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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여전히 심장은 불안하게 쿵쿵거리고 시야는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다행히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 안도할 때 얼얼한 뺨에 와 닿은 차가운 손길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부었군. 이렇게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대가 마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사라진다. 차라리 그랬으면. 왜인지 묘한 표정을 짓다가 끝내 작게 욕설을 뱉으며 중얼거리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후드가 벗겨진 상태라는 걸 알고 다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갈 건가? 그 몸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이지?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대로 마냥 있을 수 없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가 이내 멈칫거렸다. 뭐지? 이상하게 숨이 가쁘다. 시야도 흐릿하고. 머릿속마저 울리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 순간 사물들이 일그러지며 아찔함이 덮쳐 왔다.
“괜찮아? 이, 이봐, 정신 차려!”
귓가에서 윙윙거리듯 울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보이는 건 새까만 어둠뿐. 스멀스멀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여긴 어디일까?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문득 드는 두려움에 몸을 한껏 움츠리다가 곧바로 그조차도 허망하게 느껴져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나는 혼자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둠의 일부로 동화되듯. 그 어떤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막연히 어둠만을 응시할 때 갑작스럽게 주변이 일렁이기 시작하고 낯익은 장소가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후작의 집무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집무실 안에는 내 아버지라는 사람과 그와 빼다 박은 듯 닮은 형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인 19살의 내가 있었다.
‘이만큼 키워 줬으면 너도 밥벌이는 해야지. 셀레스턴 공작하고 결혼해라.’
그랬었다.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람들이, 가족으로 취급도 해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본채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던 사람들이 어쩐 일로 나를 부르나 했었다. 혹시라도 나를 봐 주는 건가 싶어 내심 기대를 품고 갔었다.
하지만 꺼낸 말은 저거였지. 카일리안 그와 결혼하라는 거. 그때 나는 천방지축 날뛰고 있었고, 나보다 5살이나 많은 그는 이미 젊은 나이로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고 황태자를 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같이 파티장을 전전하는 나와는 달리 그런 곳을 싫어하는 그를 나는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반발심이 일었지만, 곧바로 흘러나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 같은 것도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군. 네놈이 무슨 천박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단, 우리 후작가에 피해를 줄 때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명심해라.’
나와 피가 반이 섞인 형이 했던 말이다. 차가운 얼굴을 더욱 굳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친다는 듯이 그렇게 경고했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오던 일이다. 거부는 일절 용납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아.’
‘이 문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곧바로 집무실 밖으로 내쳐졌다. 멍하니 별채로 돌아오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19살의 추운 겨울, 그렇게 내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갈 길이 정해졌다.
나중에야 우연하게 알았지만 그때 후작가는 귀족파와 황제파 두 곳에 다 다리를 걸쳐 놓은 상태였다. 몇 년간 양쪽의 힘을 보며 저울질하다가 결국에는 황제파로 돌아선 것이다.
이미 나 따위는 어디로든 팔려 갈 운명이었다는 말이다.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부했다가는 그나마 내게 해 주던 원조도 끊기고 그대로 후작가에서 내쳐졌을 테니까.
당연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흥청망청했고 귀족으로서 오만한 콧대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 내가 가난한 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돈을 씀으로 내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이 친구라고 생각했었던 때였다. 그들이 나를 이용하며 뒤로 손가락질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던 때였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됐었다. 그 후 한 달이 지나 그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빛에 반짝이는 살얼음을 세공에 세공을 거쳐 가늘게 뽑아 놓은 것처럼 너무나 눈이 부시게 빛이 나는 은빛의 머릿결에 제일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차가운 살얼음을 한 겹 더 씌워 놓은 듯한 아이스 블루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과 복숭앗빛으로 반짝이는 수려한 입술. 깨끗하면서 하얀 피부와 달리 강인한 턱 선.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어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마치 신이 빚어 놓은 최상의 조각품처럼. 차갑다 못해 은은한 살기마저 품고 있는 그에게 내 마음을 송두리째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주술이 되어 나를 옭아매는 시작이 되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결혼하라기에. 한 번쯤은 내 반려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갔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를 받아들이지만 그것뿐이다. 내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라.’
