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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3장. 정보상 테아칸
침실 벽에 설치한 마법구에서 불이 반짝이며 나를 찾아온 손님이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키에 머리끝까지 후드를 눌러쓴 이가 천천히 뒤돌아봤다.
깊게 눌러쓴 후드 때문에 보이는 건 붉은 입술이 전부다. 그나마 소매 끝으로 살짝 보이는 새하얗고 모난 곳 하나 없는 자그마한 손에 처음에는 언뜻 어린 귀족 영애로 생각했다. 한 번 들었던 귀에 익은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가 이곳의 주인입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슈에리 론 그레데스, 그 망나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청각이 예민한 탓에 한 번 들었던 목소리는 어지간해서는 모두 기억하는 편이다.
특히 상대가 그레데스 후작가 망나니 공자라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 기가 막힐 노릇이군. 멀쩡히 눈 뜨고 꿈꾸는 것도 아닐 테고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 소문 무성한 주인공이 손님으로 오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헌데 이상하군. 저번에 우연히 들었을 때는 좀 더 높고 카랑카랑해 앙칼진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어쩐지 오늘은 지나치게 차분한 느낌? 물론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여전한 것 같지만. 왠지 소문하고는 분위기도 다른 것 같고. 뭐 그거야 알아보면 되는 일, 우선 장단이나 맞춰 볼까?
“흠, 목소리가 맑고 앳된 걸 봐서는 성인식 전후의 귀한 손님이군. 그래서 무슨 정보를 원하시나?”
내 유들유들한 말투에 소문대로라면 발끈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가만히 시선을 맞춰 오더니 다짜고짜 다섯 개의 주머니를 꺼내 놓는다.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로 봐서는 어림잡아 50크온. 역시 소문대로 돈질 하나는 화끈하다.
“호오, 어린 손님이 제법이야. 이만한 가격이라면 내 약점까지도 팔아 치울 수 있겠는데?”
대답이 없다. 뭐야 이거. 반응 좀 보려고 했더니 돈을 더 얹어? 그것도 두 배로. 대체 뭐야, 이 녀석. 아무리 소문은 들었어도 100크온이라는 거금을 망설임 없이 내놓는단 말인가.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뭘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얻으려고?
“보통이 아니군. 뭘 원하는 거지?”
“지금 돌아가는 정세의 모든 변화, 상세한 움직임.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 서면으로 제출해 주십시오.”
이게 무슨. 이 녀석 소문의 그 녀석이 맞아? 매일같이 파티장을 전전하고 찌질한 귀족 놈들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일에 이용당하는 그 멍청이가 맞느냐고? 말도 안 돼.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도 없고. 약 한 달 전에도 한바탕 패악을 부렸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물론 한동안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지만, 그것으로 판단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설마 내가 착각한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지금의 이 변화는 뭐란 말인가. 그때 봤던 그놈은 절대 이런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소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하는 것만 봐도 딱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에 지나지 않았었다. 즉, 이런 정보에 관심을 둘 만한 머리도 없거니와 상황 파악 능력도 없다는 말이다. 헌데 관심을 가진다?
그것도 소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뭔가가 있어. 무슨 이유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호기심은 생기는군.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망나니기는 하지만 제도의 경제 반을 휘어잡은 그레데스 후작가의 아들이자 그 문제의 셀레스턴 공작과 결혼할 이 녀석은 충분히 변수로 적용될 가치가 있거든.
“서면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줄 수 있지만 방대한 양이다. 상관없나?”
“상관없습니다.”
“좋아. 기다리도록.”
어차피 정보야 어디에 넘겨도 상관없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볼스몬 제국 귀족 놈들은 재수가 없기도 하고. 오랜만에 호기심도 동하는 일이라 선심 쓰는 기분으로 따끈따끈한 특급 정보까지 포함해 오늘 들어온 정보를 모두 넘겼다.
