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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시도 때도 없이 지독하게 엄습해 오는 마지막 한 달간 이어지던 죽음의 공포보다도 내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그의 모습이 더 고통이었다.
그가 죽는 순간 나 또한 죽어 버렸기에 결코 육체나마 편안하게 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끔찍한 고문도 묵묵히 견뎠다. 그렇게라도 죗값을 갚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조차도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찌 그런 걸로 뻔뻔스럽게 죗값을 갚았다고 할 수 있을까. 못 한다. 그리해서는 안 되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억할 것이다.
제국의 태양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죄,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죄, 추악한 질투에 사랑하는 그와 그녀, 그의 아들까지 죽인 죄. 어찌 잊겠는가. 단 한시도 잊지 않을 것이다.
* * *
되돌아온 지 15일. 밤이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그 악몽은 언제나 같았다. 채찍을 맞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잘리는 와중에도 그가 피를 토하며 죽어 가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제발 그만 이 추한 목숨 끊어 주기를 바라다가도 자신은 결코 편하게 죽어서는 안 되기에 고통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매번 같은 꿈으로 시작해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이 파고들고야 끝이 났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절망과 지독한 암흑 속에서 수도 없이 나 자신을 죽이고 또다시 질기게 살아남는다. 마치 나는 이 지독한 현실에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내가 저지른 죄과는 악착같이 따라붙어 두려움에 움츠러드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후회와 고통. 그것만이 오로지 내가 다시 되돌아온 이유 전부라는 듯.
이미 죽어 버린 마음을 다시 한 번 죽여 버리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매번 흥건한 땀투성이 몸을 하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면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통한의 눈물이 마를 때까지 멍하니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지난 삶에서는 지금쯤 그를 쫓아다니며 공작가에 쳐들어가 화려하게 결혼식 준비를 하라고 닦달하다가 공작가의 고용인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그에게 쫓겨나는 상황의 연속일 터였다.
그리고도 눈치 없이 매일같이 찾아가고 혼자 상처받고 오만하게 파티장을 전전하고 다녔을 시기였지만, 다시 돌아오고부터는 일절 침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결혼식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천박할 정도로 화려한 옷차림에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그와의 결혼식을 치렀지만, 이번에는 예복조차 맞추지 않았다.
옷이라면 옷장에 넘치지 않는가. 화려한 보석들만 떼어 내고 그저 깔끔하게 갖춰 입으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보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과거만을 되돌아봤다.
물론, 그런 나를 찾아온 사람도 없었다. 식사 때마다 들어오는 하인들이 있었지만, 그들 또한 내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하고 혹여 트집이라도 잡힐세라 두려움만 내비쳤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 또한 굳이 상관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나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할 생각이 없었고 나를 봐 달라 변명하고 애원하는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물 흐르는 대로 조용히 흘러가고 싶을 뿐이다. 지난 15일간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야 얻은 결론이 그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차피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나 혼자서 흐름 전체를 바꾼다는 것은 애초에 무리지 않은가. 오히려 뭣도 모르고 설쳐 봐야 자칫하다간 귀족파의 이목만 끌게 된다.
아직은 그들이 나를 이용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진 이상, 나만 조용하게 지내면서 방해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그들이 무난하게 처리할 것이었다.
그러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귀족파가 숙청되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에는 나 또한 그의 곁을 떠나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인 것을 어찌할까.
“슈에리, 멍청한 것.”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것. 되새길수록 어질거리는 머리와 목 안에서 올라오는 쓴 물에 씁쓸하게 웃으며 방 한편에 세워 놓은 양쪽으로 화려한 장식장이 달린 전신 거울 앞에 다가갔다.
거울 안에 서 있는 건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작은 몸의 여윈 소년이었다. 아니, 올해로 성인식을 치렀으니 청년이라 하는 게 옳았지만, 거울 속에 있는 녀석은 어린 소년만큼이나 작았다.
저 작은 몸 어디에서 패악질이 나오는 걸까. 역시 타고난 태생은 속일 수 없는가. 그래서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한 것일까. 문득 피식 흘러나오는 씁쓸한 웃음에 멍하니 소년을 바라봤다.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에 마녀의 눈이라는 몽환의 자색 눈동자, 사시사철 눈을 뿌리는 북방의 겨울처럼 새하얀 피부가 창백하게 질려 있다. 마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피부처럼.
거울 속 소년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숨을 쉬는 인형. 빛을 잃어 무심하고 어둡게 가라앉은 자색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목이 콱 졸리는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거울 속의 소년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다.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갈기갈기 찢어 두 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게 그 영혼까지 소멸시키고 싶다.
“나는…… 네가 싫어, 슈에리. 끔찍해.”
