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특히 이렇듯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하고 흔하지 않은 자색의 눈동자에 길거리의 천민조차도 나라는 걸 알아볼 테지. 그럼 어쩐다. 이대로 나가기에는 그렇고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마법 용품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있을 턱이 없지.”
지난 생에서 나는 내 화려한 외모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자색 눈동자. 그 강렬한 아름다움을 한 번 접하면 그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실제로 슈에리 론 그레데스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났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을 추하게 변화시킨 건 나 자신이지만.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홀리는 마녀나 악마로 통했었지.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자신의 외모를 뽐내고 싶어 안달 난 내가 외모를 바꾸는 마법 용품 같은 걸 가지고 있을 턱이 없고. 얼굴을 가릴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에 드레스 룸을 두리번거렸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화려한 옷들이 넓은 드레스 룸 한편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새삼 눈살을 찌푸리고 화려한 장식장을 일일이 열어 한참이나 찾은 끝에야 한구석에서 반듯하게 접어 놓은 검은색 로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17살 때로 기억한다. 귀족들이 외출 시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필수품으로 하나쯤은 갖춰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구매했던 로브였다. 그래 놓고는 구석에 처박아 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긴, 화려한 걸 좋아하는 성격에 재질만 고급이고 보잘것없는 로브 따위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어 풍성한 로브를 펼쳐 들고 몸에 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는 별 차이 없어 발목까지 덮는 길이에 모자까지 쓰자 모습이 완벽히 가려졌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보석장에서 은화를 챙기고 금화는 10크온씩 따로 작은 주머니에 담아 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매달 내게 지급되는 품위유지비는 일반 평민이 5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슈에리가 주제를 모르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고.
그 외에도 내게 남은 외가의 유산도 있어 더 그랬지만. 어찌 됐든, 어지간한 금액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는커녕 돈만 뜯길 소지가 다분해 차라리 처음부터 고급정보를 노리고 배팅하자 생각했다.
그러자면 최소한 30크온은 있어야겠지만, 내가 얻으려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어 넉넉잡아 100크온은 챙겨 넣고야 침실을 나서 망설임 없이 별채를 벗어나 뒤뜰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당당하게 마차를 준비시키고 정문을 통과했겠지만, 사정이 다른 지금 굳이 정문을 이용할 것도 없이 일꾼들이 사용하는 작은 쪽문으로 나가면 될 것이다.
게다가 별채에서 일하는 일꾼도 몇 안 되고, 다행히 조용한 별채라 눈에 띄지 않고 쪽문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약간 녹슨 철문은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나가 볼까?”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깊게 심호흡을 하고 빡빡한 문을 열고 나가자 보이는 건 숲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아마도 후작가 뒤쪽의 작은 숲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점차 나무가 사라지고 그늘이 져 으슥한 골목으로 이어졌다. 또다시 이리저리 꼬인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제도 광장.
갑자기 번잡스러워진 주변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힐끔거리는 시선에 다시 한 번 후드를 정리하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어디부터 가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한 곳으로 향했다.
기억하기에는 광장과 제도 시장 사이쯤에 정보 길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왕이면 예전 그가 주로 이용했던 정보 길드면 더 정확하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쉬움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 한참이나 걸었을까. 지친 몸을 벽에 기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무리해서 걸어서인지 몸이 무겁고 땀이 흥건하게 흘러나왔지만 거칠게 닦아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을 보다가 걸음을 재촉해 제법 넓은 골목 한 곳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건물들 사이로 잡화점 한 곳이 보였다.
겉으로는 고급스럽지 않은 그저 깔끔하기만 한 잡화점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이곳이 제도 내에서도 고가의 정보만 다루는 길드로 알고 있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내가 눈을 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렉시온의 눈물을 구하고자 왔다.”
렉시온은 깊은 해저에 살고 있다는 해저 드래곤으로 전설에서나 나오는 이름이다. 즉, 이곳에서 정보를 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암호 주문이었다.
