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



견이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었다. 여기서 앓는 소리를 냈다간 비연이 도와준다며 방 밖으로 나올 것이다.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자 비연이 견의 손목에 있는 여우를 보았다. 여우의 까만 몸이 한순간 반짝였다.
“뭐하신 거예요?”
“기운을 강화한 겁니다.”
“강화요?”
“이것은 내 몸의 일부입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으면 기운이 흩어져 원 주인에게 돌아오지요.”
“아! 그래서 오신 거구나.”
비연의 방문 이유를 깨달은 견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비연이 왜 왔나 궁금했는데 그런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 볼일은 다 끝난 건가요?”
“네.”
“저…… 그럼 좀 쉬고 싶은데.”
견은 뒷말을 흐렸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 준 비연이 고마웠지만 비연이 있으면 편히 쉴 수 없었다. 당장 폭신한 이불에 누워 파스를 붙이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견의 그런 바람과는 반대로 비연은 진지한 눈으로 견의 몸을 살펴보고 있었다.
“기의 흐름이 편하지 않군요. 누워 봐요.”
“괜찮아요. 파스 붙이면 돼요.”
“날 믿어요.”
비연이 재촉하자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견이 이불 위에 눕자 비연이 돌아누우라는 손짓을 했다. 돌아누우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어어억.”
비연의 손이 느닷없이 옷 속으로 파고들자 견은 깜짝 놀라 몸을 뒤틀었다.
“뭐, 뭐하는 거예요?”
“치료.”
“그런데 왜 옷 속으로 손을 넣어요?”
“견은 상처 난 맨살에 치료합니까? 아니면 상처 위에 옷을 덥고 치료합니까?”
“…….”
“같은 겁니다.”
“진짜죠?”
“혹시 다른 생각을 한 겁니까?”
“아, 아니에요.”
비연이 의아해하자 견이 얼른 엎드렸다. 차마 다른 생각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저승사자라도 비연은 남자다.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데 좋을 리가 없었다.
비연의 손이 닿자 견은 움찔했다. 생각보다 비연의 손길이 따뜻했다. 삐끗한 허리를 중심으로 점점 넓게 퍼졌다. 등이나 허리는 그나마 참을 만했는데 엉덩이까지 손길이 닿자 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짜 치료가 되는 걸까 의심했는데 그런 견을 비웃기라도 하듯 통증이 점점 완화되었다.
비연의 손길에 뭉쳐 있던 근육이 풀리고 있었다. 부드럽게 등을 마사지해 주는 세심한 손길이 기분 좋았다. 비연이 견의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자 견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른한 잠의 세계로 폭 빠져 버렸다.
깊이 잠든 견은 좋은 꿈을 꾸는지 편안해 보였다. 어깨가 뭉칠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견이 안쓰러웠다. 처음엔 불편한 허리만 손봐 주려 했는데 몸에 손을 대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견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비연은 뭉쳐 있는 부분을 풀어 주었다. 내일 잠에서 깨어났을 땐 피로가 말끔하게 풀려 있을 것이다.
“이런 이런. 없는 시간을 쪼개서 기껏 보러 왔더니 너무하네.”
맑은 옥구슬 소리가 나며 어느새 비연의 옆에는 소산이 앉아 있었다.
소산이 웃음을 흘리며 혀를 끌끌 찼다. 드디어 소문의 그 사람을 만나러 왔는데 엎드린 채 잠들어 버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봐. 난 바쁜 몸이라고. 여기까지 행차한 내 성의를 봐서 얼굴 정도는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냐?”
소산이 투덜거리며 견의 몸을 툭툭 건드리자 비연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그만두게. 지금 막 잠들었어.”
“잠은 얼마든지 잘 수 있어. 잠깐 일어난다고 큰일 안 생겨.”
“못 일어날 거야. 기의 흐름이 흩어졌기에 다시 정비해 줬거든. 아침까진 못 깨어나.”
소산이 눈썹을 찌푸렸다.
“뭐?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비연, 그렇게까지 해 줄 의무는 없어.”
“나도 알아. 그래도 늦게까지 일하고, 공부하고…… 안쓰럽잖아.”
소산이 코웃음을 쳤다.
