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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이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의 몸을 훑어보았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런 젠장.’이라고 소리칠 것 같았다. 견귀의 능력도 괴로운데 업그레이드 된 능력을 지녔으니 귀신들이 보면 입맛을 돋우는 상대일 것이다. 또한 비연이 자신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았기에 비연을 일반적인 귀신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다. 그 오류를 바로잡아 주고 믿음을 주기 위해 비연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로 하였다.
“견, 저는 저승사자입니다.”
“예?”
저승사자라는 말에 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처음엔 단순히 놀라워했지만 곧 쇼크를 받은 것 같았다.
“저…… 죽나요?”
“예?”
이번에는 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을 때가 다 된 사람 눈에 저승사자가 보인다고 하던데, 그래서 제 앞에 나타나신 겁니까? 아…… 그래서 만질 수도 있었군요.”
자신의 능력에 의아해하던 견이 의미를 깨닫고 허탈해했다.
“이렇게 일찍 죽을 줄은 몰랐는데. 며칠이나 남았어요? 한 달? 아니면 보름? 그것도 아니면 일주일?”
“…….”
“저 죽기 싫어요.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이렇게 빨리 갈 수 없어요.”
“무언가 오해가…….”
“제가 죽으면 저희 부모님은 어떻게 사시라고요. 아직 첫 키스도 못 해 봤어요.”
“견. 잠깐 내 말 좀.”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성을 잃은 견은 비연이 당황하건 말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와중에도 비연이 입은 비단 철릭이 꽤나 보드랍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지다니 정말 죽음이 가까이 왔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 등골이 서늘했다.
공포로 굳어 버린 견을 토닥이며 비연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견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수명이 언제까지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먼 훗날이 될 겁니다.”
“정말이죠?”
“예. 안심하세요.”
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견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아직도 비연의 옷을 붙들고 늘어진 채라는 것을 깨달은 견이 황급히 놔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오해는 풀리셨습니까?”
“조금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 그런데 왜 제가 사자님을 만질 수 있는 걸까요? 혹시 그런 능력을 가진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이니까요.”
“사자시라면 저승에 가서 알아보실 수도 있지요?”
“그것에 관해서라면 이미 부탁을 해 두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땐 어째서 견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요.”
“사자님이 직접 가시는 건…… 아, 일이 바쁘셔서 그런가?”
견은 뒷말을 얼버무렸다. 비연의 얼굴이 흐려지자 말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싶어 견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사자님.”
“비연입니다.”
“저…… 그럼 이 녀석 목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겨 주시면 안 될까요?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워요.”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잠시만 참아요.”
비연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견의 목에 붙어 있던 여우가 견의 왼쪽 손목으로 옮겨 갔다. 여우 목도리에서 팔찌가 된 셈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민감한 목에 그대로 있었다면 간지러움과 거부감 때문에 무척 우울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비연의 정체도 확인했고 여우도 자리를 옮겼으니 이만 슬슬 중요한 레포트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만 가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비연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견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계속 여기에 계실 건가요?”
“제가 불편합니까?”
“그건 아닌데…… 신경이 쓰여서요.”
“그렇군요. 다음에 보도록 하죠.”
비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을 통과해서 사라졌다. 비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견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안 와도 되는데…….”
비연이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껄끄러웠다. 견이 투덜거리며 불평을 하자 손목에 있던 검은 여우가 스르륵 움직였다. 견은 씁쓸한 얼굴로 다시 레포트에 집중했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견이 다시 레포트에 시선을 돌리자 모습을 숨기고 그를 지켜보고 있던 비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견에게는 비연의 존재가 무척이나 껄끄럽고 귀찮았나 보다. 비연 앞에서는 겁에 질려 움찔하더니 당사자가 없다고 저렇게 안면을 싹 바꿀 수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견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저승사자란 영혼을 인도하는 안내자이자 동시에 생명의 끝을 고하는 사신인 것이다.
비연은 소산의 흔적을 추적했다. 지금쯤이면 이승으로 내려와 일을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견이 왜 사자와 접촉할 수 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산의 존재를 느낀 비연은 몸을 돌렸다.