“등품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참고로 가격에 따라 다릅니다만.”
“주인에게 직접 사겠다.”
내 말에 사내가 마치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눈을 더더욱 휘고 가게 한쪽에 있는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좁은 복도를 지나 으슥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사내가 조용히 물러나며 문을 닫자마자 어두워지는 실내에 흠칫했다가 곧바로 쏟아지는 강한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마법인가? 마법사들의 수가 줄어들고 황실에서 관리하는 마탑에서 나오는 물품으로만 사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꽤 신기한 마음에 속으로 감탄을 하며 가만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집무실 같은 실내는 깔끔한 색상의 가구와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일개 정보 상인이 사용하기에는 하나같이 엄청난 금액을 치러야 살 수 있는 고가품들로.
“요즘 들어 나를 찾는 의뢰인이 늘었군.”
뒤쪽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살짝 몸을 움츠리다가 태연하게 몸을 돌려 이곳의 주인인 듯한 젊은 사내를 바라봤다. 목을 시원하게 드러낸 짧은 밀크 브라운색 머리카락에 담갈색 눈동자.
침실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흐트러진 옷차림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하고 유들유들할 것 같은 이미지였으나 사내의 강인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대가 이곳의 주인입니까?”
“흠, 목소리가 맑고 앳된 걸 봐서는 성인식 전후의 귀한 손님이군. 그래서 무슨 정보를 원하시나?”
아무리 후드를 눌러써도 후드의 재질만으로도 이미 귀족이라는 건 쉽게 눈치를 챘을 것이다. 게다가 주인에게 직접 정보를 사겠다고 나섰다면 고가의 정보라는 건 뻔한 일.
이것저것 어눌하게 입을 놀려 봐야 나만 손해라 품 안에서 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10크온씩 따로 넣은 작은 주머니 다섯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호오, 어린 손님이 제법이야. 이만한 가격이라면 내 약점까지도 팔아 치울 수 있겠는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며 능글맞게 웃는 사내를 보고 다시 공간 주머니에서 10크온 주머니를 다섯 개 더 꺼내 놓았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살풋 굳어졌다.
실제 앞서 내놓은 50크온만으로 어지간한 귀족가 작은 저택도 살 수 있는 데다 필요하다면 황족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보통이 아니군. 뭘 원하는 거지?”
“지금 돌아가는 정세의 모든 변화, 상세한 움직임.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 서면으로 제출해 주십시오.”
내 담담한 말에 사내의 얼굴이 더 굳어지더니 잠시간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면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줄 수 있지만, 방대한 양이다. 상관없나?”
“상관없습니다.”
“좋아. 기다리도록.”
제아무리 양이 많아도 공간 주머니를 이용하면 되고, 구분하는 거야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천천히 해 나가면 될 일이다. 물론, 사소한 정보까지는 필요 없지만, 쉽게 흘릴 수 있는 정보도 앞으로 집 안에만 있을 내게는 중요한 정보나 마찬가지다.
또 귀족들의 생각이나 취향 정도를 알아보는 데는 가벼운 정보가 제격이지. 그런 마음에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자니 사내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테이블 옆으로 정보지들을 묶어 놓은 걸 차례대로 가져다 놨다.
그야말로 방대한 양. 처음에 가져다 놓은 묶음은 내 키만 한 높이었고, 두 번째는 그 반 정도 되는 묶음, 세 번째는 또 그 반 정도. 마지막으로 사내가 들고 온 정보지는 세 개의 묶음과는 달리 검은 천으로 싸인 것이었다.
“좀 많지? 이게 하루에 들어오는 양이다. 제일 큰 것부터 3등급, 2등급, 1등급. 그리고 이건 특급 정보.”
역시. 그보다 엄청난 양이군. 이게 모두 하루에 들어오는 정보라니.
