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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세상이 나라는 인간을 잊을 때까지, 모든 일이 해결되고 비로소 그들 곁을 떠날 때까지 조용히 죽은 듯이 살아가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그게 맞아. 그러니 괜찮다.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흘리는 이 눈물도 그저 내가 바보라서 그래. 어차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절망하고 처절하게 괴로워하다가 죽기를 바랄 테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 내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그 악몽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견디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죽음으로 도망치겠지. 내겐 죽음의 공포보다 살아가야 하는 지금이 더 두렵기만 하니까. 죽는다는 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선택일 것이다.
“또 울고 있었나?”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들어왔는지 그가 침대가에 서 있었다. 그것도 손에 죽 그릇을 들고.
“먹어라. 자는 사이 어느 정도 치료는 했다지만 제대로 먹지 못하면 차도가 없다.”
“고맙습니다.”
입안이 텁텁해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마냥 이대로 있을 수도 없어 그가 내미는 대로 죽 그릇을 받아 들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죽이 마치 돌을 씹는 것 같은 느낌. 또다시 목이 따끔거리고 속이 더부룩해지는 통에 토기가 올라올 것 같은 걸 꾹 눌러 참고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고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 내게서 죽 그릇을 치우고 마치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더니 품 안에서 푸른 빛깔의 액체가 들은 작은 병을 내밀었다. 뭘까? 약이라기에는 뭔가 좀 이상한데.
“이게 뭡니까?”
“수면제.”
“예?”
수면제라니. 왜 이런 걸?
“의원 말로는 다른 약은 필요 없고 먹는 것하고 숙면이 최고라더군.”
아무리 그래도 사흘간이나 기절하고 일어난 사람한테 수면제는 좀.
“특별한 약재도 섞어 몸에 좋은 거니 마셔라.”
어쩌지? 그저 조금 쉬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그렇다고 안 먹자니 신경 써 준 이 사람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하는 사이 이미 약병 마개를 따서 내미는 바람에 마지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 마셨다.
“다시 누워라. 한숨 자고 나면 한결 괜찮아질 거다.”
나를 부드럽게 눕혀 주고 시트를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고도 옆에 앉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내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당황스럽다. 어째서?
이 사람은 처음 보는 내게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걸까? 그도 이미 내 소문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텐데. 나만 보면 모두가 치를 떨며 피해 버린다. 옆에 오는 것도 끔찍하다는 듯이.
혹시라도 눈이 마주쳐 시비라도 붙을세라 시선을 피하기 일쑤였고, 겉으로는 마지못해 웃으면서도 그 눈에는 감추지 못한 경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오히려 뭐랄까.
처음 봤을 때 그 강인한 눈빛이 아니라, 지금은 담갈색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다. 마치 따뜻한 햇살 아래 잔잔한 수면처럼. 또 어떻게 보면 따뜻하게 감싸는 것 같이.
“자라니까 뭘 그렇게 보는 거지?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예?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착각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어쩌려고 이러는지, 다짐해 놓고도 금세 풀어지는 대책 없는 마음에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다시 한 번 그를 향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고맙습니다, 테아칸 님.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과연 내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무슨 의도가 있든 순수한 선의에서 한 행동이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아 본 나로서는 그의 행동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마음 한편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확실히 변했군. 소문과는 전혀 달라.”
왜 갑자기 변해 버렸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테지. 알고 있다. 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기에 호기심과 기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외면하며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비참하게 죽었다가 깨어나서 변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제부터라도 달라지고 싶다고 한들 순수하게 믿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해를 바라서는 안 되니까.
이대로가 좋다. 앞으로 마주할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막막하고 두렵지만, 자격을 잃은 이상은 그저 그들이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변명한들 그 또한 추할뿐이다. 그렇겠지. 알고는 있는데. 괜스레 씁쓸해지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손을 마주 잡아 오는 커다란 손에 움찔거리며 다시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웬만하면 그 표정은 짓지 마라. 꼬맹이 주제에 세상 다 살아 본 노인네 같단 말이다.”
짐짓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는 말투에 피식 웃고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비록 길지 않은 28년의 생이었지만, 그 안에서 깨달은 건 그보다 수십 배의 삶을 되돌아볼 만한 회의였으니까.
“그만 자라. 생각이 많으면 꿈자리 사납다.”
그러면서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느낌에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서일까? 왠지 이번만큼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확실히 싫지 않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다가 이내 몽롱해지는 의식과 함께 가슴을 토닥토닥하는 손길을 느끼며 차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시 되돌아오고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한결 가뿐해진 몸으로 샤워를 하고 테아칸이 새로 사다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흘하고도 반나절 만에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결혼식이 당장 내일이라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그런 나를 보고 한숨을 내쉰 그가 다가와 젖은 머리를 정돈해 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밤에 가라니까 뭘 그렇게 서둘러?”