소산은 자신이 맡은 영혼이 육체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고 쾌적한 병원엔 사람들로 가득했고 가족들과 양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비연이 다가오자 환자를 주시하던 소산이 힐끗 돌아보았다.
“갔던 일은?”
“그게…… 시간 좀 걸리겠어. 아무도 아는 자가 없더라고.”
소산이 어깨를 으쓱하자 비연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는 자가 없다니?”
“말 그대로야. 그런 일은 처음이라더군. 위에선 자네가 그를 맡았으면 해.”
“내가? 하지만 난 행동의 제약이 있네. 그건 자네도 알고 있잖아?”
“그래도 안 돼. 모두들 바빠서 그만 특별 취급 할 수는 없다더군. 그러니 자네가 할 수밖에.”
소산이 어쩔 수 없다며 변명하자 비연이 눈썹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글쎄. 위에서도 곧 답이 내려올 거야. 특이한 경우니까. 그의 몸에 자네의 흔적을 남겼지? 그렇다면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혹, 내가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기면?”
“걱정하지 마. 자네가 잠들어 있을 땐 내가 지켜봐 줄게.”
“……그래.”
견의 실망한 얼굴이 떠올랐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마 소산이 도움을 준다니 그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소산이라면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
***
샤워를 했지만 시큼한 레몬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다. 정작 사고를 친 당사자는 날이 밝아도 연우의 병실에 오지 않았다.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며 사과하러 올 줄 알았는데 고야는 그날 세미나가 있다며 하루 종일 오지 않았다.
에이…… 앓느니 죽지. 내가 그 인간 사과받느니 화병으로 먼저 죽겠다. 어차피 이틀 있으면 퇴원이니 대인배인 내가 참아야지.
연우가 쳇 하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이제 지긋지긋한 병원생활도 끝나 가고 있었다. 보름 넘게 입원했더니 좀이 쑤셨다. 어서 빨리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과 밀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엄마가 차려 주는 밥과 편히 쉴 수 있는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병원은 결코 편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그 괘씸한 꼬마. 이제는 정신 차렸겠지? 나니까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거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고야에 대한 화를 꼬마에게 풀던 연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막상 퇴원을 앞두니 시원섭섭했다. 토닥거리며 싸우긴 했지만 주치의인 고야가 싫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텐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어둠이 내린 병실의 문이 열리고 고야가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잠귀가 밝은 연우가 알은척을 했겠지만 어제 그 사건 때문에 화가 났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내자식이 그깟 일로 쩨쩨하게 군다고 타박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우는 편안한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소독을 해야 하지만 머리에 손을 댔다가 잠들어 있는 연우를 깨울까 염려되었다.
조금만 이대로 있자. 조금만.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고야가 굳어 버린 몸을 쭉 폈다. 할 일이 많지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스트레칭하던 고야가 연우를 응시했다. 새삼스레 연우의 무방비한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얼핏 봐도 꽤나 잘생긴 얼굴이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처럼 표정이 풍부했다. 부모님을 대하는 모습도 정겨워 보인다. 16년 전의 나도 연우처럼 밝았었는데……. 연우를 보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때문일까? 그래서 연우가 더 신경 쓰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 질투, 그리고 호기심.
고야의 이런 감정을 모른 채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천진함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퇴원하면 볼 수 없겠지만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고야는 주머니에서 음료수를 꺼내 테이블에 놔두었다. 연우가 먹으려던 레몬즙을 전부 버렸으니 약소하지만 이걸로 대체할 생각이다. 커피라도 뽑아 줄까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의리는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뜬 연우는 고야가 놓고 나간 음료를 발견했다. 고야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음료다. 분명히 레몬즙에 대한 사과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자기중심적인 것 아닌가? 하필이면 연우가 제일 싫어하는 벌꿀음료였다. 연우는 손가락으로 캔을 통 튕긴 후 미간을 찌푸렸다.