“앞으로도 종종 애용해 달라는 의미로 나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영상구와 공간 주머니는 서비스로 주지.”
3크온이나 하는 공간 주머니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가격불가 영상구가 서비스라.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간 주머니야 귀족들이라면 쉽게 살 수 있는 물품이지만, 이곳의 주인과 직접 연결되는 영상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100크온이 어마어마한 금액이라지만, 고위 귀족이라면 정보에 따라 사용하지 못할 금액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특급 정보까지 얻어 가는 마당에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지?
“뭣 때문입니까?”
“글쎄.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해 두지.”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더 물어봐야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아 사내가 내민 공간 주머니에 영상구와 정보지를 차곡차곡 밀어 넣고 단단히 봉해 품 안에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난데없이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앞으로 거래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난 이곳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테아칸이다. 풀 네임은 좀 더 알게 된다면 알려 주지.”
그렇다는 건 역시 이 사람도 귀족이라는 말이군. 헌데 귀족이 왜 이런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걸까? 아니, 만약 이 사람이 귀족파의 일원이라면 오늘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복잡한 권력 다툼이 한창인 이 시기에 그런 정보를 샀다는 건 충분히 말썽이 생길 만한 일이지 않은가. 그나마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지만 이곳이 정보 길드인 만큼 그조차도 안심할 수가 없어 불안해졌다.
어쩌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벌써 나에 대해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잠시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자 테아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정보 길드를 운영하려면 손님에 대한 비밀보장은 필수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아,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한 가지는 알려 주지. 나는 귀족파와 전혀 연관이 없다.”
사내의 말에 안도하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 한 부분에 모든 생각을 멈췄다. 세 개의 세력 중에 딱 꼬집어서 귀족파를 들먹였다는 건 이미 내 정체를 파악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게다가 내 정체를 파악했다고 쳐도 중립파를 두고 굳이 귀족파를 들먹인 건 이미 중립파가 황제파로 돌아섰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도 된다. 하긴, 정보를 다루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만.
이 정도면 특급 정보도 꽤 큰 건수겠다 싶었다. 그렇게 새삼 놀라운 정보력에 속으로 감탄을 하다가 곧 흘러나오는 웃음기 다분한 사내의 말에 몸이 절로 굳어 버렸다.
“그나저나 놀랐군. 희대의 마녀라는 소문이 자자한 슈에리 공자가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정말 그대가 그 소문 무성한 패악 덩어리 망나니 공자가 맞는 건가?”
* * *
어리석게 가벼이 여겼던가. 이미 그가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나를 알아보자 또 한 번 지난 생의 죄과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버거운 무게로 숨통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
희대의 마녀. 패악 덩어리 망나니 공자. 모두 맞는 말이다. 아니, 실제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나라는 인간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모두가 그랬다. 신분이 낮은 이들은 차마 내게 말로 하지는 못해도 눈빛으로 감정을 말했고, 내가 돌아서면 그제야 침을 뱉고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마치 신에게 소원이라도 빌듯이 말했다.
죽어.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그리고 그도 말했었지. 역겹다는 듯 얼굴 가득 경멸을 담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추악한 얼굴 들이밀지 말고 제발 좀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었다.
그때 그 혐오를 두른 그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런 말을 듣고 나는 어떻게 했더라? 악을 썼던가? 아니면 그때도 상황 파악 못 하고 추하게 울며불며 사랑한다고 매달렸던가?
아마도 내 반응은 똑같았으리라. 그는 매번 치를 떨며 내게서 멀어졌으니까. 병신같이. 정말이지 병신 같다. 슈에리, 멍청한 슈에리. 왜 그렇게 살았니? 세상의 중심이 그라면서.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오로지 그의 곁에서 그를 사랑하는 것만이 전부라면서. 그래서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런 소리나 들으니까 좋았어? 만족했어?