그래서 앞으로는 너를 보지 않을 거야. 너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가당치도 않은 욕심은 버려. 용서를 바라서도 안 돼.
이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러니 원망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기대도 하지 마라. 그를 사랑해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마라.
그저 죽은 듯이 살아.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때까지만 추한 목숨 연명하면 그만이다. 그게 네가 치러야 할 대가야, 슈에리. 잊지 마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돼.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 거야.”
다시 한 번 거울 속으로 시선을 돌리고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나와 같이 거울 속의 소년도 죽어 버린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 모습에 쓰디쓴 한숨을 내뱉다가 곧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공자님,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알았다.”
바보같이 잊고 있었다. 지난 생에서도 황제, 아니 아직은 황태자인 그 사람이 찾아왔었지. 그와 절친한 친우로서 온갖 패악만 부리는 내게 경고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아마도 오늘도 같으리라. 언젠가는 모두 만날 사람들이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건만. 손끝이 시리도록 차가워지고 매서운 바람 앞에 작은 불빛처럼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다짐했던 게 무색하게 두려워하는 것인가? 그 사람이 나를 처참하고 잔혹하게 죽여서? 하지만 그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반응을.
“하아.”
진정하자. 이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제 시작이지 않은가. 여기서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지난 생에서처럼 또다시 주제도 모르고 날뛸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겠지.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하듯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깊게 심호흡했다. 그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손에 한숨을 내쉬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화려한 보석은 모두 빼고 짙은 색의 정장만을 갖춰 입고 침실을 나서 별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하인이 눈에 띄게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숙였다.
“열어라.”
일언반구 없이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짧은 순간에도 매섭게 꽂히는 살기 어린 시선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천천히 다가갔다. 막상 마주하니 생각 외로 마음은 담담했다.
아니, 무언가 공허하다고 해야 하나. 처음의 그 반응은 아마 육체에 밴 죽음의 공포 때문이었으리라.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에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눈을 조심스레 내리깔고 약식의 예를 차렸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께 슈에리 론 그레데스가 인사 올립니다.”
그 어떤 말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분명히 지난 생에서 나를 보자마자 폭언부터 퍼부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런 말도 없는 거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고개를 들라는 허락이 없기에 막연히 숙인 그대로 생각을 정리하자니 문득 떠오른 사실에 하마터면 실소를 흘릴 뻔했다. 반응이 바뀐 이유를 알겠다. 이런 어이없는 일이.
멍청하게도 지난 생에서 나는 그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황태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내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도 잊은 채 유혹적이게 웃으며 살가운 척 다가갔었다.
귀족으로서 예의도 차리지 않고 마치 오랜 벗을 대하듯 그렇게 오만 방자하게 굴었었다. 멍청하기는. 황태자인 그가 천박한 게 주제도 모른다고 폭언을 퍼붓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앉지.”
“예, 전하.”
예법에 따라 황태자와 대각선의 위치에 앉으며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침묵이 무겁게 짓눌러 오는데도 숨이 막힌다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너도 어느 정도 현 상황은 알고 있겠지?”
“예, 전하.”
“알고 있다니 길게 말할 필요도 없겠군.”
피식거리는 웃음소리에 보지 않아도 그가 비웃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동요는 일지 않았다. 다만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의문은 여전했다. 어째서?
어째서 지난 생과는 달리 분노하지 않고 이렇듯 차분하게 말하는 것인가. 지난 생에서는 황태자의 폭언으로 두려움에 떨며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런 나를 살기를 담아 내려다보며 마치 오물을 쳐 내듯 끝내 울며불며 매달리는 내 손이 빨갛게 부어오르도록 매섭게 내쳤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듯 차분한 것인가.
“너도 생각이 있다면 알겠지. 카일은 너를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럼에도 이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은 황가와 후작가의 이익을 위해서다. 그러니 이 결혼에 추호도 욕심 부리지 마라. 너 같은 것이 주제도 모르고 탐낼 자리가 아니다.”
‘역겨운 네놈 따위와 오래 말 섞고 싶지도 않다. 경고하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이 결혼식을 어쩔 수 없이 진행하지만, 카일도 나도 네놈이라면 치가 떨리고 끔찍해. 그런데도 네놈 꼴을 봐주는 건 너 같은 쓰레기도 이용할 가치는 있어서다.’
“모든 일이 마무리됐을 때 조용히 카일 곁을 떠나라. 이왕이면 이 제국을 영원히 떠나 주면 더 좋고.”
‘일이 모두 끝났을 때 네놈은 카일 곁에서 사라져. 만약 주제도 모르고 천박한 네놈이 욕심을 부린다면 내 반드시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했다. 그리고 내 대답은 과거와 달라야 하며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싫습니다. 싫어요! 아무리 전하라도 저를 그에게서 떨어뜨리지 못합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내가 아니면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입니까? 제발, 전하.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의 곁에 있게 해 주세요. 그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전하, 제발. 제발!’