“이 사람만 안쓰러운 삶을 사는 게 아냐. 더 안타까운 자들도 많아.”
“알아.”
“우리는 저승사자야. 우린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 없어. 지켜보되 정은 주지 마. 정을 주면 너만 상처받을 거야.”
“알고 있어.”
소산의 충고에 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사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삶을 지켜보고 그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죽은 후에 깨닫게 해 주는 존재이다. 해서 아직 삶이 끝나지 않은 인간에게 개입할 수 없었다. 견이 특수한 경우라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소산이 견의 팔을 꾹꾹 눌렀다. 소산이 누르는 대로 움직이는 견이 신기한지 감탄을 터트렸다.
“하~ 진짜였군. 정말로 만질 수 있잖아? 괴물 같은 놈. 이런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니. 이건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비연은 놀이터에서 견이 외친 말이 떠올랐다.
/“이런 능력 필요 없어요. 가져가세요.”(회상)/
“축복은 아니겠지. 견은 자신의 능력 때문에 괴로워했어.”
“누군가는 얻고 싶어도 못 얻는 능력을 누군가는 필요 없다고 하는군. 참 아이러니해.”
“위에서는 아직인가?”
“재촉하지 마.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 아니겠어?”
소산이 턱에 손을 괴며 빙긋 웃자 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산의 말대로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일이다. 조급해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며 때를 기다릴 뿐이다.

***

연우는 거울 앞에서 까칠까칠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수술했던 부분이 눈에 띄자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카락이 자라면 상처는 감춰지겠지만 아직 충분하게 자라지 않았다. 모자를 쓰면 덥고 안 쓰자니 상처가 눈에 거슬렸다. 언제까지 이 거추장스러운 것을 써야 할지…….
퇴원을 한 지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경과를 보러 병원에 몇 번 방문했지만 고야를 만날 수는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수술방에 들어갔거나 쉬는 날이었다. 이제는 완치가 되어 갈 일이 없지만 고야에게 제대로 인사를 못 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람이다. 다시 볼일은 없겠지만 행복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벼운 조깅을 마친 연우가 한강이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느긋하게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해가 지는 한강의 야경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예쁜 여자 친구가 없다는 것인데. 신년 초에 본 토정비결에 연애 운이 있다더니 전부 거짓말인 모양이다. 그걸 기대한 내가 바보지. 병원 신세 지는 것도 못 맞췄잖아. 역시 그런 건 믿을 게 못 돼.
연우가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격한 말소리가 들렸다.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말을 들어 보니 한 쌍의 커플이 싸우는 모양이다.
싸우나? 구경 중엔 역시 싸움구경이 최고지.
나무로 가려져 커플들이 자신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연우가 슬그머니 두 사람의 말다툼에 귀를 기울였다.
“왜 헤어지자는 건데?”
“그 이유를 몰라? 오빠 마음이 떠났잖아?”
“무슨 소리야? 난 널 사랑해.”
“사랑하는데 어째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어야 해?”
이놈 봐라. 양다리? 욕먹어도 싸다.
연우가 혀를 끌끌 찼다.
“오해야.”
“오빤 깨닫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오빠 맘에 들어온 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라고.”
“해란아.”
“난 오빠한테 최초이자 마지막이 되고 싶었는데. 이젠 아니야.”
“내가 더 잘할게. 정말 오해야.”
이봐, 아저씨. 늦었어. 여자들의 직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저 아가씨가 그렇게 말할 땐 당신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거지. 당신은 최악이야.
아가씨, 저런 놈은 뻥 차 버리고 다른 멋진 남자를 만나는 거야. 바로 나 같은 놈.
연우가 파이팅을 외치며 여인을 응원하였다.
“헤어져. 마음 떠난 남자 잡고 싶지 않아.”
“해란아. 제발.”
“연우라는 그 사람이랑 잘해 봐.”
“오해라니까?”
응?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연우가 ‘응?’하는 표정을 지었다. 할 말을 마쳤는지 여인이 급하게 나오다가 벤치에 앉아 있는 연우를 보고 흠칫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보았다.
누구지? 저 사람이 누구더라?
연우가 고개를 갸웃한 순간 여인을 따라 남자도 수풀 속에서 뛰쳐나왔다. 남자의 얼굴을 본 연우는 여인이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고야의 핸드폰에 있던 그 여인이다.