덤으로 공간 주머니와 특별한 서비스로 나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영상구까지 내밀자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뭣 때문이냐고? 이걸 계기로 너를 가까이에서 관찰 좀 하려고.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대충 대답하자 가만히 내 기색을 살피던 녀석이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 정보들을 챙겨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씩 웃으며 앞을 막아섰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벌써 가면 섭섭하지.
“앞으로 거래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난 이곳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테아칸이다. 풀 네임은 좀 더 알게 된다면 알려 주지.”
일부러 풀 네임을 들먹이자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생각 끝에 점점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으면 뭐해. 순진하게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정보 길드를 운영하려면 손님에 대한 비밀보장은 필수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아,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한 가지는 알려 주지. 나는 귀족파와 전혀 상관이 없다.”
뭐 이 정도까지 말해 줬으면 더 의심하지는 않겠지 싶어 오랜만에 즐거워지는 기분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녀석의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미 정체를 알아봤다는 걸 말했다.
의외로 순진한 면도 재미있고 소문과는 전혀 다른 녀석의 차분한 태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흥미를 느껴서이다. 맹세코 그것 외에는 별 뜻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젠장! 왜 그러는 거냐고 갑자기? 이봐! 정신 차려!”
처음에는 눈에 띄게 온몸을 굳히고 파들파들 떨어 대더니 한순간 흐느적거리는 녀석을 아무리 흔들어도 멍하니 정신이라도 나간 듯해 다급하게 뺨을 후려쳐 버렸다.
꽤 힘이 들어가 버렸는지 후드가 벗겨지고, 힘없이 비틀거리는 녀석의 몸을 받쳐 안았다가 진심으로 놀랐다. 화려한 불꽃같은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 흐린 환상을 보는 듯한 자색의 눈동자.
제국의 꽃에 비유할 정도로 최고의 미인이라더니. 맙소사. 실제 가까이에서 본 녀석의 얼굴은 순간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젠장, 심장이야. 아니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이봐, 또 정신 잃으면 곤란해. 나 참, 서서 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봤군.”
“아!”
“다행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군.”
다행은 다행인데. 얼굴이 퉁퉁 부었네. 이렇게까지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이 녀석 뭔가 위험해.
“빨갛게 부었군. 이렇게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대가 마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왠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게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이 몸으로 왜 찾아온 거냐고. 신경 쓰이게.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돈벌이니 굳이 실례는 아니지만. 뭐야, 그 몸으로 가려는 건가? 설마 이 녀석 자기 몸 상태도 모르는 거 아니야?
“갈 건가? 그 몸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은데.”
모른다. 이 녀석 지금 자기 몸이 어떤지도 몰라.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고집스럽게 돌아서더니 미처 한 발도 떼기 전에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녀석을 다급하게 안아 부축했다.
“이, 이봐! 아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런 몸으로 가긴 어딜 간다고. 미련한 놈. 황당한 마음에 혀를 차다가 그대로 녀석을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넓은 침대에 폭 파묻히듯 누워 있는 녀석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미친 건가.”
다른 놈들은 눈앞에서 죽어도 신경 안 썼는데 왜 이 녀석은 그게 안 되느냐고? 소문과는 다른 분위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해. 그렇게 죽자 사자 쫓아다니던 공작한테도 안 가고. 매일같이 전전하던 파티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봐야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이지만, 평소 이 녀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혹시 아팠다든지, 죽을병에라도 걸렸다든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후작가에 심어 놓은 놈들에게 특별한 변화가 없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고,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그런 병에 걸렸다면 일을 추진할 수는 없지. 아니야. 후작 그 냉철한 인간이라면 가능할지도.
어차피 결혼 자체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데다 평소에도 자식 취급은커녕 인간으로도 안 보는 것 같던데. 설사 병에 걸렸다고 이익을 포기할 인간들이 아니다. 후작도, 그 공작도.
“쳇, 나쁜 새끼들.”
아마 이 녀석이 결혼 후에 당장 죽는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할걸. 오히려 처치 곤란한 게 사라졌다고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결혼한 순간부터 거래는 이루어질 테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게다가 공작한테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가만 보면 이 녀석도 어지간한 불행은 다 타고났군. 부모 복도 없어 반려 복도 없어, 그나마 볼만한 건 유일하게 얼굴이 전부인데.