멍청했다. 참으로 병신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횡설수설 악을 쓰며 황태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었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왜 대답이 없지? 너 설마,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목소리에 차가운 살기가 묻어나는 걸 느끼고 가만히 비켜난 시선을 들어 처음으로 황태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금으로 빚어 놓은 듯한 화사한 금발에 고귀한 황족의 혈통을 나타내는 금안.
카일, 그와는 다른 매력의 아름다운 사람. 자신의 사람에겐 유쾌한 장난도 곧잘 치는 편안한 사람. 나만 아니었으면 드높은 제국의 태양으로 당당하게 빛을 발했을 고귀하신 분.
그런 그를 내가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귀족들에게 이리저리 채이고 끌려 다니는 힘없는 꼭두각시 황제로. 또다시 그가 했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마치 경고라도 하려는 듯이.
“떠나겠습니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차분하게 원하는 대답을 했다. 이미 정해진 대답인 것을 무엇을 망설일까. 그런 내 대답이 믿기지 않는 듯 아무런 말이 없는 황태자를 향해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국을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역겨워도 그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 때가 되면 나는 사라지고 당신들은 모두 행복해지면 되는 일입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2장. 새로운 인연
어느덧 결혼식이 5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사이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고 잠에서 깨어나면 하루 종일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내 그런 변화에 여전히 주변에선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설사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생각하는 건 뻔할 것이지만, 그 또한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되돌려 풀어 나가기에는 늦은 것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 가로막힌 벽은 너무도 높고 견고하지 않은가. 이제 와서 벽을 허문답시고 노력한들 괜한 분란만 일으킬 것이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말썽인 것을 어찌할까. 그저 이대로 물 흐르듯 순응하고 조용히 있는 것만이 그나마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을 터였다.
“후, 알고는 있지만.”
어쩌지? 아무래도 오늘은 나갔다가 와야 할 것 같은데. 결혼식이야 몸만 가면 된다지만 어느 정도 현 상황을 파악하려면 정보는 필수로 알아봐야 한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시키기에는 내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는 없고, 직접 나서 알아보자니 그것도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작정 손 놓고 있자니 그 또한 내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머뭇거리며 고민하다가 문득 지난번 다녀간 황태자가 생각났다.
확실한 대답에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지 할 말만 끝내고 곧바로 사라졌던 지난 생과는 달리 황태자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도 곧바로 당연하다는 결론이 나와 좀 더 확실한 대답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꺼냈었다.
‘원하신다면 내일이라도 이혼장을 미리 써 드리겠습니다. 언제든지 보내 주십시오, 전하.’
‘그 말…… 진심인가?’
‘예. 제국의 법이 지엄하니, 이혼장이 있다면 다른 욕심을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나 또한 부담스러웠지만 한시도 얼굴 마주하기 끔찍한 사람을 보고 있어야 할 그가 안쓰럽고 걱정돼 했던 말이다. 그제야 어느 정도 안심한 듯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련 없이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날 당장이든 다음 날이든 황태자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보내올 거로 생각하고 기다렸었다. 하지만 어찌 된 노릇인지 열흘이나 지난 지금까지 서류는 도착하지 않았다.
본시 결혼 서약이든 이혼장이든 황제의 제가는 필수였고 황제가 인정하지 않는 건 그 어떤 것도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물며 황태자도, 황제도 나를 끔찍하게 싫어하지 않는가.
지금이야 필요로 어쩔 수 없이 이용하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째서 서류를 보내오지 않는 것인가.
미리 내 수결이나 인장을 찍은 이혼장을 받아 놓으면, 훗날 날짜만 기재해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터인데.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지금까지 잠잠하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적어도 응접실을 나갈 때 황태자의 기세로 봐서는 당장에라도 실행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또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혼란스럽다. 무언가가 지난 생과는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무언가가 변했다. 미세한 무언가가. 아무래도 내가 움직이지 않아서인 것 같은데. 그 때문에 변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나를 반길 리는 없잖은가.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말이고 욕심이다. 아마도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아니라면 여전히 의심하고 있다든지.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서류를 작성해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리 작성해 놓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서류를 건네주면 황제의 허가쯤이야 간단하게 떨어지리라. 그러자면 아무래도 외출은 한 번쯤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잠시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몸을 바로 하고야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상하게 몸이 무거운 것 같다. 하긴,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당연하겠지.
별것 아니라는 생각에 하인을 부르지 않고 혼자 간단하게 씻은 후 몇 벌밖에 없는 검은색 의복 중 하나를 입고 바쁘게 움직이던 몸을 멈칫했다. 이대로는 너무 눈에 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