연우를 알아본 고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주춤거린 고야는 이내 입술을 깨물고 여인을 쫓아 사라졌다.
연우는 뜻밖의 사태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필이면 만나도 이렇게 만나는 건지. 재회해서 기쁜 건 둘째 치고 재회의 순간이 참…… 거지 같았다.

***

고야는 숨을 몰아쉬었다. 곧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연우를 보며 움찔했던 것이 원인인 모양이다. 왜 하필이면 해란과 이야기하는 그곳에 연우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해란 때문에 초조해진 고야가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그녀는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걸까? 연우는 남자이며 연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다른 환자들보다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약 연우가 여인이었다면 그녀가 오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를 상대로 오해를 하는 것은 그녀의 지나친 억측이다.
주차장으로 가던 고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꼴이 참 우습게 됐다. 병원에서는 근엄한 의사인 척 연장자인 척 행동했는데 오늘 일로 연우에게 못 볼 꼴을 보여 준 것이다. 얼마나 자신의 여자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으면 그런 소리나 듣겠냐며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고야 역시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에 오른 고야가 그녀의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사귀면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바람피우면 나 다신 오빠 안 볼 거야.”(회상)/
바람? 진짜 바람이면 억울하지도 않겠다.
여자도 아닌 남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로 몰아붙인 해란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갈 생각이다. 이야기를 다 들으면 그녀도 자신이 오해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나야.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얘기 좀 해.”
“이건 너무 일방적이잖아. 내 얘기 좀 들어 봐.”
“알았어. 기다릴게.”
몇 번의 통화시도 끝에 겨우 전화를 받은 그녀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목이 탄 고야가 자판기에서 꿀 음료의 버튼을 눌렀다.
/또 꿀 음료야? 노인네.(기울기)/
연우가 혀를 차면서 놀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고야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쩐지 오늘 연우 때문에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듯했다.
벤치에 앉아 묵묵히 손에 쥔 꿀 음료를 바라보는 고야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고야를 보면 늘 생기 있던 그녀의 얼굴이 무표정하다. 고야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자 마지못해 앉은 해란은 고야가 준 음료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고야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김연우 환자. 남자야.”
“……알아.”
의외의 대답에 고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안다고?”
“오빠가 그랬잖아. 남자 환자라고.”
“남자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거야?”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 어떻게 남자가 내 라이벌이 될 수 있겠어?”
“그 말 그대로야.”
“그런데 아니더라. 될 수 있더라고.”
“너 바보야? 어떻게 그 애가 네 라이벌이 될 수가 있어? 내가 게이도 아니고 어떻게 남자에게 한눈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당황한 고야가 소리를 높이자 해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나도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착각하는 거라면 좋겠다고.”
“착각이야. 그것도 엄청 큰 착각.”
“아니. 오빠가 그 애를 어떻게 보는지 알아? 그 눈빛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고. 나에게만 보여 주는 표정을 똑같이 보여 줬단 말이야.”
의외의 말에 고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애를 봤어?”
“그래. 오빠 병원에 몇 번 갔었어. 그럴 때마다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는 걸 다 봤다고.”
“그 애에게 다른 환자들보다 더 잘 대해 준 거 인정해. 내가 왜 그랬는지 알아? 그 애가 부러워서. 금슬이 좋은 부모님을 둔 그 애가 부러워서였어. 너도 알잖아. 우리 부모님 이야기. 그 애를 보면 자꾸 옛 시절이 떠올라서 그랬어. 그게 다야. 그것 때문에 너한테 이런 오해를 받는 건 억울해.”
고야의 얘기를 들은 해란이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부러웠다면 오히려 그 애를 외면했을 거야. 내가 오빠를 일이 년 봐?”
“아니라니까. 동생 같아서, 그래서 잘 대해 준 거야.”
“거짓말 마. 자기 이복동생도 남처럼 대하는 주제에. 동생 같다고?”
“여기서 그 녀석 얘기가 왜 나와.”
고야가 벌컥 화를 내자 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랑 사귀는 몇 년 동안 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 한 번도 없었어. 우리 요즘 만날 때마다 오빠는 그 사람 얘기만 했어. 알아?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니까 답이 나오더라.”