시리디시린 말에도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게 그는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었지.
‘목적이 끝났다면 돌아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오지 마라.’
그의 경고대로 해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나는 그때부터 매일같이 그를 찾아갔었다. 무작정 공작가에 찾아가 그를 만나겠다고 생떼를 부리고 나를 무시하는 공작가 일원의 뺨도 서슴없이 때렸다.
감히, 너희의 주인이 될 나를 무시하느냐고. 주제도 모르고 큰소리를 치고 패악을 부렸었다. 그때마다 그는 치를 떨면서 나를 밀어냈다. 매번 찾아가고 내쳐지고.
나중에는 문조차 열어 주지 않아 공작가 앞에서 패악을 부리다가 곧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어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티장에서 그에 대해 떠들며 얼굴을 붉히는 영애들을 모욕하고 심하면 손찌검까지 하면서 내가 그의 반려라고 당당하게 외쳤었다. 그때는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게 패악을 부리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오물이라도 보는 듯 피했고, 나중에는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비웃으며 경멸을 퍼부었다.
‘반려?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저따위 망발을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핏줄은 못 속인다고, 천박한 그 여자하고 똑같은 쓰레기군.’
‘후작도 골치 아프겠어. 저따위 걸 인간이라고 거둬 먹이려면.’
‘인간은 무슨. 말 못 하는 짐승도 저것보다는 괜찮지.’
상종 못 할 천박한 놈.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그들은 그렇게 나를 비웃었고 나는 그들의 그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오히려 그들을 비웃었지.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생모의 집안을 모조리 흡수한 후작가의 재력은 대륙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내게도 돈은 언제나 넘쳐났다.
하물며 자신은 그의 반려로 내정되어 있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그를 내가 곧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주제를 모르던 콧대는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다.
그럴수록 더 치를 떤다는 것도 모르는 채. 멍청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빠져 앞뒤 구분 없이 설쳤었다. 왜 그렇게도 멍청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도 구분할 잘잘못을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오만하다 못해 거만했던 나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것도 모른 채 살짝만 만져도 부서지는 썩은 울타리 안에서 좋다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 울타리는 부서졌다. 허망하고 처참하게.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 하나로도 부족해 수많은 사람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 그들까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니 이런 고통쯤은 당연하리라. 대가.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애초에 나는 거부할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째서일까? 이제야 혼자인 게 두렵고 앞으로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너무도 버거워 더 두렵다. 이런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약한 나 자신에 넌더리가 났지만 무엇 하나도 자신이 없어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어둠이 일렁이고 완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수십, 아니 수백인가. 일렁이는 형체가 점점 기괴하게 뒤틀려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숨소리를 죽였다.
알고 있다. 저들이 누구인지. 당장에라도 나 하나쯤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한 악의와 분노를 온몸으로 두르고 경멸을 쏟아 내는 그들은 나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 간 이들이었다.
‘너 때문에! 너 같은 것 때문에 왜 우리가 죽어야 하지?’
미안. 미안합니다.
‘우리는 다 죽여 놓고 너는 왜 살아 있어? 죽어! 죽어 버리란 말이야!’
나도 죽고 싶어.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어.
‘너 같은 건 불행해져야 해.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절망을 맛봐.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까마득한 절망에 처절하게 죽어가!’
그래. 그렇게 될 것이다. 행복? 그런 가당치도 않은 꿈은 꾸지 않는다. 무슨 염치로 행복을 꿈꾼단 말인가. 이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끝없이 절망하고 불행해져 끝내 처절하게 죽어 버려도 상관없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리라. 이미 각오한 바 감당해야겠지. 어느새 다시 나타난 수많은 손이 온몸을 더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살점을 뭉텅이로 뜯어내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검은 악령들이 나를 비웃으며 에워싼다.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섬뜩한 광기와 같은 소름 끼치는 광소를 터트린다. 그러다가도 또다시 나를 원망하며 소리를 내지른다.