***
연우가 고야를 다시 만난 것은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에서였다. 고야가 광합성이라도 하는지 눈을 감고 햇볕을 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따뜻한 햇볕 아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연우는 자판기에서 캔을 하나 뽑은 후 고야의 옆에 털썩 앉았다. 인기척에 눈을 뜬 고야가 연우를 보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연우가 캔을 던지자 그것을 낚아챈 고야가 물끄러미 보았다.
“이거 뭔데?”
“먹고 힘내라고요.”
“……잘 마실게.”
고야가 음료수를 마시자 연우도 주머니에 넣어 왔던 벌꿀음료를 꺼냈다. 그 음료를 본 고야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다음엔 커피로 주세요. 전 벌꿀음료 별로예요.”
“왜? 난 그게 좋던데.”
고야가 의아해하자 연우는 낮게 혀를 찼다.
“선생님, 생긴 건 아메리카노인데 속은 쌍화차네요. 여자한테 인기 없죠? 외모에 속아서 접근했다가 다들 기겁하죠?”
“아닌데.”
“아니긴. 남자인 나도 헉 하고 놀라는데. 솔직히 말해 봐요. 애인 있다는 거 거짓말이죠?”
“있다 인마. 내 여자 친구 사진도 보여 주랴?”
“못 믿겠는데? 진짜 있어요? 이런 희귀한 일이.”
연우가 믿을 수 없다며 의심하자 고야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액정화면엔 고전적으로 생긴 미인이 미소 짓고 있었다. 둘이 얼굴을 맞대고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사진을 보던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네. 이런 미인이 어떻게 선생님과 사귈 생각을 했을까?”
“뭐라는 거냐?”
“선생님, 이분 꽉 잡아요. 놓치지 말고. 천사 강림하셨네. 나이팅게일이 따로 없어.”
“뭐?”
“농담이에요. 농담.”
고야가 눈썹을 찌푸리자 연우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김연우 환자는 여자 친구 없어?”
“없어요. 공부하느라 바빠서.”
“인기가 없는 건 아니고?”
“아니거든요.”
고야가 놀리자 이번엔 연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못 믿겠는데?”
“환자복 입고 머리에 붕대 둘러서 그렇지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면 여자들 다 쓰러져요.”
“쿡쿡쿡, 알았다. 믿어 줄게.”
“믿어 줄게는 뭡니까? 진짜라니까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쿡쿡거리며 웃던 고야가 입을 다물자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음료수를 마시던 연우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대책 없는 달콤함은 앞으로도 적응하기 힘들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음료를 좋아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
“내일 퇴원이지? 좋겠네.”
“그럼요. 이제 집에 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겁니다. 선생님하고 입씨름할 필요도 없고, 완전 해방.”
“그래. 고생했어.”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고야가 의외로 고생했다며 격려하였다.
“선생님도 고생하셨어요.”
“다신 오지 마.”
“아~ 왜요. 섭섭하게. 빈말이라도 언제 같이 밥 한번 먹자 할 수도 있잖아요?”
“빈말이잖아.”
“빈말이 아니면 되지.”
“됐어. 나 바쁘다.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랑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고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연우가 입을 삐죽였다.
“저 성질머리하고는.”
“다 들린다.”
“들으라고 그런 거거든요?”
“부모님께 잘해.”
“그럴 생각입니다.”
고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잘 가.”
“내일 또 볼 거면서 무슨 잘 가래.”
연우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고야는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섰다. 산책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연우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야의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 얼굴과 인사는 마지막 말처럼 들렸다.
에이 설마……. 연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을 리가 없다. 내일 고야가 온다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할 생각이다. 연우의 주치의로서 신경 썼겠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선 호의가 있었다.
다음날 퇴원을 하고 병원을 나서며 연우는 아쉬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고야를 볼 수 없었다. 무슨 놈의 세미나가 그리도 많은지 내일까지 시간이 빡빡하게 잡혀 있었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그래도 경과를 보러 병원에 다시 올 테니 그때는 꼭 볼 수 있기를 바랐다. 연우는 고야를 떠올리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최고야 선생님, 그동안 고마웠어요.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
비연은 어두운 골목길을 홀로 걸어오는 견을 보았다. 견의 자취방이 높은 지대에 있어 굽이굽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그의 발걸음이 힘겨워 보였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얼굴 역시 무척 피곤해 보인다.