“영혼을 홀리는 마녀라더니.”
외모만 봐서는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일찍이 대륙을 싸돌아다니면서 이 녀석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못 봤으니까. 그럼 뭐야. 내가 홀린 거?
“그럴 리가.”
하여간 이상한 놈. 왜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서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기에도 찝찝하고 의원을 불러 놓고 옷이라도 갈아입힐 생각에 로브를 벗겨 냈다.
아무런 장식도, 보석도 달리지 않은 검은색 옷차림. 보고로는 항상 화려한 색상에 보석까지 치렁치렁 달고 다녀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든다고 하던데, 이것도 달라진 부분인가.
뭐 그거야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뭘 입혀야 하나 잠시간 고민하다가 잠옷을 입히기에는 체격 차이가 심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흰색 셔츠를 입히려는데 뭐야 이 녀석.
“왜 이렇게 말랐어?”
말랐다. 그것도 조금만 힘을 줘도 뚝 부러질 것같이 뼈밖에 안 남았다. 정말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보기 좋게 물이 오른 상태였는데.
물론 그것도 잠깐이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영애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모습에 질려서 돌아서 버렸지만. 고작 한 달 사이에 이렇게나 마른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아사 직전까지 쫄쫄 굶는다면 몰라도. 그렇다고 돈질도 화끈하게 하는 녀석이 먹을 게 없어서 굶은 건 아닐 테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괜한 짓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에 투덜거리다가 곧 들려오는 노크 소리와 의원이 왔다는 말에 다급하게 셔츠를 입히고 돌아서려다가 멈칫거리며 휘장을 쳐 버렸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현재 이 녀석은 이곳 볼스몬 제국에서 제일 유명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의원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자칫 귀족파의 표적이 돼 버린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 정보 길드에 녀석이 있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녀석의 팔만 침대 밖으로 꺼내 놓고 들어온 의원을 다그치자 많이 황당한가 보다.
“흐음, 기절은 아무래도 기가 약해진 상태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지금 현재 가장 시급한 건 먹는 겁니다.”
“뭐?”
“영양실조입니다. 그 때문에 열이 나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아, 영양실조? 길거리 천민도 안 걸린다는 그 영양실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후작가의 차남이 영양실조라니. 돈도 남아도는 놈이 그런 웃기지도 않는 병에 걸렸단 말인가.
“황당하네. 확실해? 혹시 다른 병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몸이 약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현재로서는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우선 열을 내릴 처방을 해 드릴 테니 푹 자고 일어나면 제대로 먹이기나 하십시오. 그리고 숙면을 취하는 게 회복에 더 좋습니다.”
억울하다. 마치 먹는 걸로 치사하게 사람을 이 지경까지 굶겼느냐는 듯 바라보는 의원의 타박하는 눈길에 순간 성질이 확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쫓아 버렸다.
내가 굶긴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하여간 이 녀석 때문에 오늘 별짓을 다 해 보네. 마음 같아서는 확 쥐어박고 싶지만, 차마 아픈 사람한테 그럴 수는 없고.
의원이 주고 간 약을 조금씩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 주자 한결 편안해졌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는 녀석의 표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조금은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악몽이라도 꾸는 듯 좁혀지는 미간과 힘겹게 앓는 소리에 괜스레 불안해져 녀석의 옆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그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평소 좋은 성격이냐? 말도 안 되지. 소중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람한테 관심도 없었는데 좋긴 지랄.
아마 내 이런 모습을 그 인간들이 봤다가는 죽을 때가 됐다고 놀려 먹을 테지. 그러니까 결론은 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거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다른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관심 밖이지만, 내가 봤을 때도 이 녀석은 도저히 좋게 봐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질당하고 죽어 버리라고 악담을 퍼부어도 당연하다 여겼지.