‘용서 못 해! 이 악마! 용서 못 해!’
그들이 말한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악령의 모습으로. 듬성듬성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고 흘러나오는 피를 빨아먹는 악령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보며 그들은 통쾌한 듯 비웃었다.
오독오독 무언가를 씹는 소리에 간신히 시선을 내리자 발가락이 아귀처럼 벌린 입안으로 사라지며 뼈째로 우두둑 씹혀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기괴한 모습과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짐승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나갔던 그때처럼.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부림쳤지만, 그조차도 손쉽게 악령들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괴로움에 허덕이고 고통에 비명을 질러도 누구 하나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 것처럼. 야금야금 내 몸을 먹어 가는 악령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피를 토하며 외치고 있었다.
* * *
밤새 악몽에 시달려서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가 깨어난 것인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눈앞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던 의식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밝은 빛에 차츰 선명해지고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곳. 이곳은 어디지?
몸은 또 왜 이렇게 무겁고.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멍하니 침대가로 쳐진 휘장만 바라보고 있자 곧 인기척이 들리고 휘장이 젖혀지며 한 사람이 보였다.
“깨어났나?”
테아칸. 정보 길드의 주인. 그가 왜?
“여긴…… 어디입니까?”
“내 침실. 너 기절한 지 사흘이나 지났다.”
내가 기절했다고? 그것도 사흘씩이나. 어쩐지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던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그런데 뭐지? 이 옷은?
“저기, 옷이 바뀌었는데.”
“그거? 내 옷이다. 땀을 하도 흘려서 갈아입혔다.”
이 사람이 직접 갈아입혔다고? 맙소사. 기절은 왜 해서. 그나저나 어쩐다. 지금은 도저히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있자니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민폐 끼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힘겹게 버둥거리다가 곧 몸을 누르고 땀에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착각인가. 잠시였지만 마치 다정하게 걱정하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생경한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같이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을. 괜한 생각이라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자 그런 내 반응을 달리 받아들인 듯 그가 나직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얼굴 보이지 않고 진맥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닌데.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내 얼굴이 알려져 봐야 나는 욕 한 번 더 먹으면 그만이지만 이 사람한테는 그것도 피해겠지. 나와 어울려서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까.
“그런데 그 몸으로 잘도 움직였군. 너, 생각이 없는 거냐? 지금 몸 상태가 어떤 줄 알아?”
화난 걸까? 왜? 아, 내가 이곳에 있어서. 그러고 보니 깨어나고도 고맙다는 인사도 안 했다는 생각에 당황해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왠지 더 화가 난 듯한 그가 내 양어깨를 눌러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움직이지 마라. 고열에 영양실조까지 더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기가 허해졌다는군.”
“에?”
“뭐야, 그 멍청한 반응은? 너 설마 몸 상태도 몰랐던 거냐?”
몰랐다. 어쩐지 어지러운 것 같더라니, 열이 있었구나.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그렇게까지 나빠진 건가. 하긴, 되돌아오고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서 식사가 들어와도 거의 물리다시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먹으려고 하면 목구멍이 따갑고 속에서 거부반응부터 일어나는 바람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먹지 않은 것이지만. 확실히 문제일지도. 이래서야 결혼식은 어찌 치르려고.
차라리 토해 내더라도 먹을걸. 몸이 점점 나빠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영양실조까지 갔을 줄은 생각 못 했는데. 그러고 보면 몸도 마른 것 같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 현기증이 나고 기운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구나.
“후작가의 귀한 도련님이 영양실조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아 힘겹게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찌푸려졌지만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초면에 폐를 끼쳤습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추후에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어딜 가려고 일어나?”
“예? 그야, 집에 가려고.”
당연히 집에 돌아가는 게 맞는데 그는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그 몸으로 간다는 거냐?”
설마, 정말로 걱정해 주는 건가? 왜?
