좀 쳐 볼까? 아니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 내가 먹는 시늉을 하면 의심하지 않고 먹겠지?
크크크크크크크. 아오, 꼬소해. 아오, 신나~
연우가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좋아했다. 하지만 밤이 늦도록 고야는 병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동안은 이 병실에 뻔질나게 들어오지 않았던가. 소독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고야가 직접 와서 했지만 오늘은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바쁜가?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병실에 레몬 냄새나나? 혹시…… 담당 환자가 또 간 건가? 에이…… 그건 아니겠지.
고야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던 연우가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계획을 포기하자니 아깝고, 그대로 있자니 고야가 궁금했다. 고야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연우는 저 멀리 고야를 발견하고 뒤를 쫓았다. 복도를 힘없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부지런히 고야의 뒤를 쫓은 연우는 어느새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야밤에 이게 뭔 짓이야. 그냥 내려갈까?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좀 그렇지.
내 기필코 저 양반에게 복수를 하고 말리라.
주먹을 꽉 쥐고 복수를 다짐한 연우가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난간을 붙잡고 오르는 손과, 발걸음 소리, 그리고 펄럭거리는 흰 가운이 보였다.
열심히 뒤를 따르던 연우는 문득 서늘한 기운에 움찔했다.
저게 선생님이 아니고 귀신이면 어떡하지? 병원에 그런 게 바글바글하다던데……. 귀신에게 홀린 건가? 옥상까지 따라갔다가 그 귀신이 뒤에서 밀어 버리면 어쩌지?
만약 떨어지면 자살로 처리되는 건가? 내일 신문에 실리는 거야?
23세 김모 씨 머리카락이 안 자란다며 비관하다 끝내 자살. 이런 거야?
오만 가지 상상을 하며 부르르 몸을 떤 연우가 슬며시 발걸음을 멈췄다. 바로 그때 터벅터벅 계단을 오르던 고야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또다. 저번에 환자가 죽었다며 한숨을 쉬던 소리와 똑같았다. 계단에서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던 연우가 다시 고야의 뒤를 따랐다. 복수니 뭐니 떠들어 댔지만 정작 고야의 한숨소리가 연우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오오오오!”
막상 올라온 옥상은 연우의 생각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나무들과 꽃들로 뒤덮인 옥상은 하나의 커다란 정원이었다. 발 아래로 도시의 불빛이 반짝거려 굉장히 아름다웠다. 뜻밖의 광경에 취해 감탄을 터트리자 고야가 그런 연우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김연우 환자. 안 자고 뭐해?”
“화장실 갔다가 선생님이 보여서 따라와 봤어요. 옥상에 이런 게 있다니 좋네.”
“너무 늦었어. 환자는 규칙적인 생활이 필수야. 그만 들어가.”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조금. 일이 많았거든.”
고야가 어깨가 아픈지 팔을 빙빙 돌렸다.
“어쩐지. 선생님 등짝에 피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더라니.”
“그런 게 보여?”
“보이겠습니까? 그렇게 느낀다는 거지.”
“재미있는 표현이네. 그건 뭐야? 그 병은?”
고야가 연우의 손에 들린 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이거.”
연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감추자 고야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데? 설마 커피냐?”
“아닌데.”
“이리 내.”
“아니라니까요.”
“너 그러다 혼난다. 주치의의 명령을 무시할 셈이야?”
연우가 부정할수록 고야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연우는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목적은 복수였지만 지치고 힘들어 보이는 고야에게 레몬 액을 먹이기 껄끄러웠다. 하지만 연우의 선의를 오해한 고야는 이번에야말로 따끔한 일침을 가하려는 듯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압박해 왔다. 키만 껑충하고 비리비리해 보이던 고야가 밀어붙이자 연우는 기겁했다. 벤치에 등을 댄 시점에 승부는 이미 끝났다.
내가 저 인간한테 깔리다니……. 이런 미친.