그 정도로 이 녀석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골빈 놈들은 딱 질색이거든. 멍청하게 이리저리 이용당하면서 그것도 모르고 잘난 척 큰소리치고 사람 무시하고 패악 부리는 허영 덩어리.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우면 뭐하나. 성격이 그 모양인데 누군들 좋아하려고. 사람들이 이 녀석만 보면 치를 떨면서 피해 버리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문제는 그런 놈을 내가 지금 보살피고 있다는 거잖아?
“끙, 돌겠네.”
미친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양심으로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고 신경 꺼 버리면 그만인데. 진짜 제대로 미쳐 버렸는지 내가 한 짓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녀석이 깨어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초조하게 옆에서 끙끙거리지를 않나,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찾아온 고가 손님한테도 특급 정보는 고이 숨겨두고 대충 알려 줘서 보내지를 않나.
안절부절못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미쳤지. 그나마 다행히 더 이상 열도 오르지 않는 것 같아 안심하고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돌아오자 깨어난 녀석이 멍하니 시선을 맞춰 왔다.
아무리 봐도 저 눈동자는 신비롭단 말이야. 그런데 왜 우는 거지? 또 어디가 아픈가 싶어 불안하게 바라보자 옷이 바뀐 걸 그제야 알았는지 당황하며 묻는 말에 태연하게 답했다.
“그거? 내 옷이다. 땀을 하도 흘려서 갈아입혔다.”
어이! 그렇게 놀라지 말라고. 아픈 사람 붙잡고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체, 기껏 돌봐 줬더니.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몸을 누르고 땀에 젖은 머릿결을 습관처럼 쓰다듬어 주자 흠칫!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내가 뭔 짓을 했다고! 되돌아오는 과한 반응에 기분이 상해 작게 투덜거리다가 녀석의 한숨 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나직하게 혀를 차고 말했다. 하여간 별걱정을 다 해.
“얼굴 보이지 않고 진맥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별 웃기지도 않는 걸 걱정한다 싶어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또다시 일어나려는 녀석의 어깨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도대체 이 몸으로 왜 자꾸 움직이는 건지.
기가 막혀 투덜거리다가 녀석의 의아한 표정에 설마 이 녀석 자기 몸 상태도 모르는 건가 싶어 물었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본다. 역시 몰랐군. 후작가의 차남이 영양실조라.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마음에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미처 막기도 전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을 보고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고집인지 움직이지 말라니까 거 더럽게 말 안 듣네.
“초면에 폐를 끼쳤습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추후에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어딜 가려고 일어나?”
“예? 그야, 집에 가려고.”
“지금 그 몸으로 간다는 거냐?”
조그마한 게 고집은.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어딜 간다고 그래?”
“하지만…….”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결혼식 전에는 보내 줄 테니 제대로 먹기나 해. 그 몸으로 중간에 또 쓰러지지 말고.”
보나 마나 뭘 걱정하는지는 뻔하고 안심하라는 의미로 말해 주자 놀란 듯 살짝 커졌던 눈을 스르르 접으며 잠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역시 저 눈은 위험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단 말이야.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겁니까?”
“글쎄. 변덕이라고 해 두지.”
그 외에는 나도 도저히 설명할 말이 없어 얼떨결에 대답을 피해서 도망치듯 침실을 나와 버렸다. 그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 버렸지만, 이왕 나온 거 녀석이 먹을 죽이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장을 닦달했다.
3장. 정보상 테아칸
침실 벽에 설치한 마법구에서 불이 반짝이며 나를 찾아온 손님이 왔다는 신호를 보냈다. 몸을 일으켜 집무실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키에 머리끝까지 후드를 눌러쓴 이가 천천히 뒤돌아봤다.
깊게 눌러쓴 후드 때문에 보이는 건 붉은 입술이 전부다. 그나마 소매 끝으로 살짝 보이는 새하얗고 모난 곳 하나 없는 자그마한 손에 처음에는 언뜻 어린 귀족 영애로 생각했다. 한 번 들었던 귀에 익은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대가 이곳의 주인입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슈에리 론 그레데스, 그 망나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청각이 예민한 탓에 한 번 들었던 목소리는 어지간해서는 모두 기억하는 편이다.
