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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고양이와 쥐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응? 뭔 개소리냐?”
견이 무심코 던진 말에 라면을 먹던 민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쥐와 고양이가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걸 봤거든. 그 둘은 원래 천적이잖아?”
“뭐…… 환경에 따라서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그래도 그건 특수한 경우일걸.”
“그렇겠지?”
견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이 그 특수한 경우에 속하지만 정말 그 저승사자랑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민우가 유심히 견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 있어? 네가 뜬금없이 고양이와 쥐 얘기를 꺼낼 리가 없잖아? 뭔데?”
“……요즘 친하게 지내자고 들이대는 사람이 있거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야.”
“여자냐?”
“아니. 남자.”
남자라는 말에 민우가 눈을 부릅떴다.
“그 남자 혹시 그쪽 취향은 아니지?”
“아냐.”
“그럼 다행이고. 네 어딜 보고 친해지고 싶대?”
“그게…… 내가 특별하대. 아니 인간은 다 특별하댔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대.”
“사이비다. 그거.”
민우가 딱 잘라 말하자 견은 웃음을 터트렸다. 민우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지만 막상 말을 꺼내 놓고 보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아닌데.”
“뭐가 아닌데? 네 말 들어 보니 딱 그렇구먼.”
“그 사람, 형, 형사거든.”
“응?”
엉겁결에 형사라고 둘러대자 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움을 받았어. 그 사람이 날 보호해 줬거든.”
“뭐? 무슨 보호? 너 강도당했냐?”
“응? 다, 당할 뻔했다고.”
민우가 경악한 눈으로 견의 위아래를 재빨리 훑었다.
“너 괜찮아?”
“괜찮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 당하기 전에 내가 몇 대 치고 빠졌어. 그걸 보고 그분이 내가 재능이 있다고 경찰 시험을 보면 어떻겠냐고…… 그랬거든.”
“그래서?”
“그게 다야. 그 이후로 몇 번 만났는데 친하게 지내자고 하더라.”
“아, 뭐야. 난 또.”
민우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너 경찰 되려고?”
“아니. 나는 지금 이대로 만족한다.”
“그 사람이 친하게 지내자면 그렇게 해. 나쁠 것 없지.”
“……그럴까?”
얼떨결에 비연의 얘기를 털어놓았으나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누가 믿어 주겠는가. 저승사자가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것을……. 비연을 경찰로 둔갑시킨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견은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누가 저승사자랑 친구 해 봤겠어?
좋게 생각하자. 좋게.
견은 손목에 감겨 있는 여우를 손가락으로 쓱쓱 쓰다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조용한 재즈음악이 흐르는 홀은 은은한 조명으로 아늑했다. 퇴근 후 스트레스를 푸는 직장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커플이 와인을 마시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과는 반대로 바텐더를 마주 보고 앉은 고야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바쁜 일정과 수술 때문에 웬만해선 잘 마시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취하고 싶었다.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탈탈 털어 넣은 고야가 한 번에 마셨다.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독한 술이 꼭 물을 마시는 것처럼 매끄럽게 넘어갔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고 몸은 경고했지만 머리는 그 위험신호를 무시했다. 그저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취해서 잊고 싶었다.
/“헤어져.”(회상)/
그녀의 냉랭한 말투와 눈빛이 차가웠다. 생각해 보겠다던 그녀의 대답이 결국 이거였다.
5년을 넘게 사귀었는데 헤어지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가 함께했던 5년의 시간은 그렇게 하찮고 보잘것없는 것이던가? 그녀가 오해할 만큼 그 환자가 나에게 대단했던가? 아니,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이렇게 부정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녀는 진심을 몰라주고 야멸치게 대하는 걸까.
한숨을 푹 쉰 고야가 병이 비었음을 깨닫고 바텐더에게 “하나 더.”를 외쳤다.
“선생님. 과음하신 것 같은데 오늘은 그만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안 취했어요.”
“무슨 일이 있으세요?”
“그냥…… 취하고 싶어서요. 괜찮으니까 하나 더 주세요.”
“……그럼 조금만 드십시오. 갑자기 많이 드시면 몸에 무리가 갈 겁니다. 원래부터 잘 드시지도 못했잖아요?”
“영광인데요? 제 몸 생각해 주는 분이 여기 있었네요.”
고야가 히죽거리며 감사를 표하자 바텐더가 곧 새로운 술병과 좋은 안주를 가져다주었다.