그럴 리가 없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병신. 사랑 받고 싶었으면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하다못해 주변이라도 돌아봤어야지.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산거야. 발악하고 추악하게 살아서 결국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갈 거면서. 뭐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 매달리고 추한 목숨 이어 간 거야.
너 때문에. 병신 같은 너 하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죽었다. 네가 가진 그 끔찍한 집착이 그를 죽이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까지 죽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너 또한 죽었지.
멍청한 것.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죽었어야지. 스스로 추한 목숨 끊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말았어야지. 그 무거운 죄과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니, 감당하지 못한다.
이렇게나 아픈데. 이렇게나 괴로운데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죄과를 떠올릴수록 숨이 막혔다. 급하게 숨을 내쉬려고 해도 무언가 가로막힌 듯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숨을 쉬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대로 당장 질식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눈앞에 하얀 형체가 일렁였다.
처음에는 작았던 형체가 곧 크게 부풀려지고 또다시 잘게 부서져 나뉘며 수많은 사람의 손 모양으로 변해 갔다. 수십 개에서 순식간에 수백 개로 늘어난 손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다가온다.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내 목을 조르기 위해 다가오는 것처럼. 내 살점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손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점점 더 길게 자라나는 기괴한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마치 눈을 뜨고 보는 것처럼 너무도 선명한 그 모습에 발끝부터 한기가 몰려와 차츰 온몸으로 번져 나가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뻣뻣하게 굳어 갈 때 누군가 내 몸을 거칠게 뒤로 끌어당겼다.
“이봐! 정신 차려!”
누구지? 뭐라고 하는 거야? 몰라. 몰라. 그러니까 나를 놔줘. 힘들어. 숨을 못 쉬겠어.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그래, 맞아. 나만 죽어 버리면 모두가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죽자.
죽어 버리자. 모두가 원하는 거야.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그나마 이대로 죽어 사라지는 게 그들을 돕는 거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면 돼.
마음을 정하고 나자 어지럽게 붕 떠올랐던 정신이 차츰 가라앉고 눈앞에서 악귀처럼 달려들던 환영도 사라졌다. 고요한 침묵.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 오는데도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졌다.
육체도, 마지막 남은 의식도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다. 더욱더 깊고 깊은 곳으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렇게 잠식해 들어갈 때였다.
“젠장! 정신 차리라고!”
깊고 깊은 어둠 속을 단숨에 뚫고 들려오는 귀청을 울리는 큰 소리와 함께 얼굴 한쪽이 화끈한 느낌에 멍하니 부유하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났다.
“이제 정신이 드나?”
뭐지? 이 사람은 누군데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걸까?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이봐, 또 정신 잃으면 곤란해. 나 참, 서서 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봤군.”
기절? 무슨 소리일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을 알고 있다. 정보 길드. 테아칸. 그렇다면 여기는.
“아!”
“다행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군.”
맙소사. 정신을 잃었던 건가. 고작 나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이 나를 알아본 걸로?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으면서 왜. 고작 이 정도에서 무너질 정신이라면 어떻게 견디려고.
안 돼! 정신 차려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그들은 만나 보지도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죗값을 치르기로 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무슨 말로 어떤 식으로 상처를 주더라도 각오해야 한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와서 두렵다고 도망칠 수는 없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 눈을 질끈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하자 그제야 조금은 안정이 되는 기분이다.
특히 이렇듯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하고 흔하지 않은 자색의 눈동자에 길거리의 천민조차도 나라는 걸 알아볼 테지. 그럼 어쩐다. 이대로 나가기에는 그렇고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바꾸는 마법 용품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있을 턱이 없지.”
지난 생에서 나는 내 화려한 외모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자색 눈동자. 그 강렬한 아름다움을 한 번 접하면 그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실제로 슈에리 론 그레데스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났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을 추하게 변화시킨 건 나 자신이지만.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홀리는 마녀나 악마로 통했었지.
