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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온 시간 01
1화
1장. 되돌아보다
돌아왔다. 찢기고 잘려 비참하게 썩어 문드러져 마지막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나갔던 28살의 내 육체는 미세한 상처 하나 없는 20살 때로 되돌아왔다. 그와의 결혼을 한 달 앞둔 시점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 느낀 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바람도 아니었고 원망도 아니었으며 경악도 후회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영혼에 새겨진 죄의 무게가 무겁게 짓눌렀을 뿐이다.
숨을 쉬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지 이제 고작해야 열흘. 내가 한 거라고는 황제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는 것만이 전부였다.
‘잊지 마라. 죽어서도 잊지 마라. 자격 없는 네놈은 죽어서도 안식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안식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욕심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장난이든 무엇이든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추악한 나 때문에 사라진 수백 명의 소중한 목숨을, 피가 이어진 가족들의 죽음을,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내 집착으로 가장 힘들어했던 그와 그녀, 그 아들의 죽음도.
그 무엇도 나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찌 잊을까? 내가 그리 만들었다. 내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사랑하는 그를 죽이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와 아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
패악의 말로가 그것이다. 멍청하게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내 추악한 집착이 무엇을 파괴했는지. 독에 죽어 가면서도 오로지 그녀와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보고야 알았다.
세상이 멈춘다는 게 무엇인지, 내 손으로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야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내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평소처럼 경멸도 퍼붓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쏟아 내는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만을 담는 그에게 나는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쯤 나를 담아 주기를 바랐던 치기는 그렇게 사라졌다. 차라리 원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보기 싫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을 터였다.
“하……하하…… 멍청한 슈에리.”
후작가의 망나니 슈에리 론 그레데스. 귀족으로서 미들네임조차 없는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극도의 거부감과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오만하고 추악한 놈.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최악의 인간. 아름다운 외모에도 마주하는 것조차 치를 떨 만큼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같았다. 황족을 제외한 모두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오만하게 패악만 부리는 어리석고 추악한 놈.
제국의 젊은 공작인 카일리안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병신. 하지만 카일리안에게 단 한 번도 사랑 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 그리고 끝내 카일리안과 그가 사랑하는 그녀와 그의 아들을 죽인 악마.
충신을 죽이고 제국의 태양을 끌어내리며 나라를 망친 역적. 더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영혼을 홀리는 희대의 마녀로 불리며 고작 28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었지. 정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멍청했다. 왜 이리도 바보 같은지 과거를 되돌아볼수록 목 안에서 쓴 물이 올라온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보고 살았는가.
어째서 일을 그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생각할수록 멍청했다. 글 한 줄 못 배운 길거리 천민도 자신보다는 똑똑하리라. 고귀한 귀족이랍시고 황족을 뺀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고 오만하게 패악을 부린 결과가 이것이다.
너무도 당연해 차마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결과에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저 두렵고도 두렵기만 하다. 마음 같아서는 짓눌러 오는 죄의 무게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도망쳐서는 안 되겠지. 내겐 그럴 자격이 없지 않은가. 왜 내가 과거로 되돌아왔는지는 모르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과거로의 회귀가 죄를 뉘우칠 기회이든 아니든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 간 나라는 인간의 죄과가 영혼에 새겨진 이상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기에 결코 안식을 찾을 생각도 없다. 설사 이번 생에서 내 죄를 뉘우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죄과가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더는 추악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나로 인해 벌어질 일을 막아야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재 볼스몬 제국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황제파와 귀족파, 그리고 그레데스 후작가를 중심으로 한 중립파로 나뉘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내전 중이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한참 물밑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움직일 것이다. 과거에는 내 처지만 돌아보느라 모든 것을 등한시했지만, 지금은 현 상황부터 파악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나는 오로지 그에게만 집착하고 방탕한 생활에 패악만 부리느라 내가 연루된 사건이나 굵직굵직한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육과 몇 년간 공비로서 업무를 본 덕분에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고 있다지만, 과연 모든 상황이 그대로 맞아떨어질지는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자신도 없고 두려워서인지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앞설 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고, 결혼이 무효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도 없다. 내가 뭣도 모르고 친 사고를 수습하지 않는 이상은 어쩌면 같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레데스 후작가는 중립파의 선두였고, 귀족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황제파인 그의 공작 가문과 혼인을 함으로 중립파가 황제파로 돌아서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 시작으로 두 가문이 이어지기를 원했고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약속된 하나의 거래를 성립시켜야 했다. 그렇게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중립파는 완전하게 합쳐질 때까지 귀족파의 공격을 피할 의도였고, 황제파는 그 사이 시간을 벌어 내실을 더 단단히 다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망쳤지.”