술을 마실수록 몸은 휘청거렸지만 반대로 정신은 또렷해졌다. 그녀가 헤어지자고 했던 상황이 머릿속에서 계속 리플레이되자 고야가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녀에게 찾아가 매달려 볼까? 아니야. 네가 뭔데 나에게 상처를 주는 거야.’라는 대립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매달려 보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기도 했다. 고야는 얌전하게 술을 마셨지만 정작 머릿속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고야가 두 번째 술병을 비우고 가게를 나온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바텐더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고야는 괜찮다며 손을 휘휘 저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올라오는 듯 울렁울렁거렸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자 은행 앞 계단에 쪼그려 앉은 고야가 킥킥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한심했다.
여자한테 차이고 술이나 퍼먹고 잘한다.
“쿡쿡쿡. 하하하하.”
고야가 크게 웃어 버리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야는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응시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의식과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매달려 보자는 의식이 서로 팽팽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밀려왔다. 이곳에서 자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쏟아지는 잠을 피할 수 없었다. 잠에 지배당한 고야의 고개가 곧 툭 털어졌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

“죽어. 오늘 다 죽어 버려.”
“먹고 죽자!”
생일을 맞은 놈이 큰 소리로 외치자 다른 놈들이 그에 화답하듯 입속으로 술을 쏟아부었다. 블랙홀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술을 빨아 대는 놈들의 기세가 무서웠다. 그 난장판 속에서 고고한 학처럼 제정신을 지킨 연우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상처에 안 좋다며 핑계를 댄 것이 신의 한 수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놈들과 함께 저승행 열차를 탔을 것이다.
낮부터 자정까지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모두 초토화되자 연우는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나마 걸을 수 있는 놈들은 술에 떡이 된 놈들을 둘러매고 가까운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자취방으로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고 시중을 들어 준 연우는 더 마실 수 있다고 칭얼거리는 놈들의 뒤통수를 한 대씩 날려 주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연우의 시선이 어딘가에 머물렀다. 금요일 밤이면 자주 볼 수 있는 술 취한 사람들이 반쯤 정신을 놓은 채 걸어가거나 길가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것이다. 헌데 어째서 계단에 앉아 있는 술주정뱅이에게 시선이 갔는지 모르겠다.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꽤나 깔끔했을 인상의 남자가 계단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열심히 졸고 있었다.
아, 뭐야. 술도 적당히 마셔야지.
투덜거리던 연우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냥 놔두고 가라고 머릿속에선 경고했지만 이대로 그냥 가려니 찜찜했다.
“저기요? 집이 어디예요? 여기서 자면 안 돼요.”
연우가 남자의 몸을 흔들자 잠에 취해 있던 남자가 귀찮은지 손을 휘저었다.
“아저씨. 집이 어디냐고요. 핸드폰 줘 봐요. 집에 전화해 줄까요? 아니면 파출소?”
“……그냥…… 가세요.”
연우가 재차 물어보자 남자가 힘없이 대답했다.
“누구 기다리는 거예요?”
“그냥 가라고요.”
“아, 뭐야.”
남자의 싸늘한 대답에 빈정이 상한 연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에이, 모르겠다. 알아서 가겠지.’라며 발길을 돌리려던 연우는 다시 남자에게 다가갔다. 조금 전까진 따끈한 라면을 먹고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싶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온정이 넘쳤나? 싶은 생각에 연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진짜 누구 기다리는 거예요? 아니면 그냥 앉아 있는 거예요?”
또다시 끈질기게 말을 걸자 대꾸도 안 하던 남자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얼굴 가득 피로와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그만 좀 내버려 두라니까요. ……어?”
짜증스럽게 큰 소리를 치던 남자가 연우를 보고 한동안 멍해졌다. 술에 취한 눈을 비비며 눈을 끔벅거리던 남자가 이내 배시시 웃었다.
“김연우 환자잖아?”
“저 환자 아니거든요. 다 나았거든요.”
“이야~ 오랜만이네.”
“오랜만이고 뭐고, 왜 이렇게 술에 취했어요?”
“나 안 취했어.”
“허이구. 어디서 그런 되도 않는 뻥을 치십니까?”
“아~닌~데.”
연우는 고야의 흐트러진 모습에 눈썹을 찌푸렸다. 늘 단정한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망가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선생님. 집이 어디예요? 택시 태워 드릴게요.”
“응? 집? 우리 집이 어디였냐면? 어~디~게?”
“……지금 퀴즈 풀어요? 아, 주소 좀 대라니까.”
“몰라. 안 가르쳐 줘.”
“집에 안 가요?”
“여기서 잘 거야.”
“아니 이 양반이.”
고야가 또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수면 모드로 돌입하자 연우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발길이 안 떨어지더라. 그냥 버리고 갔어야 했는데. 에이…….