“말도 없이 나와서 아마도 지금쯤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그 걱정도 다른 의미의 걱정이겠지만. 새삼 그들의 반응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짓자 눈치 빠른 그가 내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가볍게 핀잔을 주듯 투덜거렸다.
“또 그런다. 그런 웃음은 안 어울린다고 했지?”
“고맙습니다, 테아칸.”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든가. 뭐 충분히 들어줄 만한 소원으로 할 테니까 너무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어.”
“네,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이라면 그리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기분이 좋은 듯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웃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이상한 사람. 그리고 편안한 사람. 그래서 더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내게 이렇듯 잘해 주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별달리 요구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편안한 휴식처가 돼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한 기분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불거지듯이 신기하고 낯설고 불안하고 괜스레 초조해진다. 그러면서도 왠지 싫지 않은 기분.
아니,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따뜻하다. 처음 받아 보는 관심과 편안함이 이렇게나 죽어 버린 마음을 두드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약을 먹고 다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설마하니 악몽을 꾸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이 정말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그런데 되돌아오고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테아칸 그가 내 곁에 있어 줘서일까, 아니면 잠든 내내 내 손을 잡아 줘서일까. 근 하루를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고열도 내리고 몸도 가뿐해 가벼운 음식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테아칸 덕분이다. 그래서 더 고마운 사람. 언젠가는 그 보답을 해야겠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맴도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욕심이다.
한 번 맛본 이 기분을 내가 쉽게 놓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야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앞날을 생각하자면 뻔히 예상되지 않는가.
이런 편안함은 내게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젠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니까. 어떻게든 버티려면 흐트러지고 허물어진 마음의 벽을 다시 단단히 해야만 한다.
“공간 주머니에 오늘까지 들어온 정보도 같이 넣었다. 양이 많으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훑어봐. 꽤 소득이 있을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겁니까?”
“글쎄. 여전히 나도 모르겠네. 정 미안하면 말이야. 나와 단독으로 거래하는 건 어때?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전적으로 도와주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래 보여도 이곳이 정보 길드 중 최고로 쳐 준다고. 필요하다면 귀족파에 들어가는 정보를 조작해 줄 수도 있다. 정보라는 건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그 어떤 무기보다 날카로울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라 할 말을 잃었다. 거래라는 건 얼마든지 가격만 맞는다면 가능하지만 정보를 조작해 준다는 말은 경악할 조건이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귀족파의 술수를 차단하고 오히려 역으로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정보라는 건 값어치를 따질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를 리도 없으면서 왜?
도대체 내 무엇을 보고 말도 안 되는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걸까? 돈이야 다른 사람에게 얼마든지 받고 팔면 그만이고, 나와 연결돼 봐야 그에게 피해가 가면 갔지, 이득이 갈 일은 없지 않은가.
“대체 왜?”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같다. 뭐 굳이 대답하자면 왠지 너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 젠장, 몰라. 나도 모르겠는데 네가 신경 쓰여. 솔직히 귀족파 놈들 꼴도 보기 싫기도 하고.”
내가 신경 쓰인다니? 더더욱 알 수 없는 말에 혹시라도 다른 의도가 있는지 그의 기색을 살펴봐도 오히려 의문만 더해 가는 것 같아 한숨만 내쉬었다.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더 모를 사람이다.
“어쩔 거야? 거래를 할래, 말래?”
“하겠습니다. 그 거래. 저와 단독으로 해 주시겠습니까?”
“좋아. 앞으로 들어오는 정보 분류는 내가 직접 해서 찾아가지.”
에? 찾아온다니. 어디로?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잠입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 없고, 우선 그러자면 이것부터 받으라고.”
“이게 뭡니까?”
겉으로 봐서는 귀걸이인 건 알겠는데. 단순히 귀걸이를 주지는 않을 테고, 마법 용품인가?
“그걸로 네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위험한 일이 있으면 밟아 깨트려. 그러면 네가 어디에 있든 내 곁으로 소환될 거야. 물론 그건 일회용이지만.”
그러면서 성큼 다가와 내 귀에 귀걸이를 달아 고정시키는 그를 보며 당황스러움에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 성급하게 말을 꺼냈다.
“이, 이런 귀한 걸 그냥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격이 얼마인지 알려 주시면 값을 치르겠습니다.”
“특별히 괴짜 마법사 친구 놈이 만들어 준 거라 값을 매기기에도 어정쩡해. 그러니 그냥 잔말 말고 착용하도록.”
“하지만 그래도…….”
“시끄럽고. 뒷문으로 나가는 길을 안내할 테니 따라와.”
아무리 친구가 만들어 준 거라고 해도 값이 비쌀 텐데. 일반적인 마법 용품도 아니고 위치마법이 걸려 있다면 최소한 못 잡아도 5크온은 될 테고 거기다 소환마법까지 더한다면 몇 배로 가격이 뛸 것이다.