그를 보고 첫눈에 마음을 뺏긴 나는 그의 주변에 맴도는 이들을 모두 적대시하며 끈질기게 따라다녀 피곤하게 만들었고, 그런 와중에 파티장에서 몇 번의 말실수와 행동까지 더한 일이 있었다.
그에게 마음이 있는 백작가의 여식을 창녀 취급하며 모욕하고 내가 그의 약혼자라고 당당하게 발설한 것이다. 어찌 그리도 어리석었는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 치를 떨면서 나를 경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패악질이 이미 만천하에 알려진 터라 누구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기다 그가 나만 보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무시하기 일쑤니 그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 혼자 미쳐서 따라다니는 꼴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한 결과는 귀족파가 반격할 계기만 만들어 주었다. 결혼 몇 년 후 황제파와 중립파가 귀족파를 상대로 공격하려고 칼을 빼 들었을 때는 귀족파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때 당시 그는 이미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나와 결혼은 했지만, 그건 비단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반려로 정해질 경우 후계자를 두기 위해 두 명의 첩까지 들일 수 있는 제국법이 있었고, 그는 나와의 결혼식이 있은 지 정확히 한 달 후 그녀와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본시 첩은 결혼식을 생략해야 했지만 누구도 그 당당한 결혼식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마지못해 참석해 눈살만 찌푸리는 나와의 결혼식과는 달리 그녀는 모두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는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더 정확히는 피로 이어진 가족들과 공작가의 고용인들조차 나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틈만 나면 순수하기만 한 그녀에게 독설을 퍼부었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와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욱 그녀를 감싸고돌았고 나는 더욱 어긋나기만 했다.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백작가의 여식인 그녀를 반쪽 피인 나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괴롭혀 온 것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그가 야속해 보란 듯이 귀족파가 득실거리는 파티장을 찾아 다녔고, 그런 나를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용했다.
어리석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른 채 정보를 발설하고 나 스스로 함정을 만들어 두 파를 몰락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나 때문에 지치다 못해 결국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그가 시골로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려는 자신인데 어째서 첩 따위를 그리 감싸는지. 어째서 자신을 배척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건지.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미워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를 데리고 떠난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주제넘게도 분노에 빠져 그가 반려인 나를 배신한 거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내가 안 된다면 그녀도 안 된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녀도 가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오로지 머릿속은 그런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미쳐 버린 나는 그를 찾아갔다. 이혼해 준다는 명목으로 그를 찾아가 위선으로 슬픈 표정을 짓고 방심하게 만들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에 독을 풀었다.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사흘 후에나 갑자기 나타나며 발작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마녀의 저주라 불리는 극독을. 그렇게 내 손으로 그들을 죽였다.
그 순간에 망설임은 없었다. 사흘 안에 해독약을 먹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음에도, 해독약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그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몰랐다. 사흘 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찾아갔던 내 눈앞에서 그는 피를 토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나 또한 그 순간 심장이 멈춰 버렸다.
한순간에 심장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세상이 칙칙한 잿빛으로 변해 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공허했다. 그리고 지독하게 아팠다.
그제야 내가 파괴한 것이 무엇인지를 멈춘 심장과 함께 깨달은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그와 그가 사랑했던 이들의 주검 앞에서 멍하니 굳어 있었다.
나중 내 흔적을 뒤쫓아 잡으러 온 황제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숨만 내쉬는 인형처럼 굳어 있었고, 개처럼 끌려와 황제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황제의 그 분노가 고마웠다. 제발 나를 죽여 주기를, 나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생명을 대신해 비참하게 죽여 주기를.
어쩌면 나 자신이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조금은 빚을 갚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필사적으로 견뎌 냈다. 육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보다 정신의 고통이 더 극심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도망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후작가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나 황권과 황제파의 몰락을 좀 더 빨리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황제가 될 황태자의 그 경멸과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고, 내가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그의 비참한 최후를 나는 또다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안 돼.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이번만큼은 그를 살려야 한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힘이 되겠지만, 그조차도 없어 새삼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게만 느껴진다.