특히 상대가 그레데스 후작가 망나니 공자라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지. 그런데 기가 막힐 노릇이군. 멀쩡히 눈 뜨고 꿈꾸는 것도 아닐 테고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 소문 무성한 주인공이 손님으로 오다니.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만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헌데 이상하군. 저번에 우연히 들었을 때는 좀 더 높고 카랑카랑해 앙칼진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어쩐지 오늘은 지나치게 차분한 느낌? 물론 특유의 맑은 목소리는 여전한 것 같지만. 왠지 소문하고는 분위기도 다른 것 같고. 뭐 그거야 알아보면 되는 일, 우선 장단이나 맞춰 볼까?
“흠, 목소리가 맑고 앳된 걸 봐서는 성인식 전후의 귀한 손님이군. 그래서 무슨 정보를 원하시나?”
내 유들유들한 말투에 소문대로라면 발끈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가만히 시선을 맞춰 오더니 다짜고짜 다섯 개의 주머니를 꺼내 놓는다.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로 봐서는 어림잡아 50크온. 역시 소문대로 돈질 하나는 화끈하다.
“호오, 어린 손님이 제법이야. 이만한 가격이라면 내 약점까지도 팔아 치울 수 있겠는데?”
대답이 없다. 뭐야 이거. 반응 좀 보려고 했더니 돈을 더 얹어? 그것도 두 배로. 대체 뭐야, 이 녀석. 아무리 소문은 들었어도 100크온이라는 거금을 망설임 없이 내놓는단 말인가.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뭘 얼마나 대단한 정보를 얻으려고?
“보통이 아니군. 뭘 원하는 거지?”
“지금 돌아가는 정세의 모든 변화, 상세한 움직임.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 서면으로 제출해 주십시오.”
이게 무슨. 이 녀석 소문의 그 녀석이 맞아? 매일같이 파티장을 전전하고 찌질한 귀족 놈들 뒤치다꺼리나 해 주는 일에 이용당하는 그 멍청이가 맞느냐고? 말도 안 돼.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도 없고. 약 한 달 전에도 한바탕 패악을 부렸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물론 한동안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지만, 그것으로 판단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설마 내가 착각한 건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지금의 이 변화는 뭐란 말인가. 그때 봤던 그놈은 절대 이런 차분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소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말하는 것만 봐도 딱 철딱서니 없는 망나니에 지나지 않았었다. 즉, 이런 정보에 관심을 둘 만한 머리도 없거니와 상황 파악 능력도 없다는 말이다. 헌데 관심을 가진다?
그것도 소문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뭔가가 있어. 무슨 이유로 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호기심은 생기는군. 그렇다면 어디 한번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망나니기는 하지만 제도의 경제 반을 휘어잡은 그레데스 후작가의 아들이자 그 문제의 셀레스턴 공작과 결혼할 이 녀석은 충분히 변수로 적용될 가치가 있거든.
“서면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줄 수 있지만 방대한 양이다. 상관없나?”
“상관없습니다.”
“좋아. 기다리도록.”
어차피 정보야 어디에 넘겨도 상관없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볼스몬 제국 귀족 놈들은 재수가 없기도 하고. 오랜만에 호기심도 동하는 일이라 선심 쓰는 기분으로 따끈따끈한 특급 정보까지 포함해 오늘 들어온 정보를 모두 넘겼다.
덤으로 공간 주머니와 특별한 서비스로 나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영상구까지 내밀자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녀석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뭣 때문이냐고? 이걸 계기로 너를 가까이에서 관찰 좀 하려고.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대충 대답하자 가만히 내 기색을 살피던 녀석이 이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 정보들을 챙겨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에 씩 웃으며 앞을 막아섰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벌써 가면 섭섭하지.
“앞으로 거래하려면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난 이곳 정보 길드를 운영하고 있는 테아칸이다. 풀 네임은 좀 더 알게 된다면 알려 주지.”