“자지 말라니까. 잠깐 핸드폰 좀 볼게요.”
투덜거리던 연우가 양복 주머니 안으로 손을 뻗자 잠결에도 고야가 연우의 손을 밀어냈다.
“가지가지 하십니다.”
고야의 철벽방어에 지친 연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웅크리며 잠든 고야를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었다. 고야의 집이 어딘지 알 수 없고, 마침 집에 아무도 없으니 하룻밤 집에서 재우기로 하였다. 고야가 낯선 사람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고야를 지켜보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잠에 취해 휘청거리는 고야를 일으켜 겨우 택시를 탄 연우는 집까지 가는 내내 비지땀을 흘렸다. 축 늘어진 사람이 얼마나 무거운지 도중에 버리고 가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택시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 고야를 업었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리고 고야에게서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이 아저씨, 설마 내 등에 토하는 건 아니겠지?
무슨 일인데 술독에 빠졌을까?
혹시 환자가 잘못 됐나?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아직도 여자 친구와 해결 못 한 건가?
오만 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겨우 집 안으로 들어온 연우는 침대에 고야를 눕힌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불을 끄고 나가려던 연우는 고야가 입고 있는 양복에 시선을 주었다.
저걸 입고 자면 구겨질 텐데……. 에이, 마지막으로 온정 한 번 더 베풀지 뭐.
고야의 몸을 일으켜 양복을 벗겼다. 와이셔츠를 벗길 때 고야의 몸이 휘청이며 뒤로 쓰러지자 당황한 연우가 얼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안은 고야의 몸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하얀 가운에 가려져 있던 고야의 몸은 예상외로 잔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병원에서는 꽤나 비실비실 허약해 보였는데 생각 외로 운동을 열심히 했나 보다.
양복바지를 벗기면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왕 베푸는 친절이라며 깔끔하게 바지와 양말까지 벗겨 낸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양복에 냄새제거제까지 뿌린 연우가 그제야 긴 일정을 마쳤다며 뿌듯해했다.
소파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 연우의 눈이 어느새 스르륵 감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굳게 감겨 있던 고야의 눈이 열렸다.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보던 고야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공간이었다.
여긴 어디지?
고야가 황급히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밖에 없는 작은 방이었다. 방 구조로 보건대 모텔은 아니다. 그렇다고 고야가 알고 있는 지인들의 집도 아니었다. 트렁크 팬티만 입은 고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술김에 무슨 일을 저지른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벽에 걸린 자신의 양복을 발견한 고야가 서둘러 바지와 셔츠를 입은 후 밖으로 나왔다. 문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주방에서 국자를 들고 있던 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요?”
“어…… 너는…… 김연우 환자?”
“나 이제 환자 아니라니까.”
연우가 피식 웃으며 투덜거리자 고야는 의아해졌다. 어째서 자신이 연우의 집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화장실은 저쪽.”
“어……어…….”
연우가 화장실을 짚어 주자 고야가 어색한 얼굴로 화장실로 향했다. 그 뒤를 연우가 쪼르르 따라와 “면도 크림은 이쪽, 일회용 면도기는 여기, 칫솔은 여기”등 설명을 해 댔다.
“옷 빌려 줘요?”
“괜찮아……. 아니 빌려 입을게.”
“잠깐만요.”
옷을 받아 든 고야가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혹시 꿈을 꾸는 건가? 자신의 팔을 꼬집은 고야는 꿈이 아님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말끔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고야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른들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걸 보니 외출을 하신 모양이다. 때마침 식탁을 다 차린 연우가 손짓을 하였다.
“앉으세요.”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여행이요. 오늘 오후엔 돌아오실 거예요.”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요?”
“……응.”
연우가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짓궂게 웃었다.
“기억 못 하신다니 섭섭하네. 어제 선생님 업고 오느라 허리가 휘는 줄 알았거든요.”
“업었다고? 우리 어디서 만났지? 분명 바에서 나올 때까지는 혼자였는데?”
“은행 앞 계단에 앉아서 처량하게 졸고 있더라구요.”
“정말?”
“네. 그대로 두면 삥 뜯길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그래도 아는 얼굴인데 그냥 두고 올 수는 없잖아요.”
“……고맙다.”
“뭘요. 다음에 택시비하고 아침식사비까지 합쳐서 한턱 거하게 내세요.”
“그럴게.”
“식기 전에 드세요.”