과거 28년간의 삶에서도 되돌아온 지금도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홀로서기. 어쩌면 뻔한 결말일지도 모르나 그와 나는 성장 과정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그가 가정의 따뜻함 속에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며 훌륭하게 성장했다면, 나는 어머니가 없이 냉정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형에게 외면당하며 철저히 혼자 성장했다.
잘못을 해도 그것을 지적하고 고쳐 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잘못인지도 모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잘못을 저질렀고, 점차 자라며 전형적인 고위 귀족으로서 오만함만 갖추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에겐 온갖 권위를 내세워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고 무조건 화려한 것만이 귀족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해 주제도 모르고 사치를 일삼았다.
어쩌면 모두의 멸시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온몸에 두르고 잔뜩 경계하는 것처럼.
누군가 다가오는 걸 꺼려하고 경계하면서도 제발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모순으로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 또한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듯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타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누구 하나 나를 돌아보거나 아껴 주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 자신은 오히려 그들을 원망하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바보같이. 왜 그리도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아 보지 못하는지,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라 고민하고 방황하고 울며불며 매달리기도 했었지만 나중에 이유를 알고부터는 나 스스로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과 나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형님의 어머니는 비록 후궁의 딸이었으나 제국의 황녀였고, 그녀가 병으로 죽고 난 후 후작부인이 된 내 어머니는 돈으로 귀족의 지위를 산 남작가의 딸이었다.
원래는 평민이었다는 소리다. 그나마 재산이라도 많지 않았다면 감히 후작부인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런 데다 그녀는 태생만큼이나 천박하고 사치스러웠다.
화려한 외모로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그녀를 그들이 경멸한 것은 당연하리라. 나로서는 나를 낳다가 죽은 그녀에 대해 알 길이 없었지만, 모두가 나를 보면 쉬쉬하며 손가락질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출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내겐 아버지인 후작님이 직접 알려 준 사실. 나를 임신한 그녀를 아버지와 형이라는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었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친가 재산을 거의 흡수한 후작님은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는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나를 죽이고자 매일같이 음식에 환각제를 섞었다.
아마도 혼자 미쳐 죽든지, 정당하게 죽일 건수를 잡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는 환각제 때문에 안 그래도 방탕하고 사납던 성질이 더 안 좋아지고, 우울증과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으로 점점 미쳐 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후작님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 상황이 어긋난 건 나 때문이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열 달도 채우지 않고 출산이 찾아왔고 그들의 의도대로 그녀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 대신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이다.
그녀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죽기를 바랐는데 질기게도 태어났으니 얼마나 끔찍했을까. 소름 끼쳤겠지. 그들이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어하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고귀한 귀족이랍시고 오만하게 굴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아마도 그녀를 꼭 빼닮은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치가 떨렸을 것이다.
그나마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만남에도 당연하게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미소를 보이지 않았고 기껏 얼굴 마주하고 대화한 거라고는 언제나 같은 말이 전부였다.
마치 하찮은 쓰레기를 보듯이 가문에 해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멸이 섞인 경고와 질책만을 퍼부었다. 과연 그런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겠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가족이라고는 해도 겉모습뿐이지 않은가. 그들에게 나는 그저 이용할 패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끝내 죽음으로 내몬 내게 자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를 원망하기에 앞서 이 모든 일은 내가 자초하고 내가 만든 결과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만큼은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그에 대한 집착부터 끊어 내야 한다. 아니, 그 부분은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자격이 없기 때문인지, 이젠 그를 생각해도 나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할 만큼 격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를 떠올리면 끔찍하게 아프기만 할 뿐이다.
1화
1장. 되돌아보다
돌아왔다. 찢기고 잘려 비참하게 썩어 문드러져 마지막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나갔던 28살의 내 육체는 미세한 상처 하나 없는 20살 때로 되돌아왔다. 그와의 결혼을 한 달 앞둔 시점으로.
처음 눈을 떴을 때 느낀 건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바람도 아니었고 원망도 아니었으며 경악도 후회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영혼에 새겨진 죄의 무게가 무겁게 짓눌렀을 뿐이다.
숨을 쉬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지 이제 고작해야 열흘. 내가 한 거라고는 황제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는 것만이 전부였다.