일부러 풀 네임을 들먹이자 이미 예상했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녀석이 생각 끝에 점점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으면 뭐해. 순진하게 무슨 생각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정보 길드를 운영하려면 손님에 대한 비밀보장은 필수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고. 아,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면 한 가지는 알려 주지. 나는 귀족파와 전혀 상관이 없다.”
뭐 이 정도까지 말해 줬으면 더 의심하지는 않겠지 싶어 오랜만에 즐거워지는 기분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녀석의 반응을 보고 싶은 마음에 이미 정체를 알아봤다는 걸 말했다.
의외로 순진한 면도 재미있고 소문과는 전혀 다른 녀석의 차분한 태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흥미를 느껴서이다. 맹세코 그것 외에는 별 뜻은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젠장! 왜 그러는 거냐고 갑자기? 이봐! 정신 차려!”
처음에는 눈에 띄게 온몸을 굳히고 파들파들 떨어 대더니 한순간 흐느적거리는 녀석을 아무리 흔들어도 멍하니 정신이라도 나간 듯해 다급하게 뺨을 후려쳐 버렸다.
꽤 힘이 들어가 버렸는지 후드가 벗겨지고, 힘없이 비틀거리는 녀석의 몸을 받쳐 안았다가 진심으로 놀랐다. 화려한 불꽃같은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 흐린 환상을 보는 듯한 자색의 눈동자.
제국의 꽃에 비유할 정도로 최고의 미인이라더니. 맙소사. 실제 가까이에서 본 녀석의 얼굴은 순간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젠장, 심장이야. 아니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이봐, 또 정신 잃으면 곤란해. 나 참, 서서 기절하는 사람은 처음 봤군.”
“아!”
“다행히 제정신이 돌아온 것 같군.”
다행은 다행인데. 얼굴이 퉁퉁 부었네. 이렇게까지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이 녀석 뭔가 위험해.
“빨갛게 부었군. 이렇게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야. 그대가 마치,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젠장, 무슨 소린지.”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왠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러게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이 몸으로 왜 찾아온 거냐고. 신경 쓰이게.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돈벌이니 굳이 실례는 아니지만. 뭐야, 그 몸으로 가려는 건가? 설마 이 녀석 자기 몸 상태도 모르는 거 아니야?
“갈 건가? 그 몸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것 같은데.”
모른다. 이 녀석 지금 자기 몸이 어떤지도 몰라.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고집스럽게 돌아서더니 미처 한 발도 떼기 전에 비틀거리며 무너지는 녀석을 다급하게 안아 부축했다.
“이, 이봐! 아오, 젠장!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런 몸으로 가긴 어딜 간다고. 미련한 놈. 황당한 마음에 혀를 차다가 그대로 녀석을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넓은 침대에 폭 파묻히듯 누워 있는 녀석을 보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미친 건가.”
다른 놈들은 눈앞에서 죽어도 신경 안 썼는데 왜 이 녀석은 그게 안 되느냐고? 소문과는 다른 분위기 때문인가? 그러고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해. 그렇게 죽자 사자 쫓아다니던 공작한테도 안 가고. 매일같이 전전하던 파티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 봐야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이지만, 평소 이 녀석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혹시 아팠다든지, 죽을병에라도 걸렸다든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후작가에 심어 놓은 놈들에게 특별한 변화가 없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고,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그런 병에 걸렸다면 일을 추진할 수는 없지. 아니야. 후작 그 냉철한 인간이라면 가능할지도.
어차피 결혼 자체도 거래에 지나지 않는 데다 평소에도 자식 취급은커녕 인간으로도 안 보는 것 같던데. 설사 병에 걸렸다고 이익을 포기할 인간들이 아니다. 후작도, 그 공작도.
“쳇, 나쁜 새끼들.”
아마 이 녀석이 결혼 후에 당장 죽는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할걸. 오히려 처치 곤란한 게 사라졌다고 더 좋아할지도 모르지. 어차피 결혼한 순간부터 거래는 이루어질 테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다.