고야가 콩나물국을 한 술 떠서 입안으로 넣었다. 국은 고춧가루가 적당히 뿌려져 매콤하고 시원했다. 대박 맛집으로 소문난 국밥집도 자주 다녀 봤지만 그곳과는 또 다른 그리운 맛이 느껴졌다.
“맛있네. 김연우 환자가 끓인 거야?”
환자라는 말에 연우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요. 엄마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어제 끓여 놓고 가셨어요. 에이, 난 콩나물 안 좋아하는데. 선생님은 좋아하세요?”
“제일 좋아해.”
“신기하네. 나도 어렸을 때는 잘 먹었다고 하던데 이젠 별로예요.”
“그럼 뭐 좋아하는데?”
“추어탕. 캬하~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도네.”
추어탕을 생각하는지 연우가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어젠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신 거예요?”
“…….”
“대답하기 좀 그런가? 그럼 패스.”
고야가 대답을 회피하자 연우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병원 늦지는 않았죠?”
“오후부터야.”
“다행이네요. 걱정했었는데.”
연우가 입을 다물자 어색해진 고야가 말을 걸었다.
“어머니가 음식 솜씨가 좋으시구나.”
“그래요? 울 엄마가 그렇게 음식을 잘했던가?”
“나는 다 맛있어.”
“선생님 자취하죠? 그러니까 집 밥이면 다 맛있지. 뭐하면 싸 드려요? 가끔 제 친구들도 울 엄마 반찬 싸 가거든요.”
“어머니가 마음씨도 좋으시네.”
“그렇죠 뭐.”
고야의 칭찬에 연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마친 고야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자 연우가 극구 말렸다. 이런 건 주인이 해야 한다며 고야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연우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고야는 거실에 장식되어 있는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연우도 부모님도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무척 따뜻하고 사랑이 넘쳐흘렀다. 그래서인지 연우를 볼 때마다 행복했던 과거가 떠오르나 보다.
“드세요.”
향긋한 차 한 잔을 건넨 연우가 맞은편에 앉았다.
“김연우 환자, 핸드폰 번호가 뭐야?”
“환자 아니라니까. 언제까지 제가 환자입니까?”
“미안. 버릇이 돼서.”
“그냥 연우라고 부르세요. 010-xxxx-xxxx. 오케이?”
“응. 다친 곳은…… 이제 괜찮아?”
“그럼요. 전에 검사 받았는데 이제 다신 안 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래. 다행이네. 하지만 무리하지 말고. 특히 술 같은 거 조심해.”
“걱정 마세요.”
연우가 걱정 말라며 웃자 고야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고야는 드라이를 맡기기 위해 양복을 꺼냈다. 평소라면 술 냄새가 불쾌하게 났을 텐데 양복에선 묘한 꽃냄새가 났다. 자주 맡아 본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양복에 뿌리는 방향제였다. 꽤나 세심하게 챙겨 준 것을 보니 연우의 어머니가 자주 그렇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기 마련이니까.
고야는 핸드폰에 저장된 연우의 전화번호를 바라보았다. 김연우 환자라고 저장된 번호를 보고 있으니 연우가 투덜거리며 “나 환자 아니라니까.”라고 항의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피식 웃은 고야가 환자라는 두 글자를 지우고 달력을 보았다.
오프 날짜를 따져 보던 고야는 인터넷에서 맛있는 추어탕 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추어탕을 좋아한다던 연우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적당한 맛집을 찾은 고야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미치도록 괴로웠고 그녀에게 매달려 보자는 생각까지 했었다. 헌데 지금은 해란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

자주 찾아오겠다는 말처럼 비연은 이틀에 한 번 꼴로 견을 찾아왔다. 주로 언덕이 시작하는 길에서 기다렸는데 벽에 등을 기댄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처음 며칠간은 “윽……. 진짜 왔잖아?”라며 꺼렸지만 한 달이 넘자 이제는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깊은 밤. 언덕을 오르는 일은 언제나 힘들었다. 그러나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순간 그 길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견은 저승사자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리고 비연은 밤 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조용히 밤의 경치만 즐겼다. 묵묵히 걸어 집에 도착하면 견이 비연의 눈치를 살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비연도 잘 자라는 짧은 인사를 건넨 후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떻게 보면 참 맹숭맹숭한 광경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자주 접할수록 견은 점점 비연이 옆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오니 어느새 새벽 세 시가 넘어섰다. 내일이 주말이라 늦게까지 일했더니 몹시 피곤했다. 느릿느릿 어둠에 물든 언덕을 오르자 기다리고 있던 비연이 고개를 돌려 견을 바라보았다. 빙그레 미소 짓는 비연을 따라 견도 싱긋 웃었다. 처음엔 웃는 것도 어색했는데 이제는 그럭저럭 웃을 수도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몇 시에 만나자는 약속은 없었지만 비연을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주말엔 알바 시간이 더 길어요.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미안해서 그러죠.”