연우가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굴욕이 따로 없었다.
연우에게서 병을 빼앗은 고야가 사악하게 웃었다. 피곤한데 마침 잘됐다며 음료를 마시던 고야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푸우우우우우우웃!!”
분무기에서 물을 뿜듯 레몬 액을 뿜어낸 고야가 콜록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우~ 셔. 이거 뭐야.”
“……내가 커피 아니라고 했지.”
연우의 음침한 목소리에 고야는 그제야 연우를 살폈다. 시큼한 레몬 액을 뒤집어쓴 연우가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미, 미안해.”
“너 이씨! 일부러 그랬지? 야동도 그렇고 날 엿 먹이는 게 그렇게 좋냐?”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
“뭐가 고의가 아냐.”
“정말이라니까. 일단 좀 닦자.”
고야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아 주려 하자 연우가 손을 탁 쳤다.
“됐어요. 됐어.”
“가만있어 봐.”
반항하는 손을 거침없이 잡아챈 고야가 연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얼굴과 목,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쇄골에도 레몬 액이 묻어 있었다. 레몬 냄새를 풀풀 풍기는 연우의 얼굴이 형편없이 망가지자 고야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쿡, 쿡쿡쿡.”
만화를 보는 것처럼 연우의 놀란 얼굴이 떠올랐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야가 쿡쿡거리며 웃자 연우의 눈매가 불량하게 변했다.
“웃어? 웃음이 나옵니까? 지금?”
“아니…… 쿡쿡쿡. 미안. 쿡쿡…… 하하하하하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고야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는 괜히 따라와 봉변만 당했다며 투덜거렸다. 차라리 잠이나 잘 것을……. 연우가 입을 삐죽이며 정원을 빠져나간 뒤로 고야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

***

비연이 다시 견의 집에 방문했을 때는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책을 뒤적이며 공부하던 견은 여우가 스르륵 움직이자 고개를 들었다가 비연과 눈이 마주치자 움찔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아닌 존재를 봤지만 친한 척 들러붙는 귀신은 또 처음이다. 지금이야 얌전하지만 화가 나면 어떻게 변할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거추장스러운 여우를 떼어 낼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오, 오셨어요?”
“너무 늦게 방문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저 이것 좀 떼어 주시면…….”
견이 목에 들러붙은 여우를 가리키자 여우의 귀가 쫑긋 섰다.
“불편하십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목에 이런 녀석이 붙어 있으면 의식하게 되니까요.”
“견에게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어요. 더구나 이 녀석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잖아요?”
견은 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불같이 화를 내거나 비웃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비연은 진지했다.
“수상한 귀신이 붙여 준 녀석이니 꺼림칙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녀석이 견의 기운을 빨아먹거나 홀릴 거라 생각하신 거지요? 혹 그 녀석이 아니라 제가 그럴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네.”
비연이 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견은 안절부절못했다. 비연이 한 말은 실제로 견이 걱정하던 것이다. 하지만 비연에게 끌려 다니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견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비연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겁에 질렸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는구나 싶었다. 견의 특수한 능력에 흥미를 느꼈는데 지금은 이 사람의 엉뚱한 면에 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견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진짜죠?”
“물론이지요. 원한다면 맹세할 수도 있어요.”
“맹세가 깨질 수도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니까 떼어 주세요.”
견이 자신의 목을 가리키자 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영혼을 볼 수 있는 견귀의 능력을 가진 자는 간혹 있지만 영혼을 만질 수 있는 자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런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지요. 또한 그 대상이 저에게만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영혼들까지 만질 수 있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설마 제가 그런 특수체질이겠습니까? 그때 손을 잡은 것도 우연이겠죠.”
견이 어설프게 항변하자 비연은 곧바로 견의 팔을 잡았다. 비연의 손이 닿자 견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래도 아니라고 우길 겁니까?”
“이상하네. 왜 만질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