그것도 모르고 멍청하게 자신의 외모를 뽐내고 싶어 안달 난 내가 외모를 바꾸는 마법 용품 같은 걸 가지고 있을 턱이 없고. 얼굴을 가릴 만한 게 뭐가 있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에 드레스 룸을 두리번거렸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화려한 옷들이 넓은 드레스 룸 한편을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 새삼 눈살을 찌푸리고 화려한 장식장을 일일이 열어 한참이나 찾은 끝에야 한구석에서 반듯하게 접어 놓은 검은색 로브를 발견할 수 있었다.
17살 때로 기억한다. 귀족들이 외출 시 신분을 감추기 위해 필수품으로 하나쯤은 갖춰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 생각 없이 구매했던 로브였다. 그래 놓고는 구석에 처박아 놓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지만.
하긴, 화려한 걸 좋아하는 성격에 재질만 고급이고 보잘것없는 로브 따위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그래도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어 풍성한 로브를 펼쳐 들고 몸에 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키는 별 차이 없어 발목까지 덮는 길이에 모자까지 쓰자 모습이 완벽히 가려졌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보석장에서 은화를 챙기고 금화는 10크온씩 따로 작은 주머니에 담아 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매달 내게 지급되는 품위유지비는 일반 평민이 5년은 풍족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지난 생에서도 슈에리가 주제를 모르고 방탕하게 생활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였고.
그 외에도 내게 남은 외가의 유산도 있어 더 그랬지만. 어찌 됐든, 어지간한 금액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는커녕 돈만 뜯길 소지가 다분해 차라리 처음부터 고급정보를 노리고 배팅하자 생각했다.
그러자면 최소한 30크온은 있어야겠지만, 내가 얻으려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어 넉넉잡아 100크온은 챙겨 넣고야 침실을 나서 망설임 없이 별채를 벗어나 뒤뜰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당당하게 마차를 준비시키고 정문을 통과했겠지만, 사정이 다른 지금 굳이 정문을 이용할 것도 없이 일꾼들이 사용하는 작은 쪽문으로 나가면 될 것이다.
게다가 별채에서 일하는 일꾼도 몇 안 되고, 다행히 조용한 별채라 눈에 띄지 않고 쪽문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약간 녹슨 철문은 사용한 흔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나가 볼까?”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깊게 심호흡을 하고 빡빡한 문을 열고 나가자 보이는 건 숲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길이었다. 아마도 후작가 뒤쪽의 작은 숲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마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듯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점차 나무가 사라지고 그늘이 져 으슥한 골목으로 이어졌다. 또다시 이리저리 꼬인 골목을 빠져나오자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제도 광장.
갑자기 번잡스러워진 주변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힐끔거리는 시선에 다시 한 번 후드를 정리하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어디부터 가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한 곳으로 향했다.
기억하기에는 광장과 제도 시장 사이쯤에 정보 길드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왕이면 예전 그가 주로 이용했던 정보 길드면 더 정확하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아쉬움에 살짝 한숨을 내쉬고 한참이나 걸었을까. 지친 몸을 벽에 기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무리해서 걸어서인지 몸이 무겁고 땀이 흥건하게 흘러나왔지만 거칠게 닦아 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많아지는 사람들을 보다가 걸음을 재촉해 제법 넓은 골목 한 곳으로 들어가자, 깔끔한 건물들 사이로 잡화점 한 곳이 보였다.
겉으로는 고급스럽지 않은 그저 깔끔하기만 한 잡화점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이곳이 제도 내에서도 고가의 정보만 다루는 길드로 알고 있다.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내가 눈을 휘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렉시온의 눈물을 구하고자 왔다.”
렉시온은 깊은 해저에 살고 있다는 해저 드래곤으로 전설에서나 나오는 이름이다. 즉, 이곳에서 정보를 구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암호 주문이었다.
“등품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참고로 가격에 따라 다릅니다만.”
“주인에게 직접 사겠다.”