“신경 쓰지 마세요. 견은 자신의 생활을 그대로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도…….”
견이 말끝을 흐리자 비연은 상냥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언덕길을 헐떡거리며 오르는 견과 달리 비연은 마치 평지를 걷는 것처럼 평온했다. 사뿐사뿐 걷는 발걸음 사이로 검은 철릭이 우아하게 펄럭거렸다.
저승사자들은 기본적으로 검은 갓에 검은 도포 아닌가? 철릭을 걸친 저승사자라니 특이하네.
물끄러미 비연의 위아래를 훑자 시선을 느낀 비연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저승사자는 다들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갓을 쓴다고 생각했거든요. 전설의 고향을 봐도 그렇고, 그런데 비연 님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아서요.”
“저승사자라고 다 같은 차림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요?”
견이 호기심을 보이자 비연이 소산을 생각하는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화려한 차림을 한 사자도 있습니다. 그는 나와는 또 다르죠. 그를 보게 되면 놀랄 겁니다.”
“왜요?”
“그의 옷차림은 옛 왕족의 차림이니까요.”
“왕족? 신기한데요?”
“신기할 것 없습니다. 죽은 후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 그대로 사자가 된 경우니까요.”
“그럼 벌거벗고 죽어서 사자가 되면 맨몸으로 다니나요?”
견은 벌거벗은 저승사자가 영혼을 회수하러 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사자가 근엄하게 “가세.”라고 명령하지만 영혼이 “꺅! 변태 저승사자다!”라고 놀라며 도망치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쿡쿡쿡쿡.”
엉뚱한 상상을 한 견이 웃어 버리자 비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자는 없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옷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엔 시대에 맞춰 양복을 입는 자도 있습니다.”
“그럼 비연 님은?”
“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굳이 옷의 형태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요.”
견이 비연의 옷을 훑었다.
“비연 님의 옷은 철릭이잖아요? 전생엔 무장이셨나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전생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미 지나간 생을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흔적이 남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 사람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한 존재로 보일지 모르나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모두 옛 기억을 지우는 것이지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저승사자고 누군가의 영혼을 회수하러 갔을 때 그가 아는 자라면 곤란할 것이다. 그자가 자기는 더 살아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매달린다면 모른 척해 줄지도 모른다.
문득, 모든 기억을 지워 버려야 하는 저승사자가 안쓰러웠다. 괴롭고 힘든 일, 기쁘고 행복했던 일을 모두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영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걸까.
견은 묵묵히 걷고 있는 비연을 처음으로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이런 생각을 비연이 알았다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비연의 당당한 어깨가 외로워 보였다.

***

못 가. 못 간다고.
악령이 바락바락 비명을 지르며 대들자 소산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로 해서 안 되는 놈들은 매가 약이라고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듯싶다. 악령으로 변해 버린 영혼을 잡기 위해 칠지도를 빼 든 소산이 매섭게 움직였다. 소산의 기세에 놀란 악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자 비연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검은 창이 허공을 가르며 악령의 몸을 뚫고 벽에 꽂혔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창에 꽂힌 영혼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고통만 더해지는지 영혼은 저주의 말을 쏟아붓고 있었다. 흉악한 말에 소름이 끼쳤지만 소산은 귀를 후비며 무심한 얼굴을 했다.
“그러기에 좋은 말 할 때 갔으면 너도 좋았잖아.”
소산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검붉은 불꽃이 영혼을 감쌌다. 영혼은 불꽃 속에 갇혀 사라질 때까지 비명을 질러 댔다. 영혼이 사라지자 벽에 꽂혀 있던 언월도가 스르륵 검은 연기로 화하여 비연에게 되돌아갔다.
“수고했어.”
소산이 인사말을 건네며 비연의 어깨를 두들겼다.
비연은 깨진 창문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혼을 잡느라 견을 바래다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지금쯤이면 집에 돌아가 편하게 쉬고 있을까?
창문 너머 담장 위에서 검은 고양이가 비연과 소산을 응시했다. 사람과 달리 기운에 민감한 고양이가 벌써 이 집의 이변을 눈치채고 보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 집을 탐색하는 고양이를 보며 비연은 견이 꼭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다가가면 경계하지만 모른 척 시선을 외면하면 물끄러미 비연을 바라보곤 하였다.
“소산, 자네는 전생이 궁금한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