‘잊지 마라. 죽어서도 잊지 마라. 자격 없는 네놈은 죽어서도 안식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안식은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욕심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러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장난이든 무엇이든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추악한 나 때문에 사라진 수백 명의 소중한 목숨을, 피가 이어진 가족들의 죽음을, 가문의 몰락을. 그리고 내 집착으로 가장 힘들어했던 그와 그녀, 그 아들의 죽음도.
그 무엇도 나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찌 잊을까? 내가 그리 만들었다. 내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사랑하는 그를 죽이고, 그가 사랑하는 그녀와 아들을 내 손으로 죽였다.
패악의 말로가 그것이다. 멍청하게 그 순간까지도 몰랐다. 내 추악한 집착이 무엇을 파괴했는지. 독에 죽어 가면서도 오로지 그녀와 아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보고야 알았다.
세상이 멈춘다는 게 무엇인지, 내 손으로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야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내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다.
평소처럼 경멸도 퍼붓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서 피를 쏟아 내는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만을 담는 그에게 나는 돌아볼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한 번쯤 나를 담아 주기를 바랐던 치기는 그렇게 사라졌다. 차라리 원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나를 보지 않았다. 보기 싫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했을 터였다.
“하……하하…… 멍청한 슈에리.”
후작가의 망나니 슈에리 론 그레데스. 귀족으로서 미들네임조차 없는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 극도의 거부감과 경멸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오만하고 추악한 놈.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최악의 인간. 아름다운 외모에도 마주하는 것조차 치를 떨 만큼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같았다. 황족을 제외한 모두를 무시하는 것도 모자라 오만하게 패악만 부리는 어리석고 추악한 놈.
제국의 젊은 공작인 카일리안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병신. 하지만 카일리안에게 단 한 번도 사랑 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 그리고 끝내 카일리안과 그가 사랑하는 그녀와 그의 아들을 죽인 악마.
충신을 죽이고 제국의 태양을 끌어내리며 나라를 망친 역적. 더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영혼을 홀리는 희대의 마녀로 불리며 고작 28년을 살아오면서 내가 얻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었지. 정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멍청했다. 왜 이리도 바보 같은지 과거를 되돌아볼수록 목 안에서 쓴 물이 올라온다.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보고 살았는가.
어째서 일을 그 지경까지 만들었는지. 생각할수록 멍청했다. 글 한 줄 못 배운 길거리 천민도 자신보다는 똑똑하리라. 고귀한 귀족이랍시고 황족을 뺀 사람들을 눈 아래로 보고 오만하게 패악을 부린 결과가 이것이다.
너무도 당연해 차마 반박조차 하지 못하는 결과에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저 두렵고도 두렵기만 하다. 마음 같아서는 짓눌러 오는 죄의 무게에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도망쳐서는 안 되겠지. 내겐 그럴 자격이 없지 않은가. 왜 내가 과거로 되돌아왔는지는 모르나 한 가지만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하지 않을 생각이다. 과거로의 회귀가 죄를 뉘우칠 기회이든 아니든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 간 나라는 인간의 죄과가 영혼에 새겨진 이상은 행복할 자격이 없다.
단순한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기에 결코 안식을 찾을 생각도 없다. 설사 이번 생에서 내 죄를 뉘우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 죄과가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더는 추악한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나로 인해 벌어질 일을 막아야겠지.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재 볼스몬 제국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황제파와 귀족파, 그리고 그레데스 후작가를 중심으로 한 중립파로 나뉘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내전 중이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한참 물밑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움직일 것이다. 과거에는 내 처지만 돌아보느라 모든 것을 등한시했지만, 지금은 현 상황부터 파악해야만 한다.
하지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나는 오로지 그에게만 집착하고 방탕한 생활에 패악만 부리느라 내가 연루된 사건이나 굵직굵직한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그나마 귀족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육과 몇 년간 공비로서 업무를 본 덕분에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하고 있다지만, 과연 모든 상황이 그대로 맞아떨어질지는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자신도 없고 두려워서인지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앞설 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도망칠 수도 없고, 결혼이 무효로 돌아가기를 바랄 수도 없다. 내가 뭣도 모르고 친 사고를 수습하지 않는 이상은 어쩌면 같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레데스 후작가는 중립파의 선두였고, 귀족파가 득세하는 가운데 황제파인 그의 공작 가문과 혼인을 함으로 중립파가 황제파로 돌아서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그 시작으로 두 가문이 이어지기를 원했고 우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약속된 하나의 거래를 성립시켜야 했다. 그렇게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중립파는 완전하게 합쳐질 때까지 귀족파의 공격을 피할 의도였고, 황제파는 그 사이 시간을 벌어 내실을 더 단단히 다지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내가 망쳤지.”