게다가 공작한테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가만 보면 이 녀석도 어지간한 불행은 다 타고났군. 부모 복도 없어 반려 복도 없어, 그나마 볼만한 건 유일하게 얼굴이 전부인데.
“영혼을 홀리는 마녀라더니.”
외모만 봐서는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일찍이 대륙을 싸돌아다니면서 이 녀석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못 봤으니까. 그럼 뭐야. 내가 홀린 거?
“그럴 리가.”
하여간 이상한 놈. 왜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서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건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기에도 찝찝하고 의원을 불러 놓고 옷이라도 갈아입힐 생각에 로브를 벗겨 냈다.
아무런 장식도, 보석도 달리지 않은 검은색 옷차림. 보고로는 항상 화려한 색상에 보석까지 치렁치렁 달고 다녀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만든다고 하던데, 이것도 달라진 부분인가.
뭐 그거야 차차 알아보면 될 테고. 뭘 입혀야 하나 잠시간 고민하다가 잠옷을 입히기에는 체격 차이가 심한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흰색 셔츠를 입히려는데 뭐야 이 녀석.
“왜 이렇게 말랐어?”
말랐다. 그것도 조금만 힘을 줘도 뚝 부러질 것같이 뼈밖에 안 남았다. 정말 죽을병이라도 걸렸나?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보기 좋게 물이 오른 상태였는데.
물론 그것도 잠깐이고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 영애들에게 패악을 부리는 모습에 질려서 돌아서 버렸지만. 고작 한 달 사이에 이렇게나 마른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아사 직전까지 쫄쫄 굶는다면 몰라도. 그렇다고 돈질도 화끈하게 하는 녀석이 먹을 게 없어서 굶은 건 아닐 테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괜한 짓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에 투덜거리다가 곧 들려오는 노크 소리와 의원이 왔다는 말에 다급하게 셔츠를 입히고 돌아서려다가 멈칫거리며 휘장을 쳐 버렸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다. 현재 이 녀석은 이곳 볼스몬 제국에서 제일 유명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의원이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자칫 귀족파의 표적이 돼 버린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이곳 정보 길드에 녀석이 있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녀석의 팔만 침대 밖으로 꺼내 놓고 들어온 의원을 다그치자 많이 황당한가 보다.
“흐음, 기절은 아무래도 기가 약해진 상태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지금 현재 가장 시급한 건 먹는 겁니다.”
“뭐?”
“영양실조입니다. 그 때문에 열이 나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아, 영양실조? 길거리 천민도 안 걸린다는 그 영양실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후작가의 차남이 영양실조라니. 돈도 남아도는 놈이 그런 웃기지도 않는 병에 걸렸단 말인가.
“황당하네. 확실해? 혹시 다른 병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
“몸이 약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현재로서는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우선 열을 내릴 처방을 해 드릴 테니 푹 자고 일어나면 제대로 먹이기나 하십시오. 그리고 숙면을 취하는 게 회복에 더 좋습니다.”
억울하다. 마치 먹는 걸로 치사하게 사람을 이 지경까지 굶겼느냐는 듯 바라보는 의원의 타박하는 눈길에 순간 성질이 확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내쫓아 버렸다.
내가 굶긴 것도 아닌데 왜 내가 그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하여간 이 녀석 때문에 오늘 별짓을 다 해 보네. 마음 같아서는 확 쥐어박고 싶지만, 차마 아픈 사람한테 그럴 수는 없고.
의원이 주고 간 약을 조금씩 먹이고 젖은 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아 주자 한결 편안해졌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는 녀석의 표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조금은 괜찮아졌나 싶다가도 악몽이라도 꾸는 듯 좁혀지는 미간과 힘겹게 앓는 소리에 괜스레 불안해져 녀석의 옆을 한시도 떠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그 도가 지나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평소 좋은 성격이냐? 말도 안 되지. 소중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람한테 관심도 없었는데 좋긴 지랄.