내 말에 사내가 마치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내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내 눈을 더더욱 휘고 가게 한쪽에 있는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곤 좁은 복도를 지나 으슥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사내가 조용히 물러나며 문을 닫자마자 어두워지는 실내에 흠칫했다가 곧바로 쏟아지는 강한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순식간에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마법인가? 마법사들의 수가 줄어들고 황실에서 관리하는 마탑에서 나오는 물품으로만 사용하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꽤 신기한 마음에 속으로 감탄을 하며 가만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제법 넓은 집무실 같은 실내는 깔끔한 색상의 가구와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다. 일개 정보 상인이 사용하기에는 하나같이 엄청난 금액을 치러야 살 수 있는 고가품들로.
“요즘 들어 나를 찾는 의뢰인이 늘었군.”
뒤쪽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살짝 몸을 움츠리다가 태연하게 몸을 돌려 이곳의 주인인 듯한 젊은 사내를 바라봤다. 목을 시원하게 드러낸 짧은 밀크 브라운색 머리카락에 담갈색 눈동자.
침실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흐트러진 옷차림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하고 유들유들할 것 같은 이미지였으나 사내의 강인한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그 생각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대가 이곳의 주인입니까?”
“흠, 목소리가 맑고 앳된 걸 봐서는 성인식 전후의 귀한 손님이군. 그래서 무슨 정보를 원하시나?”
아무리 후드를 눌러써도 후드의 재질만으로도 이미 귀족이라는 건 쉽게 눈치를 챘을 것이다. 게다가 주인에게 직접 정보를 사겠다고 나섰다면 고가의 정보라는 건 뻔한 일.
이것저것 어눌하게 입을 놀려 봐야 나만 손해라 품 안에서 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10크온씩 따로 넣은 작은 주머니 다섯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호오, 어린 손님이 제법이야. 이만한 가격이라면 내 약점까지도 팔아 치울 수 있겠는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며 능글맞게 웃는 사내를 보고 다시 공간 주머니에서 10크온 주머니를 다섯 개 더 꺼내 놓았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살풋 굳어졌다.
실제 앞서 내놓은 50크온만으로 어지간한 귀족가 작은 저택도 살 수 있는 데다 필요하다면 황족의 비밀스러운 정보를 살 수도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보통이 아니군. 뭘 원하는 거지?”
“지금 돌아가는 정세의 모든 변화, 상세한 움직임.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 서면으로 제출해 주십시오.”
내 담담한 말에 사내의 얼굴이 더 굳어지더니 잠시간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면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줄 수 있지만, 방대한 양이다. 상관없나?”
“상관없습니다.”
“좋아. 기다리도록.”
제아무리 양이 많아도 공간 주머니를 이용하면 되고, 구분하는 거야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천천히 해 나가면 될 일이다. 물론, 사소한 정보까지는 필요 없지만, 쉽게 흘릴 수 있는 정보도 앞으로 집 안에만 있을 내게는 중요한 정보나 마찬가지다.
또 귀족들의 생각이나 취향 정도를 알아보는 데는 가벼운 정보가 제격이지. 그런 마음에 느긋하게 차를 음미하고 있자니 사내가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테이블 옆으로 정보지들을 묶어 놓은 걸 차례대로 가져다 놨다.
그야말로 방대한 양. 처음에 가져다 놓은 묶음은 내 키만 한 높이었고, 두 번째는 그 반 정도 되는 묶음, 세 번째는 또 그 반 정도. 마지막으로 사내가 들고 온 정보지는 세 개의 묶음과는 달리 검은 천으로 싸인 것이었다.
“좀 많지? 이게 하루에 들어오는 양이다. 제일 큰 것부터 3등급, 2등급, 1등급. 그리고 이건 특급 정보.”
역시. 그보다 엄청난 양이군. 이게 모두 하루에 들어오는 정보라니.
“앞으로도 종종 애용해 달라는 의미로 나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영상구와 공간 주머니는 서비스로 주지.”