그런 걸 그냥 준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움에 우물쭈물하자 그런 내 손을 잡고 그대로 침실을 나가 밖으로 통하는 출구에 도달하고야 내 로브를 정리해 준다.
“그만 가 봐. 앞으로 자주 보자고.”
“아, 저기 고맙습니다, 테아칸.”
“고마우면 다음에 볼 때는 신경 안 쓰이게 살이나 좀 찌지? 쯧, 너무 말랐어.”
마지막까지 투덜거리며 할 말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문득 피식 흘러나오는 웃음에 움찔거리며 표정을 굳혔다.
유독 편안하게 대해 줘서인지 이상하게 그를 만나고 웃음이 많아졌다. 자격도 없는 내가 웃음이라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내젓고 호흡을 가다듬고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처음 들어올 때 골목보다 더 좁은 골목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걸음을 재촉해 한참만에야 꼬불꼬불한 골목을 빠져나오자 바로 시장으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
갑작스럽게 번잡해진 거리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광장 주변에 있는 서점으로 향하고, 가는 도중 문서를 취급하는 곳에 들러 이혼장에 쓸 서류를 사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을 위해 미리 서류를 작성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사긴 샀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찌할 수 없어 괜스레 울적해지는 기분에 힘없이 걷다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달라질 것도 없는데 이런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처음 다짐한 대로 마음을 견고히 하기만 하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새삼 다시 각오를 다지고 서점에 들러 책 열 권을 사 공간 주머니에 넣고 빠르게 후작가를 향해 움직였다. 마차를 타고 가면 금방이겠지만, 뒷문으로 들어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
그나마 한결 몸이 가뿐해져서인지 나올 때보다 시간을 단축해 후작가 별채에 도착하자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평소처럼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요함만이 맴돌았다.
그 조용함에 나도 모르게 안도하며 뒤뜰을 나와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하인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흠칫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다급하게 어딘가로 뛰어갔다.
아무래도 본채로 가는 것 같은데. 그건 곧 내가 없어진 걸 후작님이나 대공자도 알고 있다는 말이고. 한 소리 듣겠구나 싶어 한숨을 내쉬고 침실로 들어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제 곧 호출이 올 거로 생각하고 기다리자는 생각에서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다시 나타난 하인에게 말을 듣고 지난 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세 번째로 후작가 집무실로 향했다.
가는 사이 만나는 기사들과 후작가 일원들의 눈초리가 경멸을 띠고 매섭게 파고들었지만,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각오를 해서인지 딱히 그들의 반응에 별다른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흘리고 집무실 앞에 도착하고야 나직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노크를 했다. 찰나가 지나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자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쓰디쓴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부르셨습니까, 후작님.”
피를 나눈 사이지만 나는 이들을 가족으로 부르지 못한다. 어릴 때 멋모르고 아버지라 불렀다가 호되게 뺨을 맞고 경멸을 받았었지. 처음에는 그것이 그리도 억울했지만 나중에 사정을 알고부터는 나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버지가 아닌 후작님. 형님이 아닌 대공자님. 이들과 나 사이에 선은 그리도 뚜렷하다. 그 사실에 새삼 아플 것도 없어 평소보다 더 표정을 차갑게 굳히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최대한 담담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은 미처 고개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성큼 다가와 뺨을 매섭게 후려치는 커다란 손에 속절없이 깨지고 말았다.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식도 못 할 만큼 시야가 아찔하게 일렁거렸다.
구역질이 치밀 듯이 속이 울렁거리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그 때문에 한참이나 멍하니 정신을 못 차리다가 몽롱한 의식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제야 비틀비틀 구석에 처박힌 몸을 일으켰다.
“천박한 놈! 네놈이 지금 제정신이냐? 아무리 방탕해도 그렇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사라져?”
중요한 일. 그렇지. 이들에게 내 인생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저 나라는 연결 고리로 인해 들어올 이익만이 중요할 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죄송합니다, 후작님.”
“만약 공작가에 가서도 이따위로 행동했다간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쯧쯧, 멍청한 놈.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라!”
더 이상 상종하기도 싫다는 듯 내치는 축객령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나오자 본채의 집사와 기사들이 나를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한 눈초리로 응시해 왔다.
그래도 반 핏줄이라고 마지못해 고개를 슬쩍 숙이는 그들을 지나쳐 본채에서 벗어날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과 비웃음 소리에 누군가 목을 콱 틀어쥔 듯 숨이 막혀 왔다.
이렇게도 뻔히 보이는데. 왜 그때는 몰랐을까?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피부에 날카롭게 와 박히는 적대감이 이렇게나 생생한데 어째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는지.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주제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었는지 모르겠다. 결국에는 그렇게 비참하게 무너질 거면서. 아등바등 발악하더니 꼴좋구나, 멍청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