소산을 통해 견의 집안 내력을 알아본 비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평범한 집안의 견이 어떻게 견귀의 능력과 접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보통은 핏줄을 타고 그 능력이 이어지는 법이었다.
견의 손에서 캔 맥주 봉지가 달랑거렸다. 평소 같으면 집으로 돌아가 쉬었겠지만 오늘이 생일이라 그런지 왠지 쓸쓸했다.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특별한 날이면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견은 동네에 있는 작은 놀이터로 향했다. 낡은 그네에 앉아 몸을 흔드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은 견이 앉기엔 그네가 작고 불편하다. 자신이 어느새 이렇게 컸는지 새삼 놀랍기만 했다.
캔 맥주를 홀짝이며 추억에 젖어 있던 견이 문득 옆을 보았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네에 비연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막 맥주를 마시던 견의 눈이 커지며 사레가 들렸다.
“콜록 콜록 콜록.”
견이 맥주를 뿜어 내며 콜록거리자 비연이 얼른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까?”
“놀랐잖아요. 아우. 목이 아직도 따끔거리네.”
견이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훌쩍였다. 하여간 누가 저승사자 아니랄까 봐 나타나는 타이밍하고는……. 견이 못마땅하게 흘겨보자 비연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뭐합니까?”
“그냥…… 들어가기 그래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무것도요. 그건 알아보셨어요?”
견이 말을 걸자 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왜 그런 거래요? 일시적인 거죠? 설마 평생은 아니겠죠?”
“모르겠습니다. 위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하더군요.”
견의 몸이 얼음처럼 굳었다. 맥주가 콸콸 쏟아져 모래바닥으로 흘렀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견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거짓말이죠? 일부러 저 놀리려고 그러는 거죠?”
“사실입니다.”
“그럼 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요?”
“위에서도 견의 능력을 특수하게 보고 있습니다. 지시사항이 내려올 때까진 제가 견의 보호자가 됩니다.”
“그냥 제 능력을 거둬 가시면 안 될까요? 저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안타깝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비연이 고개를 흔들자 견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해결방법이 없었다.
“……전 왜 이렇게 거지 같은 능력을 가지게 된 걸까요?”
“힘듭니까?”
“예. 귀신을 보는 것도 무서운데 이젠 그들이 저를 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요. 그들이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옥상으로 끌고 갈 수도 있고, 전철을 기다리는 내 뒤를 확 밀어 버릴 수도 있잖아요.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평생 혼자서 살아야 할까 봐 무서워요.”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요?”
“저는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아무도 이해 못 해요. 다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견이 괴로운 한숨을 쉬며 “이제 어떻게 하지?”라고 중얼거렸다. 견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비연은 아무런 위로를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른 후 견이 입을 열었다.
“결국엔 내 탓인데…… 비연 님에게 화풀이를 했어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정말 절 지켜 주실 거예요?”
“네.”
“언제까지요?”
“모릅니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겠지요.”
“그렇군요.”
견은 봉투에서 또 다른 캔 맥주를 꺼냈다. 비연에게도 권했지만 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캔 맥주를 따서 한 번에 다 마셔 버린 견이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제 생일인데 우울하네요. 나이 먹고 생일 타령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래도 기쁜 일만 가득했으면 했거든요. 비연 님은 생일이 언제예요?”
“모릅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생일을 모를 리가…….”
견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모든 생물에겐 태어난 날이 존재하지만 저승사자도 그에 해당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라서요.”
“인간이었을 때의 일은 기억하세요?”
“잊어버렸어요.”
비연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살아생전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사랑했던 사람은 있었는지…….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납니다.”
“어떤 거요?”
“누군가를 사랑했고 행복했다는 것.”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지 비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견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분 좋겠어요. 죽어서도 사랑받는다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 기억은 저에겐 흔적일 뿐입니다.”