3크온이나 하는 공간 주머니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가격불가 영상구가 서비스라.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간 주머니야 귀족들이라면 쉽게 살 수 있는 물품이지만, 이곳의 주인과 직접 연결되는 영상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100크온이 어마어마한 금액이라지만, 고위 귀족이라면 정보에 따라 사용하지 못할 금액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특급 정보까지 얻어 가는 마당에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지?
“뭣 때문입니까?”
“글쎄.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해 두지.”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더 물어봐야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아 사내가 내민 공간 주머니에 영상구와 정보지를 차곡차곡 밀어 넣고 단단히 봉해 품 안에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난데없이 사내가 앞을 막아섰다.
“앞으로 거래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난 이곳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테아칸이다. 풀 네임은 좀 더 알게 된다면 알려 주지.”
그렇다는 건 역시 이 사람도 귀족이라는 말이군. 헌데 귀족이 왜 이런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 걸까? 아니, 만약 이 사람이 귀족파의 일원이라면 오늘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복잡한 권력 다툼이 한창인 이 시기에 그런 정보를 샀다는 건 충분히 말썽이 생길 만한 일이지 않은가. 그나마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지만 이곳이 정보 길드인 만큼 그조차도 안심할 수가 없어 불안해졌다.
어쩌면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벌써 나에 대해 알아봤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인지 잠시간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자 테아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피식 웃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정보 길드를 운영하려면 손님에 대한 비밀보장은 필수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아,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한 가지는 알려 주지. 나는 귀족파와 전혀 연관이 없다.”
사내의 말에 안도하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어느 한 부분에 모든 생각을 멈췄다. 세 개의 세력 중에 딱 꼬집어서 귀족파를 들먹였다는 건 이미 내 정체를 파악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게다가 내 정체를 파악했다고 쳐도 중립파를 두고 굳이 귀족파를 들먹인 건 이미 중립파가 황제파로 돌아섰다는 걸 알고 있다는 말도 된다. 하긴, 정보를 다루는데 모를 리가 없겠지만.
이 정도면 특급 정보도 꽤 큰 건수겠다 싶었다. 그렇게 새삼 놀라운 정보력에 속으로 감탄을 하다가 곧 흘러나오는 웃음기 다분한 사내의 말에 몸이 절로 굳어 버렸다.
“그나저나 놀랐군. 희대의 마녀라는 소문이 자자한 슈에리 공자가 이런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정말 그대가 그 소문 무성한 패악 덩어리 망나니 공자가 맞는 건가?”
* * *
어리석게 가벼이 여겼던가. 이미 그가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나를 알아보자 또 한 번 지난 생의 죄과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버거운 무게로 숨통을 짓누르는 듯한 고통.
희대의 마녀. 패악 덩어리 망나니 공자. 모두 맞는 말이다. 아니, 실제는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나라는 인간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모두가 그랬다. 신분이 낮은 이들은 차마 내게 말로 하지는 못해도 눈빛으로 감정을 말했고, 내가 돌아서면 그제야 침을 뱉고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마치 신에게 소원이라도 빌듯이 말했다.
죽어.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그리고 그도 말했었지. 역겹다는 듯 얼굴 가득 경멸을 담고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추악한 얼굴 들이밀지 말고 제발 좀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었다.
그때 그 혐오를 두른 그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런 말을 듣고 나는 어떻게 했더라? 악을 썼던가? 아니면 그때도 상황 파악 못 하고 추하게 울며불며 사랑한다고 매달렸던가?
아마도 내 반응은 똑같았으리라. 그는 매번 치를 떨며 내게서 멀어졌으니까. 병신같이. 정말이지 병신 같다. 슈에리, 멍청한 슈에리. 왜 그렇게 살았니? 세상의 중심이 그라면서.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서. 오로지 그의 곁에서 그를 사랑하는 것만이 전부라면서. 그래서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 그런 소리나 들으니까 좋았어? 만족했어?