“후,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어딜 간다고 그래?”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민폐다. 지금껏 돌봐 준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신세를 진단 말인가. 게다가 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결혼식 전에는 보내 줄 테니 제대로 먹기나 해. 그 몸으로 중간에 또 쓰러지지 싶고.”
역시 이 사람은 모든 걸 알고 있구나. 그런데 어째서? 왜 나 같은 걸 도와주는 거지?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겁니까?”
나는 이런 보살핌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째서.
“글쎄. 변덕이라고 해 두지.”
무슨 말인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뒤돌아서 나가 버린다. 다시 조용해진 침실에 문득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나마 누군가 내 곁에 있다가 사라져서인지 사무치는 외로움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낯선 그 느낌이 의아하기만 했다. 혼자라는 건 내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헌데 어째서 이런 기분인지 모르겠다.
“하아, 바보같이.”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이게 무슨 바보 같은 꼴인지 모르겠다. 내 주제에 욕심으로 기대를 품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또다시 지난 생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타고난 태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게 희망은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이대로 순리에 어긋나지 않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게 좋아.
떠밀면 떠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설사 그 마지막이 두 번 다시 오를 수 없는 까마득한 벼랑 끝이라고 해도 나는 그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만 한다.
여전히 심장은 불안하게 쿵쿵거리고 시야는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다행히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아 안도할 때 얼얼한 뺨에 와 닿은 차가운 손길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빨갛게 부었군. 이렇게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대가 마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사라진다. 차라리 그랬으면. 왜인지 묘한 표정을 짓다가 끝내 작게 욕설을 뱉으며 중얼거리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후드가 벗겨진 상태라는 걸 알고 다급하게 얼굴을 가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갈 건가? 그 몸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이지?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대로 마냥 있을 수 없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섰다가 이내 멈칫거렸다. 뭐지? 이상하게 숨이 가쁘다. 시야도 흐릿하고. 머릿속마저 울리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 순간 사물들이 일그러지며 아찔함이 덮쳐 왔다.
“괜찮아? 이, 이봐, 정신 차려!”
귓가에서 윙윙거리듯 울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보이는 건 새까만 어둠뿐. 스멀스멀 올라오는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여긴 어디일까?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문득 드는 두려움에 몸을 한껏 움츠리다가 곧바로 그조차도 허망하게 느껴져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나는 혼자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둠의 일부로 동화되듯. 그 어떤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서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지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막연히 어둠만을 응시할 때 갑작스럽게 주변이 일렁이기 시작하고 낯익은 장소가 선명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후작의 집무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집무실 안에는 내 아버지라는 사람과 그와 빼다 박은 듯 닮은 형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모인 19살의 내가 있었다.
‘이만큼 키워 줬으면 너도 밥벌이는 해야지. 셀레스턴 공작하고 결혼해라.’
그랬었다. 얼굴도 보기 힘든 사람들이, 가족으로 취급도 해 주지 않았던 사람들이, 본채에는 얼씬도 못 하게 하던 사람들이 어쩐 일로 나를 부르나 했었다. 혹시라도 나를 봐 주는 건가 싶어 내심 기대를 품고 갔었다.
하지만 꺼낸 말은 저거였지. 카일리안 그와 결혼하라는 거. 그때 나는 천방지축 날뛰고 있었고, 나보다 5살이나 많은 그는 이미 젊은 나이로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고 황태자를 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다.
매일같이 파티장을 전전하는 나와는 달리 그런 곳을 싫어하는 그를 나는 소문으로만 접했을 뿐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반발심이 일었지만, 곧바로 흘러나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 같은 것도 쓸모가 있을 때도 있군. 네놈이 무슨 천박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단, 우리 후작가에 피해를 줄 때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명심해라.’
나와 피가 반이 섞인 형이 했던 말이다. 차가운 얼굴을 더욱 굳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친다는 듯이 그렇게 경고했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준비해 오던 일이다. 거부는 일절 용납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알아.’