“그래서 정말 헤어지겠다는 거야?”
“응. 난 마음 떠난 남자 가지고 싶지 않아. 육체만 가져 봤자 내가 비참하니까.”
“정말 아니라니까.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알겠니? 차에라도 뛰어들까?”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제발 좀.”
고야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자 해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우리 시간을 가지자. 오빠의 그 감정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닌지…….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해. 알았지? 그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돼?”
“…….”
“알았어. 그렇게 할게.”
고야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겨우 유예기간을 얻었지만 정말 이대로 헤어지게 될까 봐 겁이 났고 속이 상했다. 이대로 병원으로 돌아가 교수가 내려 준 연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다.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는 고야에게 재우가 다가왔다. 의대부터 함께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병원이 아닌 사석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무슨 일이야? 이런 데서 다 보자고 하고?”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재우가 고야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오랜 친구인 만큼 고야가 이런 행동을 보일 때면 무슨 일이 있다는 의미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해란 씨랑 싸웠어? 왜? 무슨 일 때문에 싸웠는데? 해란 씨가 그만 만나자고 해?”
“……응…….”
“응?”
술잔을 기울이던 재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네가 싫어졌대? 아니면 해란 씨 너 말고 딴 남자 있냐?”
“남자는 없는데…… 내가 문제래.”
“왜? 너희 커플도 사랑한다는 말 안 하냐? 아, 혹시 결혼 얘기? 해란 씨 부모님이 너 싫어해?”
“내가 바람피운대.”
고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친놈. 해란 씨가 어디가 어때서 바람을 피냐?”
“차라리 내가 정말 바람을 피우고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건 또 뭔 소리야?”
고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하자 재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데? 자세히 좀 말해 봐.”
재우가 재촉하자 고야는 겨우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에선 열불이 치솟았다. 고야의 얘기를 들으면서 재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해란씨는 네가 그 연우라는 환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거지?”
“그렇지.”
“에라이, 얼빠진 놈아. 얼마나 그 자식 얘기를 싸질렀으면 그런 당치도 않을 오해를 하냐?”
“난 별말 안 했어.”
“해란 씨 입장에선 충분히 열 받을 만하네.”
“그래도 억울해.”
“억울? 네가 똑바로 처신을 했어야지. ……그런데 말이야. 너 정말 그 환자에게 이상한 감정은 없는 거지?”
“너까지 날 게이로 몰아?”
고야가 버럭 화를 내자 재우가 얼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아니. 내가 널 쭈욱 지켜봤는데. 해란 씨의 말…… 일리가 있어. 너 해란 씨와 사귈 때 틈만 나면 나한테 해란 씨 얘기를 했잖아. 그 이외의 인물은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별말이 없었어.”
“너…….”
“네가 그 환자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마다 병원 안이었고, 네 담당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그걸 해란 씨한테 이야기한 건 좀……. 아, 역시 착각이겠지?”
고야가 이를 뽀드득 갈자 재우가 급하게 뒷말을 수정했다.
“네 말대로 오해라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잘 생각해 봐.”
“내 감정을 내가 모르겠어?”
“때로는 정작 너만 모를 수도 있어.”
재우가 피식 웃으며 고야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넌 내가 게이였으면 좋겠냐?”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은 없다만, 날 사랑하지는 마라.”
고야가 두통이 이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재우와 이야기하면 좋은 해결책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해결은커녕 고민만 더 깊어졌다.
“너랑 얘기하니까 더 피곤해. 간다.”
“뭐야? 그냥 들어가게? 한잔 더 하자. 오랜만이잖아?”
재우가 아쉬워하자 고야가 한숨을 쉬었다.
“내일 오전에 수술 있어.”
“오전? 에이……. 좋다 말았네. 알았다. 그만 들어가라.”
“너는?”
“난 한 잔 더 하련다.”
재우를 뒤로하고 술집을 나오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넘어 버렸다.
병원으로 돌아가 무거운 몸을 뉘인 고야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멀쩡한데 왜 다들 오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야의 눈이 문득 책상으로 향했다. 연우가 준 비타민 음료가 보이자 고야는 벌떡 일어나 책상에 놓여 있던 비타민 음료를 쓰레기통에 거칠게 던져 버리고 침대에 돌아누웠다.