그럴 리가 없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병신. 사랑 받고 싶었으면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지. 아무리 멍청해도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하다못해 주변이라도 돌아봤어야지.
왜 그렇게 이기적으로 산거야. 발악하고 추악하게 살아서 결국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갈 거면서. 뭐 하러 그렇게 아등바등 매달리고 추한 목숨 이어 간 거야.
너 때문에. 병신 같은 너 하나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죽었다. 네가 가진 그 끔찍한 집착이 그를 죽이고,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까지 죽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너 또한 죽었지.
멍청한 것.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죽었어야지. 스스로 추한 목숨 끊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말았어야지. 그 무거운 죄과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아니, 감당하지 못한다.
이렇게나 아픈데. 이렇게나 괴로운데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죄과를 떠올릴수록 숨이 막혔다. 급하게 숨을 내쉬려고 해도 무언가 가로막힌 듯 숨을 쉴 수가 없다.
마치 숨을 쉬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대로 당장 질식사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눈앞에 하얀 형체가 일렁였다.
처음에는 작았던 형체가 곧 크게 부풀려지고 또다시 잘게 부서져 나뉘며 수많은 사람의 손 모양으로 변해 갔다. 수십 개에서 순식간에 수백 개로 늘어난 손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다가온다.
맛있는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내 목을 조르기 위해 다가오는 것처럼. 내 살점을 뜯어내려고 하는 것처럼.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손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점점 더 길게 자라나는 기괴한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럼에도 마치 눈을 뜨고 보는 것처럼 너무도 선명한 그 모습에 발끝부터 한기가 몰려와 차츰 온몸으로 번져 나가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뻣뻣하게 굳어 갈 때 누군가 내 몸을 거칠게 뒤로 끌어당겼다.
“이봐! 정신 차려!”
누구지? 뭐라고 하는 거야? 몰라. 몰라. 그러니까 나를 놔줘. 힘들어. 숨을 못 쉬겠어. 차라리 이대로 죽어 버렸으면. 그래, 맞아. 나만 죽어 버리면 모두가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죽자.
죽어 버리자. 모두가 원하는 거야.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그나마 이대로 죽어 사라지는 게 그들을 돕는 거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면 돼.
마음을 정하고 나자 어지럽게 붕 떠올랐던 정신이 차츰 가라앉고 눈앞에서 악귀처럼 달려들던 환영도 사라졌다. 고요한 침묵. 칠흑 같은 어둠이 덮쳐 오는데도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졌다.
육체도, 마지막 남은 의식도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다. 더욱더 깊고 깊은 곳으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그렇게 잠식해 들어갈 때였다.
“젠장! 정신 차리라고!”
깊고 깊은 어둠 속을 단숨에 뚫고 들려오는 귀청을 울리는 큰 소리와 함께 얼굴 한쪽이 화끈한 느낌에 멍하니 부유하던 정신이 화들짝 깨어났다.
“이제 정신이 드나?”
뭐지? 이 사람은 누군데 저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걸까? 마치 걱정하는 것처럼.
“이봐, 또 정신 잃으면 곤란해. 나 참, 서서 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봤군.”
기절? 무슨 소리일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을 알고 있다. 정보 길드. 테아칸. 그렇다면 여기는.
“아!”
“다행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군.”
맙소사. 정신을 잃었던 건가. 고작 나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는 사람이 나를 알아본 걸로?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으면서 왜. 고작 이 정도에서 무너질 정신이라면 어떻게 견디려고.
안 돼! 정신 차려라.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직 그들은 만나 보지도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죗값을 치르기로 했으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이 무슨 말로 어떤 식으로 상처를 주더라도 각오해야 한다.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죄의 대가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 와서 두렵다고 도망칠 수는 없어. 애써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 눈을 질끈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하자 그제야 조금은 안정이 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