‘이 문제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곧바로 집무실 밖으로 내쳐졌다. 멍하니 별채로 돌아오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19살의 추운 겨울, 그렇게 내 인생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갈 길이 정해졌다.
나중에야 우연하게 알았지만 그때 후작가는 귀족파와 황제파 두 곳에 다 다리를 걸쳐 놓은 상태였다. 몇 년간 양쪽의 힘을 보며 저울질하다가 결국에는 황제파로 돌아선 것이다.
이미 나 따위는 어디로든 팔려 갈 운명이었다는 말이다.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부했다가는 그나마 내게 해 주던 원조도 끊기고 그대로 후작가에서 내쳐졌을 테니까.
당연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흥청망청했고 귀족으로서 오만한 콧대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 내가 가난한 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돈을 씀으로 내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들이 친구라고 생각했었던 때였다. 그들이 나를 이용하며 뒤로 손가락질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던 때였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됐었다. 그 후 한 달이 지나 그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빛에 반짝이는 살얼음을 세공에 세공을 거쳐 가늘게 뽑아 놓은 것처럼 너무나 눈이 부시게 빛이 나는 은빛의 머릿결에 제일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차가운 살얼음을 한 겹 더 씌워 놓은 듯한 아이스 블루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과 복숭앗빛으로 반짝이는 수려한 입술. 깨끗하면서 하얀 피부와 달리 강인한 턱 선.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어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
마치 신이 빚어 놓은 최상의 조각품처럼. 차갑다 못해 은은한 살기마저 품고 있는 그에게 내 마음을 송두리째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주술이 되어 나를 옭아매는 시작이 되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지?’
결혼하라기에. 한 번쯤은 내 반려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찾아갔었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너를 받아들이지만 그것뿐이다. 내게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라.’
시리디시린 말에도 그저 멍하니 듣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내게 그는 한심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었지.
‘목적이 끝났다면 돌아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식으로 예고도 없이 찾아오지 마라.’
그의 경고대로 해야 했는데. 멍청하게도 나는 그때부터 매일같이 그를 찾아갔었다. 무작정 공작가에 찾아가 그를 만나겠다고 생떼를 부리고 나를 무시하는 공작가 일원의 뺨도 서슴없이 때렸다.
감히, 너희의 주인이 될 나를 무시하느냐고. 주제도 모르고 큰소리를 치고 패악을 부렸었다. 그때마다 그는 치를 떨면서 나를 밀어냈다. 매번 찾아가고 내쳐지고.
나중에는 문조차 열어 주지 않아 공작가 앞에서 패악을 부리다가 곧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붙어 그를 질리게 만들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티장에서 그에 대해 떠들며 얼굴을 붉히는 영애들을 모욕하고 심하면 손찌검까지 하면서 내가 그의 반려라고 당당하게 외쳤었다. 그때는 다른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질투에 눈이 멀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렇게 패악을 부리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오물이라도 보는 듯 피했고, 나중에는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비웃으며 경멸을 퍼부었다.
‘반려?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저따위 망발을 지껄이고 다니는 거야?’
‘핏줄은 못 속인다고, 천박한 그 여자하고 똑같은 쓰레기군.’
‘후작도 골치 아프겠어. 저따위 걸 인간이라고 거둬 먹이려면.’
‘인간은 무슨. 말 못 하는 짐승도 저것보다는 괜찮지.’
상종 못 할 천박한 놈.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 그들은 그렇게 나를 비웃었고 나는 그들의 그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오히려 그들을 비웃었지. 아쉬울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생모의 집안을 모조리 흡수한 후작가의 재력은 대륙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내게도 돈은 언제나 넘쳐났다.
하물며 자신은 그의 반려로 내정되어 있다. 모두가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난 그를 내가 곧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안 그래도 주제를 모르던 콧대는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았다.