***

주문한 짜장과 짬뽕을 기다리는 동안 텔레비전 드라마에선 연인들의 살벌한 기싸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막장 드라마라며 누가 이런 걸 보냐고 혀를 차던 윤호도 어느새 그 드라마에 빠졌는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에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서비스로 나온 군만두를 먹으며 드라마를 보던 연우는 문득 고야와 여인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그렇게 떠나고 맘에 걸렸는데 화해는 했는지 아니면 그대로 헤어졌는지 궁금했다.
“윤호야.”
만두를 씹던 윤호가 ‘왓?’하는 표정을 짓자 연우가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만약 사귀는 사람 입에서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넌 어떻게 생각해?”
“응?”
“그러니까…… 네 여자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야.”
“기분 나쁘지. 한두 번이야 그럴 수 있지만 그 이상이면 의심되지. 혹시 그 애한테 마음이 간 것이 아닐까? 하고.”
“그냥 네가 편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고?”
“글쎄……. 그건 그것대로 좀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내 여자 입에서 다른 놈 이름이 나오는 건 불쾌해.”
“그게 놈이 아니라 여자라면?”
“여자? 여자라면 조금 달라지지. 음…… 대체 이런 질문을 왜 한 거야?”
윤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질문의 의도가 뭐냐고 다그치자 연우는 생각에 잠겼다.
“그럼 그 반대라면?”
“응?”
처음 윤호는 연우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천히 되짚어 생각해 보다가 연우를 힐끗 노려보았다.
“뭐야? 이건 누구 얘기인데?”
“있어. 그런 사람.”
“……내가 여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는데, 여자는 감이 날카롭다고 하잖아?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사실이겠지.”
“뭐?”
“아, 몰라. 그딴 거 관심 없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축 게이월드 입성’이란 거지.”
윤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맹렬한 속도로 만두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행복하게 만두를 먹는 윤호와는 반대로 연우는 어이가 없었다.
멀쩡한 사람 하나 게이로 만들어 버린 윤호의 말에 혀를 찼다. 고야는 절대 그쪽 사람이 아니다. 여자 친구의 사진을 보여 주며 무척이나 뿌듯해했고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입원했던 연우와 몇 년간 사랑했던 그녀가 고야에게 같은 비중일 리 없었다.

알바를 끝낸 후 집으로 돌아오던 연우는 갈증을 느끼고 자판기 앞에 섰다. 이온음료를 고르려던 연우의 손이 멈칫했다. 자판기 한쪽에 고야가 즐겨 마시는 벌꿀음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연우는 벌꿀음료의 버튼을 눌렀다. 달달한 음료를 마시며 연우는 쓰게 웃었다.
이 음료를 다시 먹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것도 내 손으로 이것을 선택할 줄이야.
“되게 달다.”
불평을 쏟아 내며 음료를 마시던 연우가 저 멀리 고야가 일하는 병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힘내요. 이번에 액땜 제대로 치렀다고 생각해요. 무사히 잘 넘기면 틀림없이 그 아가씨와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고야에게 짧은 격려를 한 연우가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비연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오는 견을 응시하였다. 늦은 시각까지 일해 피곤할 텐데도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연은 가볍게 몸을 날려 견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옵니까?”
“으악! 깜짝이야.”
딴 생각을 하며 걷던 견이 비연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들고 있던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며 흔들렸다.
“놀라셨습니까?”
“오실 땐 기척 좀 하고 오세요. 심장이 덜컹거렸다니까요.”
견이 눈썹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잊었습니까? 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척을 낼 수는 없지요.”
“아……. 그, 그런가요?”
“농담입니다. 앞으로 유의하지요.”
비연이 눈을 휘며 상냥하게 웃었지만 견은 불편한 듯 시선을 외면했다. 살아 있는 인간인 이상 저승사자를 겁내는 것은 당연하다. 몇 번 만났기에 조금은 익숙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견은 여전히 비연의 눈치를 살피며 경계했다.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혹시 기운을 강화하러?”
“제가 오는 게 싫습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익숙해지지 않아서요.”
견이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변명하였다.
“이해합니다. 제가 두려우신 거죠?”
“……두려워요.”
“왜요?”