그를 보고 첫눈에 마음을 뺏긴 나는 그의 주변에 맴도는 이들을 모두 적대시하며 끈질기게 따라다녀 피곤하게 만들었고, 그런 와중에 파티장에서 몇 번의 말실수와 행동까지 더한 일이 있었다.
그에게 마음이 있는 백작가의 여식을 창녀 취급하며 모욕하고 내가 그의 약혼자라고 당당하게 발설한 것이다. 어찌 그리도 어리석었는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고, 그때마다 그는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 치를 떨면서 나를 경멸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패악질이 이미 만천하에 알려진 터라 누구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거기다 그가 나만 보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무시하기 일쑤니 그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 혼자 미쳐서 따라다니는 꼴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한 결과는 귀족파가 반격할 계기만 만들어 주었다. 결혼 몇 년 후 황제파와 중립파가 귀족파를 상대로 공격하려고 칼을 빼 들었을 때는 귀족파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게 바로 나 자신이다. 그때 당시 그는 이미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나와 결혼은 했지만, 그건 비단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가 반려로 정해질 경우 후계자를 두기 위해 두 명의 첩까지 들일 수 있는 제국법이 있었고, 그는 나와의 결혼식이 있은 지 정확히 한 달 후 그녀와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본시 첩은 결혼식을 생략해야 했지만 누구도 그 당당한 결혼식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마지못해 참석해 눈살만 찌푸리는 나와의 결혼식과는 달리 그녀는 모두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는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더 정확히는 피로 이어진 가족들과 공작가의 고용인들조차 나를 대접해 주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틈만 나면 순수하기만 한 그녀에게 독설을 퍼부었고 손찌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와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더욱 그녀를 감싸고돌았고 나는 더욱 어긋나기만 했다.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백작가의 여식인 그녀를 반쪽 피인 나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괴롭혀 온 것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그가 야속해 보란 듯이 귀족파가 득실거리는 파티장을 찾아 다녔고, 그런 나를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이용했다.
어리석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른 채 정보를 발설하고 나 스스로 함정을 만들어 두 파를 몰락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끝내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나 때문에 지치다 못해 결국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그가 시골로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려는 자신인데 어째서 첩 따위를 그리 감싸는지. 어째서 자신을 배척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건지. 그때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미워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를 데리고 떠난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주제넘게도 분노에 빠져 그가 반려인 나를 배신한 거로 판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내가 안 된다면 그녀도 안 된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녀도 가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오로지 머릿속은 그런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미쳐 버린 나는 그를 찾아갔다. 이혼해 준다는 명목으로 그를 찾아가 위선으로 슬픈 표정을 짓고 방심하게 만들어 식수로 사용하는 우물에 독을 풀었다.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사흘 후에나 갑자기 나타나며 발작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서 마녀의 저주라 불리는 극독을. 그렇게 내 손으로 그들을 죽였다.
그 순간에 망설임은 없었다. 사흘 안에 해독약을 먹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음에도, 해독약을 수중에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렇게 그들의 죽음을 방관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몰랐다. 사흘 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찾아갔던 내 눈앞에서 그는 피를 토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나 또한 그 순간 심장이 멈춰 버렸다.
한순간에 심장에 메울 수 없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세상이 칙칙한 잿빛으로 변해 가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공허했다. 그리고 지독하게 아팠다.
그제야 내가 파괴한 것이 무엇인지를 멈춘 심장과 함께 깨달은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그저 그와 그가 사랑했던 이들의 주검 앞에서 멍하니 굳어 있었다.
나중 내 흔적을 뒤쫓아 잡으러 온 황제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숨만 내쉬는 인형처럼 굳어 있었고, 개처럼 끌려와 황제의 분노를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두렵지 않았다. 아니,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황제의 그 분노가 고마웠다. 제발 나를 죽여 주기를, 나로 인해 죽어 간 수많은 생명을 대신해 비참하게 죽여 주기를.
어쩌면 나 자신이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조금은 빚을 갚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필사적으로 견뎌 냈다. 육체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보다 정신의 고통이 더 극심했으니까.