그럴수록 더 치를 떤다는 것도 모르는 채. 멍청하게 혼자만의 기분에 빠져 앞뒤 구분 없이 설쳤었다. 왜 그렇게도 멍청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도 구분할 잘잘못을 왜 나는 알지 못했을까?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오만하다 못해 거만했던 나는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것도 모른 채 살짝만 만져도 부서지는 썩은 울타리 안에서 좋다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 그 울타리는 부서졌다. 허망하고 처참하게.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나 하나로도 부족해 수많은 사람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 그들까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니 이런 고통쯤은 당연하리라. 대가. 죄를 지었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애초에 나는 거부할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것이다.
이미 각오한 일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두려운 건 어째서일까? 이제야 혼자인 게 두렵고 앞으로 치러야 할 죄의 대가가 너무도 버거워 더 두렵다. 이런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나약한 나 자신에 넌더리가 났지만 무엇 하나도 자신이 없어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어둠이 일렁이고 완전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수십, 아니 수백인가. 일렁이는 형체가 점점 기괴하게 뒤틀려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숨소리를 죽였다.
알고 있다. 저들이 누구인지. 당장에라도 나 하나쯤 갈기갈기 찢어 죽일 듯한 악의와 분노를 온몸으로 두르고 경멸을 쏟아 내는 그들은 나 때문에 허무하게 죽어 간 이들이었다.
‘너 때문에! 너 같은 것 때문에 왜 우리가 죽어야 하지?’
미안. 미안합니다.
‘우리는 다 죽여 놓고 너는 왜 살아 있어? 죽어! 죽어 버리란 말이야!’
나도 죽고 싶어. 죽고 싶은데 죽을 수가 없어.
‘너 같은 건 불행해져야 해.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절망을 맛봐.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고 까마득한 절망에 처절하게 죽어가!’
그래. 그렇게 될 것이다. 행복? 그런 가당치도 않은 꿈은 꾸지 않는다. 무슨 염치로 행복을 꿈꾼단 말인가. 이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끝없이 절망하고 불행해져 끝내 처절하게 죽어 버려도 상관없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리라. 이미 각오한 바 감당해야겠지. 어느새 다시 나타난 수많은 손이 온몸을 더듬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살점을 뭉텅이로 뜯어내는 고통에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검은 악령들이 나를 비웃으며 에워싼다.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 섬뜩한 광기와 같은 소름 끼치는 광소를 터트린다. 그러다가도 또다시 나를 원망하며 소리를 내지른다.
‘용서 못 해! 이 악마! 용서 못 해!’
그들이 말한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악령의 모습으로. 듬성듬성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고 흘러나오는 피를 빨아먹는 악령들에게 둘러싸인 내 모습을 보며 그들은 통쾌한 듯 비웃었다.
오독오독 무언가를 씹는 소리에 간신히 시선을 내리자 발가락이 아귀처럼 벌린 입안으로 사라지며 뼈째로 우두둑 씹혀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기괴한 모습과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짐승들의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나갔던 그때처럼.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에 몸부림쳤지만, 그조차도 손쉽게 악령들에게 삼켜지고 말았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괴로움에 허덕이고 고통에 비명을 질러도 누구 하나 내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 것처럼. 야금야금 내 몸을 먹어 가는 악령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피를 토하며 외치고 있었다.
* * *
밤새 악몽에 시달려서인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가 깨어난 것인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습관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눈앞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던 의식이 얼굴 위로 쏟아지는 밝은 빛에 차츰 선명해지고 주변의 사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곳. 이곳은 어디지?
몸은 또 왜 이렇게 무겁고. 이상하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멍하니 침대가로 쳐진 휘장만 바라보고 있자 곧 인기척이 들리고 휘장이 젖혀지며 한 사람이 보였다.
“깨어났나?”
테아칸. 정보 길드의 주인. 그가 왜?
“여긴…… 어디입니까?”
“내 침실. 너 기절한 지 사흘이나 지났다.”
내가 기절했다고? 그것도 사흘씩이나. 어쩐지 어지럽고 몸이 무거웠던 이유가 그래서였구나. 그런데 뭐지? 이 옷은?