“그래도 그 흔적이 남을 정도로 사랑했다는 거잖아요?”
견의 물음에 비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연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입견으로 오해했던 부분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저승사자하면 검은 갓에, 검은 두루마기, 창백하고 흰 얼굴을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굉장히 친절했다.
자신의 특이체질에 좌절할 때는 같이 안타까워하였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는 저승사자를 처음엔 의심했지만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일날 저승사자와 같이 보내다니, 남들이 들으면 기겁하겠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좋네요.”
견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참, 집으로 가 봐요. 견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요?”
“사실은 그 말을 해 주려고 따라왔는데 너무 오래 붙잡았어요.”
견은 의아해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비연의 말대로 집 앞에 누군가가 쭈그리고 앉아 견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견을 발견한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손에 주렁주렁 비닐봉지를 가득 든 남자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미, 민우?”
“왜 이렇게 늦었어? 너 기다리느라 다리 저려 죽는 줄 알았다. 핸드폰은 왜 안 받아? 어?”
“밧데리가 죽었…….”
“뭐라고?!”
민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견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너 생일이잖아. 알바 끝날 시간에 맞춰서 왔더니 오지도 않고. 갈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생일 때문에 온 거야? 그것도 이 시간에?”
“아, 뭐야. 나 그냥 갈까? 응?”
“아냐 아냐. 잘 왔어.”
견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자 민우가 삐죽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려던 견이 비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비연은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흔적이 남을 정도로 사랑했잖아요?”(회상)/
견의 말이 비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긴 시간 동안 그가 누굴까 생각했다. 그러나 안개에 가린 것처럼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몸에 생긴 상처의 흔적처럼 이제는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은 그가 몹시도 그리워졌다.
2. 낯선 호기심
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음료가 잔뜩 든 박스를 옮기다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걸어 다닐 때마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미간이 찌푸려질 정도다. 점장의 호의로 일찍 퇴근을 한 견이 힘겹게 집으로 향했다.
산꼭대기에 위치한 자취방을 떠올리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평소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도착할 수 있는 집인데 허리까지 아프니 두 배로 힘이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가니 숨이 턱 끝에 닿았다.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입에선 단내가 났다.
허리를 짚으며 겨우 고갯길을 벗어나니 집 앞에 비연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멋들어진 수묵화를 보는 듯했다. 먹물의 향마저 은은하게 느껴지자 견은 아픈 허리도 잊고 홀린 듯이 비연을 바라보았다. 비연이 있는 곳만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비연이 고개를 살짝 틀어 견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비연이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늦었군요.”
“어쩐 일이세요?”
“견이 잘 있는지 걱정이 되어 와 봤습니다.”
“안 오셔도 되는데…….”
작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견을 비연이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 다쳤습니까?”
“일하다 허리를 좀……. 괜찮아지겠죠.”
가방에서 집 열쇠를 꺼내 문을 연 견은 따라 들어오려는 비연에게 곤란한 얼굴을 했다.
“들어오시려고요?”
“네.”
“씻을 건데?”
“부끄러운가요?”
“다, 당연히 부끄럽죠.”
“그럼 방에서 기다리죠.”
“앗! 자, 잠깐만.”
견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비연은 견을 지나쳐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인간이 만든 벽 따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저 능력이 새삼 부러웠다. 하지만 내 인권은? 무시하나? 그러나 견이 떠들어 봤자 비연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지 않았다.
“내 인권…… 개나 줘…….”
견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겨우 몸을 추슬러 샤워를 했다. 비연이 신경 쓰였지만 인간의 벗은 몸 따위 어차피 흥미도 없을 것이다.
“아…… 아퍼.”
허리에 통증이 오자 견이 자신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습니까? 내가 도와줄까요?”
“아니요. 됐어요.”
“부끄러워 그러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저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인간이든 아니든 괜찮은 건 괜찮은 거라니까요.”
견이 버럭 화를 내자 비연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씨. 쪽팔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