그런데 만약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도망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우리 후작가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나 황권과 황제파의 몰락을 좀 더 빨리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황제가 될 황태자의 그 경멸과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고, 내가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그의 비참한 최후를 나는 또다시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안 돼.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이번만큼은 그를 살려야 한다.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 나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힘이 되겠지만, 그조차도 없어 새삼 혼자라는 사실이 외롭게만 느껴진다.
과거 28년간의 삶에서도 되돌아온 지금도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홀로서기. 어쩌면 뻔한 결말일지도 모르나 그와 나는 성장 과정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그가 가정의 따뜻함 속에서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되며 훌륭하게 성장했다면, 나는 어머니가 없이 냉정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꼭 빼닮은 형에게 외면당하며 철저히 혼자 성장했다.
잘못을 해도 그것을 지적하고 고쳐 주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잘못인지도 모르고 당연하다는 듯이 잘못을 저질렀고, 점차 자라며 전형적인 고위 귀족으로서 오만함만 갖추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이들에겐 온갖 권위를 내세워 패악질도 서슴지 않았고 무조건 화려한 것만이 귀족의 가치를 높인다고 생각해 주제도 모르고 사치를 일삼았다.
어쩌면 모두의 멸시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날카로운 가시를 온몸에 두르고 잔뜩 경계하는 것처럼.
누군가 다가오는 걸 꺼려하고 경계하면서도 제발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모순으로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를 부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 또한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듯 그런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타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누구 하나 나를 돌아보거나 아껴 주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나 자신은 오히려 그들을 원망하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했다. 바보같이. 왜 그리도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아 보지 못하는지,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라 고민하고 방황하고 울며불며 매달리기도 했었지만 나중에 이유를 알고부터는 나 스스로 그들을 찾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과 나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형님의 어머니는 비록 후궁의 딸이었으나 제국의 황녀였고, 그녀가 병으로 죽고 난 후 후작부인이 된 내 어머니는 돈으로 귀족의 지위를 산 남작가의 딸이었다.
원래는 평민이었다는 소리다. 그나마 재산이라도 많지 않았다면 감히 후작부인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그런 데다 그녀는 태생만큼이나 천박하고 사치스러웠다.
화려한 외모로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그녀를 그들이 경멸한 것은 당연하리라. 나로서는 나를 낳다가 죽은 그녀에 대해 알 길이 없었지만, 모두가 나를 보면 쉬쉬하며 손가락질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단순한 출산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내겐 아버지인 후작님이 직접 알려 준 사실. 나를 임신한 그녀를 아버지와 형이라는 사람들이 죽이려고 했었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친가 재산을 거의 흡수한 후작님은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는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나를 죽이고자 매일같이 음식에 환각제를 섞었다.
아마도 혼자 미쳐 죽든지, 정당하게 죽일 건수를 잡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녀는 환각제 때문에 안 그래도 방탕하고 사납던 성질이 더 안 좋아지고, 우울증과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으로 점점 미쳐 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후작님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던 상황이 어긋난 건 나 때문이었다. 약 기운 때문인지 열 달도 채우지 않고 출산이 찾아왔고 그들의 의도대로 그녀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한 대신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이다.
그녀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죽기를 바랐는데 질기게도 태어났으니 얼마나 끔찍했을까. 소름 끼쳤겠지. 그들이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어하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고귀한 귀족이랍시고 오만하게 굴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아마도 그녀를 꼭 빼닮은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치가 떨렸을 것이다.
그나마 일 년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만남에도 당연하게 그들은 단 한 번도 내게 미소를 보이지 않았고 기껏 얼굴 마주하고 대화한 거라고는 언제나 같은 말이 전부였다.
마치 하찮은 쓰레기를 보듯이 가문에 해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멸이 섞인 경고와 질책만을 퍼부었다. 과연 그런 관계를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겠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들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가족이라고는 해도 겉모습뿐이지 않은가. 그들에게 나는 그저 이용할 패에 지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끝내 죽음으로 내몬 내게 자격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누군가를 원망하기에 앞서 이 모든 일은 내가 자초하고 내가 만든 결과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만큼은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면 그에 대한 집착부터 끊어 내야 한다. 아니, 그 부분은 이미 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자격이 없기 때문인지, 이젠 그를 생각해도 나 자신조차 제어하지 못할 만큼 격한 감정은 들지 않는다. 그저 그를 떠올리면 끔찍하게 아프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