“고양이 앞의 쥐 같아요. 비연 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두려움이에요. 비연 님에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한테 비연 님은 말 그대로 죽음의 사신이니까요. 비연 님이 좋은 분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고양이와 쥐도 친해질 수 있습니다. 그건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겠죠?”
“……저와 친해지고 싶으세요?”
견이 의심스런 눈으로 질문하였다. 태도는 무척 조심스럽지만 질문 자체는 투수의 강속구와 같은 직구라 비연은 낭랑한 웃음을 터트렸다.
“견은 싫은가요? 난 친해지고 싶은데?”
“그건…… 아니에요.”
“그럼?”
“왜 저 같은 거랑 친해지려 하세요? 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저승사자와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견은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인 우리와는 달리 물적인 존재인 견은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이요?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요?”
“쉽게 생각해서 자손을 만들 수도 있고, 견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요.”
“좋은 영향이면 좋겠네요.”
자손이라는 말에 “에게, 겨우?”라고 실망하던 견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말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영향을 끼치면 어떻게 되나요?”
“그것이 좋은 영향이라면 금상첨화겠지만 만약 나쁜 영향이라면…….”
비연은 말을 끊고 주의 깊게 듣고 있는 견을 바라보았다.
“영적인 존재가 됐을 때 고통스러울 겁니다. 인간은 자신의 죗값을 모두 치르고 윤회를 하니까요. 그러니까…… 견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앞으로 더 좋게 발전할 무한한 기회가 있는 겁니다. 죽어서는 간절하게 바라도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죠. 그런 존재인 견을 어찌 하찮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런가요?”
견의 까만 눈이 비연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고 있었다. 비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견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아직도 제가 두려운가요?”
“아까보다는 괜찮아요.”
“두려움을 없애려면 자주 접촉하라고 하더군요. 예를 들었던 고양이와 쥐의 관계. 서로 간에 자주 접촉하고 신뢰했기에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었겠죠.”
“그런 것 같네요.”
“그렇다면 작은 접촉부터 시작해 볼까요?”
“어떤 거요?”
견이 의아해하자 비연은 손을 내밀었다. 인간들처럼 악수부터 시작하자는 의미에 견이 주춤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비연이 그 손을 힘주어 잡아 흔들자 견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그대를 자주 보러 올 겁니다.”
“예?”
“익숙해지려면 어쩔 수 없어요.”
“……몇 시쯤 오실 건데요?”
자주 보러 온다는 말에 경악하던 견이 이내 포기했는지 힘없이 물었다.
“이 시각쯤이 되겠군요.”
“전 곧 알바를 바꿀 거예요. 끝나면 시간이 너무 늦어서. 만약 오셨다가 헛걸음하시면 어떡하죠? 제가 잠이 좀 많아서.”
“상관없습니다. 견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하면 됩니다. 내가 오는 시간에 맞출 필요 없어요.”
“그럼 자주 접촉한다는 의미가 없잖아요?”
“그대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 또한 접촉입니다.”
말뜻을 이해한 견이 “아…….”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곧 입을 다물었다. 한 남자가 견이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전 우연한 계기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항상 늦게 오는 동생을 위해 마중을 나온다고 들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동생 마중인가요?”
“아~ 그때 그 청년이구만.”
“제발 안경 좀 끼세요.”
“귀찮아서 말이야.”
눈이 좋지 않아 어두운 밤에는 사람을 잘 못 알아보면서도 귀찮다며 남자가 작게 투덜거리자 견은 싱긋 웃어 버렸다.
“그럼 전 이만.”
남자의 곁을 지나쳐 올라가던 견은 비연이 남자를 유심히 보자 의아해졌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비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분을 유심히 보기에 혹시나 했어요. 그거요. 그…… 비연 님의 직업.”
“아! 아닙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죠?”
“네.”
그제야 견은 안심했다. 혹시나 그 남자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다면 견은 계속 찜찜했을 것이다.
“이제 다 왔어요. 집에 들어오실 거예요?”
“아니. 그만 가 봐야지요.”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연이 돌아간다는 말이 그렇게 좋았나 보다. 서로 간에 익숙하지 않으니 아직은 어색할 것이다. 하지만 자주 만나서 접촉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겠지?
비연은 견의 방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벽에 기대어 서 있다가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