아마 내 이런 모습을 그 인간들이 봤다가는 죽을 때가 됐다고 놀려 먹을 테지. 그러니까 결론은 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거참,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
다른 놈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관심 밖이지만, 내가 봤을 때도 이 녀석은 도저히 좋게 봐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손가락질당하고 죽어 버리라고 악담을 퍼부어도 당연하다 여겼지.
그 정도로 이 녀석은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골빈 놈들은 딱 질색이거든. 멍청하게 이리저리 이용당하면서 그것도 모르고 잘난 척 큰소리치고 사람 무시하고 패악 부리는 허영 덩어리.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우면 뭐하나. 성격이 그 모양인데 누군들 좋아하려고. 사람들이 이 녀석만 보면 치를 떨면서 피해 버리는 것도 당연한 반응이다. 문제는 그런 놈을 내가 지금 보살피고 있다는 거잖아?
“끙, 돌겠네.”
미친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최소한 양심으로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고 신경 꺼 버리면 그만인데. 진짜 제대로 미쳐 버렸는지 내가 한 짓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녀석이 깨어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초조하게 옆에서 끙끙거리지를 않나, 그 사이에도 몇 번이나 찾아온 고가 손님한테도 특급 정보는 고이 숨겨두고 대충 알려 줘서 보내지를 않나.
안절부절못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사흘이나 지나 있었다. 미쳤지. 그나마 다행히 더 이상 열도 오르지 않는 것 같아 안심하고 집무실에서 일을 보다가 돌아오자 깨어난 녀석이 멍하니 시선을 맞춰 왔다.
아무리 봐도 저 눈동자는 신비롭단 말이야. 그런데 왜 우는 거지? 또 어디가 아픈가 싶어 불안하게 바라보자 옷이 바뀐 걸 그제야 알았는지 당황하며 묻는 말에 태연하게 답했다.
“그거? 내 옷이다. 땀을 하도 흘려서 갈아입혔다.”
어이! 그렇게 놀라지 말라고. 아픈 사람 붙잡고 이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체, 기껏 돌봐 줬더니.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몸을 누르고 땀에 젖은 머릿결을 습관처럼 쓰다듬어 주자 흠칫!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내가 뭔 짓을 했다고! 되돌아오는 과한 반응에 기분이 상해 작게 투덜거리다가 녀석의 한숨 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나직하게 혀를 차고 말했다. 하여간 별걱정을 다 해.
“얼굴 보이지 않고 진맥했으니 걱정하지 마라.”
별 웃기지도 않는 걸 걱정한다 싶어 불퉁하게 중얼거리며 또다시 일어나려는 녀석의 어깨를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도대체 이 몸으로 왜 자꾸 움직이는 건지.
기가 막혀 투덜거리다가 녀석의 의아한 표정에 설마 이 녀석 자기 몸 상태도 모르는 건가 싶어 물었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본다. 역시 몰랐군. 후작가의 차남이 영양실조라.
다시 생각해도 황당한 마음에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미처 막기도 전에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을 보고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고집인지 움직이지 말라니까 거 더럽게 말 안 듣네.
“초면에 폐를 끼쳤습니다. 여러모로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은 추후에 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어딜 가려고 일어나?”
“예? 그야, 집에 가려고.”
“지금 그 몸으로 간다는 거냐?”
조그마한 게 고집은.
“여러 소리 하지 말고 누워 있어.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어딜 간다고 그래?”
“하지만…….”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결혼식 전에는 보내 줄 테니 제대로 먹기나 해. 그 몸으로 중간에 또 쓰러지지 말고.”
보나 마나 뭘 걱정하는지는 뻔하고 안심하라는 의미로 말해 주자 놀란 듯 살짝 커졌던 눈을 스르르 접으며 잠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역시 저 눈은 위험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단 말이야.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겁니까?”
“글쎄. 변덕이라고 해 두지.”
그 외에는 나도 도저히 설명할 말이 없어 얼떨결에 대답을 피해서 도망치듯 침실을 나와 버렸다. 그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해 버렸지만, 이왕 나온 거 녀석이 먹을 죽이나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방장을 닦달했다.