“저기, 옷이 바뀌었는데.”
“그거? 내 옷이다. 땀을 하도 흘려서 갈아입혔다.”
이 사람이 직접 갈아입혔다고? 맙소사. 기절은 왜 해서. 그나저나 어쩐다. 지금은 도저히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있자니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민폐 끼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힘겹게 버둥거리다가 곧 몸을 누르고 땀에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착각인가. 잠시였지만 마치 다정하게 걱정하는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생경한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같이 그럴 리가 없잖아.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니.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을. 괜한 생각이라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자 그런 내 반응을 달리 받아들인 듯 그가 나직하게 혀를 차며 말했다.
“얼굴 보이지 않고 진맥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닌데.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내 얼굴이 알려져 봐야 나는 욕 한 번 더 먹으면 그만이지만 이 사람한테는 그것도 피해겠지. 나와 어울려서 좋은 소리 못 들을 테니까.
“그런데 그 몸으로 잘도 움직였군. 너, 생각이 없는 거냐? 지금 몸 상태가 어떤 줄 알아?”
화난 걸까? 왜? 아, 내가 이곳에 있어서. 그러고 보니 깨어나고도 고맙다는 인사도 안 했다는 생각에 당황해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왠지 더 화가 난 듯한 그가 내 양어깨를 눌러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움직이지 마라. 고열에 영양실조까지 더해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기가 허해졌다는군.”
“에?”
“뭐야, 그 멍청한 반응은? 너 설마 몸 상태도 몰랐던 거냐?”
몰랐다. 어쩐지 어지러운 것 같더라니, 열이 있었구나. 그런데 영양실조라니? 그렇게까지 나빠진 건가. 하긴, 되돌아오고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서 식사가 들어와도 거의 물리다시피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억지로라도 먹으려고 하면 목구멍이 따갑고 속에서 거부반응부터 일어나는 바람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먹지 않은 것이지만. 확실히 문제일지도. 이래서야 결혼식은 어찌 치르려고.
차라리 토해 내더라도 먹을걸. 몸이 점점 나빠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영양실조까지 갔을 줄은 생각 못 했는데. 그러고 보면 몸도 마른 것 같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 현기증이 나고 기운이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구나.
“후작가의 귀한 도련님이 영양실조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아 힘겹게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찌푸려졌지만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초면에 폐를 끼쳤습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추후에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어딜 가려고 일어나?”
“예? 그야, 집에 가려고.”
당연히 집에 돌아가는 게 맞는데 그는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그 몸으로 간다는 거냐?”
설마, 정말로 걱정해 주는 건가? 왜?
“후,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어딜 간다고 그래?”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민폐다. 지금껏 돌봐 준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신세를 진단 말인가. 게다가 돌아가서 할 일이 있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결혼식 전에는 보내 줄 테니 제대로 먹기나 해. 그 몸으로 중간에 또 쓰러지지 싶고.”
역시 이 사람은 모든 걸 알고 있구나. 그런데 어째서? 왜 나 같은 걸 도와주는 거지?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겁니까?”
나는 이런 보살핌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째서.
“글쎄. 변덕이라고 해 두지.”
무슨 말인지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더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뒤돌아서 나가 버린다. 다시 조용해진 침실에 문득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나마 누군가 내 곁에 있다가 사라져서인지 사무치는 외로움에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낯선 그 느낌이 의아하기만 했다. 혼자라는 건 내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헌데 어째서 이런 기분인지 모르겠다.
“하아, 바보같이.”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으면서. 이게 무슨 바보 같은 꼴인지 모르겠다. 내 주제에 욕심으로 기대를 품기 시작한다면 어쩌면 또다시 지난 생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타고난 태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게 희망은 독약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이대로 순리에 어긋나지 않고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게 좋아.
떠밀면 떠미는 대로 당기면 당기는 대로. 설사 그 마지막이 두 번 다시 오를 수 없는 까마득한 벼랑 끝이라고 해도 나는 그 어떤 대가라도 치러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